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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가르는 힘과 백지를 뚫는 힘의 상관관계

쓰는 동안

황정은

제233호

2023.05.11

[쓰는 동안]에서는 읽고 쓸 때의 습관, 글쓰기의 원동력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 희곡 쓰기의 기쁨과 슬픔, 생활 속에서도 작가로 살아가는 방법 등을 주제로 극작가들의 에세이가 연재됩니다.

1. 글쓰기

글을 쓴다고 하면 간혹 듣는 질문이 있다. 어떻게 글을 쓰기 시작하셨어요. 이 말에 나는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모른다. 어떻게 쓰기 시작했지, 하고 생각하다가, 무심코 툭 내뱉는 말은 간단하다. 살려고요. 무심코 뱉어서인지, ‘살려고’라는 말의 무게 때문인지, 대부분 이 말을 듣는 사람의 표정은 눈은 그대로인데 입가만 웃는, 어색하지만 난감함 그 자체다. 그 표정을 빠르게 간파한 소심한 나는 내가 또 상대방을 무안하게 만들었구나 싶어 다른 대답을 찾아본다. 최대한 쏘 쿨한 어떠한 표정과 말투로, 그냥 뭐 그렇게 된 거죠 허허허… 라며 상대방이 느끼는 어색함을 무마해보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내 무덤을 파는 것 같은 기분은 어쩐지 기분만이 아닌 것이 대부분 확실하다.

그런데 사실이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살려고 시작한 게 맞다. 사실 나도 좀 시크하고 무언가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살려고’ 글을 쓴다는 말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 너무 삶에 매달리는 것 같고, 글에 매달리는 것 같으니까. 그러면 내 삶에도 내 글에도 너무 집착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으니까. 또 그렇게 쓴 글을 읽고 보는 누군가가 얼마나 부담스러울지 생각만 해도 부담스러우니까.

그런데. 말을 잘 지어낼 줄도, 말주변도 그다지 없는 나는, 과거 한 심사 인터뷰에서 내게 글을 어떻게 쓰기 시작했는지 묻는 질문에 그만 ‘살려고’라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 고백을 한 지 0.01초 만에 후회했지만 내 입은 내 후회와 상관없이 뭐라고뭐라고 계속 어떤 말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제발 그 입 다물라, 라고 뇌는 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인터뷰인데 마무리는 맺고 다물어야 하지 않겠냐며 내 입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급기야 내게 질문을 건넨, 오늘 처음 만난 상대방은 ‘삶에서 어떤 힘든 시기였나 보군요’라는 추임새를 넣기까지 했고, 나는 마치 오은영 선생님 앞에 선 금쪽이처럼 마음을 활짝 열고는 당신의 말이 맞다고, 내 삶의 어떤 시기에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또다시 나를 필요 이상으로 내보이고 있었다. 제발. 여기는 상담소가 아니라 인터뷰 장소야! 정신 차려! 너 정말 이렇게 인터뷰 와서 상담받을 거니? 하지만 사람을 믿지 않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사람을 심하게 믿어버리는 나는 이성의 끈을 놓은 채 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말들을 주절주절 떠벌이기 시작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후회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제발. 난 말을 못 한단 말이야. 게다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도 상대방이 조금만 공감해주면 그 사람을 완전히 신뢰한 채 내 속을 다 보여준단 말이야. 제발 내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저는 무장해제한 채 제 이야기를 모두 꺼내버리고 말거든요. 여기가 인터뷰 장소인지, 담소 장소인지 구분도 못 한 채로 말이죠.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스스로 책망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위로를 이내 다시 스스로에게 건네고 만다. 그래, 이런 성격으로 태어난 걸 어쩌겠어. 이게 너라는 사람으로 태어난 기회비용이다. 어쩔 수 없잖아. 셰익스피어가 그랬다잖아. 성격은 운명이다… 너의 삶은 너의 운명인 것이다. 그러니 받아들여 정은아.

말이 길었다. 어쨌거나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살기 위해서였다.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가 ‘살기 위해서’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기 위해 이렇게 긴말을 또 해버린 나…) 사방이 조여오는 듯한 삶의 어떤 시기에서 내 유일한 숨쉬기 비상구는 글이었다. 마치 인공호흡기를 달 듯, 하루의 시작을 글과 함께 시작하고 하루의 마무리도 글과 함께 맺었다. 백지를 쓰레기통 삼아 내 마음을 완전히 토해내고 비우고, 다시 토해내고 비우는 일상의 반복. 그 과정을 거치고 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희곡이라는 장르의 글쓰기를.

누군가가 백지에 등장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는 게 좋았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게 좋았고, 그 말들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하는 게 좋았다.

둥근 나무 테이블에 앞뒤로 나란히 놓인 안경과 물안경이 보인다. 앞쪽에 놓인 안경은 얇은 검은색 테로, 렌즈의 윗부분은 다소 평평하고 아랫부분은 둥근 타원형이다. 뒤쪽의 물안경은 투명한 두 개의 남색 렌즈에 노란색 스트립이 연결된 모양이다.
수영할 때 쓰는 안경과 글 쓸 때 쓰는 안경과의 상관관계

2. 수영하기

누군가가 내게 묻는다. 어떻게 수영을 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럼 나는 또 무심코 툭, 내뱉는다. 살려고요. 그럼 상대방은 묻는다. 물 무서워한다면서. 그럼 나는 말한다. 맞아요. 상대방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럼 나는 그냥 씩- 웃고 만다. 참고로 나는 아침 9시마다 주 5일 동안 수영을 한 지 n년 차다. 정확한 햇수를 말하지 않는 이유는 나도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래 했는데 아직도 그 정도밖에 안 돼? 라는 질문이 들어올까 봐…

여하튼. 인생에서 힘든 일들은 때가 되면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비데 아저씨처럼, 때가 되면 나를 방문한다. 아마 이때도 그때였던 것 같다. 글쓰기를 통해 나름의 어떤 시기들을 나만의 방법으로 잘 헤쳐 나갔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내 인생이 너무 평탄하지 않은지 체크하러 온 이상한 불행 전도사의 방문 시기가 나를 찾아왔고, 나는 이번에는 수영으로 그 시기를 헤쳐 나가기로 했다. 아니 헤엄쳐 나가기로 했다. 음파음파. 그런데 이런. 숨쉬기가 너무 안 돼 괴로웠다.

나를 이루는 환경이 완전히 변해버린 그 시기에,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이 완전히 변해버려서 일상을 지키는 어떤 작은 일도 할 수 없던 그 시기에, 내가 온 힘을 다해 붙든 한 가지 루틴은 수영이었다. 물이 무서워서 수영을 가는 길에 ‘제발 오늘도 수영장 물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세요’ 기도하며 물에 들어갔고, 수영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도 ‘오늘도 안전 수영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했다. 누군가는 기도까지 하며 수영을 할 일이냐고 했지만, 내게는 그럴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매일 기도로 수영장을 오고가며 어푸어푸 물에서 움직이는 기술을 배웠다.

자유롭고 싶었다. 땅에서 움직이는 것 말고, 물에서도 움직이고 싶었다. 직립보행으로 땅에서 걷는 것 말고, 수평의 스트림라인으로 자유롭게 물을 가르고 싶었다. 나는 왜 인간으로만 살 수 있는가, 라는 안타까운 질문을 품고, 고래나 상어, 아니면 가오리나 문어로도 살 수 있었다면 좀 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며, 당시의 나는 당시의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나를 상상했다.

내가 고작 인간이었기 때문일까. 물에서 나는 자유롭지 않았다. 물속에 들어가면 엄청난 물의 저항이 나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곤 했다. 수영은 처음이라 물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더더욱 몰랐던 나는 물과 싸우면서 25m를 힘겹게 겨우겨우 나아갔다. 내가 문어나 가오리였다면 이깟 물쯤이야 편안하게 내 집처럼 드나들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인간이었고, 인간 중에서도 비효율적인 스트로크 기술을 가진 나는 힘겹게 물을 가르며 나아가야 했다.

한번은 수영이 너무 힘들었기에, 스스로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 이 물은 백지다, 라고. 이 생각을 하고 나니 물에 더 들어가고 싶지 않았지만 한번 들어온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때부터 물은 내게 백지였다. 오른팔 스트로크에 단어 하나, 왼팔 스트로크에 또 다른 단어 하나. 여기서부터 저기를 왕복으로 오고 가면 나는 백지 속에 한 문장을 쓰는 것이다! 그렇게 이 시기를 헤쳐 나가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물속에서 스트로크와 발차기를 이어가다 보니, 내가 왜 물에서까지 글을 쓰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괴로움이 밀려왔다. 그러나 또 나는, 그래 이게 나인 걸 어쩌겠어, 라는 생각으로, 힘겨워도 이렇게 매일 수영을 하다 보면 언젠가 이 시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라고 굳게 믿었다.

3. 글쓰기와 수영의 상관관계

글쓰기와 수영. 내게 있어 이 둘의 상관관계는 내게 어떤 종류의 힘을 길러주었다는 데 있다. 삶의 엄청난 저항의 시기를 가르고 나가는 힘을 길러준 것들. 이 두 가지를 통해 나는 인생의 어떠한 시기들을 지나왔고, 그 시기에서 내가 버틸 수 있게 도와준 글과 수영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 여전히 물은 무겁고, 발차기는 안 되고, 스트로크는 물을 잡지 못하고, 스트림라인은 유지되지 않지만, 그래서 선생님으로부터 매일매일 지적을 받고, 그래서 어떤 때는 수영 같은 거 때려치울까 하는 마음으로 소심한 일탈로 결석을 하지만, 그래도 계속하고 있다.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속하는 게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정신 승리의 마음으로.

매일 스트로크를 하는 만큼 왕복하는 거리가 늘어나듯,
매일 글을 쓰다 보면 관객과 만날 수 있는 날도 늘어나겠지.
그렇겠지.
제발 그러길.
정말 그럴까?
흠…

오늘도 질문과 생각의 반복이다.
내일 아침에도 수영을 가야겠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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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

황정은
희곡은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하고 묘사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글을 씁니다.
hwangje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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