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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과 수녀와 여행자들

다른 손(hands/guests)

김해경

제224호

2022.10.27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다른 손(hands/guests)’은 인류세 이후의 연극, 인간중심적 예술의 바깥을 상상합니다. 그동안의 한국 연극이 누락한, 이야기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존재들의 지위와 존엄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다른 손으로 보편성을 다시 씁니다.

작의

누구나 삶이 주는 우연하고 잔인한 불행을 마주하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진다. 나라는 자아로부터 도망쳐서 다른 페르소나로 계속 옮겨가며 자아와 인생이 주는 무게를 가볍게 하려고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회피는 때로 공상이나 이야기 예술 속으로의 도피 같은 얄팍한 취미로 나타나고 봉사활동이나 종교활동 등 숭고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양한 이유와 상처 때문에 사회로부터 자신을 숨기고 사는 사람들, 특수하고 폐쇄적인 사회에 소속된 비주류 군상들. 그들이 보다 큰 사회와 공감대에 소속감을 느끼고 타인과 교류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그것은 소위 ‘현실도피적’ 오락물이다. 서사예술을 통해 서로의 고통과 이유에 공감하면서 일시적이나마 친구가 될 수 있다. 일시적인 위안과 공감일지라도 서로의 상처와 이유를 이해하고 공감하면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서로가 다르지 않고 같은 상처를 가진 존재인 걸 깨달으면 서로 깊은 차원에서 교류할 수 있고 소속감을 가질 수 있다. 사소하고 하찮은 소속감이라도 소속감은 인간에게 인간성을 일깨우고 일상을 살아가게 한다


줄거리

스페이스후프라는 공상과학 드라마의 팬클럽 모임 겸 팬픽 앤솔로지를 위해 만난 소피아 수녀와 19살의 등교 거부 히키코모리 청소년 남문수는 불쾌하고 불편한 첫 만남 이후로 우연히 SF컨벤션에서 다시 만난다.
신의 존재는 믿지만 외계인은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소피아 수녀와 신 따위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고 외계인은 진짜라고 믿는 남문수는 상대방의 신념을 부정하며 자신만의 고집과 망상을 내세운다. 두 사람은 외계인 피랍 일화의 진위 여부를 논쟁하다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납치돼 기절한 뒤 깨어난다.
정체불명인 존재의 심리실험대상이 되어 각자 자신의 잊고 싶었던, 하지만 잊을 수 없었던 과거와 억지로 마주하게 되는 두 사람. 상대방의 신념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고집과 망상을 내세웠던 두 사람은 상대방도 자신처럼 왜곡된 자아상을 품고 살며 고통받고 있었던 것을 알고 비슷한 상처에 공감하며 서로를 위로하게 된다.


등장인물
소피아
이제 막 수녀복을 입기 시작한 수련기 1년 차 22살 수녀, 서브컬처 커뮤니티에서 시즌2에 종료된 마이너 SF드라마 시리즈 <스페이스후프>의 19금 팬픽 작가로 유명하다.
남문수
온라인 닉네임은 쌍성계의 선녀보살, 17살부터 등교 거부를 하며 방에 틀어박힌 은둔형 외톨이. 이제는 어느덧 22살 더벅머리 오타쿠, 여성동성애 팬픽을 구매하고 싶은데 남자는 팬덤에 끼워주거나 판매를 하지 않아 온라인에서는 중년여성인 척 가짜의 삶을 살고 있다.
여행자1, 2
알파센타우리계 옆에 존재하는 은하계인 쌍성계에서 지구의 인류학적 탐사를 위해 파견된 외계인들, 스타트렉의 커크와 스팍 코스프레를 하고 스페이스후퍼 행사장에 잠입했다가 다른 외계인들에게 납치당한다.
코러스1, 2, 3
로마제국 귀부인 복장을 한 세 명의 여성, 플래시몹과 중창단을 겸직한다.
바텐더 쿼키
SF컨벤션에 팝업 바를 운영, 직접 개발한 칵테일을 판매하는 수상한 바텐더
팬보이1, 2
모든 종류의 서브컬처 컨벤션에 코스프레를 하고 참석하는 20대 남성들
팬걸1, 2
스페이스후프 티비쇼 시리즈를 좋아해서 SF컨벤션에만 항상 참석하는 중년여성과 10대 소녀

1막 1장 외계인피랍 경험자들과 외계인들

남성들 간의 로맨스를 소재로 한 팬픽 문화를 발생시킨 시초로 유명한 스타트렉 시리즈 스타쉽 선장 제임스 T 커트와 벌컨 행성에 온 스타플릿 선임 장교 스팍 복장을 한 남자 두 명이 컨벤션 중앙의 둥근 형태의 스탠드바 의자에 나란히 앉는다.
스페이스후프 엔블럼이 잔뜩 그려진 티셔츠와 선원 제복 레플리카를 입은 팬보이 두 명이 바에 왔다가 이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건다.
팬보이1
허? 스페이스후프 특별전에 KS 커플룩이라니 너무 눈치가 없는 거 아니예요?
팬보이2
아무리 다른 SF 팬덤도 포용한다는 방침이지만 스페이스후프 특별전에 커크와 스팍 복장으로 나타나는 건 일부러지? 놀리는 거지? (여행자1, 2를 소심하게 힐금거리며 팬보이1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팬보이1
그렇지 뭐.
여행자1
(팬보이들에게 바짝 다가서며) 그런가요? 몰랐습니다.
여행자2
(팬보이2 옆에 바짝 다가선다) 스페이스후프 소속 사람들과 스타트렉이 사이가 나쁜지는 몰랐네요.
팬보이2
(움찔하더니 몸을 슬슬 옆으로 기울이고 여행자2의 시선을 못 본 척하며 여전히 팬보이1에게 시선을 향하고 웅얼거린다) 그걸 어떻게 모르죠?
여행자1
(팬보이2의 얼굴에 얼굴을 들이밀듯이 바짝 다가서며) 가장 자료가 풍부하고 팬덤이 큰 티비쇼를 토대로 데이터를 산출해서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조합으로 선정한 건데요.
여행자2
가장 눈에 안 띄고 적응하기 쉬울 줄 알았던 거죠.
팬보이2
(다시 명확하게 불만 있는 목소리로 소근거린다) 커크와 스팍 커플이 가장 인기가 있는 건 맞지.
팬보이1
근데 스타트렉 팬덤도 내가 다 아는 얼굴들만 있는데? 어디서 온 거죠?
팬보이2
그러게? 다들 아는 사인데? 처음 보는 사람들이잖아?
여행자1
알파센타우리계
여행자2
옆에 있는 쌍성계에서 왔습니다. 지구 문화는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어떻게 섞여야 할지 나름대로 고민하고 어렵게 고른 복장인데.
여행자1
유감스럽네요.
팬보이1
항성간 여행자인 외계인라니 그게 무슨 너구리라쿤 스시초밥같은 소리야. 스타트렉이 원래 항성간 우주를 워프드라이브로 여행하고 탐험하는 드라마인데!
팬보이2
나는 어릴 때 진짜 외계 우주비행선을 본 적 있어. 가까이서 본 적은 없지만. 내 친구 중에 한 명은 납치되었다가 풀려 난 뒤 외계문명을 창조주라고 믿는 컬트에 입단했지.
여행자1
저희 종족 중에도 다른 외계 문명에 납치된 경우가 있습니다. 지구 문명만큼이나 태양계 밖에도 야만적인 지성체나 문명이 종종 있거든요.
여행자2
물론 바로 구조팀이 파견되어 지금은 다들 건강합니다. 특정 종교에 입단할 필요는 없었죠.
바텐더 쿼키
외계인 피랍 경험자들이시군요. SF컨벤션에서 그리고 특히 스낵바에서 항상 인기 있고 빠질 수 없는 분들이죠. 지난해에도 본 분들 같은데.
팬보이2
당신은 처음 보는 바텐더인데? 작년에 못 본 사람인데?
바텐더 쿼키
저는 쿼키라고 불러주세요. 쿼크스 바에서 영감을 얻어 작명한 건데.
팬보이1
하필 페렝기인 쿼크스 바에서 영감을 얻다니.
바텐더 쿼키
쿼크스 바 앤 레스토랑이 뭐가 어때서요? 클링온 칵테일 드릴까요?
팬보이1
우리를 납치했던 외계인은 클링온이나 로뮬란 아니면 탈로스인 셋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아.
팬보이2
탈로스인은 아니야. 탈로스인은 몸에는 관심 없는 종족이잖아. 지적인 개체에게 정신적인 세뇌와 환영을 주입하는 데 기술을 집중하는 존재들이지.
여행자1
이전에는 대부분의 탐사가 지구인의 육체적인 능력과 해부학적 특징을 탐색하는데 초점이 맞춰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탐사가 지구인들의 정신적인 능력과 사회성에 심각한 후유증과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거든요.
여행자2
초기 보고서에는 부작용이 심하다는 보고가 누락되어 있었죠.
여행자1
그동안 관련자들의 문책이나 처형 기타 여러 가지 후속 조치를 하는 동안에도
여행자2
다른 항성계에서 독선적으로 잘못된 방식의 탐사를 지속했고.
바텐더 쿼키
스마트폰의 자동완성 기능이라도 켜놓은 거예요? 아니면 일란성 쌍둥이예요? 무슨 말을 두 사람이 똑같이 이어서 하세요? 무슨 누가 대본 써준 거 나눠서 릴레이로 읽는 사람들 같네.
여행자1
지구인들이 말하는 일란성 쌍둥이와 비슷한 거지만
여행자2
전혀 다르죠.
여행자1
일란성 쌍둥이는 서로 독립된 개체인 두 사람이 말없이 통하는 공감대를 가진 것뿐이라면 쌍성계 여행자들은 뇌파와 자아를 완전히 하나로 공유하는 게
여행자2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그냥 언제나 연결되어 있어서 자아가 하나에 몸만 둘인 거에 가깝다고 봐야죠.
여행자1
그래도 필요하다면 물론 자아를 다시 둘로 나누고 각자 독립된 주체성으로 활동하는 것도 가능하지
여행자2
만 웬만하면 그런 비효율적이고 위험한 행동은 하지 않지. 자아가 둘이면서 하나인 게 정신적으로 훨씬 안정적이거든.
바텐더 쿼키
왜죠? 자아가 한군데 모여 있으면 서로 부딪히고 싸울 텐데?
여행자1
우리 종족의 자아는 모래시계의 위아래 단지처럼 모래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형태로 정신적인 에너지가 이동하고 교류하기 때문에 한쪽 자아의 에너지가 약해지면 다른 자아 즉 형제의 자아로부터 에너지를 빌려 쓸 수 있거든요. 중간에 연결을 끊고 혼자 다녀도 외부의 큰 위협이나 공격이 없다면 당분간 큰 문제는 없지.
여행자2
만 그래도 꽤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있을 수밖에 없죠. 특별한 목적이나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항상 연결된 상태를 유지한 채 활동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고 안정적입니다.
바텐더 쿼키
그렇군요. 굉장히 흥미로운 형태의 교감이네요. 만약 두 분의 연결이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끊어진다면 어떤 정서적 경험을 하게 될까요?
여행자1, 2
(동시에 경악하며) 무슨 그런 끔찍한 말을?
바텐더 쿼키
때로는 악몽이나 시련이 인간이나 그 외 지적인 존재들의 지성을 자극해서 좀 더 성숙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성장하게 만드니까요. 제가 이번에 개발한 칵테일 공짜로 서비스 중인데 한잔 시음해보시겠어요? 스페이스후프 아공간중계장이란 칵테일이에요.
천장에서 갑자기 강렬한 은회색 빛이 쏟아지며 음악소리가 들린다.
여행자1, 2
(동시에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게 뭐지? 다른 탐사팀인가? 우리가 지구에 접근할 때 다른 탐사팀은 없었는데?
바텐더 쿼키
아 저런 SF컨벤션 플래시몹 이벤트를 하나 보네요. 율동과 가창 솜씨는 형편없는 데 반해 열정과 동작과 목소리는 큰 분들이죠. 오타쿠는 원래 그런 사람들이니까요.
팬보이1, 2
오타쿠가 아니라 스페이스후퍼즈라고!
바텐더 쿼키
그게 그거죠. 너구리와 라쿤 스시와 초밥 같은 거죠.
팬보이2
페렝기다운 야비한 말투네.
여행자1
페렝기는 어느 항성계 문명이죠?
여행자1, 2
들어본 듯하긴 한데.
코러스1, 2
(목소리) 우우~후프 모양 우주정거장의 주민들과 대원들은~~
후프 모양 우주선을 타고 우주 저 끝까지 탐험하지.
여행자1
이 음계는?
여행자2
삼중성계 음악?
로마제국 복식을 재해석한 수트를 똑같이 맞춰 입은 세 명의 플래시몹 오타무 여성이 구석에서 나타난다.
코러스1, 2 ,3
화이트홀에 숨어 사는 좀도둑도~~ 시간여행을 하는 바다벌레들도~~ 모두가 한번은 스페이스후프를 거쳐 가지!
코러스1, 2, 3
우주정거장으로 도망치자! 도망치는 게 뭐가 나빠. 우주정거장에 온 이들은 모두가 도망자 혹은 스파이 심지어 테러리스트!
모두가 친구이면서 모두가 이방인! 서로의 과거 따위 묻지 않는다네! 과거는 누구나 어둡고 야비하고 슬프니까.
문수
(바의 스툴에 앉으려다가 소피아를 발견한다. 소피아는 이번에는 사복 차림이다) 이번에는 사복 차림이시네요. 성직자가 이런 데 오는 거 불미스럽고 불쾌한 행동 아닌가?
소피아
여기 바에서 하는 공짜 칵테일 이벤트에 당첨돼서 어쩔 수 없이 온 거고, 천주님이 취미 생활 하지 말라고 한 적 없어.
문수
천주님이 여자들끼리 그렇고 그런 행위를 약 1만 자에 걸쳐서 하는 10만 자짜리 19금 팬픽을 쓰고 배포하고 즐겨도 된다고 하진 않았을 텐데?
소피아
된다고 하신 적은 없지만 안 된다고 하신 적도 없지. 하! 하!
문수
종교란 환상이고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만드는 사회악이지! 마르크스도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지.
소피아
그래 다 받고 더블로! 가 아니라… 21세기에 남한 땅에서 천주교보다 신자가 더 많은 쪽은 티비쇼 팬덤과 일본 만화영화거든? 그리고 그 팬덤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성년자 의제강간 사건과 집단따돌림도 예수님 팬덤보다 더 빈번할 걸?
문수
스페이스후프 같은 SF 티비쇼는 적어도 자신이 환상이고 거짓말이고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걸 인정하고 시작해. 종교처럼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거짓말이 아닌 척 사람을 속이진 않지.
소피아
외계인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그런 말을 여기저기 진정성 넘치게 하고 다니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문수
외계인은 정말로 있으니까! 내가 직접 만났고 피해자니까! 당신은 당신이 그렇게 믿고 있는 걸 직접 만나본 적 있어?
소피아
없지 당연히.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도다, 라는 말씀대로, 나는 보지 않고도 진실을 믿는 능력이 있거든. 그리고 나는 내가 믿는 게 뭐든 그런 거에 피해당한 적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 없어. 그리고, 외계인 같은 건 볼 기회도 없고 믿을 기회도 없는 게 좋은 거 아닌가?
문수
무지하고 무지한 중생 주제에! 어디 컴컴한 천체 구석탱이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귀신 따위는 믿으면서 외계인이 얼마나 현실적이고 우리 가까이에 어디서나 발견될 수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알아볼 생각도 안 하지! 알고 나면 너무 무섭고 끔찍하니까 말이지.
소피아
그래… 오금이 저린다~ 진실을 마주본다는 게~~
문수
피해당한 게 없고 고통스러운 적도 없고 그딴 게 진실일 리 있겠냐. 그냥 취미 생활이나 아편중독 같은 거지.
팬걸1
(바 옆에 앉아 있던 스타쉽크루 복장의 중년여성) 뭐야 저 둘은? 왜 다른 회원들을 드라마 장면에서, 주인공 커플 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엑조틱한 복장의 외계인들 취급하는 거야?
팬걸2
(팬걸1 옆에 앉아 있던 원피스형태의 스타쉽크루 복장을 한 10대 소녀) 그러게요. 완전 스페이스후프 시리즈 특유의 정거장 바에 앉아서 단둘이 주요 스토리 진행하는 주인공 남녀처럼 완전 자리 차지하고 시끄럽네요.
바텐더 쿼키
다들 조금만 조용히 해주세요. 팝업스토어지만 그래도 나름 영업장인데요.
팬걸2
아 그러게 남의 가게에서 뭐대!
팬걸1
아니 그쪽도 목소리가 꽤…
팬걸2
컸나? 너무? 근가!
바텐더 쿼키
당첨 이벤트는 쌍성계의 선녀보살 님한테 피랍 경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서 마련한 자리예요.
문수
(움찔하며) 내 피랍 이야기를?
팬걸1
나도 외계인납치경험자인데? 어떻게 알았지?
팬걸2
나는 없는데?
팬걸1
정말? 한 번도?
팬걸2
(머뭇거리며) 아니… 한 번 정도는 있을지도…
팬걸1
그래 설마 한 번도 없겠어! 자기는 꽤 이쁘장하게 생겼고만. 외계인한테도 어필될 얼굴이야.
팬걸2
아… 네… 고마워요!
바텐더 쿼키
다른 분들도 외계인 납치 경험은 아니라도 각각 특별한 이야기를 갖고 계신 거 같아서 초청했습니다.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흥미로운 경험을 할 수 있어서 좋고 저도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라는 개인적 욕심이 있어서요.
소피아
되게 개인적이고 소름 끼치는 욕심이네요. 남이 납치당한 이야기 같은 걸 왜 자세하게 알려고 하죠?
바텐더 쿼키
자세하게 알고 싶다기보단 깊게 알고 싶다에 가깝죠.
팬걸2
이거 그런 거 아닌가? 다크투어리스트! 테드번디 팬클럽?
바텐더 쿼키
제가 개발한 칵테일 시리즈 좀 맛보시겠어요. 블랙홀 속에 머무는 외계종족의 이름을 딴 칵테일들이에요.
코러스1, 2
(목소리) 우우~후프 모양 우주정거장의 주민들과 대원들은~~
코러스의 목소리와 음악이 다시 흘러나온다. 동시에 푸른빛의 섬광이 갑자기 바텐더와 여행자들 위로 쏟아진다. 너무 강렬해서 관객석의 시야가 흐려진다.
무대 암전.

2막 1장 여행자와 불청객

은회색으로 빛나는 좁은 복도를 벽을 만지거나 두리번거리며 나란히 걷고 있는 쌍성계 여행자1, 2
여행자1
여기는 어디야? (여행자2를 바라보며 자신의 말을 연결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아무 반응 없자 당황한다) 왜 이어서 말을 안 하는 거야? 내가 방금 에너지를 보냈잖아!
여행자2
무슨 소리야 나야말로 에너지를 보냈는데 네가 무시한 거잖아!
여행자1, 2
(동시에) 이런 젠장! 연결이 끊어졌군!
여행자1
이 우주선은 우리 우주선도 아닌데 왜 연결이 끊어진 거지?
여행자2
우리 우주선이 아니니까 강제로 연결이 끊긴 거지. 바보 같은 소리를 하네.
여행자1
누구보고 멍충이래! 우리는 지적 수준이 똑같은 지성체인 거 몰라? 연결이 끊기더니 지적 활동의 끈도 끊겼나 보네. 우리와 기술 수준은 비슷하지만 다른 종족일 거야. 바닥에 이 모래를 봐. 벽면을 일렁일렁거리면서 환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만져 보면 모래야. 여기는 샌드박스야.
이 정도 고도의 기술이 적용된 샌드박스는 우리 행성에서는 의료용, 치료용으로만 쓰는데. 우리를 납치해서 무슨 치료를 하려는 거지?
여행자2
그럴 리 없어. 우리는 완벽하게 건전하고 건강한 상태야. 출발 직전에 종합적으로 검진을 했잖아.
여행자1
세상에 완벽하게 건강한 상태가 어디 있어?
여행자2
왜 없어? 우리가 그런 상태였지.
여행자1, 2
(동시에) 지금은 아니지만, 어? 설마(다시 동시에)
여행자1
아 연결된 줄 알았네. 하긴 동시에 감탄사나 중얼거리는 건 비효율적인데 이런 상태가 적절 연결일 리가.
여행자2
설마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 건가 아닐 거야.
여행자1
맞을 거야. 우린 완전히 단절됐어.
여행자2의 목소리를 듣고 대답이라도 하듯이 복도의 불빛이 꺼진다. 짙은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만 점차 거칠어진다.
무대 암전.

2막 2장 여행자의 진짜 이름

아직도 좁은 복도를 작은 손전등에 의지해서 걷고 있는 여행자1과 여행자2. 여행자1은 탈진했는지 여행자2에게 부축을 받고 있다. 여행자1이 바닥에 주저앉아서 버틴다.
여행자2
좀 더 힘을 내. 내가 옆에 있잖아.
여행자1
옆에 있으면 뭐해 연결이 끊어졌는데! 이어지지 못했는데 옆에 있는 게 무슨 소용이야!
여행자2
소용이 없다니! 말이 심하네!
여행자1
알잖아… 나는 에너지 소모가 빠르고 충전도 느린 쪽인 걸. 난 다른 보조체 없이는 오래 못 버텨. 난 여기까지인 거야. 나는 그냥 두고 너라도 탈출해. (고개를 돌리고 드러눕는다)
여행자2
아니야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세우려고 잡아끈다) 단절되었다고 아무 의미 없고 힘도 없는 게 아니야. 내가 옆에 있잖아. 나는 너였고 너는 나였잖아. 우리는 우리였잖아.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의 기억과 감정이 남아 있어. 연결이란 게 꼭 텔레파시로만 가능한 게 아니야. (여행자1의 어깨를 껴안으며) 이렇게 같이 붙어있으면서 옆에 계속 있을게. 니가 내 보조체인 건 내 운명이고 내가 네 옆에 있는 건 내 운명이야. (여행자1의 옷 사이에 손을 넣고 천천히 쓰다듬는다) 몸의 감각으로 에너지를 약간은 공유할 수 있어.
여행자1
테뉴아… 나는 이제 에티엔으로 있기 힘들어. 네가 테뉴아여서 내가 에티엔일 수 있는 건데. 자아를 혼자 책임지는 건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더 무겁고 에너지 소모가 심해. 갈수록 두려워져. 자아는 뇌의 에너지를 너무 많이 잡아먹는 괴물이야.
여행자2
아니야. 괴물이 아니라 네 공포가 만들어낸 망상이야. 그러지 말고 우리가 함께 관찰하고 기록했던 신비하고 한심한 지성체들에 대해 떠올려봐. 삼중성계에 갔을 때 발견한 붉은색 테트라족 기억나? 네가 거기에서는 잘생기고 좋은 유전자를 가진 외모라 납치당할 뻔했잖아. 하필 그 시기가 재생산 주기와 겹쳐지는 바람에. 그래서 우리 둘이 테트라족을 피해서 숲으로 도망쳤다가 거대한 황금 나무를 만났지. 나무의 끝이 대기권에 맞닿아 있어서 나무를 이용해서 행성을 탈출했잖아!
여행자1
나무가 아니라 버섯이겠지.
여행자2
그래 버섯이었어.
여행자1
아니야 그건 그냥 나무였어. 아무 생각 없이 내가 하는 말에 긍정하지마.
여행자2
대답을 좋게 해줘도 지랄이야! 그리고 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어때서!
여행자1
지랄이라니. 너 요즘. 갈수록. 지구인처럼 말한다.
여행자2
지구인이라니. 말이 심하네.
여행자1
너는 몰라. 너처럼 에너지가 많은 쌍성계 지성체들은 이 기분을 알 수 없어. 이건 차라리 지구인들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거야. 지구인들은 어떻게 이런 기분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항상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거지? 어떻게 견디는 거지? 지구인들은 정말 불쌍하고 외롭고 지독한 종족이었구나.
여행자2
지금은 지구인들 걱정할 때가 아니야. 네 정신 에너지를 아껴야지.
여행자1
이번 탐사 보고서는 문제없겠어. 쓸 이야기가 너무 많아.
여행자2
보고서 따위는 걱정하지 말라니까.
여행자1
걱정하는 거 아니고. 소리 좀. 지르지 마. 머리 아파…
여행자2
눈을 감지 마. 눈을 감으면 몸에서 힘이 빠지고 몸에서 힘을 빼면 에너지가 흩어지고 에너지가 흩어지면… 여하간 눈은 감지마.
여행자2가 여행자1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어깨를 떨구고 몸을 떤다. 손전등의 배터리가 다 떨어졌는지 손전등의 불빛도 사라진다.
무대 암전.

3막 1장 여행의 끝

따뜻한 백색 조명이 가득 차 있는 방에 하얀 천으로 덮여 있는 앙상한 철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는 문수와 소피아, 그리고 여행자1, 2.
여행자2가 먼저 깨어난다. 겁에 질려 주위를 둘러보는데 여행자1이 바로 옆에 누워있는 걸 발견하고 안도한다. 침상을 옮겨서 옆에 눕는다.
문수와 소피아도 거의 동시에 깨어나 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서 침상에 앉는다. 서로를 발견하고 안도하고 이게 무슨 일이냐고 표정으로 묻고 있다. 이때 다가오는 응급실 담당의.
의사
이제 깨어나셨네요. 다들 마약성분이 있는 환각제가 포함된 술을 마시고 기절해서 여기까지 실려 오셨어요. 중독증상이 일어날 정도의 농도는 아니었지만 일단 마약성분이라 경찰 조사가 끝날 때까지 당분간 병원에서 대기하셔야 합니다. 지금 맞고 계신 건 그냥 수액 주사예요. 어지럽거나 다른 증상 느껴지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종종 걸음으로 사라진다)
여행자2
(여행자1 흔들며) 풀려났어! 일어나봐!
여행자1
(깨어나서 몸을 반쯤 일으켜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연결됐어? (여행자2가 여행자1을 얼싸안는다)
여행자1
(안고 있는 팔을 풀며) 앞으로는 약물의 충격 없이도 연결을 주기적으로 꺼놓는 연습을 해야겠어. 이대로는 탐사를 계속하기에 위험이 너무 크고 에너지가 강한 쪽에 의존하는 게 습관이 되어서 내 자아 에너지장 자체가 너무 약해졌어.
여행자2
연결이 끊길 일이 왜 또 있겠어? 왜 그런 소리를 해! (오히려 자신이 더 불안한 듯 다시 여행자1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앞으로는 지상 임무를 안 맡으면 되지!
여행자1
피곤해 좀 더 누울래. (여행자2의 품에서 빠져나와 침상에 등을 돌린 채 눕는다.)
여행자2는 불안한 듯 여행자1의 등에 몸을 바짝 대고 같은 침상에 눕는다.
여행자1
테뉴아.
여행자2
안 좁아.
소피아
(여행자2를 힐긋 보더니 문수 쪽으로 몸을 틀어서 침상에 걸터앉는다) 역시 진짜 환영은 아니고 환각 속 아니 꿈속에 나타난 환영이었네. 아니 이게 도대체 뭔 말이야. 환각 속 환영이라니. 스시 속에 든 초밥도 아니고.
문수
칵테일 맛이 좀 이상하긴 했어요. 역시 세상에 공짜란 없다더니. 공짜 칵테일 따위를 먹는 게 아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 바텐더 아저씨 이상한 질문을 하고 눈빛도 이상했어.
소피아
오타쿠들은 원래 항상 이상하잖아! 이상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이니까 이상해도 별로 안 이상해 보였던 거지. 그래도 좀 더 의심을 했어야 했는데…
문수
작가님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 소피아 수녀님…
소피아
그냥 소피아라고 불러도 되는데…?
이때 푸른 조명이 은은하게 깔리며 바텐더 쿼키의 목소리가 들린다.
바텐더 쿼키
(목소리) 이 푸른색 칵테일 여기 아지랑이처럼 올라오는 연기에 집중해보세요. 저기 언덕 너머로 아지랑이가 올라오고 커다란 은빛 접시가 내려오죠. 처음에는 두려움을 느껴요. 하지만 이내 친절하고 무해한 존재란 걸 그리고 위대한 존재란 걸, 왠지 모르게 마음이 따스해지면서 깨닫죠.
코러스1, 2, 3
(목소리) 우우~ 스페이스후프에서는 누구나 친구! 누구나 이방인! 서로의 과거는 묻지 않네. 과거는 누구나 어둡고 야비하고 슬프니까
바텐더 쿼키
(목소리) 그리고 그 존재들의 뒤를 따라서 시야가 하얗게 차단되는 강렬한 빛 속으로 빨려들어 갑니다.
소피아
(덜컥 겁이 난다) 약 효과가 남은 건가? 그 바텐더 목소리가 울리는 거 같아. 아닌가 나만 들리는 건가? 내가 드디어 또 미쳤나?
문수
아니에요. 안 미쳤어요. 약 효과가 남은 게 맞을 거예요. 나도 방금 들렸거든요.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다수가(여행자1, 2에게 시선을 던진다) 동시에 같은 환영과 환청을 들을 수 있는 약이 있는가 봐요. 신기하긴 하네요. 어쩐지 기분이 안 나쁜 납치였어요. 그 바텐더인 척하는 매드사이언티스트 덕분에 과거의 트라우마를 돌아보는 효과도 봤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지.
소피아
효과는 무슨 효과!
문수
내 트라우마에는 효과가 있으니까 있다고 하는 거죠. 수녀님 거는 모르겠지만.
소피아
뭐 나도 트라우마…까지는 아니라도 여러 가지 깨닫기는 했지. 그래도 그런 변태 약쟁이한테 이상한 약물 실험 대상이 될 필요까지는 없었어. 그런 종류의 진실은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진실들이니까. 그런 사건을!
문수
무슨 사건이요?
소피아
아니 내 말은… 내가 남자한테 욕정이 없는 게 정신이 정결해서가 아니라
문수
여자를 욕망한다든가 그냥 다른 방향의 욕정 덩어리였던 거라든가. 그런 거요?
소피아
그래!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을 어떻게 평생 모른 척하고 살아가겠어? 그래서 쌍성계의 선녀보살 아니 문수 씨는 그 사람을 찾아갈 거예요? 납치범이잖아! 외계인이 아니라 인간이었고! 인간이 한 짓인 걸 알았으니 잡아다가 속세의 법으로 처단해야지! 나 증인으로 설 수 있어!
문수
무슨 증인이요? 뭘 어떻게 증명할 건데요? 우리 둘 다 이상한 약을 먹고 이상한 꿈을 같이 꿨을 뿐이잖아요.
소피아
아니 내가 직접 본 네 행동과 감정 그런 것들은 다 진짜였잖아.
문수
그런 식이면 내가 그동안 읽은 소설들도 다 진짜겠죠. 스페이스후프도 진짜고. 내 마음속에서 진짜처럼 느껴졌으니까.
소피아
그래 다 진짜야. 스페이스후프도 진짜고 외계인도 진짜고 우리가 겪은 고통과 환각 그 모든 게 진짜야.
문수
그 모든 게 다 진짜라니 더 끔찍하고 무섭네요.
소피아
스페이스후프 대원에게 공포란 없어. 포기도 없지.
문수
공포는 있어요.
소피아
두려움은 진실을 발견한 뒤 만나는 경이감과 구분되지 않을 때가 많은 법이지.
문수
시즌2 13화 피날레에서 과학장교 찬드라가 한 말이죠.
문수
(스페이스후프의 엔딩 크레딧 나레이션을 먼저 암송하기 시작한다) 스페이스후프 대원은 낯선 문명이나 행성에 혼자 남겨졌을 때 두려움을 느낀다. 두려움을 느끼는 건 인류의 한 개체로서 정상적인 반응이고 생존을 위한 방어기제다. 그러나 두려움은 언젠가 정복되기 위해 존재한다. 정복을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모선과 혹은 근처 본부와의 연결을 위해 통신선을 열어놓는 것이다.
소피아
(나머지 문구를 암송한다) 그리고 대원은 사령부에서 새로운 지령과 구조선이 올 때까지 대기하라.
소피아가 침상에서 내려오자 문수도 따라서 내려온다. 서로 마주보고 계속 암송한다.
문수
대기하며 생명유지장치를 작동시켜라. 제대로 작동하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하라.
소피아
생명 유지에 아무 이상이 없다면 일어선다. 일어서서 앞으로 걸어가 본다.
문수
계속 걷는다. 다음 지령이 올 때까지 통신선을 개방해놓고
소피아
계속 앞으로 걷는다.
무대 암전된다.

3막 2장 다시 하나가 되어

우우웅거리는 비행체가 출발하는 소리가 먼 곳에서 아련하게 들린다. 어둠 속에서 쌍성계의 여행자들이 대화 소리가 들린다.
여행자2
잠든 거야 에티엔?
여행자1
응. 혼자 있고 싶으니까. 연결 좀 끊어줘.
여행자2
그래 네가 굳이 혼자 있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어차피 냉동수면에 빠질 거니까 연결을 끊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응 그래 그냥 끊을게. 아공간중계장에 도착할 때 깨울게. 이번 여행은 정말 여러 가지 일이 있었어. 그렇지? 에티엔? (여행자1은 대답이 없다. 적막이 흐른다) 그냥 자는 거지? 그냥 물어봤어…
무대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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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경

김해경
SF와 서사예술을 사랑하는 미디어오닥구, 트위터 @erenakim4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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