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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 안내 다시 시작

다른 손(hands/guests)

한결

제221호

2022.06.30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다른 손(hands/guests)’은 인류세 이후의 연극, 인간중심적 예술의 바깥을 상상합니다. 그동안의 한국 연극이 누락한,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지위와 존엄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다른 손으로 보편성을 다시 씁니다.
배경
대한민국, 미래
대한민국에서 동성혼인이 합법화되고, 입양까지 가능한 미래

인물
지우
수현
내비게이션

일러두기
지우와 수현은 혼인신고를 마친 부부이다.
지우와 수현의 성별은 같다.
배우의 성별은 정해두지 않는다.


달리는 자동차 안.
지우가 운전을 하고, 수현은 조수석에 앉아 있다.
둘은 친구의 베이비샤워에 가고 있다.
수현
얼마나 걸려?
내비게이션
전방 200미터 앞에서 우회전하세요.
지우
앞으로 한 15분만 더 가면 돼.
수현
곧 도착하겠네. 엄청 떨린다.
지우
(웃으며) 네가 왜 떨려?
수현
그냥, 특별한 날이니까.
사이.
수현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단 말이야. 안나가 애를 가질 줄은 진짜 몰랐어.
지우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수현
걘 일밖에 모르는 애였잖아. 우리가 다 일중독이라고 뭐라 했는데, 별안간 부모가 된다니! 아마 앞으로 모든 게 다 달라질 거야. 우리는 지금보다 더 안 만나주겠지?
지우
그렇겠지.
수현
사람들 만날 시간도 없을 거야. 일도 전만큼은 절대 못 하겠지?
지우
그렇겠지.
수현
나는 걔 삶에서 일이랑 친구, 술이 전부인 줄만 알았어.
지우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는 건 순식간이야. 그렇게 소란 떨 일도 아니고.
수현
그냥 궁금해. 갑자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부모가 된다는 거, 엄청나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잖아.
지우
그런가?
사이
수현
지우야.
지우가 우회전을 하려는데 골목에서 불쑥 튀어나온 아이 때문에 차가 급정지를 한다.
셋, 동시에
지우
아씨.
수현
악!
내비게이션
(경보음 울리듯) 삐-삐-삐-
지우
하… 애들은 이래서 안 돼. 저렇게 불쑥 튀어나오면 어쩌자는 거야?
(수현에게) 괜찮아?
수현
어, 괜찮아.
지우
근데 나 뭐, 부르지 않았어?
수현
아무것도 아니야.
지우
아닌데, 너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얼굴인데.
다시 셋, 동시에
지우
왜 얘길 하다 말아?
수현
나도 애 키우고 싶어.
내비게이션
경로 안내를 다시 시작합니다.
수현
나도 애 키우고 싶어. 입양. 하고 싶어!
지우
(놀라며) 입양? 갑자기?
조수석에 앉은 수현을 놀랜 눈으로 쳐다보는 지우,
하지만 운전 중이기에 곧바로 다시 전방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 틈을 타 수현이 빠르게 얘기한다.
수현
갑자기 아니야.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거야. 내가 조금 충동적인 성격인 것도 알고 지금 이런 식으로 얘기 꺼내는 게 되게, 뭐랄까, 무책임해 보일 수 있다는 거 아는데, 나 진심이야! 넌 그동안 나랑 같이 살면서 그런 생각해 본 적 없어?
지우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하며) 아니 대체 무슨 생각? 아니, 그것보단 언제부터? 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수현
네가 방금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며. 나도 언제부턴지는 정확히 몰라. 그래도 조금만 마음을 열고 생각해 봐주면 안 될까? 우린 좋은 부모가 될지도 몰라. 아니, 우린 분명히 좋은 부모가 될 거야. 왜냐하면 넌… 넌 골목에서 애가 불쑥 튀어나와도 욕도 안 하고…
지우
거의 할 뻔했는데??
내비게이션
전방 50미터 앞, 어린이 보호구역입니다.
수현
아니야, 그렇지 않아. 너는 아 씨발! 할 수도 있었는데 나한테 괜찮냐고 먼저 물어봐 주는 사람이잖아. 넌 항상 그렇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겨도 차분하게 처리하고, 난…
지우
넌???
수현
난 네가 컴퓨터 앞에서 10시간씩 앉아 있거나, 이렇게 운전할 때 네 옆에서 널 유일하게 웃게 만드는 사람이잖아.
지우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
수현
우리 둘을 닮으면 아주 훌륭한 인간이 한 명이 생겨나는 거야. 이 사실을 알고도 무시하는 건…
마땅한 말이 생각 나진 않지만 일단,
수현
인류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거야 너!
지우
아니 대체 무슨 인류에 대한 책임까지 가. 너 지금 나랑 농담하는 거지?
수현
아니, 농담 아닌데? 그렇잖아. 우리같이 훌륭한 인간들은 훌륭한 유전자를 널리 퍼트려야 해. 네가 지금 당황스럽다는 거 알아. 내가 지금 이런 얘길 꺼내는 게 좋은 타이밍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근데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 너랑은 같이 애 키우고 싶어.
네비게이션
전방 50미터 앞 우회전입니다.
수현
분명 힘들겠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 거고. 그런데 나는 나랑,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아이를 키우면서 생기는 행복이 어떤 모양인지 평생 알고 싶었어. 너도 궁금하지 않아?
지우,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수현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정면을 보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간다.
지우
들어봐. 내가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 줄게.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내가 서핑을 잘할 수도 있는 거야.
수현
갑자기 웬 서핑? 너 바다 무서워서 근처도 안 가잖아.
지우
그래 맞아. 난 평생 알 수 없을 거야. 내가 서핑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서핑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안 주는지. 그건 나한테 관심 밖의 일이니까 굳이 파도에 가까이 갈 필요도 없어.
아이도 똑같아. 네 말대로 내가 좋은 부모가 될 수도 있겠지. 부모가 되면, 내가 모르는 어떤 행복이 있을지도 몰라. 근데 그걸 알아보고자 입양이라는 파도를 뚫고 싶지 않다는 거야. 왜냐하면 내가 알고 싶지 않고, 내 관심 밖의 일이니까.
잠깐의 정적
수현
확신이 없고, 그래서 두렵고, 그래서 떨쳐버리고 싶어도 한 번 생기면 평생 동안 주변을 맴도는 물음표들이 있어. 그런 애들은 갈고리처럼 생겨서 한 번 잡으면 놔주질 않아.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건 나한테 그런 거야. 난 아마 이 생각들을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아, 앞으로도 쭉.
지우
너 이래서 일부러 바쁜데도 계속 안나한테 가자고 그랬던 거구나?
수현
그러니까, 안나를 한 번 생각해봐. 가족을 이룬다는 거. 누군가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는다는 거. 진짜 엄청나지 않아?
지우
잊었나 본데, 너랑 나도 이미 가족이야.
수현
그치 우리 가족이지, 근데. 상처받지 말고 들어. 나한테는 뭔가 더 필요해.
네가 부족하다는 말이 아니야. 그냥, 이건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이루고 있는 생각들 중 하나였고, 물론 너한테는 오늘에서야 처음 얘기하는 거지만…
언젠가 너한테 말하려고 메모장에 적어 두기까지 했었는데, 지금은 없으니까
그냥 막 생각나는 거 하나만 말하자면, 난 우리가 가족처럼 보일, 무언가.
우리 셋이 다니면 진짜 가족이다 할, 무언가, 그래 우릴 감싸주는 투명한 보호막! 그런 게 필요한 것 같아. 왜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우리한테 그러잖아. 친구분 어쩌고저쩌고.
지우
친구 아니고, 부부인데요? 하면 되잖아.
수현
그런 문제가 아니야. 우리 둘이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해봐.
지우
너 좋자고 아이를 원한다는 거면 더더욱 얘기할 가치가 없는 것 같다.
수현
그러자는 게 아니라 난 더…
지우
더 뭐? 더 단란한? 더 복작복작한? 뭐라고 할 건데?
우린 이미 단란하고, 복작복작하게 잘 살고 있어.
수현
그냥 가족을 꾸리고 싶다는 거야!
지우
그리고 우린 이미 가족이고. 법적으로.
사이
내비게이션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목적지를 재검색해주세요.
수현
뭐야? 거의 다 도착해서 어디로 가?
지우
약속해. 이따가 집 가서는 이 얘기로 날 괴롭히지 않겠다고.
수현은 대답이 없다.
지우
왜 대답이 없어? 응?
내비게이션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목적지를 재검색해 주세요.
내비게이션이 그들의 대화를 방해한다.
10분이면 갈 거리를 계속해서 맴도는 둘.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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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

한결
잘못든 길이 때론 지도를 만들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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