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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세헤라자데

다른 손(hands/ guests)의 희곡 쓰기

최세리

208호

2021.10.28

[희곡] 코너의 주제는 ‘다른 손(hands/ guests)’입니다.이전 또는 나와는 다른 손으로, 다른 누군가의, 다른 무언가의 희곡을 쓸 수는 없을까. ‘인간’과 ‘비인간’은 누구(무엇)인가의 질문으로부터 그동안 희곡 쓰기의 중심에 두지 않았던 바깥의 이야기를 탐구합니다. 2020년과 2021년, 같은 주제로 희곡 릴레이를 이어갑니다. - 연극in 편집부

등장인물

세헤라
얼굴들 아주 많고 다양한 얼굴들

하나

마지막 세헤라자데는 고아였지
걔가 자기 마을을 떠났을 때 우는 사람은 없었어
모두가 입을 다문 밤이었지
안개가 침묵을 따라 번지고 있었어
하수구 밑을 들여다본 적 있어?
다들 낯이 좋아야 한다는 말만 믿고 고개를 바닥에 처박아버렸잖아
밤마다 수면 위로 둥둥 떠오르는 밋밋한 얼굴들
빗물펌프장에서 흘러나오는 세헤라자데의
비린내 나는 이야기들
목숨을 미끼로 쓰는 낚시터에서
걔가 뭐를 더 걸 수 있었겠어?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저
구역질 나는
얼굴들

얼굴들
세헤라자데이야기속주인공들은구질구질해나까지불쌍해질것같잖아
포동포동한얼굴들을만들어봐네이야기는빗물에사는인어공주같거든
지린내나는모텔에서잠든공주처럼아무것도모르지아무도오지않을곳

짐을 챙겨서 떠나던 세헤라자데는
얼굴들 중 하나를 집어 들고 침을 뱉어대기 시작했어
퉤 퉤 칵 퉤
네가 나보고 이야기를 하라고 했잖아
왜 지금 와서 나보고 시비야?
얼굴들
왜 이러는 거야 더럽게
난 너보고 이야기해달라고 한 적 없어
네가 시작한 거잖아

난 시작한 적 없어
내가 이야기를 시작한 적 없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잖아 그것뿐이야
세헤라자데가 혼자 남았던 시절에,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들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가득, 넘쳐 나올 듯이, 간당간당하게, 숨이 막힐 때까지, 간밤의 구토들이, 이야기의 찌꺼기들이, 채 소화되지 않은 말들이, 질식할 때까지
세헤라자데의 목을 죄어오고 있을 때 세헤라자데는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 생각만으로도 세헤라자데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어
처음에는 길거리에 가판을 차려놓고 이야기 버스킹을 시작했는데,

세헤라
발목을 자르고 눈을 찌르고 엄마랑 자고 아빠를 죽이고 아버지의 유령을 보고 하인에게 속아 넘어가고 경매에 넘어간 집들, 땅들, 나무들, 과거의 망령이 우리를 찾아오고 있어, 유령을 쫓아내자, 저 너머로 가서 내 얼굴을 들이밀고 죽은 아이를 파묻고 내 이야기인지 네 이야기인지도 모를 것들을 중얼 중얼 중얼거리자.

다들 알겠지만 이야기는 얼마 안 돼서 재미없어졌어
이미 모든 이야기들이 아주 비슷비슷한 모양으로
이리저리 복사 붙여넣기 복사 붙여넣기 하면서 쏟아지고 있었거든
굳이 세헤라자데가 있는 길거리까지 찾아와서 이야기들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그때, 얼굴들이
강가를 터덜터덜 걸어가던 세헤라자데의 옆에서
둥실, 하고

얼굴들
안녕
세헤라
안녕
얼굴들
뭐해
세헤라
걸어
얼굴들
이름이 뭐야
세헤라
세헤라자데
얼굴들
나는?
세헤라
너는 뭐?
얼굴들
내 이름은 뭐야?
세헤라
그걸 내가 아니?
얼굴들
이름을
지어줘
세헤라
너흰 너무 많은데
얼굴들
하지만 난 알아
우린 알아
너한텐 아주 많은 이야기가 있어
세헤라
그게 무슨 상관인데?
얼굴들
이야기는 곧 이름이야
너한테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건 곧
너한테 아주 많은 이름들이 있다는 거지
생각을 해봐
넌 아주 많은 이름들을 부르게 될 거야
네 속에 있는 모든 이름들이 새로운 이야기가 되어서 터져 나올 거야
이름 하나마다 새로운 인생들이 하나씩 쓰여질 거야
세헤라
난 그런 거 관심 없어
나한테 왜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지 그것도 몰라
난 그냥, 이야기들이 내 목 끝까지 차서
입을 다문 날 밤에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아서 이야기를 시작한 거야
사이.
세헤라
근데 너희가 진짜로 이름이 없다면,
내가 이름을 지어줄 수는 있어
대신, 아까도 말했듯이 너희는 너무 많으니까
열심히 지어줄 수는 없어
그래도 괜찮아?
얼굴들
그럼, 우리는 열심히 지은 이름에는 관심 없어
우리는 그냥, 우리를 불러줄 이름들이 필요할 뿐이야
세헤라
그러면, 하나부터 시작하자.
너는 하나야.
얼굴들
나는 하나
세헤라
너는 나연이야.
얼굴들
나연이
세헤라
연주
얼굴들
연주
세헤라
주희
얼굴들
주희
세헤라
희정이
얼굴들
희정이
세헤라
정민이
얼굴들
정민이
세헤라
민영이 영진이 진성이 성민이 민아 아현이 현아 아영이 영주 주
얼굴들
주우우
세헤라
주리
얼굴들
주우리
세헤라
나머지는 나중에
세헤라자데는 매일 밤 강가로 가서 둥실 떠오르는 얼굴들의 이름을 지어줬어
어디서 들어본 듯한
비슷비슷한 이름들
어디 가서든 숨어 살 수 있는, 눈에 띄지 않는
기억할 수 없는
자기 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수많은 이름들을
매일 밤 강가에 가보면
전날 이름을 지어준 얼굴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얼굴들이 수면 위로 입을 내놓고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어
이름을 받은 얼굴들은 하나씩 떠나가고 있었어
세헤라자데는 문득, 외로워졌어
세헤라
근데 너희는 언제까지 생겨나는 거니?
이제 나도 생각나는 이름이 더 이상 없어
내가 이름을 지어준 애들은 어디로 갔어?
나, 걔네들 이름을 좀 불러주고 싶어
이름은 부르라고 짓는 거잖아
얼굴들
이름을 받은 애들은 다 떠났어
원래 이름을 지어놓으면 얼굴은 사라지는 거야
이름이 없어야만 얼굴을 가질 수 있는 거야
세헤라
근데 너희는 왜 나보고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어?
얼굴들
우리는 우리를 불러줄 이름들이 필요하니까
얼굴 같은 건 없어져도 괜찮아
얼굴들은 원래 사라지는 거야
이름만이 영원하게 남는 거야
네가 우리 이름을 지어준 순간에, 우리는 사라지면서
동시에 남아 있는 거야
세헤라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이해가 안 돼
얼굴들
우리는 아주 많은 이야기들의 영혼이야
이야기 속에서만 살아 숨 쉴 수 있는
글자들이고 말들이고 소리고 그림이야
우리한텐 이름들이 없어 우린 그저 이야기일 뿐이야
얼굴만 남아 있는 것들일 뿐이야
누구나 우리를 알지만
동시에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해
다들 우리를 알 것 같다고 말하지 사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조차 모르는데
우리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우리 서로도 알 수가 없어
그래서 너한테 이름을 지어달라고 한 거야
우리는 네 덕에 많은 이름을 얻었어
혜미 미진이 진희 희주 주영이 영지 지민이 민주 주원이 원 원 원


세헤라자데에게 남은 것은 없었어
애초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세헤라자데가 가진 것은 오직,
그 속에서 구역질처럼 밀고 올라오는 말들, 이야기들뿐이었어
하지만, 이제는, 얼굴들에게 너무 많은 이름을 지어주느라
이야기들마저도, 사라지고 있었어
세헤라자데는 이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어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고, 소리를, 소리를 지르려고 했어
하지만 그때부터 아주 긴
침묵이
세헤라
(생각한다) 난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지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얼굴들, 얼굴들 때문에
걔네한테 이름을 지어주지만 않았어도
이야기를 할 수 있었는데
시장 구석에라도 앉아서 말을 할 수 있었던 건데
이름만 받고 홀랑 사라져버리고
나한테 남은 건 이제 아무것도 없는데
말을, 말을 해야 하는데
난 그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데
말을 하는 일들이 나를 살릴 거라고,
엄마의 할머니가 할머니의 할머니가 계속해서 얘기했는데
나는 그렇게 살아남았는데
세헤라자데는 울었어
말을 하지 않고 울었어
아주 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그것을 이야기하지는 못하면서
주먹으로 바닥을 쾅쾅 치면서
세헤라자데의 엄마의 할머니와 할머니의 할머니들로부터 세헤라자데가 전해 받은 것은 수많은, 셀 수 없는 이야기들뿐이었고
이야기를 하지 않고도 살아있는 방법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세헤라자데는 이제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어
이제 아주 많은 이야기들이 자신의 목구멍을 막을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이제 이야기들은 다 사라졌잖아
세헤라자데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건 울음뿐이었어
세헤라자데는 마침내 울음마저 멈췄어
그리고 떠나기로 결심했지
강가를 따라 걸어가는 세헤라자데의 옆에서
얼굴들이 떠올랐어
얼굴들
세헤라자데이야기속주인공들은구질구질해나까지불쌍해질것같잖아
포동포동한얼굴들을만들어봐네이야기는빗물에사는인어공주같거든
지린내나는모텔에서잠든공주처럼아무것도모르지아무도오지않을곳
세헤라자데는 침을 뱉지 않았어
이름을 지어주지도 않았고
말을 하지도 쳐다보지도 않았어
그냥 앞으로, 앞으로 강가를 따라서 걸어갔어.
사실은
아주 아주 조그맣게
중얼거리면서
자기가 지어준 모든 이름들을
하나씩 부르면서
그렇게 살아있기로 했어
얼굴들
(노래한다) 이야기에 이야기를 뒤섞어서 이야기가 아니게 만들자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만들자 번호를 붙이고 순서를 바꿔서 이야기가 아니게 만들자 아무도 이해 못 할 이야기를 만들자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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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리

최세리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결국엔 살아나아가는 이야기들을 쓰고자 합니다. 현재는 창작집단 소네트18에서 여러 가지 역할로 연극을 만드는 중 cseri120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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