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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워서 글 쓰는 법

쓰고 보니

최세리

제252호

2024.04.25

[쓰고 보니]는 쓰는 동안 극작가의 몸을 통과해 간 것들을 기록합니다. 극을 쓴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실천을 동반하는지 그 흔적을 스스로 기록하고 지금의 극쓰기를 반추해보고자 합니다.

침대에, 바닥에 혹은 의자에 기대 눕는다. 할 일이 없을 때는 보통 누워있으므로 누우러 가는 과정은 필요치 않다. 그리고 떠올리는 수많은 생각들. 서사도 인물도 이름도 없이, 아직 말도 글도 되지 않은 것들. 오로지 생각 속에서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것들.

계속해서 떠오르는 생각 중에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은 말로 묘사해서 번역한다(시각적인 것에 취약하기 때문에 이미지나 느낌 같은 것은 잘 잊어버린다). 그리고 가장 크게 들리거나 보이는 것(문장 혹은 글자)을 골라내고 쓸데없는 것을 잘라내고 두 가지 말을 동시에 듣거나 반투명하게 두 개의 문장을 겹쳐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을 글로 적어내지는 않으면서. 아직 무엇도 되지 않은 것들을 계속해서 머릿속에서만 글과 말의 형태로 벼른다.

일단 문장이나 말을 만들어낸 뒤, 누워있으니 어느 순간 잠이 들고 깨어나서 또 누운 상태로 몇 가지 말을 골라내고, 누워있지 않을 때는 일상을 보낸다(밥을 먹거나 돈을 벌거나 희곡을 쓰거나 공연을 하는 순간들에는 구체적이고 생활과 밀접한, 익숙한 생각만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써내는 순간은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어떤 에너지가 갑자기 생기는 순간. 제대로 써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지금 써두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은 것들이.
그럴 때는 재빠르게 내가 쓰는지도 모르게 써낸다. 핸드폰이든 컴퓨터든 종이 쪼가리나 책 귀퉁이든 쓸 수 있다면 아무 데나 쓴다. 쓰는 도중에는 쓰고 있는 것을 읽지 않는다. 오타나 비문 같은 것이 있더라도 고치지 않고 쓰는 일이 끝날 때까지 쓴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읽어본다. 문장은 문장으로 두고 입으로 소리 내본다. 아직 말해지지 않은 글을 써야 하므로 말이 될 수 있는 글들을 골라낸다.

그러나 그렇게 말이 될 생각들만 골라 써놓고도 ‘애초에 생각은 전부 속으로 하는 말 아닌가?’하고 한 번 생각해 준다. 근데 막상 입으로 뱉으면 생각은 또 다르게 들리고 목소리와 말투와 몸 같은 건 마음대로 되지는 않아서 생각과는 많이 멀어진다.

그러면 누워서 다시 돌아가 본다. 생각들 사이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들. 글이나 말이 되지 못하고 사라진 것들.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들. 실체가 없더라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어떤 몸들.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들.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상상들. 상상은 일견 없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일 뿐이고 그것은 미래의 범주에 있고 미래는 언젠가는 현재가 될 수 있다고. 그러면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일일 뿐인가? 생각하지만 또 어느 기억들은 저 먼 곳에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니 과거는 여기로 불러일으켜지고 미래도 기억 속에 있고. 그렇다면 현재는 무엇이지? 말해지고 있는 것들.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던 적이 있었다. 침묵만이 나의 천성이고 생각과 말 사이에는 너무 큰 간극이 있고 말이 되는 동시에 생각은 전부 사라지는 것 같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일은 왜인지 사치처럼 느껴지고 몸을 움직이고 소리를 내는 일은 버거운 일 같아서.

그러나 그 생각들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억력을 기르는 것이 누워서 글을 쓰는 법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언젠가 그것이 구현될 수 있는 어떤 모르는 순간에 그것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므로. 계속해서 기억해야 한다. 생각의 형태로 계속해서 붙잡아 두어야 한다. 언젠가 우리에게 도착할 말들을 위해서.

물론 그렇게 골라낸 말들이 희곡의 말이 되는 것에는 또 다른 종류의 시간과 단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제 눕고 싶으므로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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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리

최세리
일단 살아있어 보기로 결심하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자주 쓴다. 기덧에서 주로 작업하며 최근에는 가상의 경계 없음을 믿고 있다.
cseri1209@gmail.com @cell2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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