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꿈에선 안경을 못 써

자기만족충만

박영영

제223호

2022.10.13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자기만족충만’은 작가 스스로가 추구하는 사유 방식, 세계관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입니다.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지점들을 충만하다고 느낄 때까지 끈질기게 탐구합니다.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와 형식을 작품을 통해 관철시키는 작가중심적 작품들을 만납니다.

등장인물
나(여, 20대 후반), 누군가, 엄마(여, 50대 중반)

무대
- 1.5m*1.5m 크기의, 앞이 한지 같은 반투명한 종이로 막힌 프레임이 무대 중앙에 세워져 있다. 여기서 꿈 장면의 그림자극이 진행된다. 그림자극은 꿈의 내용을 보여준다.
- 객석을 포함한 여기저기에 놓인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녹음된 누군가의 목소리와 음악들이 흘러나온다.
- 꿈 장면의 배경음악: 사극에 나올 법한 경음악. 아련한 멜로디가 나오기도 하고, 코믹한 상황에틀 법한 똥땅거리는 음들이 나오기도 한다.

- 프레임 앞에는 매우 편안하고 푹신한 1인용 매트리스가 있다.
- 매트리스 옆에는 K값이 아주 낮은 전구색 장 스탠드가 꿈 장면에서 켜져 있다.

- 현실 장면에서 객석등까지 조명이 켜진다. 이때 객석등은 K값이 높은 주광색 형광등이면 좋다.


1. 꿈

프레임 안에 섹스 중인 남녀의 실루엣이 보인다. 섹스의 움직임에 맞춰 반복적인 하프 음 혹은 바이올린 음이 들린다.
피부가… 피부가 부드럽다. 진짜로. 가슴이 만져진다. 배도. 오… 근육. 진짜.
대박. 다리?
매트리스에 누워있는 배우는 자는 채로 손에 닿은 털 담요를 만지작거린다.
털이 좀 많네. 남성 호르몬이 많은 남잔가보다.
근데 나 좀 잘하네? 완전 파워 섹스다! 남자가 하나도 안 무거워.
프레임 속 여자가 남자를 들었다 놨다 한다. 남자는 인형처럼 가볍게 들렸다가 닿았다가 들렸다가 하다가 힘 조절을 못 한 여자에 의해 프레임 밖으로 휙 날아간다. 와장창 박살나는 효과음이 들린다.
잠깐만. 남자친구 뼈 뿌러졌나? 나 이제 경찰서 가나? 내 인생 망했나?
섹스하다가 넘치는 정력에 남친 골절시킨 여자? (사이)
근데 나 남자친구 없는데. 뭐야. 성매매 그런 거야? 호스트빠? 내가?
나 인생 완전 종쳤나? 골방에 박혀서 글만 쓰다가 하수구 인생 된 거야?
아니지…! 완죠니 성공한 걸지도? 로또 당첨? 성공한 억만장자 할망구냐.
여기 몇 년도야?
손이 안 보여. 내 손이 안 보여. 일단 목소리는 젊은데.
내 섹스 파트너야~ 어떻게 된 거니. 어디로 날라갔니~
프레임에 깨진 접시가 나타난다.
꿈이구나.
에잇 그럼 한 번만 더 할래! 제발~
여자의 손이 나타나 깨진 접시를 조각조각 맞춰보려 한다.
다시 붙어라. 남자로 변해라! 얍! 변해라! 얍! 꿈인데 왜 이래?
누군가
야. 너 섹스 하고 싶어?
존나 하고 싶어.
누군가
그럼 이리 와.
스크린에 시소의 이미지가 나타난다. 누군가는 시소의 한 편에 가서 엎드린다.
누군가
반대편에 엎드려.
난 이상 성욕자가 아닌데.
누군가
시소랑 하라는 게 아니거든.
나는 시소의 반대편에 가서 엎드린다. 시소는 쿵덕쿵덕
누군가
자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게 섹스지.
응 좀 어지럽기도 한데 이것도 재밌다.
시소는 한참을 쿵덕쿵덕
누군가
야 이제 나 이 놀이 질렸어. 혁명놀이 하자.
오 그것도 재밌겠다.
프레임 속에서 나와 누군가는 종이를 박박 찢어서 마구 던진다. 나의 벨소리가 저 멀리서 흐른다.
누군가, 나
폐지하라~! 폐지하라~! 어쩌구를 폐지하라~! 저쩌구는 사죄해라~! 무릎꿇고사죄해라~! 폐지하라~! 집어쳐라~! 어쩌구는 집어쳐라~! 저쩌구는 각성해라! 각성해라~! 각성해라~! 무릎꿇고 반성해라~! 저쩌구는 사죄해라~! 무릎꿇고 사죄해라~! 폐지하라~! 집어쳐라~! 어쩌구는 집어쳐라~! 저쩌구는 각성해라! 무릎꿇고 반성해라~!
헉헉거리는 나와 누군가.
이젠 뭐 하고 놀아? 이젠 너도 놀 거 떨어졌지? 또 지루한 삶 시작이지?
누군가
아니? 사람들 두드려 패기 할 건데.
이야~~
프레임 속에 사람들을 펀칭하는 손 두 개가 나타난다.
나, 누군가
이런 씨발 망할 놈들 씨발 놈들 죽어라!
누군가
속 시원해?
헉헉… 아니.
이거 꿈이잖어.
누군가
그래도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단 사실이 중요한 거지.
뭐래.
누군가
이번엔 너 차례야.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자살해볼래.
누군가
정말? 왜?
실제론 무서워서 못 할 것 같으니까. 꿈에서 해버리면 다시는 안 할 것 같은데.
밧줄을 잡고 목에 거는 실루엣.
잠깐만. 근데 너 누구야? 너 되게 꿈 안 같애. 말이 되게 두서 있어. 너 무슨 신적인 존재야? 이름 뭐야?
나는 누군가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안경을 코에 누르는 시늉을 한다.
나 눈 나빠서 너 얼굴 기억 못 해. 빨리 말해.
누군가
널 가장 사랑하는 사람. 정도로 해.
자 하나 둘 셋
나, 누군가
이얍!
장 스탠드와 프레임 속 전구색 불빛이 꺼지고, 객석등이 켜진다.
불쾌한 느낌이다. 식은땀에 등에 달라붙은 잠옷, 그 위에 난 보풀, 정사각형 이불 밖으로 삐져나와 차게 식은 코와 발. 뻐근한 목과 허리.
잠자리 주변에 흩어져 있는 수면제 알약, 베개와 이불에 자신이 뱉어놓은 수면제 알약을 보고 우는 나.
살았구나. 또.
도어락 소리가 들린다. 알약들을 급히 정리하는 나. 그 직후에 방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엄마. 커다란 가방을 옆에 끼고 있다.
노크 좀 해~
엄마
현관문 여는 소리 다 들었을 텐데 뭔.
너는 뭐 하는데 전화도 안 받아? 이럴 거면 다시 회사를 다니든가. 어우 이건 무슨 홀애비 냄새니? 글을 쓰더라도 기본적인 생활을 해가면서 글을 써야 될 것 아니니? 나는 바라는 것 없다. 그냥 청소랑 기본적인 것만 지키자. 12시 전에 일어나자. 어?
대답 없이 엄마에게 안겨 우는 나. 엄마는 왜 이래 왜. 제대로 하고 좀 살아. 라는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리다가 나를 안아준다.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엄마
왜 못 받았는데?
그냥.
엄마
그냥이 어딨어. 이틀이나 안 받았는데. 사정이 있었을 거 아냐.
그냥…
엄마
비켜, 이불 정리하게.
이불에서 수면제 두세 알을 발견한 엄마. 미친년아, 미친년아 하면서 흐느낀다.
엄마 나 그냥 오래 자려고 먹은 거야….
안 되겠다며 부랴부랴 나의 옷가지를 집어, 짐을 싸는 엄마.
엄마
말리지 마. 어차피 집에서 아빠랑 얘기하고 올 때부터 이러려고 온 거니까.
어차피 니 방 있는데 뭐 하러 월세를 낭비해. 너 이상해진 것도 혼자 살고 부턴데.

2.

프레임에선 TV 방송이 나온다. 사이좋게 TV를 보는 모녀. 알콩달콩한 분위기다.
엄마. 난 엄마 때문에 못 죽을 것 같아. 아니 안 죽어. 엄마 죽는 거 보고 죽을 거야.
엄마
엄마 죽으면 죽을 거야? 엄마 죽고도 100살까지 살아야지. 남편이랑.
결혼하면 지겹지 않을까? 남편이랑 100살까지 알콩달콩 살 수 있을까?
엄마
응. 잘해주는 남자 만나서 사랑받으면서 살어.
웃는 나.
엄마
징그러워도 엄마는 엄마 죽을 때까지 너 옆에 놓고 봐야 놓인다.
엄마 나 졸려. 나 잘래.
엄마
벌써?
엄마가 나 계속 쳐다봐서 부담스러워서 어제 못 잤잖아. 오늘 푹 자야지.
엄마
너 그럼 몸수색 좀 해.
아악 징그럽게 왜 이래.
몸수색을 하는 엄마.
엄마
됐어. 누워.
사이좋게 이불을 덮고 자는 모녀. 한참이 흐르고… 다시 객석 등이 꺼지고 꿈속.

3.

너 보려고 안 죽고 왔어.
누군가
엄마 때문에 안 죽었으면서 거짓말 마. 나 본 지 얼마나 됐다구.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가족 때문에 안 죽는 게? 가족 때문에 산다는 게?
애초에 내 삶에서 가족이 중요한 존재였던 시기는 한 번도 없었어. 그냥 옆에서 날 챙겨 주는 고맙고 미안한 사람들이지.
누군가
맞아.
그럼 오늘은 뭐할래?
너랑 하늘을 날아갈래.
누군가
내 손을 잡아. 간다~
하늘을 나는 두 사람의 실루엣.
누군가
저기 에펠탑이 보여. 와~ 하울의 움직이는 성도 보여.
안 보여.
누군가
눈에 힘을 주고 봐.
그래도 안경이 없어서 안 보여. 그리고 하늘도 회색이구만 뭔.
누군가
하늘은 푸른색이야. 무서울 정도로 푸르러.
너는 꿈속에 사니깐 그렇겠지. 나한테는 뿌옇고 회색 하늘이야. 공감 능력도 없냐?
신경질적으로 누군가의 손을 뿌리치는 나.
그래도 손잡은 느낌은 났는데.
누군가
너가 엄마랑 손잡고 자고 있으니까.
야 어쨌든 중요한 건 너와 내가 하늘을 날고 있다는 사실이야.
이 말만 번드르르한 놈.
그래도 난 너랑 있으면 재밌어. 너랑 계속 있으려면 우째야 해?
누군가
계속 잠을 자면 되잖아.
넌 계속 내 꿈에 올 거야?
누군가
너가 원한다면.
야 일어나! 일어나라! 12시 다 됐다. 엄마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린다.
내버려 둬!!!
몸을 흔드는 엄마. 결국 일어나는 나.
엄마를 밀어내고 다시 잠드는 나. 결국 포기하고 자는 나를 지켜보는 엄마.
엄마
겨울인데 얼마나 자면 땀띠가 나니. 왜 이러니 정말….
흐느끼며 잠든 나에게 연고를 바르는 엄마.
나는 계속 자고, 엄마는 쪼그리고 앉아서 날 지켜본다.
나는 일어나서 몸을 일으켜 밖으로 간다.
엄마
어디 가?
화장실.
자다가 깨서 화장실에 가는 상황이 몇 번 반복된다. 결국 잠을 더 잘 수 없을 만큼 많이 자서, 일어나는 나.
엄마
어디 가?
졸려서 못 가겠어.
엄마
그렇게 많이 자놓고 뭘 또 졸려?! 잠보야. 자는 게 그렇게 좋니. 엄마랑 장 보러 가는 것보다 좋니.
재밌단 말이야. 나 꿈에서 하늘도 날았어.
엄마
꿈 아니어도 하늘을 날 수 있어.
뭐, 비행기 타는 거?
엄마
그건 나는 게 아니지. 스카이다이빙 말이야.
그렇긴 하네….
엄마
엄마랑 스카이다이빙 하러 갈래?
엄마가 다 늙어서 스카이다이빙을 어떻게 해? 관절도 안 좋으면서.
엄마
관절이랑 상관없거든. 원래 엄마가 하려고 했었어. 엄마가 하고 싶어서 알아봤는데,
일로 와 봐.
엄마는 포스터를 가져와서 보여준다. 스카이 다이빙을 하는 흑백 사진이 있는 광고지다.
내가 꿈 속에서 봤던 하늘과 같다.
아, 안경 안 써서 안 보여.
안경을 가져와 쓰곤,
어? 나 이거 어디서 봤는데.
엄마
아주 오래전부터 냉장고에 붙여놨었어. 가려고 가려고 했는데.
하늘이 흑백이잖아. 회색 하늘이잖아.
엄마
광고지니까 그렇지. 대량 복사해서.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박영영

박영영
배달음식처럼 기다려지는 이야기
계속 머릿속에 남아서 꿈에 나오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파이팅!
mala1207@naver.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