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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신지원(신난다)

208호

2021.10.28

* 이 희곡은 학대, 폭력 등의 소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소녀
30살 여자. 겁이 많다. 그 사실을 일찍부터 알아차린 소녀는 성인이 되어서는 감추려 하다 까칠해졌다. 그리고 혼자 못 잔다.
어둠
50살 된 여자의 목소리. 외모는 상관없다.
그리고 출연은 안하지만 객석에서 존재한다.
좀비
외형적으로는 60세 정도의 남성과 비슷하게 생겼다. 멍과 상처투성이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제대로 걷지 못한다.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한다)
깜깜한 어딘가. 가운데 사다리 하나만 덩그러니 보이고 무대는 온통 어둡다. 조명이 비친 곳에 소녀가 사다리 위에 위태롭게 걸터앉아 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적막한 가운데 선뜻 땅으로 내려가지 못하는 모습이다. 무대에는 사다리와 그곳에 앉아 내려다보는 소녀뿐이다. 마치 낭떠러지에 있는 것 같다.
소녀
(헛기침하듯 일부러) 흠!
소녀가 한 손으로 어둠 속에서 베개를 집어 떨어뜨려 본다.
기척이 들리는지 집착적으로 집중하고 있다.
소녀
(헛기침하듯 일부러) 흠!
사이.

어둠은 등장하지 않고 목소리만 들린다. 객석에 있어도 좋다.
따뜻하지만 지쳐있는 여성의 목소리다. 동시에 여전히 무대는 깜깜하고 소녀만 보인다.
어둠
(낮고 따뜻한 목소리로) 내려와
소녀
아 씨 깜짝이야, 놀랬잖아
어둠
새삼스럽게 왜 놀래. 여기 나 말고 또 누가 있다고
소녀
기척 좀 해.
어둠
알았으니까 내려와
소녀
없지?
어둠
없어
소녀
정말?
어둠
없어. 있으면 내가 말했지
소녀
넌 거짓말 잘 하잖아
어둠
(한숨 쉬며) 너 언제까지 이렇게 살래. 벌써 서른이야.
소녀
서른이랑 여기 내려가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어둠
매번 이렇게 겁먹을 거면서 왜 그랬어.
소녀
걔가 먼저 그랬어, 너도 봤잖아
어둠
난 몰라.
소녀
어떻게 몰라?
어둠
어둠이잖아
소녀
(기가 차서) 허.
어둠
아침에 일어난 일은 난 몰라
소녀
억지야
어둠
내 의지가 아니야 너도 알잖아
소녀
그런 게 어디 있어. 넌 그냥 도망간 거야
어둠
몰아가지 마. (사이) 가야겠다.
소녀
(혼잣말처럼 작게 툭) 잠깐! (사이. 어둠에게) 가든가.
소녀, 말하고 슬쩍 눈치를 본다. 어둠이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다리에서 안절부절못한 모습으로 최대한 들키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동동거리고 있다.
어둠
너가 내려와야 가지.
소녀
어차피 갈 거면서 착한 척은.
어둠
꼭 가야 하는 사람한테 그렇게 말해야겠니.
소녀
마치 내가 쫓아내는 것처럼 말하지 마.
어둠
나도 어쩔 수 없이 가는 거야
소녀
어쩔 수 없는 게 세상에 어디 있어
어둠
어쩔 수 없는 것도 있어. 늦기 전에 얼른 내려와.
소녀
아직 시간도 안 됐거든.
어둠
무슨 소리야- 밝아지고 있어
소녀가 옆을 바라보자 깜깜하던 무대에 푸른빛과 함께 서서히 빛이 들어선다.
여긴 방이었다. 벙커 침대 옆 사다리에 앉아 있던 여자가 빛이 들어선 바닥으로 내려간다.
소녀는 밝아진 방에서 나와 아침을 준비하러 간다. 이동 거리는 거의 없다.
무대가 집 전체를 상징한다. 식탁 쪽으로 간다.
식탁 밑에서 온몸이 퍼런 멍 자국과 상처로 가득한 헝클어진 머리의 남자가 흐느적거리며 툭 나온다.
좀비
(몽롱하게 읊조리며) 배고파
소녀
(비명을 지른다) 으악-
좀비도 소녀의 비명 소리에 놀라 비명을 지른다.
대화는 좀비와 소녀의 말을 도중에 자르며 빠르게 진행된다.
소녀
(놀라며 다급하게) 누구세요?
좀비
소녀
(멍투성이 좀비를 보고 놀라며) 괜찮으세요? 어… 어디 다치신 거예요?
좀비
저기… 다친 게 아니라 제가 이렇게 생긴 거예요.
소녀
(좀비의 말을 끊고 다급하게) 병원에 데려다 드릴게요.
좀비
제가 갈 수가 없어요.
소녀
(애써 침착하려 하며) 제가… 구급차를 부를게요!
좀비
저…
소녀
(말을 끊고) 잠시만 기다리세요.
좀비
좀비에요…
소녀
(혼잣말로) 뭐라는 거야 (좀비에게) 저기 제가 핸드폰만 빨리 찾아서 구급차 부를게요.
좀비
좀비라구요… 진정하시고…
소녀
(말을 끊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혼잣말로) 폰아… 폰. 폰…!
좀비가 핸드폰을 찾고 있는 소녀 앞에서 구르고 넘어지고 자기 몸을 때리기 시작한다.
소녀
(핸드폰을 찾다 구르는 좀비를 보며)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좀비 계속 구르고 자기 몸을 때린다. 곧 침대 위 사다리 위로 올라가서 떨어져 본다.
바닥으로 떨어져 엎어진 채 좀비는 미동이 없다.
소녀
(소리를 지르며) 미쳤어!
좀비
(침묵)
소녀
왜 그러세요? 정말!
좀비
(엎드린 채) 저 안 죽어요. 진짜예요. 저도 시도해봤어요. 안 죽는다고요 저…
소녀
(좀비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도 안 돼요.
좀비
진짜예요!!
소녀
지금 아프시죠? 솔직히 말해보세요!
좀비
아프긴 한데 안 죽는다구요. 찔러봐요.
소녀
(무시하며) 병원에 가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좀비
(훌쩍이기 시작한다)
소녀
(혼잣말로) 미친놈이다…
소녀가 경계하자 좀비가 미친 듯이 주방으로 뛰어가 순식간에 칼을 꺼내 자신을 찌른다.
소녀가 비명을 지른다. 그 와중에 꼭 감았던 눈을 살짝 뜬다. 좀비는 여전히 살아있다.
여자
좀비
봐요!
여자
좀비
저 진짜 안 죽어요…
여자
(여전히 믿기 힘들다는 듯) 진짜… 좀비예요?
좀비
그런 것 같아요.
여자
그걸 어떻게 알아요… 통증을 모르는 뭐 그런 걸 수도…
좀비
제가 한 여덟 번 구르고 치이고 그랬는데… 아무리 찌르고 다쳐도 안 죽어요.
좀비가 울기 시작한다. 그래도 소녀가 경계하자 다시 칼로 자신을 찌른다.
좀비
(팔을 찌른다) 팔을 찔러도 (팔을 움직인다) 움직이고 (머리를 찌른다) 머리를 찔러도 어지럽기만 하고 흐흑… 흑…(힘없이 찌른다) 이놈의 심장을 찔러도… 찔러도! 아무리 찔러도 안 죽는다고요…
소녀가 엎드려서 자신을 찌르고 있는 좀비를 힘껏 걷어차 본다.
소녀
(발로 차며) 얏!
좀비가 힘없이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간다.
좀비
(낮게 신음한다) 윽… (침묵) 아프기만 해… 안 죽어…
소녀가 떨어진 칼을 집어 좀비의 엉덩이를 찌른다.
좀비
으억 으으으!! (꿈틀거리다 이내 잠잠해진다) 그래도 안 죽지… 요
사이.

이때부터 대화는 소녀 중심으로 흘러간다. 좀비의 말은 계속 소녀에게 무시당한다.
소녀
(적막을 깨고 진지하게) 어떻게 들어왔어요?
좀비
네?
소녀
(따지듯) 좀비인 건 그렇다 치고 왜 우리 집에 와 있냐고요. 좀비가!
(무서운 듯) 어떻게 들어온 거예요?
좀비
눈 떠 보니까 여기-
소녀
(말을 자르며) 바른대로 말해요. 아깐 정신도 없고 말도 안 되니까 물어볼 생각도 못 했는데-
좀비
(소녀의 말을 가로채며) 눈 떠 보니까 여기였어요.
소녀
(화가 난 듯) 눈 떠 보니, 라니. 대체 언제부터 우리 집에서 자고 있었어요?
좀비
분명히 여기서 계속 잔 건 아닌데 기억이 잘 안 나요. 눈 떠보니까 여기였어요.
소녀
(어이없다는 듯) 이렇게 말도 하고, 생각도 하고 눈도 뜨고 칼로 자기도 찌르면서 그 전에 뭐 했는지 모르는 게 말이 돼요?
좀비
왜 화를 내세요!
소녀
남의 집에 있으니까요. 그것도 좀.비.가!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요.
좀비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고 사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소녀
저 사람 말 안 믿어요.
좀비
(말을 가로막으며 조심스럽게) 좀비에요 저…
소녀
사람이든 좀비든! 어쨌든 그냥 말 자체를 안 믿는다고요. 어떻게 들어왔는지 거짓
말 하실 거면 전 신고할 수밖에 없어요.
좀비
그래봤자 아무도 안 믿을 텐데…
소녀
그래도 무단침입하시고 막 자살 시도까지 하셨으니까 경찰도 무언가 조치를 취하겠죠!
좀비
제가 아무리 이 꼴로 다녀도 다들 모르던데요?
소녀
합의는 없어요.
좀비
취한 사람 그냥 지나치는 것처럼, 마치 안 보이는 것처럼.
사이.
소녀
죄송한데 그쪽 지금 제 눈앞에 있으시고요, 아주 잘 보이세요. 안경 안 썼다고 저 안 봐줘요.
좀비
봐줘서 고마워요. 난 또 내가 귀신인 줄 알았어요.
소녀
잘 보이시니까 걱정 마시고요. 얼른 말하세요.
좀비
그냥 눈 떠보니까 여기였는데 정말… 진짜인데…
소녀
신고해요?
좀비
어차피 아무도 못 보는데… 오히려 그쪽이 신고 당할 걸요?
소녀
뭐라고요?
좀비
아무도 아는 척도 안 하던데. 지금까지 누구랑 말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아무도 못 봤어요.
소녀
무슨 이런 일이 다 있어. 안 보이면 신고도 못 하고!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생각해보세요. 제가 엄마랑 둘이 사는데 낯선 좀비가 저희 집에 들어와 있으면 앞으로 무서워서 어떻게 살겠어요?
좀비
죄송하지만 어떻게 들어왔는지 정말 기억이 안나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좀비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계속해서 “죄송합니다”를 혼잣말처럼 되풀이한다.
소녀
(어쩔 수 없다는 듯) 알겠어요. 나가세요. 저 시간 없어요.
알바 가야 돼요. 나가세요.
좀비
(소심하게) 어디로…
소녀
본인 집으로 가셔야죠!
좀비
아무런 기억이 없는데- 저더러…
소녀
가세요.
좀비
(불안해하며) 집이 없어요. 저… 그리고 밖엔 너무 춥고… 아무도 절 못 보고… (아주 작은 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취해서… 그러는데… (다시 원래 목소리로) 그리고 죽진 않아도 저, 아파요.
소녀
(단호하게) 가세요.
좀비
(절박한 마음으로) 시리얼이라도 한 그릇 하고… 아까 굴러서 그런지 제가 속이 너무 안 좋아서…
소녀
(화내며) 닥치고 나가시라고요!
좀비
(억울하다는 듯, 소리를 조금 높여서) 정말 당장 갈 데가 없어서 그래요. 제가 어디도 갈 데가 없다고요. 정말-
소녀
그럼 에버랜드라도 가시든가요.
좀비
어떻게 그런 말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에버랜드라니요!
소녀
거기 유령의 집도 있잖아요. 거기 좀비들 많아요!
적당히 유령이랑 귀신들도 있고. 거기서 오순도순 사세요. 얼른 나가요!
좀비
에버랜드라니요. 거긴 다 가짜에요. 걔들은 연기하는 거고 전 진짜 좀비예요.
소녀
다 사람인 척하면서 살아가는 거지.
좀비
걔넨 찌르면 다 죽는다니까요?
소녀
여튼 나가세요. 안 그러면 때릴 거예요.
좀비가 소녀를 빤히 쳐다본다. 소녀는 냉소적으로 쳐다본다.

사이.

좀비가 훌쩍 훌쩍 울기 시작한다. 사이. 소녀는 꿈쩍도 안 한다.
소녀
안 나가시면 때릴 거예요. 어차피 흐느적거리는 좀비, 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좀비
(계속 울고 있다)
소녀가 좀비를 발로 툭툭 건드린다. 좀비는 힘이 없어 소녀의 발길질에 이리저리 비틀거린다.
소녀
안 나가면 칼로 찌르고 후라이팬으로 때려서라도 내보낼 거야. 다시 한번 기어오기만 해봐.
좀비
시리얼 한 그릇만…,
소녀
미친놈. 이러니까 맞고 다니지. 이러니까 니가 좀비지. 아무것도 기억도 못 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집에는 왜 들어와. 꺼져. 꼴도 보기 싫어.
좀비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는다. 구석탱이에 기대어 힘없이 앉아 있다.
소녀는 떨어져 있는 칼을 추워 좀비를 무자비하게 찌른다.
소녀
(좀비를 찌르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버러지 같은 놈. 씨발새끼. 죽지도 않니. 작작 쳐마셔. 미친새끼. 나가. 다신 오지 마. 미친놈. 존나 싫어. 미친. 사람도 아니면서. 꺼져. 꺼져. 꺼져 (온갖 증오의 말을 반복한다. 관객에게 전달되지 않아도 된다. 계속 찌르며 반복한다.)
좀비가 맥없이 비틀거리다 쓰러진다. 소녀는 좀비를 냉소적으로 쳐다본다. 자기 손을 쳐다본다. 소녀, 눈물이 흐른다. 조명 서서히 어두워진다.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도중 무대는 정말 많이 어두워져 있다. 실루엣이 간신히 보인다. 잠시 후 소녀가 좀비를 질질 끌고 문밖으로 나간다.

암전.

암전 중 목소리만 들린다.
소녀
자?
어둠
일어났어. 넌 좀 더 자.
소녀
오늘도 또 올 거야.
어둠
괜찮을 거야.
소녀
나 사실 너무 무서워.
어둠
괜찮을 거야.
사이.
어둠
이제 미안해하지 마.
사이.
어둠
가야겠다.
소녀
가지 마
어둠
가야 해. 어쩔 수 없어.
소녀
어쩔 수 없는 게 어디 있어!
어둠
돈 벌어야지.
소녀
언제까지.
어둠
정해두면 더 힘들어져. 그냥 하는 거지. 일단은 하고 봐.
소녀
미룰 수도 있잖아
어둠
숙제를 아무리 미룬다고 방학이 영원한가? 마찬가지야. 미뤄봤자 해내야 해.
소녀
어둠
너도 니 숙제를 어서 해치워.
소녀
너무 어려워.
어둠
이제 그만 미안해도 돼.
소녀
그게 너무 어려워.
어둠
괜찮을 거야.
소녀
아빠는 또 올 거야. 그러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사이.

암전.
*
마감 속 다섯 시간 만에 후딱 태어나버린 「Hom(e)」을 읽어주어 고맙고 고맙다.
당신에게 집은 어디이고, 어떤 곳이고, 그곳에 누가 있는가. 아, 혼자여도 된다.
나는 마치 e 가없이 hom 만으로도 충분히 ‘홈’의 소리가 완성되는 이 단어처럼
집에는 무언가 없어도 집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설마 나일까 하는 두려움과 함께
역시 글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라 명심하며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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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원(신난다)

신지원(신난다)
여전히 연극에 대해 이래저래 생각해봐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사람인 채로 무언가 연습 중이다. 시시콜콜한 것에 관심이 많다.
여전히 연극도 세상도 진실도 희곡들도 궁금하며
재주는 없지만 희곡을 읽고 또 쓰고 싶을 것 같다.
그리고 잊지 않겠습니다.
nodame1004@hanmail.net / 인스타그램 @nan_nan_da (사실 인스타는 거의 안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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