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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발명

다시 쓰기

하수진

제222호

2022.09.29

2022 [희곡] 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다시 쓰기’는 기존 작품을 동시대의 시선에서 바라봄으로써 지금 여기와 그때 그곳을 가로지르고자 합니다. 하나의 장르와 또 다른 장르를 넘나들고자 합니다. 때로는 원전의 전형적인 코드들을 드러내고 비틀며 고쳐 쓰거나 다시 씀으로써, 글쓰기의 평행 우주에서 함께 존재하고 있었을 또 하나의 작품을 발굴하고자 합니다.

* 「사랑의 발명」이 다시 쓴 작품은 이영광의 시 「사랑의 발명」과 신형철의 논평 「무정한 신 아래에서 사랑을 발명하다」입니다.

등장인물



1.

장소와 시간을 알 수 없는 세계. 무너지고 있다.
나와 너, 바람에 삐거덕거리는 대교 위에 앉아있다.

셋.
둘.
하나.
나/너
무너진다!
나와 너, 눈을 감고 귀를 막는다. 큰 굉음을 내며 빌딩이 쓰러진다.
아깝다. 저기 일 층에 있는 맥도날드 맛있었는데.
내일은 또 어디가 무너질까?
아마도 땅이 갈라질 거야.
그다음은?
하늘이 무너지겠지.
마지막에는?
다리. 우리가 앉아 있는 이 다리가 무너져내리겠지.
그렇구나.
내일은 같이 땅이 갈라지는 걸 구경하자. 재밌을 거야.
그래. 땅속 깊은 곳엔 뭐가 있는지 항상 궁금했어.
세상이 큰 불길에 휩싸일 거야. 어딜 가도 뜨겁겠네.
더운 건 질색이야. 나는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만 마신다고.
여긴 아주 아주 높으니까, 걱정하지 마.
걱정 같은 거 안 해. 어차피 결국은 다 망가질 테니까.
바람이 분다.
대교가 고래의 울음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나,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돌아가는 거야?
이제 갈 시간이야.
그래. 내일 봐.
그래. 돌아올게.
안녕.
안녕.
나, 멀리 걸어간다.
건물들이 모두 쓰러진다.
먼지가 자욱하다.
너, 무너지는 세계를 구경한다.

2.

나, 멀리서 걸어온다.
너,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안녕. 정말 왔네.
안녕. 돌아올 수밖에 없었어.
네 말대로 정말 땅이 갈라지고 있어.
땅속 깊은 곳엔 뭐가 있는지 알게 되었니?
엄청 깊은 구멍과 엄청 뜨거운 불이 있었어.
덥진 않고?
견딜 만해.
다행이다.
저 깊은 구멍으로 계속 빨려 들어가고 있어. 아주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도 저기로 빨려 들어가게 될까?
우리는 아주 높은 다리 위에 있잖아. 괜찮을 거야.
우리도 그냥 저기로 들어갈까?
엄청 깊고 엄청 뜨거울 텐데 괜찮을까?
생각해보니, 더운 건 딱 질색이야.
나도 그래.
그냥 여기서 구경이나 하자. 뭐가 빨려 들어가는지, 뭐가 무너져내리는지.
그래.
나,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손을 흔든다.
안녕하세요. 네, 저예요. 저. 반지하에 살던. 저 기억하시죠? 네, 저 밑에는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대요. 근데 엄청 뜨거운 불길이 이글거리고 있는 건 알겠어요. 네, 추운 건 딱 질색이라구요. 아, 다행이네요. 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누구야?
아, 일 층에 사시던 할머니. 가끔 과일을 챙겨 주셨어. 조금씩 곯아 있긴 했는데, 그 부분만 도려내고 먹으면 먹을 만했어. 혼자 사는 사람한테 과일은 귀하니까. 고마운 분이셔.
너, 자리에서 일어난다.
(크게 외치며)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따라 크게 외치며) 안녕히 가세요.
감사한 분이니까 인사드려야지.
할머니가 뜨거운 걸 좋아하셔서 다행이야.
우리도 나이가 들면 뜨거운 걸 좋아하게 될까?
햇볕에 몸을 지지는 고양이들처럼? .
고양이는 귀엽지만 아무래도 더운 건 질색이야.
그건 그래.
또 저기 누군가 빨려 들어간다. 너에게 손을 흔들고 있어. 아는 사람이니?
글쎄. 아주 희미한 사람이네, 누구였더라….
나, 난간에 기대서서 고개를 쑥 내밀고 깊은 구멍에 어떤 것들이 빨려 들어가는지 관찰한다.
아,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야. 어쩐지 희미하더라.
너를 좋아했나 봐. 엄청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어.
사귀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확실할 건 나한테 걸레라고 했어. 더 확실하게 기억나는 건 쟤랑 다른 남자애들이 나한테 급식으로 나온 백설기를 잘게 잘라 던졌어. 아프진 않았어. 그냥 백설기가 너무 맛있어서 떡이 아깝다고 생각했어.
백설기는 언제 먹어도 맛있지.
너, 자리에서 일어나 힘껏 외친다.
얼른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썩 꺼져버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 무도 모르게 영원히 죽어버려라!
(따라 야유하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영원히 죽어버려라!
나와 너, 야유를 퍼붓는다.
희미한 남자, 산산이 조각나며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간다.
전부 내가 아는 것들이야. 방금 어릴 때 키웠던 금붕어가 저 구멍으로 들어갔어. 가족들, 키우던 강아지, 수족관에 갇힌 생선들, 문화센터 수영장, 즐겨 듣던 노래, 매일 걸어 다니던 거리, 풀린 신발끈, 3200번 버스, 지하철 1호선, 여름밤의 눅진한 바람, 짙은 녹음과 햇볕, 맡았던 향기와 악취들,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던 모든 게 다 저 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지금 슬퍼하고 있니? 불안해하고 있어? 외로워? 아님 분노하고 있어?
아니. 그런 것들은 깊은 곳으로 다 빨려 들어가서 이제 아무렇지 않아.
그래. 다음엔 하늘이 무너질 거야.
알겠어.
다음에도 돌아올 거니?
나는 돌아올 수밖에 없어.
그래. 안녕. 내일 봐.
안녕.

나, 멀리 걸어간다.
너, 더 깊고 더 넓어지는 구멍을 구경한다.

3.

나, 멀리서 걸어온다.
하늘에서 유리 조각이 떨어지며 나와 너를 할퀸다.
너, 나를 보고 손을 흔든다.

안녕. 아프진 않아?
아프지 않아. 아니. 아픈 건가. 모르겠어. 그냥 아무렇지 않아.
그렇다면 다행이네. 얼른 이리로 와. 지금 막 하늘이 무너지기 시작했어.
꼭 눈이 내리는 거 같아.
날카로운 눈송이야. 눈에 안 들어가게 조심해.
하늘은 언제쯤 다 무너져내릴까?
글쎄. 신의 뜻대로.
하늘이 무너져내리고 있는데, 신이 어딨어.
어딘가로 무사히 피난 갔겠지.
웃기는 소리. 세상이 무너지고 있는데? 신은 이미 한참 전에 우리를 버렸어.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어디 한번 반박해보시지.
반박할 생각 없어. 증거도 없고. 네 말이 맞아. 신은 이미 한참 전에 우릴 버리고 떠났어. 우리가 너무 답이 없었나 봐.
떠난 게 아니야. 신은 죽었어. 그것도 아주 아주 아주 오래전에. 여긴 아무것도 없어,
너랑 내가 남아 있어.
그래서? 어차피 곧 종말인데, 그게 뭐 어쨌다고.
그냥 그렇다고. 어떤 의미도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없어.
그렇다면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위로하지 마. 잔소리도 하지 마.
어차피 망할 세상인데 아무 말이나 하면 안 돼?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텐데?
내가 듣기 싫어서 그래. 그냥 입 닫고 날카로운 눈이 내리는 거나 구경하자.
알겠어.

나와 너, 말없이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구경한다.
쩍쩍 금이 갈라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와 너,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오늘도 돌아갈 거니?
아니. 이제 돌아가지 않아.
그럼, 여기 있을 거니?
응. 너는 가고 싶다면 가도 돼.
혼자선 무서울지도 몰라.
이제 너무 지쳐. 더 이상 못 하겠어. 나는 이제 죽어버릴 거야. 여기 누워서, 마지막으로 다리가 무너지는 걸 기다릴래. 이렇게 눈을 크게 뜨고 두 눈에 다 담을 거야. 종말이 오는 순간을.

나, 자리에 드러누워 집게손가락으로 눈꺼풀을 크게 벌린다.

떠날 거라면 얼른 가. 곧, 다리가 무너질 거야.
정말 괜찮겠어?
나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뒤를 돌아보지 말고 떠나.
외로울 거야. 쓸쓸하고 두려울 거야. 그런 것들이 정말 다 괜찮아?
그래. 상관없어. 어차피 망하는데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상관이야.
정말 괜찮아?
정말 괜찮아.
그래. 알겠어. 그럼 나는 떠날게.
안녕.
안녕.

너, 멀리 걸어간다.
나,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나, 하늘을 노려보며 소리친다.

외롭지 않아. 쓸쓸하지 않아. 두렵지 않아.

곧, 대교가 크게 울며 무너짐을 예고한다.
너, 멀리서 걸어와 나의 옆에 앉는다.

안녕. 나는 가지 못했어.
(몸을 일으키며) 안녕. 왜 떠나지 못했어?
나는 알고 있어. 여기 혼자 있는 건 외롭고 쓸쓸하고 두렵다는 걸. 그래서 떠나지 못 했어. 그냥 네 옆에 있을래.
여기 있으면 온몸에 상처가 생길 거야.
이미 상처투성이야.
아주 무섭고 두려울 텐데?
응. 무섭고 두려워. 하지만 신은 아주 오래전에 죽었고, 우리를 봐줄 사람도 없으니까, 우리 둘이 같이 있자. 그럼 좀 덜 무섭고 두려울 거 같아. 나는 그거면 됐어.
정말로?
정말로.
나는 이런 걸 듣도 보도 못했어.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나도 몰라. 어차피 곧 종말인데 알 게 뭐야. 그러니까 그냥 지금은 무너져내리는 걸 구경하자.
그래.
대교가 요동친다.
먼지 바람이 자욱하게 일고, 세계는 잿빛이다.
나와 너, 빈틈없이 서로를 꽉 껴안는다.
셋.
둘.
하나.
나/너
무너진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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