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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의 개

다른 손(hands/guests)

박초원

제220호

2022.06.16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다른 손(hands/guests)’은 인류세 이후의 연극, 인간중심적 예술의 바깥을 상상합니다. 그동안의 한국 연극이 누락한,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지위와 존엄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다른 손으로 보편성을 다시 씁니다.
등장인물
문숙
보라


배경
잡동사니가 어질러져 있는 비좁은 집. 문숙이 작은 창문과 현관문을 연다. 각종 애견 간식을 뜯어 그릇 위에 올려놓는다. 보라, 무대에 등장해 현관문 앞을 기웃거린다.


보라
안녕하세요?
문숙
아, 안녕. 걸리적거렸지? 미안해.
보라
아뇨, 그게 아니고 내일 이사 가거든요. 201호요. 저 기억하시죠?
문숙
어쩐지 요 며칠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던데 이사 준비하느라 그랬구나. 보라 맞지?
보라
많이 시끄러우셨을 것 같아서요. (봉지를 건네며) 귤이에요. 아빠가 마지막인데 층마다 돌리고 오라고 하셔서.
문숙
뭘 이런 걸 다… 괜찮은데. 맛있게 먹을게. 영원히 여기서 살 것 같던 사람들이 어딘가로 자꾸만 떠나네.
보라
그동안 감사했어요. 오래 살았는데 제대로 인사드리는 게 처음이네요.
문숙
서 있지 말고 들어올래? 마지막인데 빵이라도 먹고 가.
보라
제가 빵 좋아하긴 하는데… 뭐 하고 계셨던 거 아니에요?
보라, 못 이기는 척 집 안으로 들어선다.
문숙
아, 응. 그렇긴 한데 요즘은 잘 안 오더라고.
보라
뭐가요?
문숙
우리 개.
보라
헐. 아줌마 강아지 키우세요? 저 강아지 진짜 좋아해요. 왜 한 번도 못 봤지?
문숙
2009년에 죽었어. 2월. (머쓱한 듯) 꽤 됐지?
보라
그럼 이 간식은요?
문숙
기다리는 거야. 가끔 이렇게 간식을 놓고 문 열어 놓으면 찾아오더라고. 진짜로 몇 번 온 적이 있어. 저 문으로 걸어 들어와. 창문에서 나타날 때도 있고. 이상해 보이지?
보라
전혀요.
문숙
에이, 진짜? 이 동네에 나 미친년이라고 소문 많이 났어. 못 들었어?
보라
듣긴 들었는데… 뭐 어때요.
문숙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런 거 신경… 안 쓰나?
보라
저희 엄마가 무당이에요.
문숙, 당황한다. 보라가 웃는다.
문숙
진짜?
보라
모르셨죠? 엄마도 여기 살았으면 소문 엄청나게 났을 걸요. 주소 알려드릴게요. 언제 한 번 오세요. (문숙이 고민하는 듯 아무 말이 없자) 용하기로 유명한데.
문숙
아니… 그게 아니라. 개 때문에 가도 괜찮은 거야?
보라
왜 안 돼요?
문숙
그래, 그럼 한번 가봐야겠네. 안 그래도 요즘 얘가 잘 안 왔거든. 오늘은 정말로 올 것 같았는데.
보라
어… 제가 여기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낯가리는 강아지였어요?
문숙
아니. 우리 개는 사람들 오면 환장했어. 사람들도 개를 좋아했지. 나를 안 좋아했을 뿐이야.
보라
왜 아줌마를 안 좋아해요? 그냥 어색해서 그랬겠죠.
문숙
글쎄. 사람들은 날 안 좋아했어. 내가 동성애자인 게 더럽다고 생각했거든. 우리 개만 날 좋아했지. 나랑 처음 만난 것도 그래. 내가 사람들 없는 새벽에 자주 등산을 다녀.
보라
알겠다. 여기 뒤에 있는 산이요?
문숙
응. 경사도 안 높고 딱 나 같은 노인들이 운동하기 좋잖아. 그래서 매일같이 나갔지. 근데 어느 날부터 어떤 개가 계속 나를 따라오는 거야. 강아지 옷을 입고 있길래 주인이 있는 줄 알았는데, 다음날도 같은 곳에서 날 기다렸다가 따라와. 그 다음날도 따라오고. 그렇게 일주일을 같이 등산하다가 안 되겠어서 데려다 키웠어. 아프기 전까지는 사람들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꼬리 흔드느라고 엉덩이가 가만히 있는 날이 없었어.
보라
사람 좋아하는 강아지 많지 않은데.
문숙
그래? 개들은 보통 사람 좋아하지 않나?
보라
그러니까요. 전 강아지라면 사람을 무조건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요. 근데 아니더라고요. 자기랑 같이 사는 사람을 좋아하는 거지, 사람 자체를 좋아하는 강아지는 별로 없어요.
문숙
우리 개는 특별했지.
보라
아파서 죽은 거예요?
문숙
대부분 그렇듯이 늙어서 앓다가. 종양 때문에. 그게 폐까지 전이가 되어서… 아유, 말도 마. 다시 생각하고 싶지가 않네.
보라
(사이) 저 말씀 중에 죄송한데 혹시 빵…
문숙
내 정신 좀 봐.
문숙, 일어나 빵과 우유를 가져와 보라에게 건넨다. 보라, 꾸벅 인사하고 빵을 먹기 시작한다. 정적을 깨고.
보라
근데 동물은 원래 귀신 되기가 쉽지 않대요.
문숙
정말? 왜?
보라
동물들한테는 영혼이 없대요.
문숙
영혼이 없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보라
엄마 말로는 없대요. 엄마도 없대, 성경에서도 없대, 유명한 철학자들도 없대, 다 없대요, 참나. 근데 저도 그 말 안 믿어요. 제 생각에 동물들은 원한을 가질 마음이 없는 것 같아요. 원한이 없으면 귀신도 못 되니까… 그래서 귀신이 흔치 않을 뿐인 거 아닐까요? 이러나저러나 아주머니 강아지는 좀 특이한 케이스예요.
문숙
그럼 좀 납득이 가네. 우리 개는 나한테 원한이 있을 거거든.
보라
(빵이 든 봉지를 뒤적거리며) 개가 아줌마 되게 좋아했을 것 같은데. 아줌마 좋은 사람 같아 보여요. 아, 빵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로요.
문숙
갈 때 챙겨줄 테니까 천천히 먹어.
보라
감사해요. 산책은 했어요? 강아지 산책은 자주 시켜주는 게 좋다고 그러던데.
문숙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부터 매일 산을 같이 탔지.
보라
뭐야, 아줌마 강아지가 원한 있을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문숙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매일 탔어. 함께 같은 계단을 오르고 같은 길을 걸으면 혼자였는데도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 그게 참 신기하고 충만한 기분이 들다가도 어느 날은 갑자기 막 불안해지는 거 있지.
보라
뭐가 불안해요?
문숙
얘를 잃을까 봐. 영원히 같이 있을 수 없을까 봐. 언젠가는 내가 여기 이 집, 이 동네, 아니 이 지구, 온 우주에서 사라져버린 내 개를 찾으러 다니겠구나. 자주 생각했어.
보라
근데 죽었다고 해서 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요?
문숙
그렇지. 죽은 후에도 가끔씩 찾아오니까.
보라
아뇨, 그런 거 말고. 어쨌든 기억 속에는 남아 있잖아요. 그건 사라지는 게 아니지 않아요? 만약에 시간이 흘러서 잊게 되더라도 그게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보면 아주머니랑 강아지는 영원한 거예요.
문숙
나도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그런 말은 죽음 앞에서 그냥 말장난이야.
보라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장난에 힘을 얻기도 할 걸요.
문숙
그럴 수도 있겠지. 난 이제 괜찮아. 괜찮아졌어. 우리 개는 죽어서도 날 찾아와주니까.
보라
언제부터 찾아왔어요?
문숙
죽고 2년이 지났을 때였나. 처음엔 믿기지 않아서 병원에 갔어. 의사는 환각이라고 하더라. 개가 보이면 쉽지 않더라도 외면하려고 노력해보래. 근데, 그게… 기분이 나쁘더라고. 나를 찾아왔는데 어떻게 그걸 외면해. 그래서 몇 번 다니다가 관뒀지. 나 정말 소문대로 미친년일까?
보라
저희 엄마도 많은 걸 봐요. 그런데 미친 사람 같지는 않아요.
문숙
엄마가 동물을 본 적도 있대?
보라
가끔씩 외국인도 보기는 하는데… 그 연안부두에서 맥아더 장군도 봤대요. 동물은… 잘 모르겠네요.
문숙
내가 미쳤다고 소문이 난 건 내가 뭔가를 봐서가 아니야. 내가 볼 수 있는 게, 매일 기다리는 게 고작 개여서 그랬던 거야. 내가 동성애자라는 것도 한몫했겠지.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몰라. 평생 모를 거야. (사이) 개가 죽고 처음 혼자 등산을 하던 날, 아직도 잊지 못해.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어. 나는 산의 입구에서 너무도 뚜렷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 거야. 내 개가 죽었다는 거. 그 개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 그 불가항력적인 사실에 끝없이 충격을 받기 시작했어.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상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거야. 어떻게든 산을 오르려는데 나무들은 꼭 군인처럼 우뚝 서서 나를 감시하는 것 같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면 낙엽들은 죽은 새처럼 보이지. 하늘이 노래지더라. 그 이후로는 등산을 못 했어.
보라
한 번도요?
문숙
그래 단 한 번도. 넌… 아마 우리 개 봤을 텐데.
보라
엄마나 보지, 저는 귀신같은 거 못 봐요. 한 번도 제 눈으로 본 적은…
문숙
아니 개가 살아있었을 때.
보라
제가요? 본 적 있다고요?
문숙
너 어릴 때는 이 빌라에 사는 아이들이 많았어.
보라
제 친구들도 다 여기 살았죠. 맨날 아래 화단에서 흙 파면서 놀았는데. 지금은 다 떠나고 없지만요.
문숙
그래, 그때 그 아이들이 요만할 때. 네다섯 살은 되었던가. 그때 애들이 우리 개만 마주치면 얼마나 좋아했다고. 우리 개도 애들을 좋아했고. 부모들이 없을 때면 함께 놀기도 했지. 얼마나 즐거웠는데. 분명 너도 본 적이 있었을 거야.
보라
사진 있어요?
문숙, 방에 들어가 작은 사진첩을 가져온다. 사진을 보여준다.
보라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귀여운데요?
문숙
응. 이거는 첫 이발했을 때.
보라
정말 기억이 날 것도 같아요. 또 없어요?
문숙
없어.
보라
왜요? 더 안 찍은 거예요?
문숙
이때 이후로 개가 아팠어. 오래 아팠거든.
보라
얼마나 오래 앓았는데요?
문숙
아주 오래. 나는 내 개가 살기를 바라면서도 또 동시에 죽기를 바랐어.
보라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는 건 너무 힘든 일이겠죠. 안락사를 고민하는 사람도 많다던데.
문숙
나는…
보라
알아요, 아줌마. 저도 개를 돌본다면 그랬을 거예요.
문숙
그런 게 아니야. 난… 나는 외로웠거든.
보라
네?
문숙
내 인생이 너무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어. 나는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했으니까. 내 개가 죽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에게… 그러니까 사연이 생기는 거잖아.
보라
사연이요?
문숙
그래, 사연. 그즈음에 내 인생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지 넌 모를 거야. (사이) 개가 죽은 이후를 끊임없이 상상했어. 바싹 말라가는 개를 어루만지면서. 개가 죽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죽기를 바라면서. 그때는 상상 속에서 살았어. 상상 속에 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고, 모두들 나의 슬픔에 압도되어서 나를 쳐다보고 있어. 날 안아주고 손을 건네. 개의 죽음으로 내 슬픔은 인간들이 바글바글한 광장에서도 눈에 띌 만큼 반짝거려. 사람들은 내게서 눈을 뗄 수가 없고 질척거리는 연민 속에서 나는 더는 외롭지 않아. 외로울 수 없어.
보라
아줌마.
문숙
그래, 알아. 내가 어리석고 멍청해 보이겠지. 근데 개가 죽으면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아갈 거라는 거 그때도 알고 있었어. 내가 상상하던 것들이 허상이라는 거, 너무 당연하게 알았다고. 개가 죽을까 봐 얼마나 두려웠는데. 그때 난 그냥 자유를 원했던 나를 나만의 방식으로 벌주려고 했던 거야. 개가, 그리고 내가 날 영원히 용서할 수 없도록.
보라, 말이 없다.
문숙
이제 너도 내가 미친년처럼 보이려나? (사이) 미안해. 내가 말이 너무 많았지. 널 앞에 두고 왜 계속 이런 얘기를 하는지. 너랑 이렇게 대화하는 것도 처음인데.
보라
아뇨. 사과하지 마세요. 아줌마랑 진즉에 대화도 좀 나누고 안부도 물을 걸 생각하고 있었어요.
문숙이 보라의 건너 현관문 틈을 힐끔 쳐다본다. 무대에서는 개가 보이지 않지만
문숙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진다. 문숙이 일어나 현관문 쪽으로 다가간다.
보라
아줌마 왜 그래요?
문숙
왔어. 우리 개, 아롱이.
보라가, 문숙이 가는 쪽을 바라본다.
보라
어?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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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초원

박초원
희곡 「어쩔 수 없어」,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을까」를 썼다. 누군가 나의 글을 읽는다는 것이 두렵고 창피하지만 여전히 쓰고 있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복잡한 고통을 떠올리면서.
dibby73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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