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넛
다른 손(hands/guests)⁺
이예본
제244호
2023.10.26
[희곡]코너에서는 2020년부터 ‘다른 손’ 희곡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인류세를 살아가는 우리가 읽고 써야 할 희곡들을 싣습니다. 올해는 ‘+’가 더해진 ‘다른 손⁺의 희곡 쓰기’를 선보입니다. ‘다른 손’의 주제적 카테고리 안과 밖에서 쓰여진 새로운 작품들을 만납니다.
- 등장인물
- 완
케이
도넛
- 무대
-
완의 집이 되기도, 케이의 방이 되기도 한다.
식탁과 소파, 침대를 유동적으로 사용한다.
고정된 소품과 장치는 없다.
완의 집
완, 케이의 품에 안겨있다.
- 완
- 너는 안 돼. 네가 도넛이면 안 돼….
- 케이
- 나 여기 있어.
- 완
- 정말?
- 케이
- 응. 너랑 같이.
케이, 완을 세게 끌어안는다.
완, 한참 동안 케이의 팔 곳곳을 깨문다.
- 완
- 찾았다.
- 케이
- 이제 나로 보여?
- 완
- 네가 영영 도넛이 되어버리는 줄 알았어.
- 케이
- 그럴 리가. 언제든 찾아냈을걸.
도넛, 완과 케이를 바라본다.
케이에게는 도넛이 보이지 않는다.
- 도넛
- 보기 좋아.
- 완
- 저리 가.
- 케이
- 좀 진정됐어?
완, 고개를 끄덕인다.
케이, 완의 팔을 여전히 꼭 잡은 채
- 케이
- 그럼 다시 얘기해줘. 아까 말한 거, 도넛.
- 완
- 뇌가 도넛이 되어가고 있대. 정확히 말하면 뇌가 세상을 도넛으로 만들고 있다고.
- 케이
- 도넛이 돼? 어떻게?
- 완
- 밝혀진 게 많이 없어서, 그냥 시간을 믿어보래.
- 도넛
- 잘 알고 있네.
- 완
- 언제 어디서 도넛이 보일지 아무도 몰라. 먹어봐야만 도넛인지 아닌지 알 수 있어.
- 케이
- 환각 같은 거야?
- 완
- 다른 것 같아.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원래 있던 걸 도넛으로 보는 거니까. 베어 물 때마다 뇌가 새로 배우게 된대. 도넛인지 아닌지.
- 케이
- 그러다 삼켜버리면 어떡해.
- 완
- 씹어보되 삼키지는 않기. 병원에서도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어.
- 케이
- 촉감이나 냄새로 알 수는 없는 거야?
- 완
- 나한텐 세상 모든 게 이미 도넛이거나 도넛이 되기 직전의 상태야. 먹기 전엔 분간이 안 돼. 온갖 모습으로…. (도넛을 바라보며) 나랑 닮은 도넛도 있어. 진짜 사람 같아. 숨 쉬고, 움직이고, 웃기도 해.
완과 도넛, 눈이 마주친다.
도넛, 완을 향해 웃는다.
- 케이
- 사람?
- 완
- (도넛의 시선을 피하며) 아니야.
- 케이
- 미안해. 내가 같이 갔어야 했는데.
- 완
- 네 잘못 아닌 거 알잖아.
- 케이
- 내가 널 혼자 두지 않았으면.
- 완
- 똑같았을 거야. 특히 나한테는 그런 게 필요했어. 세상에서 완벽하게 동떨어질 수 있는 방법. 몇 걸음이면 갈 수 있는 무대 위에서 전혀 다른 세상이 벌어질 때만큼은 음식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니까.
완의 회상이 시작된다.
- 완
- 그런데 극장 안에서 냄새가 났어. 기름을 가득 머금은, 갓 튀긴 도넛 냄새? 고소하고 기름진 향이 극장 안에 진동을 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시작할 때까지 냄새가 가시지를 않았어. 더 지독해지기만 하고. 이상했지, 누가 극장에서 도넛을 먹겠어. 영화관 팝콘도 아니고. 참을 수가 없어서 코를 부여잡고 있는데 ….
도넛, 천천히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간다.
완의 시선 끝에 도넛이 있다.
- 완
- 햇빛이 땅굴을 비추는 바로 그 장면에, 태양이 있어야 하는 그곳에 거대한 도넛이 있는 거야. 완벽한 구를 그리는 도넛이. 도넛이 내려왔어.
완, 도넛에게로 다가간다.
- 완
- 믿겨져? 천장에서 도넛이 내려왔다니까. 그을린 곳 없이 매끈한 표면에 설탕이 골고루 묻어 있어.
무대 중앙에 도착한 완, 도넛을 만지고 쓰다듬는다.
- 도넛
- 나야.
- 완
- 어떻게 이렇게 탐스러울 수 있지. 크림이 들어 있나 봐. 푹신하고 촉촉한 중심을 베어 물었어. 있는 힘껏 입을 벌려서 한가득.
완, 도넛의 한가운데를 베어 문다.
- 완
- 먹어보니까 알겠더라. 이건 도넛이 아니야. 거대한 스티로폼이지.
- 도넛
- (장난스럽게) 좀 아팠어.
- 완
- 페인트 냄새와 마카 냄새 때문에 구역질이 나. 밑에서는 안내원들이 올라오고 관객들은 하나같이 핸드폰을 꺼내 들어. 한두 개가 아닐걸. 날 알아보면 어떡하지?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영상을 본 사람들이.
- 케이
- 숨 쉬어. 진정해.
- 완
- 나를 보고 소리 질렀어.
- 케이
- (완과 눈을 맞추며) 내가 너랑 같이 있잖아.
도넛, 완과 케이 사이를 비집고 앉는다.
- 도넛
- 그래도 재밌었지?
- 케이
- (쇼핑백을 꺼내며) 이거라도 먹자. 이건 도넛 아니야.
- 완
- 삼키기 싫어.
- 케이
- 나으려면 잘 먹어야지.
- 도넛
- 아무것도 모르면서. 얘가 이젠 사랑까지 굶기네.
- 완
- (도넛을 밀어내며) 시끄러워.
케이, 작은 포장용기를 완에게 건넨다.
- 케이
- 괜찮을 거야. 부탁해.
- 도넛
- 지독하긴.
- 완
- (도넛을 향해) 왜 항상 자신이 주는 음식은 약이라고 생각할까? 엄마나, 애인이나.
- 도넛
- 그게 그들의 사랑이거든.
완, 마지못해 받은 음식을 입에 넣고 아주 느리게 씹는다.
- 케이
- 어때?
- 완
- 먹을 만해.
- 도넛
- (완을 관찰하며) 음식이 식도로 넘어가는 그 감각에 집중해봐. 묵직하고 기름진 찌꺼기들을. 네가 원한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선택해야 해. 그게 너의 몸을 이루도록 내버려 둘지 아니면,
- 완
- 잠깐….
완, 입을 부여잡고 무대 구석으로 달려간다.
케이, 완을 따라 나간다.
등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 도넛
- 이미 선택했네.
변기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완, 돌아온다.
- 완
- 변기에 처박힌 동안은 나 자신이 존재가 아니라 행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 도넛
- 나는 거대한 구토, 게워내는 것이 나의 전부다.
- 완
- 역류하는 식도와 콧구멍의 쓰라림 외에는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 칫솔을 집어넣을 땐 휘몰아치던 감정마저도 깨끗하게 사라지지.
- 도넛
-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으며 위장 어디에도 음식이 남아있지 않은 완벽한 무.
- 완
- 텅 비어 있어야만 해.
- 도넛
- 나는 계속 해내고 말 거야.
- 완
- 나는 계속….
사이.
- 완
- 해내고 말 거야.
케이, 화장실에서 돌아온다.
- 케이
- 괜찮아?
- 도넛
- 참 아름다워. 케이가 없다면 진작 포기했을 텐데 그렇게 굶주리면서도 지긋지긋하게 살아내. 이젠 네가 보답할 때도 되지 않았어?
완, 고개를 끄덕인다.
- 케이
- 미안해.
- 도넛
- 싹싹 긁어 먹어봐. 바닥이 훤히 보이게.
- 완
- 저걸 다?
- 도넛
- 분명히 기뻐할 거야.
완, 머뭇거리다 이내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다.
- 완
- 나 더 먹을 수 있어.
- 케이
- 그만해.
- 완
- 더 먹고 싶어. 다 먹을래. 빈 그릇을 보면 너도 기쁠 거야.
완, 삼키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케이, 빼앗으며
- 케이
- 나는 네가 나아지길 바라는 거야. 닥치는 대로 씹고 삼키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 완
- 알아. 그러고도 식탁에 앉는 게 이상하긴 하지. 그런데…. (도넛을 가리키며) 얘가 시켰어.
- 도넛
- 맞아. 내가 시켰어.
도넛, 여전히 케이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 케이
- 무슨 말이야?
- 완
- 이상해. 도넛이 계속해서 나타나. 그리고는 말을 걸어. 이걸 먹으면 네가 기뻐할 거야, 이 그릇을 비우면 내가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 케이
- 완아.
완과 도넛, 동시에 소리 내어 말한다.
- 완, 도넛
- 이걸 먹으면 네가 기뻐할 거야. 이 그릇을 비우면 내가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먹어, 그러니까 삼켜. 내가 지금 이걸 먹으면.
- 케이
- 완아.
완, 말과 움직임을 멈춘다.
- 케이
- (간절하게) 정신 차려.
완, 대답 없이 벌떡 일어난다.
케이의 얼굴을 향해 몸을 숙인다.
- 완
- 도넛이 또 있네.
완, 케이의 볼을 깨문다.
케이의 외마디 비명이 들린다.
사이.
케이, 멍하게 완을 바라본다.
- 케이
- 네가 많이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케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완의 침대, 도넛과 완이 나란히 앉아 있다.
- 도넛
- 케이는 무슨 맛이야?
- 완
- 끔찍해.
- 도넛
- 한때는 이게 가장 빠른 길인 줄 알았지. 그래서 선택한 거잖아.
- 완
- 선택이었나?
- 도넛
- 나름의 도약. 그래서 결국 꿈을 이뤘어?
- 완
- 아니.
- 도넛
- 충분히 비슷해졌잖아. 꿈꾸던 모습과.
- 완
- 너무 늦었어.
- 도넛
- 그런데도 멈추지 않네.
- 완
- 뭘?
- 도넛
- 늦은 걸 알면서도 계속하는 거. 먹지 않기, 게워내기.
- 완
- 내가 이룰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안 남은 것 같아.
- 도넛
- 네 곁에 남은 것도 나뿐이고.
완, 침대 위에 있는 쿠션과 이불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 도넛
- 봐. 온통 도넛이잖아.
- 완
- 케이가 했던 말을 기억해. 잔디밭을 뜯어 먹었던 날.
- 케이
- 몇 끼를 거른 뒤였어. 눈앞이 핑핑 도는데 며칠 전에 먹은 음식이 위에 남아있는 것 같았지. 그래서 나간 거야. 그 더운 날씨에 땀복까지 입고.
- 완
- 산책을 나갔대. 음식점도, 카페도, 편의점도 마주칠 일이 없는 가장 안전한 경로가 케이의 머릿속에 있었거든.
- 케이
- 나는 그 길을 벗어난 적이 없어. 그날도 마찬가지로 전환점을 지나 되돌아오는 길이었지. 물 마실 생각도 안 했어. 다시 무거워지는 건 아닐까 싶어서.
- 도넛
- 머리에 숫자만 들어있는 건 오히려 멍청해 보여.
케이, 책상 위로 올라간다.
- 완
- 그때 느껴진 거야. 케이는 그날을 기억할 때마다 이렇게 얘기해. 몸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다가 단숨에 사라졌다고. 팔과 다리가 조각조각 절단된 것 같았다고.
- 케이
- 무엇이든 당장 씹어 삼키라는 목소리가 들려.
- 도넛
- 텅 빈 몸이 지르는 소리였겠지.
- 케이
- 마침 누군가의 텃밭이 있었어, 나도 모르게 흙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케이, 책상 위에 올라앉은 채로 흥분한 듯 목소리가 커진다.
정신없이 무언가를 뽑아내고, 입에 집어넣는다.
- 완
- 사방에 널린 잎사귀들, 케이는 숨도 쉬지 않고 그걸 삼켰어. 씹을 때마다 터져 나오는 채즙이 속을 채웠지. 땅을 파고 또 솎아냈어. 더 큰 잎을 먹으려고. 그러다 문득 속이 쓰리더래.
- 케이
- 속이 쓰려. 그제야 정신이 들더라. 누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아서 주위를 둘러봤는데 사람 대신 어떤 안내판이 보이더라고.
완과 케이, 눈이 마주친다.
- 케이
- 잔디를 밟지 마시오. 라고 쓰여 있는 안내판이.
- 도넛
- 네가 밟은 게 잔디뿐일까.
- 완
- 나는 그 일이 내 기억처럼 생생해. 그래서 케이의 등을 보고도 붙잡을 수가 없어.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아니까.
- 케이
- 도망치고 싶어. 내가 무언가를 먹고 삼키고 소화시킨다는 게 믿겨지지 않아. 가끔은 내 장기가, 모든 게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나를 수치스럽게 해.
- 완
- 케이는 내 머리를 항상 손으로 쥐어.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까지 고무줄에 말려 뜯겨 나갈까 봐. 고꾸라져 있는 내내 등을 두드려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리해줬지.
- 도넛
- 케이 말고는 네 등을 두드려줄 사람이 없으니까.
- 케이
- 너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어. 널 따라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네 머리칼을 잡고 등을 두드릴 때, 변기에 남은 것들을 치울 때마다 나도. 나도 너처럼.
사이.
- 케이
- 우리가 마주 보고 밥을 먹는 날이 올까.
조명이 어두워진다.
완의 집, 소박한 식탁이 한 가운데 있다.
케이와 도넛이 차례대로 등장한다.
- 완
- 왔어?
도넛, 케이보다 앞서 걸어 나온다.
완의 맞은편에 앉는다.
활짝 웃는다.
-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