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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것들

페미씨어터X래빗홀씨어터 <우리는 이 도시에 함께 도착했다>

송이원_연출가

제140호

2018.05.24

함께 살기 위해 그들은, 죽음이 도처에 널린 폐허로 발을 디뎠다.

공연을 보고 나오니 언젠가의 누군가가 문득 떠올랐다. 그때의 그 사람은 “조금만 참아야지”, “버텨야지” 또는 “괜찮아질 거야” 같은 말을 부적처럼 자주 내뱉으며 삶을 붙잡던 사람이었다. 당시, 삶은 버티고 참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의문을 가졌던 것 같다. 왜 어떤 이들에겐 삶이 현재의 것으로 충만하게 주어질 수 없는 것일까, 왜 어떤 이들에게 삶이란 저 미래의 어딘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인 양 ‘부재’하는 듯 보일까. 공연을 보고는 어쩐지 자연스레 그때의 그 사람을 떠올렸던 것 같다.

강화길 작가의 신춘문예 당선작 <방>을 원작으로 한 연극 <우리는 이 도시에 함께 도착했다>는 “유토피아를 꿈꾸기 위해 제 발로 디스토피아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역설”을 극한의 재난 상황 속에서, 소수자의 눈과 입을 빌려 말하고 보이는 작품이다. 하지만 작품 속 재난 후의 세계가 어쩐지 이 현실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 그 씁쓸함은 공연이 끝나고도 결코 가시지 않는 듯했다. 오늘날과 너무나도 닮아 있는 디스토피아를 무대 위에 그려낸 페미씨어터와 래빗홀씨어터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송이원
강화길 작가의 단편소설 <방(소설집 『괜찮은 사람』 수록)>을 무대화하여 올리셨는데 이 작품을 선택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윤혜숙
대학로에서 공연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일반적으로 기획자가 작품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 것 같아요. 큰 제작 극장이 아닌 이상 보통 기획자들은 홍보와 마케팅 쪽으로만 주로 업무를 맡으시고요. 저희 제작자 겸 기획자 나희경 PD는 여성과 퀴어 이슈에 관심이 많은데 이 이슈를 담은 작품들을 엄청 찾아다니셨더라고요. 소설도 읽고 영화도 보고 하시면서 연출들에게 제안을 하시던 중에 저에게 이 소설을 보여줬어요. 보고 너무 좋아서 하겠다고 했죠. 아는 연출가가 많을 텐데 제게 할 생각이 있냐고 물어봐 준 게 저는 고맙더라고요.
나희경
2017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에 퀴어 소재의 작품이 두 편 있다고 해서 읽어봤어요. 거기 강화길 작가의 작품도 데이트 폭력을 소재로 실려 있었는데, 그걸 읽고 강화길 작가님의 다른 작품들을 읽다가 이 <방>이란 소설도 읽게 됐어요. 딱 제가 보는 세상 같은 거예요. 재난이 일어나도 보호받지 못하는 것, 매일 통장 잔고를 확인해야 하는 것,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이죠. 분명 작품은 가상의 도시를 다루고 있는데 다큐멘터리 아닌 다큐멘터리 같았어요.
또 작년부터 페미니즘 관련 작품들을 기획하거나 겪어오면서 어떤 작품들은 자기 서사에 치중되어 있고, 또 어떤 작품들은 구호에 치중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꼭 구호가 있어야 페미니즘 연극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단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을 찾기도 어렵고, 성소수자가 등장하는 작품이면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불행하거나, 성소수자가 되는 과정을 설명하거나, 당사자성과 수난을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작품의 이야기만을 가지고 그 가치들을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작품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윤혜숙
저는 전 작품들에선 동화 같은 이야기들을 많이 했어요. 아름답고 따뜻한 이야기들을 주로 해왔고, 형식 쪽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작품들을 하다 보니 점점 내용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되더라고요. 작품이 하고 있는 이야기가 희경PD가 얘기한 것처럼 마음이 먹먹해진달까요. 이렇게 저에게 와닿는 작품을 찾기가 쉽지는 않더라고요. 또 소설에 디스토피아적이고 판타지적인 측면이 있잖아요. 연극적으로 벌여볼 수 있는 부분들이 있겠다는 호기심이 들어 선택하게 됐어요.

김원정신지원강혜련나희경

소설이 무대에 오르기까지

송이원
소설 텍스트를 무대로 가져오시며 많은 고민을 거치셨을 것 같아요. 가장 흥미로웠던 건, 소설은 ‘재인’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이 되는데, 무대에서는 두 배우분이 모두 ‘수연’이기도 했다가 모두 ‘재인’이기도 하고, 화자도 주체도 고정적이지 않아 참 묘했어요.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각색을 하시게 되었나요?
윤혜숙
연습 시작하기 전에 공연을 보러 갔다가 원정 언니를 만났어요. 그땐 많이 안 친하던 때라 원정 언니가 "연출님 각색 잘 되고 있어요?"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언니 각색 제가 안 하는데요?" 이랬더니 언니가 농담인 줄 알고 웃더라고요. "언니 농담 아니에요. 진짜 제가 안 할 거예요. 언니랑 혜련이가 하게 될 거예요." 이렇게 운을 띄웠죠. (웃음) 보통 소설 텍스트를 무대에 올리면 누군가는 각색본을 쓰고 연습을 시작하잖아요. 저희는 그냥 소설책을 한 권씩 집으로 배송해드리고, 단편집에 있는 소설들을 다 읽고 만난 상태에서 연습을 시작했어요.
강혜련
소설 속에 어떤 것들은 되게 디테일하게 묘사가 되어 있고 어떤 건 또 한 줄로 간결하게 끝나는 문장들도 있는데, 그 한 문장 한 문장을 가지고 하루종일 워크숍을 하기도 했어요. 어떻게 하면 이 문장을 말로 해버리지 않고 장면으로 만들까 싶어서요. 또 어떤 장면의 경우는 섬세한 묘사를 함축적인 행동으로 표현한 것도 있었고요. 연습실에서 계속 머리 돌리느라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과정이었어요.
김원정
소설을 읽을 땐 각자가 상상을 하게 되잖아요. 공연 또한 관객들이 느끼는 게 다 다를 거라고 생각해요. 텍스트로부터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처럼 우리 공연을 봤을 때도 여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같이 공유했어요. 그래서 주옥같은 문장들을 빼기가 아쉬웠지만 과감하게, 극화시키기 위해서 생략해 나가는 과정들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윤혜숙

윤혜숙
소설을 다룰 땐 화자에 대한 문제를 건드릴 수밖에 없어서 노래 가사, 뉴스기사, 동화 등으로 기존 텍스트의 시점을 바꿔 보는 워크숍들도 했어요. 또 소설을 어떤 순서로 배치할 건지 각자 자기 방식으로 배치를 해보기도 하고, 읽고 이야기 나누는 활동들을 많이 했었죠. 제일 마지막으로 했던 이야기가 결국 이걸 몇 인칭으로 이야기할 것인가였는데, 1인칭 시점을 3인칭으로 바꾸는 건 정말 많은 각색이 필요한 과정이더라고요. 소설에 있어서 내가 내 얘기를 하는지, 내가 남 얘기를 하는지가 제일 중요한 형식인데, 그걸 바꾸는 게 좀 두렵기도 했고요. 또 조연출 지원이가 해준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데, 소설 원작을 보면 처음에 ‘재인’이가 혼자 방안에 남아있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마지막에 또 혼자 방 안에 남아있게 되는 장면으로 끝을 맺어요. 그게 중요한 구조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재인’이의 시점을 잘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1인칭 시점의 화법을 유지하되 어떻게 다른 방법으로 말할 수 있을까, 여러 연습을 하면서 찾은 것 같아요.
강혜련
어느 날 연습 중에 연출이 “둘 다 ‘재인’으로 시작하면 어때?” 하고 제안을 해서 둘 다 ‘재인’이 되었던 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굳이 나누자면, 저는 사건이 벌어지는 시점에서 발화하고 있는 ‘재인’이고, 원정 언니는 마치 미래에서 ‘나’를 보는 듯한 시점이에요.
김원정
시공간을 분리한 거죠. 관객분들이 인물에 대해 헷갈려 하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그게 나중엔 중요치 않더라고요.
송이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배우의 입장에서 연기하시기에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보통 극 중에서 다른 역할을 동시에 맡을 때 막의 전환이라도 있기 마련인데, 대사를 하다가 바로 빠져나오시고 다시 들어가시고 하는 식이었잖아요.
김원정
그 과정이 좀 힘은 드는 게, 감정은 차오르고 있는데 그걸 털고 화자로서 다시 말을 하며 그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니까요. 또 ‘수연’과 ‘재인’ 각 인물의 감정선들이 있잖아요, 연습할 땐 극과 극이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몸이 굳어가는 ‘수연’은 자기가 체감하는 것이 있을 테고 ‘재인’은 그걸 바라보고 있어서 또 다른데, 제가 공연 과정에서 느낀 건, 이 둘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중엔 이 어려움이 무뎌진 건지, 이 이의 고통이나 저의 고통이나, 한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느끼는 게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송이원
말씀하신 것처럼 관객의 입장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정말 슬픈 이야기이고 어떻게 보면 끔찍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야기인데, 무대 위 인물들이 어떤 단절을 두니까 그 감정이 끝까지 가지 못해 공연 내내 먹먹함과 답답함이 가시질 않는 기분이었어요.

무대를 채우는 빛과 소리들, 그리고 사람들

송이원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글’이라는 건 독자를 텍스트 속으로 끌어들여 물리적인 공간을 닫아버리는 성격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독자 각자의 상상의 영역은 무한에 가깝지만요. 이에 비해 극장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몸보다 넓고, 갇혀 있다는 느낌보다는 열려 있다는 느낌이 든달까요. 그래서 연극에선 공간을 어떻게 ‘채우는’ 지가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텐데, 배우 두 분의 연기도 물론 흡인력이 있었지만, 빛과 소리로도 다양하게 채우셨던 것 같아요.
윤혜숙
음향 같은 경우는 큐가 워낙 많아 임서진 감독님도 고생을 많이 하셨을 테고, 오퍼레이팅을 한 지원이가 할 말이 많을 것 같아요.
신지원
저는 음향 큐가 이렇게 많은 작품을 처음 오퍼레이팅 해봤어요. 심심할 때 세어 보라고 농담하셔서 정말로 한 번 세어봤는데 큐만 208개더라고요. (강혜련: 정말? 무슨 뮤지컬이야?) 어쩌면 소리가 이 극을 훨씬 풍부하게 만든 것 같아요. 저는 이 작품이 재난을 다루기 때문에 굉장히 거대한 세계 같다고 느꼈었거든요. 이런 작품을 직접적인 시각물들보다는 빛과 음향으로 채워서 훨씬 더 상상력을 자아내 공연을 거대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송이원
빛도 여러모로 활용하신 것 같아요. 그림자를 사용하시기도 하고, 머리에 헤드 랜턴을 달기도 하셨고요.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장면에선 음향과 배우의 몸에 달린 움직이는 빛 때문에 정말 공간 안에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어요. 몸을 피하고 싶더라고요.
윤혜숙
제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게 기차 안이었는데, 소설을 다 읽고 바로 뒤집어서 메모를 한 게 있어요. 얼마 전에 다시 보니까 손전등, 헤드 랜턴 이런 것들이 메모가 되어 있더라고요. 소설이 전반적으로 어두운 이미지를 묘사하고 손전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다 보니 그게 인상적이었던 것 같아요.
극 후반부엔 손전등으로 ‘팀장’이라는 인물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원정 배우가 연습 중에 “이렇게 하면 어때?”하며 찾아낸 장면이에요. 이걸 계기로 다른 장면이 많이 풀린 것 같아요. 사실 비둘기 장면 같은 경우도 연습 중에 별의별 것을 다 했어요. 직접 몸으로 비둘기도 됐다가…. 저희가 큰 깨달음을 얻은 게, 시각은 불리한 점이 많다는 것이었어요. 비울수록 좋더라고요. (웃음) 집에 있는 각종 랜턴들을 모으고 여러 램프나 랜턴들을 주문해서 그 도구들을 어떻게 쓸까 연습하고 고민하다 보니 이런 장면들이 나오게 됐네요.
송이원
작은 물건들을 크게 키우셔서 많은 상상력을 자아내시는 것 같아요. 연출님께서는 2015년 작품 <작은문공장>에서 스타벅스, 맥도날드 등의 쇼핑백들로 거리와 건물들을 표현하셨잖아요. 그 표현에 심장이 녹는 느낌이었어요, (웃음) 이번에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게, 헤어스프레이와 화장품, 북엔드 등 일상 소품들의 그림자로 폐허의 도시를 표현하셨던 장면이에요.
윤혜숙
빛을 잘 활용해 보고 싶었고, 제작비가 워낙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돈이 안 드는 방향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저는 원래 그림자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빛이란 게 가장 돈 안 들이고 사이즈를 가장 크게 확대시키는 방법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빛과 그림자를 염두에 두고 처음엔 휴지 심 같은 재활용품들로 시작해서 배우들과 장면을 만들었어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지점이긴 한데, 이 표현이 극 전반이랑 좀 더 붙었으면 좋았을 텐데 작품에 크게 쓰이지 못한 것 같아 좀 아쉬워요.
강혜련
‘재인’의 집에 있을 법한 물건들이란 설정으로 시작을 했는데 어쩌다 번데기 통조림이랑 부대찌개에 들어가는 베이크드 빈 통조림이 섞이게 됐어요. (웃음) 이런 소품들이 화장품이랑 잘 안 맞는 것 같아서 하면서 점차 초콜릿 통, 치약, 손전등, 북엔드 등의 물건들로 좁혀지게 됐어요.
송이원
무대 위에 도구를 거의 안 두셨는데 그 중 선택을 하신 게 큐빅 박스와 검은 봉지였어요. 비닐봉지는 포스터에서도 중요한 이미지로 사용되었고요. 이 이미지는 어떻게 사용하시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나희경
저랑 연출님, 황가림 디자이너님, 이렇게 셋이서 포스터 회의를 했는데 가림씨가 가져온 이미지 소스들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검은 봉지가 작품 속 '타르'라는 것과 맞닿지 않을까 이야기가 나오게 됐어요. 제가 항상 포스터 할 때 얘기하는 건, 포스터는 작품 상징 안 해도 된다, 무조건 낚시다인데 (웃음) 이렇게 디자이너님이 상징을 만들어 오시고 연출님이 잘 풀어 주셨죠.
윤혜숙
가림 디자이너가 가져온 비닐봉지 이미지가 너무 좋아서 작품에도 실제로 쓰게 됐어요. 희경PD가 썼던 글 중에 "퇴근길에 비닐봉지 달랑달랑, 그 안에 딸기우유와 두부를 넣고 다니는 소소한 일상"이란 글이 있는데, 이렇게 봉지가 작품 속 ‘재인’과 ‘수연’이 꿈꾸는 일상일 수도 있을 테고, 또 한 편으론 ‘타르’로 연결되기도 하고요. 또 제가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가 "그들은 날지 못했다 만일 그들이 날 수 있었다면 진작 이 도시를 떠났을 것이다."인데, 그 말과 포스터 속에서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닐봉지가 마음에 와닿더라고요. 그래서 더 좋아하게 됐어요. 
송이원
미담이네요. 작품을 홍보하기 위해 찾은 이미지가 무대에서도 중요한 요소로 쓰였다는 게요. 작품 내외적으로 유연한 망들이 얽혀 상상력이 자극되는 듯해요.

가까스로 삶아 남은 사람들(조연출 신지원의 작업노트)

송이원
사실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찾는 건 함께 머물 수 있는 방이잖아요. 방이란 건 안정적으로 거주할 수 있는, 어쩌면 안정적으로 멈춰 있을 수 있는 공간인데, 이 멈춤 혹은 머무름을 위해 두 사람이 폐허 같은 무대 위를 계속 바삐 뛰어다니다가 결국 굳는 듯 멈추게 되는 게 참 역설적이고도 슬프더라고요. 각자 ‘재인’과 ‘수연’의 고되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이들의 삶으로부터 어떤 감상을 느끼셨는지 궁금해요.
신지원
‘복숭아’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아요. 작품을 준비하면서 이 도시의 배경이 어디일까 함께 조사를 하고 의견을 나누었어요. 후쿠시마에 딸기와 복숭아가 되게 유명한데, 작품 속의 도시가 폭발하는 재난과 원전의 재난이 겹쳐지더라고요. 그래서 복숭아를 먹고 싶다는 대사가 굉장히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장면인 것 같았어요. 둘의 친밀감도 확대되는 장면이고요.
김원정
저는 ‘팀장’이 돈을 세 배 더 주는 일을 시킨 다음 ‘재인’이에게 돈을 덜 줬잖아요. 그래서 ‘재인’이가 “남은 돈은요?” 했을 때 ‘팀장’이 그 봉투를 줬던 손을 잡고 그 손을 타고 올라가서 귓불을 만지는데(김원정 배우가 묘사하는 이 장면이 앞 대화에서 언급된 빛의 이동으로 표현된 ‘팀장’의 인물/손길), ‘재인’은 항상 보다 유약한 것 같았는데, 덤덤하게 ‘팀장’의 손을 내리면서 그를 지나치고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나는 수연이 보고 싶었다”라는 대사를 하잖아요. 저는 이들이 여기서 살기 위해 더 강해질 수밖에 없는, 그리고 더 단단해질 수밖에 없는 작중 현실이 참 슬프고 먹먹하더라고요.
강혜련
함께 나눴던 이야기 중에 기억에 남는 건, 이 작품이 '생존'에 대한 이야기고 이것이 잘 드러나게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마지막에 재인이가 수돗물을 마시는 게 단순한 죽음을 향해 가는 게 아니고, 이 둘은 함께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둘이기 때문에 어떤 선택이자 고투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런 이야기들을 했을 때 관객들이 지금 자신이 살고있는 삶을 사유할 수 있지 않을까, 감정이 터져서 해소가 되어버리는 식이 아니라, 관객들이 이 공연을 통해서 자기의 삶이나 지금의 일상들을 떠올려보게 되는 방향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아요.

윤혜숙
(작업 노트를 뒤지며) 혜련아 네가 이런 말을 했었어. "너가 아니면 나는 살 수 없다." 그리고 원정 언니는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 이건 지원이가 얘기한 건데, "이 도시에 함께 도착했지만 어디도 함께 출발할 수 없는 두 사람" 그리고 제가 했던 기록 중에 끝까지 가져왔던 말은 "존재의 고투"에요. 그래서 유난히 뛰어다니는 장면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여담으로 혜련 배우가 요즘 트레이닝 어플을 하는데, 공연을 할수록 점점 가뿐하게, 상체도 안 흔들리고 무슨 미군처럼 뛰는 거예요. 헉헉거려야 하는데…. 그래서 제가 트레이닝 그만해라….
강혜련
어느 날은 시체를 받는 장면에서 너무 가뿐하게 받아서 연출이 깨진다고, 좀 힘들게 받아 달라는 말도….
송이원
2주 동안의 짧지 않은 공연이다 보니 몸에 변화가 올 만도 하겠어요. 그러면 인터뷰도 슬슬 마무리할 겸, 2주간의 공연이 이번 주말이면 끝나는데, 관객분들을 직접 만나시면서는 어떠셨나요?
강혜련
저는 여기 와 주신 관객분들이 특별하다고 느꼈는데, 숨도 못 쉬고 보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을 할 때 관객들의 표정을 봤는데, ‘재인’이를 오롯이 같이 느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재미없게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하는 순간순간 60여 명의 ‘재인’이가 같이 있는 것 같아서 인사를 할 때도 확 배우로 풀어지지가 않더라고요. 이렇게 만난 게 저에게는 되게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 같아요.
나희경
평소에 연극을 하다 보면 공연 기간도 짧다 보니 사실 연극인 관객이 많잖아요. 그런데 이번 공연에는 연극과 뮤지컬을 많이 보시는 관객들이 많이 왔어요. 뭘까, 왜 그랬을까, 생각했을 때, 무대 위에서 내 이야기, 내 또래의 20~30대 여성의 이야기가 보고 싶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이제 어떤 연극들을 만들어야 할까를 고민하게 된 것 같아요.
윤혜숙
아, 마지막으로 ‘미아리고개예술극장’ 관계자분들께 정말로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저희가 여기서 마음 놓고 공연할 수 있도록 정말로 응원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보통 극장에 들어가면 방치되거나 감시를 당하잖아요. (웃음) 그런데 그게 아니라 정말로 식구처럼 챙겨 주신 게 정말 감사해요. 감사합니다.

- 일동 CCTV 보며 인사 -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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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원

송이원 연출가
‘丙 소사이어티’에서 글 쓰고 연출하는 사람.
eewon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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