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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가슴속에 이끼가 생겼다

다른 손(hands/guests)

최서율

제222호

2022.09.29

2022 [희곡] 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다른 손(hands/guests)’은 인류세 이후의 연극, 인간중심적 예술의 바깥을 상상합니다. 그동안의 한국 연극이 누락한,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지위와 존엄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다른 손으로 보편성을 다시 씁니다.

등장인물
장보

모아

배경
인도네시아 자바(Java) 섬에 위치한 어느 시골 마을. 마을 자체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조용하다. 그러나 관광객들이 많은 족자카르타(Yogyakarta) 인근에 자리하고 있어 길을 잃었거나 호기심이 많은 외국인들이 드물게 출몰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외국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방 안에 자리한 가구를 보듯 할 뿐이다.


1. 돌멩이와 꽃잎

장보의 방, 그리고 집. 장보의 방 안에는 돌멩이와 꽃잎들이 가득하다. 꽃잎의 색은 벚꽃색과 같은 분홍색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사이사이로 보라, 주황, 빨강 등의 꽃잎도 숨어있다. 이 방은 장보의 집이 되기도 한다. 모아가 무대 위로 올라오면 방은 집이 된다. 그러나 장보만 무대 위에 있을 때는 철저히 장보만의 공간으로 변한다.
장보
어느 날부터 내 이불 속에 돌멩이와 꽃잎이 생겼어요. 돌멩이는 치워도 치워도 사라지지 않아서 잘 때도 내 등을 아프게 했어요. 수북하게 쌓인 꽃잎에서는 진액이 나왔어요. 꽃잎은 돌멩이 때문에 으깨지고 내 등에 눌려서 이불을 축축하게 만들었어요. 매일 이불이 끈적하고 더러워졌어요. 잠에서 깨면 옷은 빨래통에 넣었어요. 그리고 이불에 묻은 꽃 진액을 닦았어요. 그래도 진액은 이불에 점박이처럼, 그러니까 얼룩처럼 남게 됐어요.
모아
(무대 바깥에서 목소리로) 장보!
장보
내 동생 모아예요. 모아는 노란색을 좋아하는 바보 같은 애예요. 얘는 인도네시아에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다섯 달 정도 됐을 거예요. 모아는 한국에서 태어났대요. 예전에 엄마가 한국에 살았을 때 모아를 낳았다고 했어요. 모아가 약하게 태어나서 외할머니에게 줘 버렸대요. 그런데 지금은 모아가 건강해져서 같이 살게 된 거래요. 내 눈에 모아는 여전히 약해 보여요. 키도 작고 힘도 정말 약하거든요. 모아는 6살 정도로밖에 안 보여요. 학교에 다니는 나이인데 말이죠.
장보가 무대 뒤쪽에 있던 테이블과 의자를 천천히 무대 앞으로 옮긴다. 테이블과 의자가 돌멩이를 치고 꽃잎을 망가뜨리기도 한다.
장보
신기한 이야기를 더 해 드릴게요. 방 안에 돌멩이와 꽃잎이 생겼다고 했잖아요? 언젠가부터 현관에도 돌멩이와 꽃잎이 생겼어요. 엄마는 모르는 눈치예요. 현관에 쌓인 돌멩이와 꽃잎을 전혀 치우지 않으니까요. 어쩌면 귀찮은 것일 수도 있어요. 엄마는 집안일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에요. 몸이 약하거든요. 그래도 나랑 모아가 먹을 밥은 꼭 챙겨 줘요.
이때, 무대 위로 모아가 등장한다. 모아는 무대 아무 곳에나 앉는다. 그리고는 멍한 표정이 된다. 뭔가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처럼.
장보
들리세요? 아까부터 엄마가 계속 뭐라고 소리치고 있었어요. 인도네시아어라서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엄마는 모아를 부르고 있었어요. 간식을 주려고요. 하지만 모아는 그걸 못 알아들어요. 모아는 아직 인도네시아 말이 서툴러요. 그래도 한국어는 정말 잘해요. 나는 모아에게 많이 배웠어요. 한국어나 한국에 대해서요. 이 마을에 살면 한국을 잊게 돼요. 그런 나라가 있었던 것도 기억이 안 나게 돼요. (무대 뒤쪽을 돌아보며) 아, 이제 엄마가 나를 부르고 있어요. ‘모아’에게 이야기해야 해요. 모아.
모아
응?
장보
모아. 마마(mama), 쁭아난(penganan).
모아
뿡… 아난? 뿡?
장보
아니, 아니. 쁭아난(penganan). 간식 말이야. (머그컵을 가져와 테이블 위에 올린 후 의자에 앉는다) 엄마가 와서 우유 마시래. 만화 같은 건 그만 보고.
모아
(장보를 따라 앉는다. 머그컵을 입 가까이에 대려고 하다가 이내 다시 시선을 돌린다. 만화를 다시 보려는 태세다.)
장보
엄마는 모아가 한국 만화를 너무 많이 봐서 인도네시아어가 안 느는 거라고 했어요. 만화 비디오는 외할머니가 보내준 거예요. 외할머니를 본 적은 없지만 좋은 사람인 게 느껴졌어요. 모아가 보는 만화는 대부분 밝은 내용들이에요. 나쁜 사람이라면 밝은 만화를 찾아낼 리 없거든요. 모아는 매일 한국 만화만 봐요. 재미있는 인도네시아 만화를 소개해 줘도 볼 생각을 안 해요. 귀를 막고, 눈을 감아요. (모아가 우유를 마시지 않고 만화만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리모컨의 버튼을 누른다) 안 되겠어. 수수(susu)를 다 마시기 전엔 만화 금지야.
모아
수수?
장보
수수 몰라? 어제 단어 놀이할 때 가르쳐줬잖아.
모아
수수? 수수…… 깡?
장보
무슨 소리야. 수수(susu)는 우유야. (모아 앞으로 머그컵을 밀며) 다 마시면 이야기해. 마시면 키가 많이 클 거야. 릴리를 납작하게 해 줘야지.
모아
응.
장보
릴리 싫어?
모아
릴리 무서워.
장보
얼른 먹어. 다 마시면 2cm 정도 클 거야.
모아
2cm.
장보
5분 안에 다 마시면 3cm가 크게 될 거야.
모아
3cm.
장보
릴리는 모아의 친구예요. (조금 머뭇거리다가) 사실 친구는 아니에요. 그냥 같은 반 애예요. 릴리는 모아가 작고 인도네시아어가 서투르다는 게 마음에 안 드나 봐요. 모아를 자주 괴롭혀요. 모아는 릴리에게 괴롭힘당하고만 있어요. 반격하지 않아요. 인도네시아어로 어떻게 욕을 하는지 알려주기도 했지만 모아는 모른 척만 해요. 발음이 안 되나 봐요. 인도네시아 말이 어렵다면 한국어로 욕을 해도 좋다고 하기도 했어요. 그래도 모아는 말을 안 해요. 말을 모르는 사람처럼요.
모아
(이야기에 심취한 장보를 바라보다가 슬쩍 머그컵을 놓는다. 그리고 살금살금 움직여 무대 뒤로 사라진다. 장보는 모아가 사라진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장보
모아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한국어로 욕을 어떻게 하느냐고. 모아는 ‘의자’, ‘책상’ 같은 걸 가르쳐 줬어요. 그래서 요즘 종종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이런 의자’, ‘이런 망할 책상 같은 녀석’이라고 욕을 하고 있어요. 친구들은 낯선 말을 들어서인지 그 말에 꼼짝 못 하고 겁을 먹어요. 나는 이게 미국이나 중국 욕보다 더 세고 멋진 거라고 우겼어요. 내 친구들은 고작해야 텔레비전에 나오는 욕밖에 모르거든요. 내세울 거라고는 그게 다인 애들이에요. 내 동생이 욕을 정말 잘한다고 자랑하기도 했어요.
장보는 모아가 우유를 잘 마시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자리에 모아가 없는 것을 알게 된다. 무대 곳곳을 확인한 뒤 모아가 집 안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장보
이런 책상! 모아가 또 없어졌어요. 밖에 나갔을 거예요.

2. 짠디 보로부두르(Candi Borobudur)

밖. 마당에 모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디에도 없다. 장보는 길목까지 나가 본다. 길목에도 모아가 없자 장보는 크게 “모아!”라고 소리를 지른다. 건너편에 있던 모아와 ‘어떤’ 남자가 동시에 돌아본다. 모아는 “장보!” 하며 손을 흔든다. 장보는 모아에게 집으로 돌아가자는 듯 손짓한다. 그러자 모아와 남자가 동시에 다가온다. 가까이에서 본 남자는 키가 꽤 크다.
모아
산책 중에 만났어. 내 친구야.
장보
뜨만(teman)?
모아
응, 뜨만이야.
장보
어른이랑 아이는 뜨만이 될 수 없어.
한국말을 할 줄 알아요?
모아
(장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재촉하면서) 빨리 대답해 줘.
장보
동생 때문에 배웠어요.
이름이 뭐예요?
장보
왜요.
(살짝 당황하며) 민준이에요. 성이 민, 이름이 준. 아까 모아가 ‘장보’라고 하던데. 그럼 이름이 ‘보’예요?
장보
장보.
네?
장보
‘보’가 아니라 ‘장보’라고요. 여긴 한국처럼 성이랑 이름이 구분되어 있지 않아요.
미안해요. 몰랐어요.
장보
미안하라고 한 말은 아니에요.
자유로운 이름이 있는 건 좋은 일인 것 같아요. 한국은 성이랑 이름이 꼭 구분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모아
(보도블록 사이를 가리키며) 이끼!
어디요?
모아
여기!
정말 이끼가 있네. 심지어 보라색이에요. 장보도 여길 봐요.
모아가 가리킨 곳에 정말로 보라색 이끼가 자라나고 있다. 보도블록을 네모나게 감싸며 자라고 있어서 누군가가 임의로 심은 정원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 만다라(曼茶羅)처럼 신비한 분위기가 풍긴다. 장보는 자신도 모르게 “보로부두르”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모아와 준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이끼만 관찰 중이다.
내가 여기서 이끼를 관찰하고 있는데 멀리서 모아가 뛰어왔어요. 먼저 “안녕”이라고 인사를 했어요. 난 처음에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어요. 여기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희귀한 일이니까요. 그래서 “슬라맛(selamat)”이라고 다시 인사를 했더니 또 “안녕”이라고 했어요. 그제야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어요.
장보
너 어떻게 민준이 한국 사람인 줄 알았어?
모아
정류장에서 전화하는 걸 봤어. “여보세요”라고 했어.
이 주변에서 학교 다녀요? 나도 한국에서 대학교 다녀요. 여긴 봉사 때문에 온 거예요.
장보
학교 다녀요.
모아도 학교에 다니나? 이 주변에 학교가 있어요?
장보
모아는 여기 온 지 얼마 안 돼서 일주일에 두 번씩만 나가고 있어요. 학교는 알려주기 싫어요.
(웃으면서) 장보는 멋진 사람이네요.
장보
뭐가요?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멋져요. 그리고 한국어도 정말 잘하네요. 장보도 여기 온 지 얼마 안 됐나요?
장보
아뇨. (주변을 둘러보며) 모아랑 같이 집에 갈 거예요. 감사합니다.
한국어 많이 쓰세요. 잊어버리지 않도록.
장보
알아서 할게요.
모아는 이끼를 구경하기 위해 보도블록을 따라 걷고 있다. 장보는 모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준도 장보와 함께 걷는다. 두 사람은 느릿느릿 앞으로 향한다. 발걸음이 빠른 모아는 두 사람의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진다.
있잖아요.
장보
네.
아까 ‘보로부두르’라고 했잖아요. 그건 무슨 말이에요?
장보
(아무도 그 말을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해서인지 깜짝 놀란다. 그러나 어린아이처럼 보일까 봐 겉으로는 티 내지 않는다.) 짠디 보로부두르. 불교 사원이에요.
불국사 같은 건가요?
장보
불국사가 뭔지 몰라요.
미안해요. 절 같은 곳인가요?
장보
아니요. 절은 아니에요. 거긴 텅 비어있거든요.
텅 비어있다니?
장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어요. 네모난 보로부두르만 있을 뿐이에요.
거기에 가 본 적 있어요?
장보
없어요. 멀리서 본 적은 있어요. 예전에 엄마가 보로부두르를 멀리서 보여 준 적이 있거든요. 네모난 돌덩이가 성처럼 세워져 있었어요. 구름 사이에 떠 있는 것처럼요. 신이 사는 곳인 줄 알고 엄마에게 꼭 가보자고 말했어요. 그런데 엄마가 그럴 수 없다고 했어요.
왜요?
장보
우리 마을 사람들은 이슬람교를 믿거든요. 불교를 믿는 집은 우리 집밖에 없어요. 그래서 갈 수 없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장보
마을이 작아서 소문이 빨리 퍼져요. 이 마을엔 ‘의자’나 ‘책상’ 같은 사람들이 많이 살거든요.
‘의자’나 ‘책상’이요?
장보
몰라요?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텐데.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알기는 알죠. 앉는 의자, 공부하는 책상.
장보
준은 착한 사람이군요?
왜요?
장보
말뜻을 잘 모르는 것 같아서요. 한국에서 ‘의자’랑 ‘책상’은 엄청난 욕이에요. 대학교에 다닌다고 했죠? 그래서 잘 모르나 봐요.
누가 ‘의자’랑 ‘책상’이 욕이라고 했어요?
장보
모아가 가르쳐 줬어요. 한국 욕이라고요. 그래서 친구들한테도 ‘책상’과 ‘의자’를 알려 줬어요. 다들 무서워서 난리가 나요. 모아는 작아 보이지만 엄청 강한 애예요. 욕도 잘하고요. 조금 더 크면 진짜 대단해질 거예요. 인도네시아어에도 곧 익숙해질 거예요.
(웃음을 참으면서) 아, 그랬군요. 모아가 가르쳐 줬군요.
장보
(인상을 찌푸리면서) 왜 웃는 거죠? 어린아이라고 욕을 못 쓸 거란 생각은 하지 마세요. 편견이에요.
아뇨, 아니에요. 난 그거 때문에 웃은 게 아니에요. 그냥 신기해서 그랬어요. 난 어릴 때 욕을 전혀 못 하는 애였거든요.
장보
왜요?
부모님께서 욕은 나쁜 거라고 하셨어요. 욕을 쓰면 ‘이놈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무덤으로 끌고 간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죠. 난 그 말을 믿고 욕을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른이 돼서 보니까 어릴 때 욕을 안 쓴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요. 아무도 ‘이놈 할아버지’한테 잡혀가지 않은 거죠. ‘이놈 할아버지’는 없었던 거예요. 어린아이를 겁주기 위한 말에 불과했던 거죠.
장보
‘이놈 할아버지’는 뭐죠? 악마 같은 건가요?
비슷해요.
장보
보로부두르에도 악마가 있어요. ‘욕망’이라는 악마예요.
정말요?
장보
네. 보로부두르 지하에 그런 악마가 살죠. 그 악마는 만다라에도 그려져 있어요. 네모난 선 모양으로요. 집중해서 봐야 악마가 보여요. 마음의 눈을 써야만 하죠. 그냥 봐서는 알 수가 없어요.
아까 보로부두르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했죠?
장보
네.
혹시, 보로부두르가 여기에서 멀어요?
장보
조금요. 엄마는 보로부두르가 땅끝에 있다고 했지만 아니에요. 족자카르타에서 40km 정도밖에 안 걸려요.
괜찮다면 우리 함께 가볼래요? 장보의 말을 들으니까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보
엄마한테 허락을 받아야 해요. 걱정하실 거예요.
좋아요. 장보네 집까지 같이 가요.
장보
모아랑 같이 다녀올게요. 한국 사람을 보면 엄마가 놀랄 거예요. 엄마는 한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기다릴게요.
장보는 이끼를 구경 중인 모아에게 손을 내민다. 모아는 순순히 장보의 손을 잡고 일어선다. 준은 보도블록 사이에 자라난 이끼 중 가장 풍성한 것을 몇 개 뜯어서 모아에게 준다. 작은 보라색 꽃처럼 보인다. 모아는 준이 준 이끼를 손으로 감싼다. 소중한 물건을 다루는 듯하다. 세 사람은 길목에서 헤어진다. 장보는 준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다. 모아는 손을 흔든다. 준은 활짝 웃어 보인다. 장보와 모아는 코너를 돌아 집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로 들어선다. 더는 민준이 보이지 않는다.
장보
너 먼저 인사했다며? 모르는 사람한테 인사하는 건 좋지 않아. 위험할 수도 있어. 한국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여기는 아니야. 특히 관광객들한테는 아는 척도 하지 마. 마을 어른들도 그렇게 하잖아. 마을 애들도 그렇고. 너만 튀게 행동하면 안 돼. 그러니까 릴리가 자꾸 괴롭히는 거잖아.
모아
내가 인사한 거 아니야. 준이 거기서 먼저 이끼를 보고 있었던 거야.
장보
누가 이끼를 보고 있든 그건 아니야. 위험해.
모아
이끼를 보는 사람은 위험하지 않아!
장보
이끼를 보는 사람들이 착하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야.
모아
준은 천사야. 장보가 뭘 모르는 거야.
장보
천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모아
준이 보도블록에 손을 댈 때마다 보라색 이끼가 생겼어.
장보
거짓말 좀 하지 마. 아까 준도 보라색 이끼를 보면서 놀랐잖아.
모아
일부러 그런 거야. 장보한테 이끼를 보여주려고.
장보
사람은 천사가 될 수 없어.
모아
준은 진짜야. ‘보로부드러운’에서 왔다고 했어. ‘아무것도’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했어.
장보
‘보로부드러운’이 아니라 ‘보로부두르’겠지.
모아
아무튼 거기야. 준은 ‘아무것도’ 세상에서 산대. 거긴 텅 비어 있대. 천사들의 마음도 텅 비어있는데 준은 마음이 생겨서 잠시 여기로 온 거랬어. 마음을 누군가한테 나눠 주면 다시 보로부두르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어.
장보
대체 ‘아무것도’ 세상이 어디 있다는 거야.
모아
‘보로부드러운’ 옥상에 있대. 가끔 마음이 생기는 천사가 있는데 그게 자기래. 보라색 마음이 생겨서 그걸 나눠 주러 온 거랬어.
장보
보라색 마음?
모아
보라색 마음은 꿈꾸는 마음이래.
장보
이따 준한테 다시 물어볼 거야. 거짓말이면 가만 안 둬.

3. 천사의 이끼

장보의 집. 1막과는 다르게 돌멩이와 꽃잎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다. “마마! 마마!” 아무리 불러도 엄마는 대답하지 않는다. 장을 보러 나갔을 수도 있고 이웃집에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장보의 머릿속을 스친다. 모아는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만화 비디오를 보려는 듯하다. 그제야 장보는 주변을 휘둘러본다. 돌멩이와 꽃잎이 사라진 걸 깨닫는다.
장보
이상한 일이에요. 돌멩이와 꽃잎이 갑자기 사라졌으니까요. 엄마가 드디어 돌멩이와 꽃잎을 치우기로 결심한 걸까요? 돌멩이와 꽃잎이 워낙 많아서 그 쓰레기를 치우러 나갔나 봐요. 어쩌면 이웃집 짠디 아줌마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을 수도 있고요. 준에게 보로부두르에는 못 가게 됐다고 말을 해 줘야겠어요. 엄마 허락 없이는 집을 비울 수가 없거든요. 그건 엄마와 나 사이의 약속이니까요.
밖으로 나가려는데 모아가 아무렇게나 바닥에 버려둔 보라색 이끼가 눈에 띈다. 둥근 이끼는 보라색 꽃처럼, 둥근 마음처럼 보인다. 장보는 모아를 혼내려다가 준이 오래 기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우선 이끼를 주머니에 넣는다.
장보
모아! 다시는 이끼를 못 만질 줄 알아! 거실에 버렸으니까!
모아
(목소리만) 싫어!
장보
모아는 원래 저래요. 가끔은 저렇게 자기 좋을 대로만 하죠. 준에게 가 봐야겠어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돌아갈 거예요.
장보는 모아와 걸어왔던 길을 혼자서 돌아가기 위해 현관문을 연다. 그 앞에는 준이 서 있다. 준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잘 찾아왔군요, 내가?
장보
어떻게 왔어요?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그리고 그 속에서 돌멩이와 꽃잎을 꺼낸다.) 이걸 보고 여기가 장보의 집인 줄 알았어요. 이건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거거든요.
장보
준은 그게 보여요?
당연히 보이죠. 이건 보로부두르에 있는 것들이거든요. 어느 날 돌멩이랑 꽃잎이 대량으로 사라진 걸 봤어요. 그 이후로 나에게 보라색 마음이 생겨났죠. 나도 잘은 모르지만 돌멩이와 꽃잎을 꼭 되찾고 싶었나 봐요. 나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돼요. 보로부두르에서는 모든 게 텅 비어있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 마음을 주기 위해 여기로 온 거예요.
장보
보로부두르? 준은 한국에서 왔다고 했잖아요.
거짓말은 아니에요. 보로부두르는 한국이기도 해요.
장보
보로부두르가 한국이라고요? 거긴 인도네시아예요.
보로부두르는 한국이 되기도, 인도네시아가 되기도 해요. 미국, 일본, 아르헨티나 뭐든 될 수 있어요. 어차피 아무것도 없는 곳이니까요.
장보
준은 누구예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아에게는 천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면 알아듣지 못할 테니까요.
장보
거짓말.
돌멩이와 꽃잎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장보는 알고 있죠?
장보
몰라요.
잘 생각해봐요. 알고 있을 거예요. 모아가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생겼잖아요.
장보
아니에요.
뭐가 두려웠어요? 엄마가 모아를 더 사랑하게 될까 봐 무서웠나요? 아니면 갑자기 나타난 동생이 싫었나요?
장보
모아는 내 동생이에요. 싫지 않아요.
그런데 왜 괴로웠어요? 왜 돌멩이와 꽃잎을 치우지 못했나요?
장보
나도 한국으로 가고 싶어요. 엄마의 나라로요. 내 원래 이름은 장진보래요. 성과 이름이 있었대요. 인도네시아에서 살아가야 하니까 장보라는 이름으로 바뀐 거예요. 나는 자유로운 이름을 가졌지만 하나도 자유롭지 않아요. 나도 어른들이 하는 고민을 그대로 해요. 나도 가지고 있어요.
장보의 발밑에서 보라색 이끼들이 자라난다. 마당으로, 현관으로, 집 안으로. 보라색 이끼들은 점점 퍼져나간다.
장보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게 싫어요. 알고 싶어요. 그래서 돌멩이와 꽃잎이 아파도 참은 거예요. 나는 한국 아이예요, 인도네시아 아이예요?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어요?
장보의 목소리를 따라서 보라색 이끼들이 꽃처럼 활짝 피어난다. 준은 장보의 말을 들으며 전지전능한 신처럼, 친절한 이웃처럼 웃는다.
알 수 있을 거예요. 이끼는 계절마다 자라니까요. 꿈처럼 커질 거예요.
장보
준은 어떻게 알아요?
장보도 곧 알게 될 거예요. 이끼를 잘 보면 알 수 있거든요. 장보는 마음의 눈이 있는 사람이니까.
장보
왜 나를 찾아왔어요?
보라색 마음을 주고 싶었어요.
장보는 집을 둘러본다. 보라색 이끼들이 가득 자란 게 보인다. 장보는 보라색 이끼들 사이로 누워 본다. 푹신한 감각이 장보에게 전해진다. 준은 사라진다.
장보
준의 이끼는 부드럽구나. 천사의 이끼처럼.
모아
(목소리만) 장보! 비디오가 안 나와.
장보
(꿈에서 깬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선다.) 응, 갈게.
모아
(목소리만) 빨리 와.
장보가 집 안으로 사라진다. 무대 위에는 무성한 보라색 이끼들만 남는다. 그때 준이 다시 무대에 등장한다. 준은 보라색 이끼들을 바라보며 손을 모으고 기도를 시작한다. 무대는 점점 더 환하게 밝아진다. 태양이 무대를 비추고 있는 것처럼.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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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율

최서율
연극을 공부하고, 희곡을 쓴다. 신화적 상상력의 힘을 믿는다. 기록하고 싶은 일상은 @dont.be.xx 안에 모아 둔다.
메일은 0001244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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