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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으로 말하기

극단 2악장 <자가면역질환>

김태희_연극평론가

제145호

2018.08.09

자신의 세포가 자신을 공격하는 일이 벌어지면 어떨까. 각종 병원균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야 하는 백혈구가 오히려 정상적인 세포를 공격하고, 어렵게 이식한 장기를 병원균으로 인식해서 공격을 한다면? 우리는 면역세포가 오작동을 일으키면서 우리 몸에 있는 정상 세포를 공격하는 질환을 일컬어 자가면역질환이라고 부른다. 이 질병은 언뜻 생각해보면 조금 어이없는 질병이기도 하다. 결국은 같은 편끼리 공격을 일삼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이없음과는 별개로 이런 증상은 생각보다 빈번하게 우리 일상에 나타나고 있는데, 루프스처럼 낯선 질병에서부터 류머티즘 관절염, 원형 탈모 같은 일상적인 질병들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병들이 나에게서 비롯되는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이다.
극단 2악장은 이런 질병을 연극 무대로 소환하고 있다. 1960년 서울의 작은 병원에 몰려든 세 명의 자가면역질환 환자들은 이 질병에 대한 다양한 사례이자 우리 스스로를 사유할 수 있는 유의미한 길라잡이들이다. 사실 자가면역질환만큼이나 모순적인 일들이 왕왕 벌이지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 아니던가.

‘나’를 병들게 하는 것

김태희
질병을 통해 우리 스스로를 들여다보려는 시도가 흥미로웠어요. 어떻게 의학을 소재로 삼을 시도를 하셨는지 궁금해요.
박현정
제가 의학 관련 콘텐츠를 만드는 곳에서 일을 했었어요. 요즘 암 만큼이나 자가면역질환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그러다 보니 관련 동영상 같은 것들도 많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들이 관련 내용을 설명하는 걸 듣다가 작품으로 만들어보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의학과 우리 사회의 만남이라는 틀 안에서 소재와 주제를 발굴해나가는 작업이 다소 어렵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는데 낭독공연과 공연을 거치면서 작품을 만들어보니까 저희 스스로도 배우는 점이 많았어요.
김태희
프로그램 보니까 용종절제술, 알레르기, 신경증 같은 후속작에 대한 정보도 있더라고요.
박현정
네, 맞아요. 아직 대본은 안 썼지만요. (웃음) 이번 작품을 하면서 관객들이 의학이라는 단어를 어렵지 않고 흥미롭게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어요. 연극에서는 조금 낯선 소재일수도 있지만 평소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관점에서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작품은 서울의 작은 병원에서 시작된다. 의사(박용우 분)는 골치 아픈 환자들의 치료를 맡고 있는데, 이들은 서로 다른 종류의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다. 인쇄소를 운영하는 양종남(김정훈 분)은 류머티즘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 증상을 겪고 있고 애국반공청년단으로 일하는 신상구(신정식 분)는 몸 여기저기에 원인 모를 피부 발진이 생겨 고통받고 있다. 한편 유일한 여성인물인 최주희(전수빈 분)의 경우 더 심각한 상황인데, 그녀는 몸이 조금씩 마비되다가 결국에는 전신 마비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1960년대, 아직은 자가면역질환이라는 의학용어가 보편화되지 않은 시대이다 보니 극 중 의사(박용우 분)는 제대로 된 처방을 내리지 못하고 환자들의 증상은 나날이 심해지기만 한다.

김태희
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요.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고 있는 양사장님이 제일 먼저 등장하는 환자죠. 재밌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피곤할 것 같아요. 아프다고 엄살은 엄청 부리는데 의사 말은 안 듣고, 바람피우고 폭력 휘두르고 완전 골칫덩어리잖아요.
박현정
공연을 보신 어떤 분이 누구의 집안에 하나씩 있는 큰 아버지 같은 인물이라고 평하셨어요. (웃음)
신정식
왕 꼰대, 슈퍼꼰대죠.
박용우
그러면서 교회는 열심히 다니면서 구원받을 거라고 하고요.
김태희
양사장에게는 아들이 가장 큰 약점인 것 같아요. 결국에는 아들에게 무시당해서 속상하고 엄마보다 자기를 좀 더 좋아해줬으면 좋겠다는 투정 같더라고요.
박현정
아들이 약점이죠. 그런데 아들 세대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고 해서 기성세대에 대한 비판을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류머티즘 관절염은 환자수도 많고 다른 자가면역질환에 비해 생명의 위험도 덜한 질병이거든요. 그래도 자기 나름 고통을 받고 있는 거죠. 사실 어떤 사람에 대해 안타까웠다가도 꼴 보기 싫었다가 엎치락뒤치락하는 마음들이 있잖아요. 그런 우리 주변에 있는 흔한 인물을 그리고 싶었어요.
김정훈
다른 인물에 비해 제가 맡은 양사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 가치관을 좀 강요하는 인물이긴 하죠. 저는 처음에 이 작품을 읽었을 때 의학연극이라는 독특한 소재가 좋았어요. 그런데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강요하지 않아서 좋았고요, 우리 작품이 이 질병을 4.19라는 역사적 소재와 엮어서 다루는데, 그것 역시 강조하거나 강요하지 않아서 좋았어요. 마지막 장에 시민들을 제압하고 피범벅이 된 상구가 의사를 찾아와서 그런 말을 해요. 선생님은 참 앞뒤가 안 맞는 분이십니다, 라고요. 저는 그 대사가 마음에 들었는데요. 우리가 삶을 살아나갈 때 순리나 진리나 이치대로 풀어지는 것보다 엄청난 모순들과 맞닥뜨릴 때가 더 많잖아요. 개인이든 사회든요. 그 대사를 들으면서 저는 저 스스로의 모순, 세상에 대한 모순들이 자연스럽게 생각났던 것 같고 그래서 이 작품이 좋았던 것 같아요.

신정식전수빈김정훈

병원에서 환자들의 진료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 밖에서는 4.19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4.19혁명은 직접적으로 무대 안으로 들어오는 대신 반공애국청년단원으로 일하는 상구나 의사의 후배 성근의 변화를 통해 감지된다. 혁명이 진행될수록 환자들의 증상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흘러간다.

김태희
상구는 피부 알레르기를 앓고 있는데, 질병도 질병이지만 그가 반공애국청년단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했던 것 같아요. 자가면역질환에 시달리는 인물이면서 전체 사회의 구조 속에서는 자가면역질환을 일으키는 세포에 해당하는 인물이죠.
신정식
저는 제가 연기한 상구가 어떤 바람에 휩싸였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그가 시위대의 바람에 휩싸였다면 전혀 다른 경험을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사회도 그렇고 사람의 몸도 그렇고 각각의 부분이 담당하는 몫이 정해져 있다면 분명 그걸 컨트롤하는 곳이 있을 거예요. 그 컨트롤을 담당하는 한 사람의 한마디가 큰 파장을 일으켜서 많은 사람이 바람에 휩싸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니까 그 큰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제가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사람으로 의사를 만나게 되는 거여서 맹목적으로 저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는 것 같아요. 몸 안에서 백혈구가 면역을 담당하는 존재로 설계된 세포인 것처럼요.
김태희
시위대를 진압하고 난 뒤 상구가 의사에게 복수하려고 다시 돌아오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의사는 약사와 연애를 하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약사를 좋아하는 상구를 놀리잖아요.
신상구
다시 의사를 찾아오는 장면도 제일 높은 사람이니까 해결할 방법을 구해야겠다는 심정이었던 것 같아요.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면서 자기 스스로는 알 수 없으니까 답을 찾기 위해 오는 거죠. 궁금함을 해소할 능력은 없지만, 저 사람이 한 말이 나쁜 말인지 좋은 말인지 판단할 잣대도 없지만 높은 사람이니까 나의 행동을 지시해줄 거라고 믿는 거예요.
김태희
마지막 환자는 주희죠. 다른 환자들이 그래도 익숙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에 비해 주희가 앓고 있는 루프스는 정말 처음 들어보는 질병이었고요.
전수빈
작년에 낭독극을 준비했을 때는 저도 그 질환에 대해서 전혀 감이 오지 않아서 관련 영상을 많이 찾아봤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다가가니까 제가 너무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공연을 하면서는 루프스보다 작품이 담고 있는 이야기에 더 주목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김태희
주희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나요?
전수빈
연습을 하면서 주희는 왜 아픈데 의사에게 고쳐달라고 하지 않고 포기하게 만들어달라고 하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어쩌면 주희는 몸이 아픈 것보다 다른 아픔이 더 큰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죠. 왜 우리도 몸이 많이 아프면 우울해지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이 친구는 몸이 아픈 걸 떠나서 정신적인 아픔이 훨씬 큰 친구인 거죠. 어디하나 기댈 곳 없는 사람이었는데 그나마 그림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루프스 때문에 그것마저 무너져 버리는 순간이 오게 된 거예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죠.
김태희
그런데 의사를 만나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물론 그 의사 때문에 상처받아서 죽음을 선택하지만요.
전수빈
주희가 마지막으로 믿었던 사람이 의사였는데 그가 주희의 질병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도 않고 성병이라고 단정을 지어 상처를 주죠. 주희는 믿었지만 의사는 주희를 믿어주지 못한 건데, 그게 좌절의 계기일수 있겠지만 더 한 것들도 겪어 온 사람인데 고작 의사 때문에 죽었을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오히려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삶을 더 소중히 생각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해요.

박현정김다솔박용우

의사, 혹은 환자 둘

작품의 중심인물인 의사와 그의 고향 후배이자 수련의사인 성근(김다솔 분)은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인물이다. 서울에 갓 상경한 성근은 의사로서의 책임감이 강한 인물로, 자신에게 치료를 받다가 사라진 환자를 찾아 헤매며 밤낮으로 환자 걱정뿐이다. 한마디로 인간적이고 친절한 의사의 표본이다. 그러나 성근의 선배인 의사는 그런 성근에게 늘 잔소리만 늘어놓는다. 시골에서 성근을 걱정하는 어머니가 우선이어야 하고 본인 스스로의 안위가 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 의사의 가치관이다.

박용우
제가 연기한 의사는 알량한 지식을 가지고 작은 개인병원에서 왕이라도 된 것처럼 절대자로 군림하는 인물이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몸을 사리는 걸 보면 한 사회로 놓고 봤을 때는 스스로가 굉장히 작고 보잘것없는 개인이라는 의식도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환자들에게 구체적 병이 있다면 의사한테는 사랑하는 동생이 죽고 자기가 알고 있던 것들이 무너지는 일들이 질병처럼 갑자기 벌어지는 것 같아요. 자가면역질환처럼, 당사자한테는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일들이 몰아치는 거죠. 병을 고쳐줘야 할 의사가 알량한 지식으로 오만한 판단을 일으키면서 환자들의 증상도 극단으로 나아가요. 주희가 죽은 것도 의사가 기폭제가 된 것 같아요.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그 전부터 심리적으로 아버지한테 억압당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서 우울증을 앓았던 주희가 죽음을 결심하게 된 기폭제 같은 게 된 거죠.
김태희
성근에게 형은 진짜 좋은 의사죠. 실제로 무료로 환자들을 돌보아 주기도 하고 그러는데, 저에게는 어쩐지 너무 나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제가 극을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이해했을 수도 있겠지만, 마치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함축하고 있는 인물처럼 보이기도 했거든요. 다양하게 나쁘잖아요. (웃음) 어떤 때는 이기적이기도 하고 문제를 외면하고 포기하기도 하고 착한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요.
박현정
저희 대본 자문해주시는 의사님이, 대본 구성 단계에서 문득 등장인물 중 의사가 악인이거나 사이코패스인지 물으셨어요. 의사들은 실제로 이렇지 않고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면서요. 급기야 나중에는 성근이 실제 자기 모습이라고 하시기도 했어요. 그 다음에는 무료로 환자도 봐주고 치료도 하는 걸 넣었더니 괜찮아하시더라고요. (웃음) 처음 팀이 모였을 때도 의사가 악인이고 나머지가 피해자인 것처럼 보이면 안될 텐데, 걱정했어요.
김다솔
누구나 자기의 안위를 지키려고 노력하죠. 그럼에도 여기서 의사가 부각되는 건 아무래도 이들 중에서는 그나마 권력이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의사는 양사장이나 상구에 비해서 교육 수준도 높고 사회적 계층도 높은 인물이잖아요. 물론 주희도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래도 여성이라 제약이 많았을 테니까요.
김태희
그런 의사의 반대편에는 성근이가 있는 것 같아요. 성근은 그야말로 환자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이상적인 의사잖아요.
김다솔
성근은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려고 준비하는 친구에요. 의사로서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환자를 치료하고 스터디 모임도 찾아다니죠. 그런데 그렇게 해도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거나 지금 이 연극과 같이 사회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를 목격하면서 안타까움에 더 발버둥치는 인물이에요.
박현정
의사와 성근이 다른 지점이 분명히 있지만, 한편으로는 성근이라는 인물이 정말 완벽하고 선한 인물인지는 모르겠어요. 이를테면 모두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추구하면 그 사람은 과연 옳은 사람인가, 이런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성근이나 하루 종일 연락이 두절되었다가 시위 도중 다친 사람들을 무작정 차에 싣고 병원으로 데리고 와요. 그런 성근에게 의사가 제발 기다리게 하지마라, 누군지도 모르는 저 사람이 중요하고 나는 너에게 무엇이냐, 네가 봐야 하는 환자는 무엇이냐, 이런 말들을 하거든요. 제가 예전에 그랬어요. 어떤 목표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걸 위해 무언가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에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공권력이 시민을 향해 발포했던 1960년 봄, 그 곳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는 방관을, 누군가는 시위를 선택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시민을 향해 총구를 겨눴을 것이다. 아군이 아군을 향해 공격을 하는 상황, 그 모순적인 상황 속에는 그보다 더 복잡다단한 개인들의 인생이 존재한다. <자가면역질환>은 아픈 우리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 안에서 혼란과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세 명의 환자에게 각자의 아픔이 있었던 것처럼 성근과 의사에게도 시시각각 아픔이 번져간다. 각자의 방식대로 열심히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삶은 언제나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때로는 나에게서 시작된 파장이 나의 삶을 덮쳐오기도 한다. 성근은 누구보다 이상적인 언어로 무장한 의사였지만 그의 이상은 가장 친한 선배이자 고향 형인 의사에게는 폭력이었다. 성근이 약속을 어기고 세미나 대신 시위 현장에 나갈 때마다 의사는 그를 대신해 환자를 돌보고 어머니를 안심시켜야 했으며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의사는 위험한 곳은 피하고 무료로 환자들을 돌보아 주는 것으로 죄책감을 떨쳐버리며 소소한 일상을 누리려고 하지만 그도 모르는 사이 그의 지적 오만함이 환자들의 삶을 파괴로 몰아가고 있었다. 결국은 의사나 환자나 삶은 마찬가지다. 그것은 거대한 모순의 연속이며 누구 하나의 잘잘못을 가리기 어려운, 그래서 여전히 알 수 없는 것이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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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

김태희
한국연극사를 공부하고 있고 연극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shykt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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