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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와 한 발자국을

극단 종이로 만든 배 <권력에 맞서 진실을 외쳐라 ? 어둠 너머의 목소리>

송이원_연출가

제142호

2018.06.21

극장이나 카페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고 돌아와 그 대화들을 편집할 때면 텍스트라는 매체의 한계로 인해 종종 답답함을 느끼곤 한다. 현장의 분위기를, 또 인터뷰이의 진심과 그 ‘사이’들의 여운을 그대로 옮겨 전하고 싶은 마음은 수두룩하지만, 마음만큼 손(?)이 따라 주질 못해 결국은 문장 내 적절한 곳에 구두점을 찍거나, 괄호 안에 “웃음”두 글자를 넣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과연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 걸까?’ 하는 걱정과 함께. 연극이란 활동을 하며 끝없이 새로이 느끼게 되는 것인데, 사람의 ‘말’이란, 또 특히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닌 타자의 것일 경우, 무한에 가까운 세계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종종 생각해보곤 한다.
세계인권선언 70주년을 기념하여 상연된 ‘종이로 만든 배’의 <권력에 맞서 진실을 외쳐라 – 어둠 너머의 목소리>는 전 세계로부터 말들을 모아 –아니, 어쩌면 말들이라는 표현보다는 ‘목소리들’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무대에서 관객을 만나는 작품이다. ‘로버트 케네디 인권재단’의 대표이자 인권운동가 케리 케네디가 세계 35개국의 인권운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경험을 인터뷰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아리엘 도르프만이 이 증언들을 희곡화 하였다. 인권, 사람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하는, 사람됨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조건들이 침해당하는 현장을 겪어온 이들의 증언이니만큼 관객으로서 결코 가볍게 들을 수는 없는 말들이었다. 묵직하게 들려오는 이 한마디 한마디를 몸소 무대에 올리는 과정은 어땠을까. 극단 ‘종이로 만든 배’를 만났다.

경계를 잇는 목소리, 사람과 사람을 잇는 종이로 만든 배

(인터뷰를 시작하며 녹음 상태를 체크하는 과정에서 배우분들이 아름다운 화음으로 Joan Baez의 We Shall Overcome을 불러 주셨는데, 키보드로는 이들의 따뜻한 마음을 전달할 수 없음을 통감하며 해당 곡의 링크(https://youtu.be/RkNsEH1GD7Q)로나마 대체한다.)

송이원
아름다운 노래 정말 감사합니다. We Shall Overcome은 극 중에서도 여러 번 부르셨는데요, 이 곡은 원래 인권 운동이나 활동의 현장에서도 자주 불리는 노래인가요?
쭈야
네. 실제로 현장에서 많이 불리는 노래예요.
하일호
미국 사회에서는 베트남 반전 운동 때 특히 많이 불린 노래이고 흑인 인권운동의 현장에서도 불렸어요. 가만히 들어보면 가스펠 같기도 해요. '힘들게 지내고 있지만 이걸 이겨내자'라는 메시지를 담은 곡이고,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우린 승리하리라”로 번안되어 대학가에서 많이 불렸어요.
송이원
공연 전반적으로 음악이 많이 연주되고 불리었어요. 아코디언과 실로폰 또 바이올린을 연주하기도 하셨고, 육성으로도 화음을 만드시며 노래를 부르기도 하셨고요. 이게 극 초반부터 강조되던 "용기는 하나의 목소리에서 시작된다"라는 대사와도 맞닿는 것 같아요.
하일호
인권운동을 하기까지 한 마디, 또 한 발자국을 내딛기가 굉장히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해요. 또 이 사회의 피해자들과 희생자들이 자기의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과정도 굉장히 험난하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또 한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게 도와준 것이 노래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희곡을 처음 읽었을 때 한국 사회에서 소수자들, 가난한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들을 떠올리게 되었고요. 노래를 통해 ‘누군가 곁에 있다’, ‘함께 할 수 있다’는 마음을 전달할 수 있고, 그것이 다리가 되어서 연대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것이 확대된 경우가 악기 그리고 연주라고 생각해요. 악기와 연주 그리고 노래가 함께 할 때 조그마한 한 사람의 목소리, 한 사람의 발걸음이 보다 큰 움직임으로 나타날 수 있지 않을까, 위안을 줄 수 있고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순간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도로 공연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송이원
반면 모두 노래를 부르실 때 소외되어 함께 부르지 못하셨고 공연에서도 독재자의 모습을 한 악역을 맡으셨는데요, 활동가 역을 맡은 배우분들 사이에서 악역을 맡으시면서 힘든 건 없으셨나요?
손인수
활동가 역할을 맡은 배우분들 보다 저는 편했어요. 본연의 악…? 갖고 있는 악만 표출해내면 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은 힘드셨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저는 있는 그대로 해서…. (일동 웃음)
송이원
음악도 그렇고 여러 예술 활동들이 사회를 향해 발언하는 창구로 기능하고 있기도 한데요, 팸플릿을 읽으면서 '종이로 만든 배'라는 극단 이름에 대한 소개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이로 만든 배를 타고 거슬러 오른다는 표현이요.
하일호
이 이름은 제가 안치운 교수와 함께 유제니오 바르바의 『연극인류학 - 종이로 만든 배』라는 책을 번역하면서 알게 된 제목이에요. 책에 사람과 사람 사이는 섬과 같아서 그 사이를 오가는 수단으로서 ‘종이로 만든 배’라는 것을 상정하고 설명하는 대목이 나와요. 유약하지만, 그래서 친구들이 다들 놀려요. 종이로 만든 배는 가라앉는다고. 쇠로 만든 배나, 돈으로 만든 배로 바꾸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해요. 아무튼 유약한, 종이로 만든 배이지만 상상력으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며 그 안에 쌓인 역사를 돌아보자, 그런 취지의 내용이었어요. 그게 저에게는 연극이란 예술의 본질이에요. 자본주의와는 반대되는 인간적이고, 가내수공업적인 측면들이 느껴져서 이 이름을 따오게 됐어요. 예전에 개인적으로는 번역극을 많이 했는데 이 친구들과 만나면서는 사회에 대한 내용이 담긴 연극들을 하게 되었고 이후로도 이런 작업을 할 계획이에요.

하일호 쭈야 박경은 손인수

진실 또는 진심에 가닿기 위해

송이원
극단 소개에 또 연극이란 “몸으로 당대의 사람들과 만나는 행동”이란 구절이 있었는데, 얼핏 당연한 말 같을 수도 있지만 공연 내내 그게 느껴지더라고요. 극 초반에 언급되는 대사처럼 이 작업이 증언들을 계속해서 '통역'하는 작업인데, 대사의 “동시통역”이란 표현에서 연상되는 기계적인 느낌과는 달리 배우분들의 표정이 저는 참 감동적이었어요. 배우분들은 활동가들의 말을 통역하듯 또 하나의 증언을 하신 것일 텐데, 보는 내내 어떤 마음이셨을까 궁금하더라고요.
박경은
저는 개인적으로, 스스로 어둡고 끈끈한 흐름에 계속 말리는 상황이었어요. 이 인터뷰집을 봤을 때 너무 많은 사례를 접하면서 ‘이 악몽 같은 현실들이 진짜 일어났단 말이야?’ 하면서 몰려오는 거예요. 이 분들이 어땠을지를 솔직히 감당할 수가 없었어요. 한국 사회에 살면서 옆의 문제들에도 용기를 내지 못하는 상황들이 너무 많은데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굉장히 번민이 많았어요. 더 많이 초라해지고. 그래도 대본에 집중을 했죠. 연출님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너는 배우잖아. 배우의 역할을 생각해." 그리고 이분들이 사람들에게 정말로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가 뭘까 생각했을 때, 슬픔과 눈물이 아니고 '나는 이겨냈다. 당신들도 할 수 있다.'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고, 그걸 내 입을 통해서, 내 목소리를 통해서 알려야지 생각했어요. 그래서 강요할까봐 그게 가장 두려워요. 왜냐하면 그분들이 이 증언을 강요하길 바라진 않으실 것 같아요. 진심을 담아서 말씀하셨을 것 같은 거예요. 그런데 내가 조금 더 나아가 강요하게 되면, 진심을 과장해버리게 되면 이 분들의 마음에 다가가지 못할까봐, 조금씩 조금씩 만나려고 노력하는 마음으로 서고 있어요.
김보경
저희가 4월에 세월호 관련 공연을 했는데 그때 아이를 잃은 부모 역할을 맡았어요. 우리가 실제로 아이를 잃은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마음에 가닿을 수가 없잖아요, 그 진실에…. 그런데 하일호 연출님이 그런 얘기를 늘 하세요. ‘진심’에 가닿으려고 노력하는 거라고. 저는 이 극이 진심인 것을 연극으로 관객에게 보여드리는 거라고 생각해요. 실제 활동가들이 그 고통을 겪으면서 느꼈을 그 마음이 어땠는지,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 마음이 어땠는지, 누군가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공감하고 이랬던 마음들이요. 그 용기를 내었던 마음들을 표현하려고, 아니 표현이 아니라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쭈야
저는 '종이로 만든 배'의 정식 단원은 아니고 함께 연대해서 이번 연극을 올리는 ‘인권연극제’에서 활동하는 사람이에요. 연극도 하고 있지만 평화와 반군사주의 운동을 하고 있고, 심지어 연극을 만들 때도 배우의 역할이 아닌데 연출님께서 왜 나를 초대하셨을까 궁금했어요. 그런데 무대에 서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제가 활동을 할 때엔 사람들이 별로 관심을 갖지 않거든요. 전단지를 나눠주거나 집회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거나 무관심하고, 그냥 우리끼리만 경찰하고 싸우고 있는 것 같은 고립감이 있어요. 그래도 활동을 할 수 있는 건, 많지는 않지만 나와 이 운동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고, 우리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함께 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 힘을 받아서 계속하는 건데, 이 무대에서는 제가 오히려 연기를 하면서 위로와 지지, 응원, 선물을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요. 관객분들에게 이 자리는 힘드셨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만 여기 와서 처음 듣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고, 집에 가셔서 아니면 나가서 사람들과 밥을 먹으면서, 그 생각을 계속하고 검색도 해보고,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연기를 하고 있어요. 저는 이 연극 자체가 그냥 연극이 아니라 운동으로서의 연극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송이원
인권운동가들의 증언들을 바탕으로 한 이 독특한 형식의 희곡은 어떻게 접하게 되셨나요? 그리고 지금의 한국 사회에 이 말을 하고 싶다고 결정하신 계기도 궁금해요.
하일호
이 작품을 처음 소개해준 친구는 윤색을 맡은 김나연 작가예요. 한 5년 전이었나? 전태일 추모 연극제 각색 작가를 맡으면서 조계사 쪽 극장에서 공연을 하게 됐는데, 거기 기획팀 중 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희곡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는 그 원서를 저한테 보내줬어요. 제 친구랑 같이 번역하면서 읽어봤는데 굉장히 좋더라고요. 아리엘 도르프만이 워낙 대작가이고 <죽음과 소녀>에서도 고문과 관련된 희곡을 만들었지만, 이런 형식의 희곡을 만들었다는 게 굉장히 놀라웠고 이걸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우연찮게 작년에 초연을 하게 됐는데,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지나 새로운 정권이 집권을 하게 되면서 이 연극을 하게 되었어요. 예전에는 사회 전반적으로 반정부적이고 정치적인 이슈가 많았는데, 정권이 바뀌면서 이 사회에서 중요한 것이 과연 큰 문제들, 정부에 대한 것이거나 정치 테이블에 올려져 있는 이슈들뿐일까 생각이 들더라고요. 실제로 민주주의의 각론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세세한 인권분야, 평화 문제, 여성인권 문제, 퀴어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여러 문제가 많잖아요. 특히 노동 문제 같은 경우도 그렇고. 그런 문제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연극이 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 올리게 됐고, 이후에도 극단의 레퍼토리로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어요.
요즘 미투(#MeToo)운동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건, 인권운동가 역할을 하고 있는 배우들 중에 여성 배우들이 다섯 명으로 훨씬 많잖아요. 남자 배우는 지금 일곱 명 중 두 명인데, 원래 희곡에서는 남녀동수로 하게 되어 있어요. 저희 극단에서는 이렇게 하게 됐는데, 사회적으로 아직 가부장적인 문화가 훨씬 강하기 때문에 인권운동 분야에서는 남성들의 숫자가 훨씬 적은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고, 오히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남성이 훨씬 많죠. 이런 부분이 아이러니하게 반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했어요.

김진희 이건희 김보경 김범린

용기는 하나의 목소리에서 시작됩니다

송이원
아아까 박경은 배우님께서 하셨던 말씀이 인상적이었어요. 이 텍스트에 등장하는 사례들이 그저 글이거나 말뿐이기만 한 게 아니라 정말 현실의 일들이기 때문에 무겁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세계 곳곳에서 카키아(FGM/여성할례)가 자행되고 있고, 분쟁 지역에서는 아이들이 소년병으로 징집되거나 여성들이 물을 길으러 가다가 강간을 당하는 비극들이 벌어지고 있으니까요. 공연을 보면서 잊고 살던 기사들과 사실들이 다시 생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니까 뭘 해야 하고 뭘 할 수 있을까, 복잡해지기도 하더라고요. 이 텍스트를 접하고는 어떠셨는지, 아까 말씀을 안 하셨던 다른 배우 분들의 생각도 듣고 싶어요.
이건희
가장 충격이었던 부분은, 내가 살면서 얼마나 내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나, 얼마나 무관심했었나 하는 것들이에요. 저는 작년에 초연을 했을 때는 뒤에서 오퍼레이팅을 했던 사람인데, 공연이 끝나면서 다짐을 하게 되었어요. 내가 뭔가를 크게 하지는 않지만, 극 중 매리언 라이트 에델먼의 말처럼 적어도 움직이기라도 해야 겠다고요. 이에 대해 계속 인지하고 무관심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도 몇 개월뿐이었고, 그 기간이 지나면서 또 망각하게 되더라고요. 이번에 공연을 하기 위해 연습을 참여하면서 대본을 받아들고 텍스트를 보는데, 그때의 마음가짐이 생각나면서 너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이번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온전히 고민하게 되는 기간인 것 같아요.
김범린
알고 있어도 어떻게 행동해야 될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무력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는 일단 사람들에게 그들의 목소리를 알리는 게 배우로서 그리고 연극하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작년부터 공연을 해오면서 이런 생각들이 들어요. 이건 운동의 또 다른 한 개념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우리가 더 목소리를 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끔 하고, 사람들이 마음에 작은 것이라도 느끼고 또 살면서 잠시라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분들의 이야기를 느끼고, 무대에서 이 사람들을, 이야기를, 마음을 최대한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대변한다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던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고, 작게나마 마음에서부터 움직이는 게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계기가 될 수 있는 연극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김진희
저는 예전에 이런 내용들을 기사로 봐도 그냥 ‘이런 일이 있구나’, 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지나가곤 했는데, 이 연극을 하면서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어떻게 행동을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이 일에 아무리 관심을 갖고 있어도 어떻게 힘이 되고 움직일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 많았는데, 연극을 계속 하고 관객들에게 알릴 때, 이런 식으로라도 하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최근에 하게 된 것 같아요. 나의 진심을 그 사람이 되는 방법으로 관객들에게 발화할 때 이 마음들이 전달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초반에는 되게 많이 했었거든요. 요즘엔 그들의 아픔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마음을 담아서 하면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하고 있어요.
쭈야
저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전하고 싶어요. 이 무대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보면 살인, 납치, 고문같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먼 곳의 일들로 여겨지는 게 어쩌면 맞죠. 한국에서는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진 않으니까요. 그런데 대사 중에 ‘파멸의 씨앗이 떨어져 그것을 우리가 방치하거나, 외면하거나, 그대로 두면 그 씨앗은 결국 여러분에게 가게 될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어요. 극 중에 나오는 명예살인, 카키아(FGM/여성할례)와 같은 얘기들이 한국 사회에선 벌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저는 그것들이 지금 한국 사회의 미투 운동을 촉발한 여성혐오 문제와 전혀 다르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해요. 다만 그 사회에서 '파멸의 씨앗'이 더 남성 중심적이고 계급 중심적인 방식으로 크게 자라났기 때문에 더 가시적으로 가혹해 보이는 거고, 우리 사회는 이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그 기저에 있는 감정은 똑같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에게 이 사건들이 너무 먼 일이고, 내가 겪지 못한 일이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여기 등장하는 이 사람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다, 단지 그 수위가 상대적으로 낮아 보일 뿐인 거지, 사실 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을 진짜 많이 해요. 여성으로서 또 소수자이자 약자로서 당장 내게 큰일이 안 일어나니까 저 말을, 행동을 내가 지나친다면, 한국 역시 극단적인 사회로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파멸의 씨앗을 뿌리지 않는 사람으로서 존재해야 된다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무도 그 일이 쉬운 일이라고 말한 적 없어요. 첫 걸음을 떼기 위해 계단 전체를 다 볼 필요는 없어요. 뛸 수 없으면 걸으면 돼요. 걸을 수 없으면 기어가면 돼요. 기어갈 수 없으면 그저 움직이려고 하면 돼요. 그냥 계속 움직이면 돼요.

- 매리언 라이트 에델먼(Marian Wright Edelman), <권력에 맞서 진실을 외쳐라> 中

씨앗이 떨어져 싹을 틔우듯
송이원
거대해 보이는 세계 앞에 무력감이 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로부터 시작해 나와 내 주변이 더 평화로울 수 있도록, 조금씩 느끼고 알아가는 게 ‘움직이는 것’의 시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쭈야님께서는 파멸의 씨앗을 말씀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어떤 긍정적인 의미를 품은 씨앗이 제 마음에 뿌리내린  것 같아요. 관객들에게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킬 것 같은데, 직접 관객분들을 만나시면서는 리허설 때와 또 어떤 것들을 달리 느끼셨나요?
박경은
극 중에 파멸의 씨앗이 뿌려진 곳에서 꽃을 따다 어린이에게 주는 장면이 있잖아요. (마임으로 처리하는 ‘보이지 않는’ 꽃 -편집자 주)관객들에게 다가가 선물할 때 저 또한 선물과 감동을 받아요. 작년 초연 때 객석으로 내려가 젊은 여성 관객분에게 ‘꽃목걸이’를 선물하고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그분이 눈물을 보이셨어요. 공연이 끝나고 그분이 남아서 인사를 잊지 않으셨는데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배우님이 저에게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주시는 것 같아서 감사했어요.”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매 공연마다 다른데, 오늘은 할머님 관객분에게 ‘꽃목걸이’를 선물하고 팔 윗부분을 꽉 잡아드리고 눈을 맞췄어요. 그러니 저에게 고개를 끄덕이시며 눈을 맞춰 주셨어요. 그 순간들이 마음에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 무대 위 배우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주인공이고, 인생이란 무대에 서 있는 모든 분들을 응원하고 싶어요.
김범린
저는 약간 반대의 경우인데, 무대에 있으면, 저희 공연이 조명이 굉장히 밝아서 관객분들의 얼굴이 엄청 정확하게 보여요. 그런데 무대 위의 제가 관객 분들의 눈을 마주치고 이야기하면 제 눈을 회피하시더라고요. 그러면 스스로 흔들리기도 하고,그래서 관객들의 눈을 마주보는 것이 두려웠어요. 그러다 보니 그런 상황에서 활동가들 또한 얼마나 두렵고 외로웠을까, 그 분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 두려움과 외로움을 이겨내는 것에서부터 시작이 아닐까 생각을 하게 됐어요.
쭈야
공연에서 언급되는 활동가분들이 모두 외국 활동가분들이다 보니 저희는 매 공연이 끝나고 한국의 인권활동가 분들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활동가와의 대화’를 함께 하고 있어요. 첫 날의 시간이 인상적이고 기억에 남는데,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이신 한종선님, 전 변방연극제 예술감독이자 예술인 검열/배제/성폭력 반대 행동을 이어오고 있는 임인자님이 활동가로 초대되었어요. 그런데 두 분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 관객석에서 스스로 피해 당사자이자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분들이 발언을 하기 시작하셨어요. 순간, <권력에 맞서 진실을 외쳐라> 무대가 관객석으로 옮겨지는 것 같은 기묘한 감정이 느껴지더라고요. 관객으로 존재하던 분이 또 한 명의 배우로 자신이 투쟁하고 있는 활동을 이야기해주시는 느낌이었어요. 이 작품의 힘이, 무대에서 목소리 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 목소리의 무대’로 만들어지는 걸 느꼈어요.
하일호
“영웅인 척 행동하고자 한 것이 아니에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에요. 용기는 하나의 목소리에서 시작합니다.”라는 대사가 생각나요. 이 작품이 유명한 인권운동가들을 소개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름 없는 인권운동가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관객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인권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를, 인권운동이라는 것이 어떤 거대한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일상 속에서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순간에 처했을 때, 그것에 문제제기를 하는 하나의 작은 목소리라고, 그것이 이 사회를 한 발짝 앞으로 내딛게 하는 용기 있는 발걸음의 시작이라고, 그것이 이 작품의 메시지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 메시지가 관객들의 마음속에 꽃 피기를 꿈꿉니다.

타인으로부터 건네받은 말 한마디는 그 ‘사람’이라는 오롯한 세계를 품고 있는 것이기에, 듣는 ‘나’로서는 또 그 말을 옮기는 ‘나’로서는 결코 그 ‘말’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삶과 그 무게 앞에, 때로는 그 고통 앞에 무서울 정도로 무력할지도 모른다. 이해란 가장 오만한 오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소한, 무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삶과 평화라는, 또 인권이라는 거대하지만 납작해진 말들을, 끝없이 뿌리고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 무대에서 그 목소리들을 증언하는 배우 분들이 인터뷰 과정 중 연달아 어떤 ‘무력함’을 고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그 강인함이 느껴지는 대화들이었다. 땅으로 떨어진 씨앗은 충분한 빛과 수분을 머금고 나면 곧 푸른 싹을 틔우고 잎과 줄기를 뻗어낼 것이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그들은 오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서 씨앗을 심을 것이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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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원

송이원 연출가
‘丙 소사이어티’에서 글 쓰고 연출하는 사람.
eewon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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