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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향한 제의의 노래

그룹 동시대 & 극단 아마란스 <하녀들>

김태희_연극평론가

제143호

2018.07.05

일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너무 치열하게 살기보다는, 천천히 좋아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가며 사는 삶이 더 의미 있지 않을까. 하지만 늘 그렇듯 이런 상상이 실제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는 많은 난관들이 존재하고 종국에는 포기에 이르고 만다. 무엇이 이토록 나를 겁쟁이로 만드는지 한참 고민을 해보지만 결국 문제는 나다. 내 삶을 억압하는 가장 큰 걸림돌은 늘 나로부터 비롯된다.
그룹 동시대와 극단 아마란스의 <하녀들>은 묘하게도 이런 지점을 건드리고 있었다. 원작 희곡에서는 마담이 집을 비우고 남겨진 하녀들이 마담의 살인을 모의하고 실행에 옮겼다가 결국에는 실패하고 마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무대 위에서는 두 하녀와 마담을 통해 계급적 갈등, 사회적 부조리, 억압과 해방 등의 주제로 확장이 되곤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 이번 <하녀들>에서는 문제의 원인이 외부에 있기보다는 인물들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 하나의 작업

송인성

김태희 :
처음에 어떻게 작업을 같이하시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배우님들이 그룹 동시대 소속, 연출님이 극단 아마란스에 계시다고 들었거든요.
송인성 :
처음 극단을 만들 때 극단보다는 그룹에 가까운 단체, 그러니까 여러 사람이 콜라보를 해서 다양한 형식으로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열린 그룹으로 가자는 취지가 있었어요. 이번에도 이전 작업과는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4개월간 연습을 한 거예요. 정지현 연출님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경험이었어요.
김태희 :
공동 작업의 첫 시작을 <하녀들>로 하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정지현 :
이 작품은 제가 개인적으로 옛날부터 좋아해서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던 작품이었고요. 그룹 동시대와 공동작업에 앞서 희곡 모임을 가졌어요. 3개월 정도 그야말로 공부를 했는데, 1주일에 한 희곡씩 계속 읽었어요. 그러다가 장 쥬네 희곡을 다시 읽었는데 이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어요.
김정은 :
저는 이 극을 연출님과 같이 시작하기 전에 다른 스터디 모임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극의 구성, 작가에 굉장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고 그래서 장면 발표부터 도전해봤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연출님의 제안이 정말 반가웠고, 제시해주신 방향으로 간다면 흥미로운 작품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황연희 :
<하녀들>을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많이 했었잖아요. 그런데 항상 보면 후배들이 주축이 되어서 공연을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볼 때마다 언젠가 내가 나이가 들면 저 작품을 꼭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웃음) 사실 이 작품이 에너지도 많이 요구하고 주제나 형식적인 면에서 특별함을 가지고 있다 보니 그것이 관객하고 어떻게 하면 잘 만나질 수 있을까, 그런 우려 때문에 선뜻 도전하기가 어렵더라고요. 한두 달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거죠. 그런데 이번에는 4개월 정도, 스터디 까지 포함하면 더 길 텐데, 그렇게 긴 시간을 두고 공연을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그동안 못 했던 마담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참여하게 되었어요. 송인성 배우나 이혜진 배우가 다들 구력이 있는 배우들이거든요. 마담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나이대가 올라간 <하녀들>이 없었을 거예요. (웃음) 덕분에 그동안 읽지 못했던 것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것 같아요.
송인성 :
어렸을 때는 <하녀들>을 읽어도 이해가 잘 안 되었는데, 이번에 다시 오랜만에 희곡모임에서 읽었을 때 너무 재밌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강하게 들었어요. 완전히 코미디 같은 대목도 있고요, 너무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어서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연출님 제안을 받고 즐거웠어요.

‘몸mom소리’와의 만남

정지현

김태희 :
그동안 공연되었던 <하녀들>하고 다른 지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이어 가볼까요. 우선 프로그램 보니까 현무도(玄武道)와 소리선(禪)에 대한 내용이 있더라고요.
정지현 :
작업의 초기 단계에서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을 정하지 않는 것은 연출의 직무유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개 일반적인 연기를 할 때 명확한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매한 상태에서 하잖아요. 그런 것들을 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일종의 스타일로 만들어보려고 했던 게 현무도나 소리선을 가지고 온 첫 목표였어요. 그런데 현무도는 무술이잖아요. 연극하고 조금 다른 자기의 맥락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소리선이라는 발성법도 그러하고요. 그래서 그걸 연극적으로 접목시키는 게 이번 작업의 숙제였어요. 솔직히 숙제를 잘 풀지는 못했어요. 적용시킬 때 한계가 있더라고요. 현무도도 소리선도 형태적으로 구현하는 데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어요. 가령 형태를 따와서 무술 움직임처럼 움직이거나 도복을 입을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게 제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고, 그 원리를 가지고 오고 싶었어요. 어쨌든 훈련을 해서 소리 마녀의 움직임에는 좀 적용을 시켰지만 드라마 안의 인물들, 하녀들과 마담에게까지는 크게 적용 시키지 못했죠. 탐구에 의의를 두고 긴 호흡으로 가져가보려고요.
김태희 :
소리선도 소리 마녀들에 의해서 구현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들은 원작에는 없는 인물들인데, 하녀들의 내적 충동을 건드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정지현 :
저는 이 작품을 일종의 제의로 접근하고 있어요. 하녀들은 마담을 살해하는 일종의 의식 놀이를 하는 건데 이것이 실제 현실의 의식으로 확장되면서 죽게 되는 거죠. 마담을 죽이면서 해방감을 느끼는 그 제의를 어떻게 살릴 건지 고민하던 차에 소리로 살리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저희 몸소리 선생님은 보이스 퍼포먼스 그룹 대표이신 김진영 선생님이세요. 그 보이스 퍼포먼스 그룹의 메소드가 저희와 잘 맞았어요. 선생님이나 저나 둘 다 제의나 샤먼에 관심이 있어서요, 그걸 적극적으로 차용해서 같이 갈 수 있는 요소를 만든 게 소리마녀였어요. 소리마녀들은 사실 샤먼이죠. 머리에서 길게 드리워진 장식으로 눈 앞을 가리고 있는데요, 그게 이들이 현실을 보지 않고 다른 세계를 보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표식이에요. 이들은 무의식에 있는 힘, 어떤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들, 이걸 확장시켜 주는 존재들이에요.
김태희 :
소리마녀들이 내는 소리가 묘하더라고요. 어떤 때는 사람 소리 같고 또 어떤 때는 악기 소리 같기도 하고요. 각각의 소리를 어떻게 만들었고 작품에 배치시키는지, 그 과정도 궁금했었어요.

김정은

김정은 :
연출님이 몸소리 훈련법을 가지고 오셨고 저희가 직접 기초부터 배우기 시작했어요. 몸소리는 성대에서 나는 소리를 몸의 다른 부위로 공명을 시켜서 소리를 내는 거예요. 가령 머리 위쪽을 울리게 하면 높은 소리가 나고 또 이 소리가 귀 옆, 광대, 단전처럼 몸의 곳곳을 울리고 가는 거죠. 몸의 곳곳에서 제각각 다른 공명이 만들어지고 다른 소리가 나요. 이런 훈련법으로 훈련을 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이걸 어떻게 접목시켜야 할지 감이 안오더라고요. 그런데 차츰 배우들의 연기와 만나고 끌레르와 쏠랑쥬의 정서와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소리와 작품이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송인성 :
그래서 소리마녀 역의 배우들도 스터디 단계부터 계속 같이 참여했어요. 작품에 대해 같은 정서를 공유하고 싶었거든요.
김태희 :
정서 공유에 대해서 말씀하셔서요. 작품 마지막 대목에 이르면 소리마녀들이 무대 가운데에 있는 제단 주변을 빙빙 돌잖아요. 저한테는 그게 끌레르나 쏠랑주와 소리마녀들이 감정들을 주고받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송인성 :
소리마녀 역을 맡은 배우 셋이 저희 극단 막내 배우들이에요. 세 명이 다 몸이 다르고 성대가 달라서 같은 기관을 울리더라도 소리가 굉장히 달라요. 배우들이 각자 본인이 잘 내는 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연습하면서 매일 지켜봤는데, 그 과정도 매우 흥미로웠어요.
김태희 :
그렇다면 혹시 세 마녀는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로 구현되었을까요?
정지현 :
김정은 배우는 높은음의 소리를 예쁘게 내고, 김진솔 배우는 낮은음의 소리를 잘 내고 현진 배우는 움직임이 좋아요. 그런 특색들을 살려서 소리들을 배치했죠. 하지만 세 마녀 캐릭터상의 다양성은 없어요. 이들은 개인적인 존재들이 아니에요. 특정 공간에 있는 일종의 에너지예요. 극 중 캐릭터들을 몰아가는 충동이자 확장된 자아이고 의식의 종합인 셈이죠.
황연희 :
무의식을 어떤 것을 통해 어떻게 드러내 줄 것인가 고민을 하게 되지요. 다른 공연을 보면 신체성으로 풀기도 하고요. 그런데 사실은 신체라는 게 움직임을 통해서 무의식을 표현하는 거고, 그 움직임 자체가 역동적이기 때문에 사실은 소리가 그것하고 가장 잘 맞는다는 걸 이번 공연을 하면서 알게 된 것 같아요. 다음에는 소리 마녀들이 적극적으로 극 안에 들어오면 좋을 것 같아요.

다양한 악(惡)의 얼굴들

황연희

김태희 :
마담 역이 새삼 매력적이더라고요. 희곡으로 읽었을 때는 절대적인 악, 그 정도의 이미지만 있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좀 다양한 모습으로 보였던 것 같아요. 가령 남편 때문에 슬퍼하고 좌절하면서 하녀들에게 비싼 옷을 가지라고 주잖아요, 그러다가도 이럴 때일수록 꾸며야 된다는 하녀의 한 마디에 다 떨치고 일어나서 화장을 하고 치장을 하죠. 어떻게 보면 천진난만한 것 가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좀 악랄한 것 같기도 하고요.
황연희 :
이번에 연출이 의도한 마담이 그런 모습이었어요. 어떤 때는 순수하고 또 어떤 때는 숨 막힐 정도로 강압적이고요. 그런 다채로운 색깔을 주문했어요. 우리나라에서 그동안 했던 <마녀들>은 주로 마담이 가지고 있는 권력처럼 외형적인 것에 집중해서 표현을 했었죠. 그러다 보니 저도 마담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연출이 그런 부분에 대해 끊임없이 조언을 해주고 저도 좀 다른 모습으로 그려보려고 노력을 하다 보니까 제 안에서 마담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김태희 :
악이 항상 못돼서 악이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가령 어떤 애가 되게 착한데도 나한테 피해를 줘서 엄청 미울 때가 있잖아요. 착하니까 미워하지도 못하고.
황연희 :
그렇죠.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는 경우도 있잖아요. 마담의 모습은 그런 부분들을 드러내고 있기도 해요.
김태희 :
한편 두 하녀는 서로 짝패 같기도 해요. 끌레르에게 있는 것이 쏠랑쥬에게는 없기도 하고 또 반대이기도 하고요. 둘이 주고받아야 하는 에너지들이 많아서 배우 분들 두 분이서 의논도 많이 하실 것 같아요.
송인성 :
그렇죠. 둘이 엄청 의논하면서 해요. 오늘도 무대 위에서 듣고 반응하고 존재만 해보자, 그걸 의논했어요. 공연 시작하면 결국 그렇게 되는 게 중요한데 자꾸 배우적인 게 들어가면 인물이 휘어져 버리거든요. 그게 늘 숙제에요. 끌레르가 마담의 살해를 실패한 뒤에 쏠랑쥬가 연극을 하면서 동생 끌레르의 목을 조르죠. 극중극에서는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시체 역할을 하면서 누워 있는데, 그때도 저는 언니 쏠랑쥬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요. 그다음에 제 제의로 가잖아요. 쏠랑쥬의 대사에 영향을 받아서 저의 제의로 넘어가는 부분이 있어요. 극중극이지만 쏠랑쥬가 결국 끝까지 해냈다는 그 부분이 저에게 와닿아요. 그런 식으로 뭔가를 주고받는 장면들이 있는 것 같아요. 그 장면에서 쏠랑쥬의 대사가 너무 슬퍼요.
김태희 :
저는 조금 다른 장면에서 쏠랑쥬가 짠했던 것 같아요. 하녀 둘이 극중극에 돌입하면서 앞 장면들은 생략하고 뒷부분부터 시작하잖아요. 근데 쏠랑쥬가 마담역을 하는 끌레르에게 바로 화를 내지 못하고 더 큰 강압을 요구하잖아요. 본인이 화를 낼 수 있게 끌레르에게 욕을 하라는 거죠. 이 대목에서 쏠랑쥬가 얼마나 억압을 받았으면 화를 내기까지가 이렇게 힘이 들까, 억압과 복종이라는 것이 얼마나 내면화가 되어 있길래 이럴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짠하더라고요.
정지현 :
저는 이 작품에서 하녀들이 왜 마담을 죽이지 못하는지를 더 찾으려고 했거든요. 생각해보면 내면화되어 있는, 자기 스스로 억압되어 있는 걸 깨는 게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현실에서 저희도 그렇잖아요. 굉장히 사소한 거, 가령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데 못 그만두잖아요. 스스로 내면화된 어떤 족쇄들인 거죠. 마담은 오히려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존재가 아니라 친절하면서도 우아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존재인 것 같아요. 하녀를 지배하는 이 사람의 코드는 굉장히 내면화되어 있어서 더 꺼내기 힘든 건지도 모르겠어요. 이 마담은 원래부터 이렇게 태어난, 그렇게 사는 사람인 거죠. 그래서 그걸 하녀들이 깨는 게 더 어려운 거예요.

쏠랑쥬와 끌레르는 결국 마담을 살해하는 일에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극중극의 말미에서 쏠랑쥬가 희열에 차 내뱉은, 자유로워졌다는 한마디가 깊게 와서 박혔다. 그 한 마디를 쟁취하기 위해 쏠랑쥬와 끌레르는 긴 시간 연극을 반복해야만 했다. 결국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기는 했지만 극중극 속에서라도 마담을 죽인 그녀들은 어쩌면 그렇게 기다리던 해방을 맞이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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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

김태희
한국연극사를 공부하고 있고 연극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shykt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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