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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day + day)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박아영

207호

2021.10.14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배경
3537년,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지구.
멸종 위기가 된 소수의 인간들,
인간들의 기억을 옮겨주는 진화된 하루살이가 있다.
멸종 위기가 된 인간들은 지구의 하루들을
K-영희 휴먼 로봇을 통해 기억을 전시하면서 살아간다.
인물
556,990번째 하루살이, 하루
K- 영희
흰고래

1. 초

어두운 무대, 무대 중앙에 스크린과 붉은 버튼이 보인다.
두 날개가 기계에 박제된 채 괴로워하는 556,990번째 하루가 등장한다.
556,990번째 하루 앞에 스크린이 켜진다.
하루
따뜻하고 평온한 에너지가 대지 위를 감싼다. 엽록소가 화학반응을 일으켜
잎사귀를 푸르게, 또 푸르게 하라고 속삭인다.
하루
뜨거운 태양이 멸망을 일으키기도, 생명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루
잉태한 생명이 열매로, 씨앗으로 탄생한다. 풍년의 날들이다.
하루
온 세상을 조용하게 할 만큼 견고해지고 고요해진다.
556,990번째 하루, 기계를 벗어던지면 무대 조명 밝아온다.
스크린 안에 박제된 또 다른 하루와 마주한다.
하루
이제 시작인데
하루
수없이도 들었던 옛날이야기야. 애벌레 시절부터 귀가 닳고, 피가 터지도록 들었다고.
하루
자연의 순리를 보지 못하였으니, 듣지 못하였으니 반복학습을 해야지. 나도 그래왔고,
너도 그래야 하고, 다음의 하루도 그렇게 해야만 해.
하루
우리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거지?
하루
우리가 살아야 하니까.
하루
우리는 죽었어.
하루
하루들이 모여야만 기억이 돼.
하루
살아있는 하루지만, 죽어있는 하루이기도 해.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알에 갇혀 세뇌당했지. 인간들과 공생을 해야 한다고. 그래야 우리들이 산다고. 인간들에 의한 것들, 의미 없어.
하루
……
하루
인식하지 못한 것들은 소멸되겠지. 죽은 우리들의 하루들처럼.
하루
이미 너의 하루는 결정되었고, 시작되었어. 인간을 도와야 해. 기억을 전달하고, 기록해야 해. 그래야 또 다른 하루들이 생존할 이유가 생겨.
하루
내 하루는 내가 결정해.
하루
입이 봉해진 니가 뭘 말하겠니. 누가 알아주겠니.
하루
나는 날아갈 거야 훨훨-
556,990번째 하루, 있는 힘껏 날갯짓을 한다.
스크린 안에 박제된 하루 사라지고, 블랙 화면이 뜬다.
타임워치가 작동된다.
하루
00시 00분 01초.
앵앵거리는 경보음, 윙윙거리는 벌레소리가 들린다.

2. 기억

무대 위 바닥 직사각형이 보인다.
흰고래 자유롭게 유영하며, 버블 링을 만들어낸다.
556,990번째 하루, 흰 고래에 다가가 손을 내민다.
하루살이와 흰고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클래식이 흐르다가 멈춘다.
흰고래
소리치지 마! 다가오지 마!
하루
내가 학습한 것들과 다르구나. 고단해 보여.
흰고래
나아가도, 나아가도 계속 그 자리야.
하루
니가 만났던 하루들은 어땠니?
흰고래
내 하루는 없었어. 인간들로 인해 박제된 기억뿐이지.
하루
너를 돕고 싶어.
흰고래
기억은 유영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남는 거야. 그 외의 것들은 점점 퇴화되지.
하루
난 의미 있는 하루가 되고 싶어.
흰고래
의미 있다는 건 전시되는 것들일 뿐이야. 지금의 나처럼.
흰고래 사라진다.
무대 위 직사각형 안 갇혀있는 하루가 보인다.
무대 점점 어두워진다.

3. 계획

무대 밝아오면, K- 영희가 보인다.
K- 영희 옆 수많은 하루들이 쓰러져있다.
K- 영희 책을 읽고 있다.
영희
그날은 따뜻했다. 아니, 어딘가 습하고, 조금은 서늘한, 아니, 추웠다.
영희
손을 잡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 따뜻했다. 아니, 찝찝했다. 차가운 손이었다.
영희
순간 펑- 하는 소리가 났다. 찝찝하고 차가웠던 것들은 뜨거워졌다.
캄캄한, 빛나는, 시퍼런, 환하고 검붉은 것들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가라앉는다.
K- 영희 책장을 쉼 없이 넘긴다.
그때 556,990번째 하루, 힘겨운 날갯짓을 하며 K- 영희 곁에 온다.
영희
말하지 못하니? 오늘 만난 하루는 굉장히 힘들어 보이는구나.
556,990번째 하루, K- 영희 손을 잡는다.
K- 영희, 생명수를 하루의 몸에 뿌려준다.
556,990번째 하루, 날갯짓을 천천히 하며 영희의 손을 잡고 교감을 한다.
영희
까맣고, 검은 그림자가 아빠였구나. 따뜻했지만, 찝찝했던 건 엄마의 손이었고, 아빠는 나를 안고 있었고, 엄마는 나를 잡고 있었어. 그리고 펑-하고. 날아 올랐던 것들은 뭐야?
하루
말하기 싫어.
영희
왜지?
하루
내 기억이 정답은 아니니까.
영희
왜지?
하루
나는 죽어가고 있어. 사라지고 있는 내 기억들이 무슨 의미가 되겠니.
영희
생명수를 줬잖아? 그러면 보답을 해야지.
하루
난 최선을 다했어. 인간들의 기억 전달을 위해 태어났고, 학습했고, 살아왔어.
영희
아직 기억하지 못하는 영희들이 많아.
하루
나는 의미가 없어.
영희
됐어. 또 다른 하루는 언제 오니?
하루
지금도 시작되고 있어. 너랑 대화하는 이 순간에도.
영희
무슨 말이야? 기억을 전달해주는 하루가 언제 오냐고.
하루
더 이상 오지 않을 거야.
영희
왜지?
하루
다음 날을 준비하는 하루에게 기억을 전달하지 못했거든.
영희
하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소개를 할게. 나는 556,990번째 하루야. 난 내 기억으로 하루를 살았으니, 존재가 증명이 되었어.
영희
그건 규칙위반이야. 하루살이와 인간은 지구가 폐허가 된 이후부터 협약을 맺었어. 깨끗한 물에서만 사는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 남지 않은 생명수를 뿌렸어. 너희 하루들을 보면서 희망을 얻으려고, 기억을 하려고, 다시 일어나려고. 그런데 뭐? 기억을 하지 못해? 종말이 올 거야. 너희들은 멸종할 거야.
하루
기억에만 의존하고 살아가는 건 죽어가는 행위야.
영희
아니야.
하루
기억은 변화해. 행복한 것들만 기억이 된다면 미화되고, 퇴보하지. 너희는 그래서 지금 아직 그렇게 머물러 있는 거야. 저 너머의 세상을 생각해 본 적 있니?
사이

K- 영희와 556,990번째 하루살이,
저 끝 너머를 바라본다.
하루
난 태어나고 계속 기억했어. 너희들을 기억하려고 기억하고 또 기억을 했지. 추억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었어. 오늘의 하루를 희생하면서 생존해왔어. 하지만 지금 달라진 건 없어. 그 자리일 뿐이야. 나는 종말 이후 556,990번째 맞이하는 죽어가는 하루일뿐이야. 내가 기억을 전달하고 죽으면, 다음의 하루는 탄생하겠지.
영희
아직… 수많은 영희들이 있어…
하루
기억은 과거일 뿐이야.
영희
아니, 현재야.
하루
기억은 역사일 뿐이야.
영희
아니야, 현재야.
하루
난 저 너머로 날아갈 거야.
영희
그러면 다시 숨게 돼. 기억은 사라지게 돼.
하루
나는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할 거야. 말하지 못해 내 하루가 소멸되더라도 힘차게 날아갈 거야.
영희
니가 죽는데도?
하루
그리고 내 눈으로 기록할 거야.
영희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하루
내 죽은 몸은 진실이 될 거야. 내 몸은 죽지만 난 영원히 살아날 거야.
바닥에 죽은 하루들이 보인다.
하루
이렇게 머물러서 죽어버리긴 싫어. 난 날아오를 거야. 저 너머로.
영희
그러면… 난 어떻게 되는데?
하루
타오르는 나를 봐. 파편처럼 튀어버리는 나를 봐. 그리고 읽어. 책이 아닌 눈으로 세상을 읽어.
하루
오늘이 바로 나의 디데이야.

4. 종말

556,991번째 하루 저 멀리 날아간다.
K-영희, 파편처럼 튀어 오르는 섬광들을 바라본다.
영희
생각을 한다. 귀가 아닌 눈으로.
영희
기억을 한다. 기록이 아닌 지금 현재 순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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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영

박아영
늘 풍성한 결핍을 갈구합니다. 조각난 애정을 연구하며 글을 씁니다. 인스타그램 @bigahyong, youth9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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