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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족충만

이다은

제225호

2022.11.10

2022 [희곡]코너는 ‘다른 손(hands/guests)’, ‘다시 쓰기’, ‘자기만족충만’ 세 가지 주제로 진행됩니다.

‘자기만족충만’은 작가 스스로가 추구하는 사유 방식, 세계관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입니다. 만족스럽다고 느끼는 지점들을 충만하다고 느낄 때까지 끈질기게 탐구합니다. 오랫동안 고민해온 주제와 형식을 작품을 통해 관철시키는 작가중심적 작품들을 만납니다.

인물
정민 가람의 가족
가람 정민의 가족

거대한 건축물 안.
인파 속에서 둘은 동시에 서로를 알아본다.
가람
여기서 만나네.
정민
어떻게 알아봤어?
가람
보였어. 헷갈리지도 않았어. 오히려 왜 이제 찾았지, 싶었어.
정민
어떻게 지냈어. 어디서 지냈어.
가람
집에서 지냈지.
정민
갈 때마다 네가 없어서 다른 곳으로 간 줄 알았어.
마당에 잡초도 자랐고.
가람
일하느라 집에서 잠만 잤어. 집을 지키려면 집 밖으로 나가야만 하더라고.
그래서 엇갈렸나 봐. 짐 챙기러 왔었어?
정민
가끔. 물건을 놔두러 갔어.
가람
어쩐지 집이 좁아지더라. 천장에 손도 닿고.
정민
네가 너무 커진 거야. 원래 작았는데.
가람
우리야 늘 작았잖아.
정민
(웃으며) 새끼손가락만 했지.
가람
(웃으며) 응. 거대한 새끼손가락만 했지.
정민
집이 많이 낡았던데. 대문도 잘 안 열리고.
가람
요즘 내가 수리하고 있어. 대문, 울타리, 주방, 전등, 화장실.
하나를 고치면 둘이 망가져. 여기를 메우면 저기가 새고. 늙어가는 것 같아.
정민
왜 안 떠났어? 창틀에서 마른 거미 사체를 발견하고 안도했는데.
(사이) 아직도 기다려?
가람
어디에 있을까? 손.
정민
그러게. 눈에 안 띌 수가 없는데.
가람
바다에 있을 수도 있어. 포옹하면 가끔 짭짤한 냄새가 났거든.
손톱 밑에 가끔 흙이 껴있었으니까, 화석을 캐고 있을지도 몰라.
정민
사소한 것도 기억하는구나.
가람
어떻게 잊겠어. 그 손을.
정민
손.
가람
거대한 손.
정민
어렸을 때, 학교에서 부모님에 대한 시를 쓰라더라.
그러니까 아이들 모두 다 손에 대해서 쓰는 거야.
딱딱한 손, 물에 젖은 손, 굳은살이 배긴 손, 거친 손, 따뜻한 손.
나도 비유 없이 시를 쓰고 읽었지.
‘손은 나를 손안에서 재웁니다. 손가락이 나를 움켜쥘 때 따뜻합니다.’
모두 그렇게 손에 안겨서 잠드는 줄 알았어.
가람
나도 모두가 거대한 손에게서 자라는 줄 알았어.
나 생선 뼈가 목에 걸려서 고생했던 거 기억하지. 그래서 손이 탄산음료를 처음 줬잖아. 그 다음부터 손이 생선 뼈를 다 발라서 줬는데. 일부러 콜라를 마시고 싶어서 걸린 척했어. 그러면 캔 뚜껑 고리를 아주 세심하게 따서 한 잔 따라줬지. 식사가 끝나면 손가락으로 툭툭 등을 쳐서 화장실로 보냈어. 가기 싫어서 버티면 장난치듯 들어서 화장실로 데려다줬어. 양치하라고.
정민
그때 양치를 잘못 배워서 나 아직도 충치가 많잖아.
가람
손에 대해서 또 기억나?
정민
겨울날에 옷을 입을 때 소매가 말려 들어가잖아.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니까, 검지와 엄지로 아주 조심히 내 손을 잡았어.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소매를 꺼내줬지. 그 커다란 손으로 만졌는데 소매가 늘어나지도 않았어.
가람
종종 우리가 잘 때 손이 우리 손톱 발톱을 깎아줬잖아.
어느 날은 내가 밤에 일어나보니까, 그 작은 손톱깎이로 자기 손톱을 깎고 있더라고.
정민과 가람, 웃는다.
정민
농담이지?
가람
맞아. 이런 농담을 내가 어디 가서 하겠어.
정민
못하지.
가람
재밌다. 손 얘기하니까.
정민
다른 사람에게 말하긴 힘드니까.
가람
(사이) 나 다른 사람한테도 얘기한 적 있어.
정민
믿어?
가람
내가 진지해질수록 웃더라고. 처절해질수록 더 웃고.
오기가 생겨 만나는 사람마다 얘기했어.
정민
왜 말했어?
가람
안 돌아오니까. 좀 긴 외출을 하듯 나가버려서는.
정민
다들 그렇게 살아. 시를 낭송했던 애들이 벌써 상주 노릇을 해.
장례가 끝나면 형제들이 서먹한 얼굴로 사라진대. 어느샌가 집도 없어졌대.
손이 없어진 것처럼.
가람
손이 죽었다고 생각해?
정민
기다리지 않기를 바라.
짧은 침묵.
정민
우리 다른 이야기 하자.
가람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정민
어떻게 지냈어.
가람
문을 열어두고 집을 지켰어. 기다렸던 사람이 잠긴 문에 돌아갈까 봐.
벌레나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목줄을 끈 개도 들어왔지. 언젠가는 여름에 겨울 부츠를 신은 사람이 들어오더라고. 짝이 맞지 않는 신발을 신는 사람과 맨발로 걷는 사람도. 농담을 들려줬지. 농담인 척하는 진담을, 진담인 척하는 농담을. 농담으로 여겨 웃어놓고 뒤에선 진담의 가능성을 고민해주길 바라는 말을.
다들 찰나의 웃음처럼 빠져나갔어. 흘러나가거나, 새어나갔지.
정민
나는 다른 사람들과 있으면 손 얘기는 빼고 다 얘기할 수 있었어.
구멍 난 양말을 신지 않는 것처럼.
하지만 이야기엔 점점 빈틈이 생기고, 구멍이 커져 가.
일부러 신지 않았는데도 말이야.
그 구멍으로부터 늘 도망 다녔어.
가람
그건 비워놓아야 하는 틈도 아니고, 메워야 할 구멍도 아닌데.
그냥 손이 있었던 거야.
정민
하지만 다들 채워주려고 하잖아. 내 충치 치료를 해준 사람도 그랬어.
‘이건 치료해야 합니다. 내버려 두면 이 자리가 하나의 구멍이 될 것입니다.’
가람
치료했어?
정민
아.
정민, 입을 벌려 보여준다.
가람
잘 안 보여.
정민
안 보이면 치료가 잘 된 거야.
가람
계속 고쳐가면서 사는 거야?
정민
몸은 금방 망가져.
가람
손도 늙었을까?
정민
작은 동물일수록 일찍 죽는다는데, 손은 오래 살지 않을까?
가람
손이 사라지기 전 감촉 기억해?
손가락 마디가 주름지고, 까슬거렸어.
정민
손에 안겨있으면 피부가 딱딱했지. 손끝은 차가웠고. 손톱은 거칠었어.
가람
어떤 동물은 죽기 전에 사라진대. 그래서일까?
정민
사라지기 전에, 소리가 들렸거든. 또는 굉음. 또는. 비유할 수 없는 소리.
생각해보면, 손은 손목으로, 팔뚝으로, 어깨로, 가슴으로, 목으로 이어지잖아.
손에게도 입이 있었을지도 몰라.
그건 손의 목소리였을 거야.
가람
그래서 떠난 거야?
정민
처음엔 손의 얼굴을 찾으려고 했어.
집에서 멀어질수록 손의 얼굴이 무수히 생겨났어.
물건이 방에 가득 차듯. 어느새 쌓인 얼굴 속에서 손을 찾아낼 수 없었어.
그래서 오늘 다시 돌아가려고 했어.
가람
어떤 걸 찾아가려고?
정민
아니. 이제 기다리려고.
가람
우리는 돌아갈 수 없어. 이제 나도 떠나야 해.
가람, 주머니에서 미니어처 집을 꺼낸다.
가람
봐. 이게 집이야.
정민
이렇게 작아졌다고?
가람
떠나려고 나왔어.
농담으로든 진담으로든 내 말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
멀리 떨어져 보니 집이 작더라. 무서워져 결국 다시 돌아갔어.
가보니 이렇게 작아져 덩그러니 남아 있었어.
정민
(사이) 우리가 커진 걸지도 몰라.
정민, 미니어처 집을 건네받는다. 천천히 들어 올린다.
정민과 가람, 미니어처 집에 눈을 가까이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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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은

이다은
몸과 그 몸이 거주하는 세계와의 관계에 대해서 씁니다.
연극 <돼지의 딸> 극작, 연극 <우리는 내일도 같이 있을 것이다> 도움 참여.
dob68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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