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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산책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보세요

쓰고 보니

김상훈

제249호

2024.01.25

[쓰고 보니]는 쓰는 동안 극작가의 몸을 통과해 간 것들을 기록합니다. 극을 쓴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실천을 동반하는지 그 흔적을 스스로 기록하고 지금의 극쓰기를 반추해보고자 합니다.

오타 정리1)

다마스커스칼 만드는 사람이나 털 고르는 원숭이의 시간을 좋아한다. 유튜브 때문에 와글한 머리를 잠재우는 정갈한 리듬과 몰입을 선망한다. 극작가의 일 중 그 시간과 가장 비슷한 시간이라고 한다면 오타 정리의 시간일 것이다.2) 그동안 희곡은 다른 것이 된다. 쓰는 동안엔 하나의 생물 같아서 만지지도 못했는데 쓰고 보니 칼이나 털처럼 두드리고 뽑고 자르고 당기고 누를 수 있게 된다. 그런 걸 좋아한다. 그래야 하나의 물질 같다.
실제로 오타 정리하는 동안 완전히 희곡의 내용이 바뀌기도 한다. 나의 경우엔 사이를 행갈이로 표기하는데 행갈이를 고민하다가 일이 커져서 장면이 날아가기도 한다. 어 미안 죽은 줄 알았다 푹 찔러도 별 소리 않길래. 자다가 죽은 글의 업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아, 이게, 죽었다 살았다 그런 차원의 분류가 아니구나, 느끼게 되고, 그런 걸 좋아한다. 그래서 오타 정리만으로 희곡을 완성할 수 없을까 궁리해보는데,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답니다 ^_^

직접 걷기

제가 보통 글을 쓰기 전에 걷습니다. 걷지 않으면 생각이 전진하질 않고 계속 맴돈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쓰기 전에 걷습니다. 사실 걸으면서 쓰기도 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걸으면서 생각한 걸 다 잊어버리기도 해서. 카톡에 메모하고, 귀찮으면 그냥 녹음해놓기도 합니다. 이 산책에는 규칙도 있습니다. 고정된 경로를 만들면 안 되고, 그날 자고 일어난 동네에서 해야 하고, 노래를 듣지 않거나 안 자극적인 것3)만 들어야 합니다. 물론 산책을 한다고 꼭 글을 쓰게 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산책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생각해보세요.★
아무튼 몸이 쓰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특히 희곡은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영상작업을 하는 친구가 만든 이미지보다 빌린 이미지가 언제나 유의미한 시대인 것 같다고 한 게 재밌었는데요, 그걸 연극에 놓고 생각해봤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뭘 빌려오든 그걸 나나 내 친구나 동료가 직접 몸으로 해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질 않아서. 오 이거 참 연극 너, 녀석, 심술꾸러기다, 그치만 그래서 참 좋아, 그런 생각이.
요즘 고민은, 아무래도 직접 살고 있지 않다는 기분 때문인데요. 모든 것에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더 많이 말도 안 되게 넓은 것에, 예를 들면, 내가 알지도 못하는 모든 생채기에도 책임, 연결? 연루? 된 기분. 같은 게 고민인데. 왜 그러냐면, 그러다보니까 내가 직접 연결된 거, 직접 책임이 있는 거, 연루된 게 아니라 찾아간 게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걸으면서는, 그렇지 않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걸으면서 쓰는 것, 걸으면서 만들고 상상해낸 것이, 저를 좀 살게 한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흰 종이 위에 검은색의 손 글씨. 12월 18일부터 1월 16일까지 산책한 경로가 날짜별로 그려져 있다. 날짜 옆에는 돌곶이, 동선동, 신대방, 보문동, 혜화 등 다양한 동네 이름이 쓰여 있다. 경로를 나타내는 선들은 뻗어나갔다가 돌아오면서 크게 하나의 구역을 만드는가 하면, 조금씩 다른 길로 좁은 구역을 여러 차례 왕복하기도 한다. 경로를 나타내는 선 밑에는 각 경로의 거리와 소요 시간이 적혀 있다. 거리는 6.2km에서 17.4km까지 다양하고, 소요 시간도 적게는 63분에서 많게는 214분까지 분포되어 있다.

누끼 따끼4)

구글맵에 산책은 다 기록되니까, 그냥 가져다 쓰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누끼도 못 따는 사람이라서 모든 기록을 직접 그리게 됐다.5) 이 이미지는 핸드폰 화면에 경로를 띄우고 종이를 대고 그린 것이다. 이걸 그리고 있는 모습을 어머니께 들켰는데 다행히 자초지종을 설명하긴 했지만 좀 근심이 더 커지신 것 같아 보여서 맘에 걸린다. 많이도 싸돌아다녔다는 코멘트가 있었고 대체 뭘 위해서 이렇게 싸돌아다녔던 거니 물으셨지만 쓰고 있는 걸 보여드리는 것도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았답니다.
쓰고 보니 127.5km 1,736분을 걸었다. 그게 얼마만큼의 결과를 산출해내는지 잘 말하기는 어렵다. 얼마나 많이 멈췄고 얼마나 빨리 뛰었고, 그런 게 또 기억이 나지는 않아서. 걸었던 날 쓴 글들을 읽어봤는데 딱히 많이 걸었다고 좋은 게 나오진 않았다. 1월 6일의 경우 말도 안 되게 많이 싸돌아다닌 날인데 이 정도면 사실 회피에 가깝기도 하다. 이날은 찾아보니 노래도 씨잼, 키라라, 우탱클랜, 봉제인간, fkj를 들었다. 사실 쓸 생각이 없었다고 할 수 있지. 이날 유독 한심한 글이 많았는데 부끄럽지만 한 꼭지를 공개한다.


스위스 사람들은 금 위에서 발가벗고 자는 취미가 있대요.

금 위에서?

응. 금괴. 알죠? 금괴를 쌓아놓고.

그걸 어떻게 알게 된 건데?

친구가 스위스에서 유학을 하는데 교수가 알려줬대.
교수는 포르투갈 사람이고요.

그런데 그걸 왜.

가만히 있으면 묘한 진동이 느껴진다고. 금괴에서.

천연, 바이브레이터, 같은 건가.

천연은 아니죠.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걸으면서 쓴 좋은 글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 글들은 나중에 극장에서 보여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해주신다니 감사합니다.

  1. 사실 교정 수준의 일을 하는데 그렇게 본격적인 것이 아니기도 하고 오타 정리라는 말이 더 좋아서 오타 정리라고 말한다. 아마 극작가는 대부분… 남들이 쓰는 걸 못 봐서 모르겠다.
  2. 나의 경우에는 다마스커스칼 만드는 사람이나 털을 정리하는 원숭이 유튜브를 틀고 오타 정리를 하곤 한다. 요즘 즐기는 영상은 https://www.youtube.com/watch?v=2kWEsuvaIio.
  3. 브라이언 이노나 히로시 요시무라 같은 걸 듣는데 요즘은 이 사람들도 왠지 자극적이라서… 추천 받습니다. sam95418@naver.com.
  4. 이렇게 발음하면 기분이 좀 좋아집니다.
  5. 빌릴 생각이었는데 만들게 돼서 이미지로서는 ‘유의미함’이 좀 떨어진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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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훈

김상훈
음이온과 상상만발극장에서 극 쓰고 만듭니다. 진심이고 싶어서 이걸 하는데 잘 되진 않습니다. 인스타 해킹당했는데 계속 쓰고 있습니다. @xangxanjo @ummeeeonn @imagineatre.comp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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