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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던져진, 버림받은, 어쩌면 우리

<우리가 고아였을 때>

김태희_연극평론가

제147호

2018.09.06

다른 사람의 애정을 갈구하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혼자는 종종 외롭고 불안하니 말이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한 아이를 통해 그 욕망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온전한 애정을 받아본 적이 없는 한 아이가 있다. 언제부터인지 할머니 집에서 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 아이는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 또래 아이들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거짓말과 영악한 행동을 일삼는다. 친구를 질투해서 그 친구의 비밀을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는가 하면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을 내세워 주변 사람들의 동정심을 유도하기도 한다. 의도 없이 저지르는 아이의 행동은 거칠기 짝이 없고 그런 아이의 모습을 객석에서 바라보고 있는 심정은 복잡하다. 씁쓸한 마음과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 같은. 그것은 어쩌면 이 아이가 느끼는 불안과 비뚤어진 감정이 나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고아들이 사는 세계

김태희
작품을 보고 나서 궁금했어요. 아이들은 왜 하필 고아로 설정이 되었을까요? 엄마와 아빠가 없는 아이들 같긴 한데 어떤 이유로 고아가 된 건지 언제부터 아이들이 할머니 집에 살게 된 건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그리고 아이는 고아인 것을 불행하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어른들의 애정을 얻기 위해 그걸 오히려 이용하죠.
강보름
드라마터그님이 처음 대본을 읽고 나서 이건 ‘지금 우리의 이야기’라고 말씀하셨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과거 속의 나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절망과 고독을 현재의 상태에서 느끼게 만들려면 불우한 환경을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게 필요할 것 같다고 의견을 주셨어요. 그래서 작품이 수정되었고 제목도 여러 번 바뀌었어요.
김태희
작품 제목이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김연재
처음엔 불안에 대해 쓰고 싶어서 <불안 희곡>이었다가, <검은 쥐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탈고를 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저희가 유년시절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검은 쥐의 아이들>은 자꾸 유년시절과 연결되는 느낌이어서요. 오히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들, 고독한 생, 불우한 인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아이에게 고아정체성이 있어야 할 것 같았어요. 원래 초고는 아이들이 할머니 집에 오는 것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러면 이 불우한 아이들의 전사가 자꾸 끼어들게 되더라고요. 마치 우리 사회가 내버려 둔 불쌍한 아이들이 되는 거죠. 이걸 우리가 지양해야 할 거로 삼고 같이 노력했던 것 같아요. 애초에 우리가 던져진 사람들인 것처럼 이 아이들도 던져진 아이들처럼 보이길 바랐어요.
김태희
처음에 쓰실 때는 불안에 대해 쓰고 싶으셨다는 게 이해가 가는 것도 같아요. 불안하니까 자꾸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게 아닐까요. 마지막에 아이가 “이게 당신에게 전하는 마지막 이야기입니다.”라고 대사를 해요. 굳이 왜 이야기라는 결을 하나 더 만들었을까 궁금하면서 한편으로는 쥐나 이리에 대한 상상과 함께 이 작품이 한 편의 동화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장치 같았어요. 마치 잔혹동화를 보고 난 것 같은 느낌처럼요.
김연재
마지막 독백을 쓸 때 어떤 절대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존재를 용서해줄 수 있는 신 같은 존재한테 고아로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닿고 싶다는 마음으로 썼던 것 같아요. 누군가가 나의 이런 모습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인 거죠. 그리고 쥐나 이리 같은 것은 아이한테 편안하지 않고 청결하지 않은 존재인데요. 아이는 쥐를 이리라고 상상하면서 자기를 여기에서 구해서 어딘가로 데려가 줄 수 있는 존재라고 믿어요. 아이가 그걸 원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신화에 나오는 보호자로서의 이리를 생각했던 것 같아요.

강보름

강보름
연출적으로는 이리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쥐인 거잖아요. 나에게 절대적인 초월자는 없는 거구나, 현실을 깨달은 순간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어요. 작가님은 이 작품이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했다고 말을 하지만, 저는 오히려 보편적이고 많은 사람들한테 공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모두에게는 타인을 통해서 구원받길 원하는 욕망이 있잖아요. 그걸 솔직하게 드러내는 존재가 아이인 거고요. 그것이 이 작품이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김태희
그런 면에서는 충분히 보편성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동시에 시공간은 매우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계시더라고요.
강보름
평소에 90년대 생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했어요. 평소에 연극을 많이 보러 다니는 편인데 90년대 생의 이야기가 많이 없는 것 같았거든요. 연재 작가의 작품을 읽었을 때 이 작품은 90년대 생들만의 특수한 걸 가져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면도 있다고 생각을 했어요. 서교동, 홍대의 구체적인 지명들이나 시대를 특정하는 성인식 노래나 그런 코드들도 세대적인 특수성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다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코드로 넣고 싶었죠.
김연재
그러면서도 작품에 등장하는 구체적인 시공간들이 유년시절의 향수, 세대 이야기로 가지 않고 이야기의 보편성을 해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김태희
90년대 생의 이야기라는 표현을 하셨는데요. 연출님이 생각하시는 90년대 생만의 이야기가 뭔지 알 수 있을까요?
강보름
사실 내용의 특수성이라기보다는 주체가 90년대 생이 되었다, 90년대 생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게 더 컸던 것 같아요. 90년대 생들이 거의 20대를 이루고 있는데, 이들이 인터넷에서 혐오적인 발화들을 가장 많이 하는 세대가 되어버렸어요. 사실 우리 20대들도 놀이터 문화가 있던 세대들인데 이렇게 되어가는 과정이 있었고, 지금 기억들을 반추하거나 되짚어 보지 않는다면 지금 10대들도 혹시 더 소통이 단절되고 혐오하고 현실에서 서로를 사랑하거나 관계를 맺을 수 없는 현실에 처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잘 반영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업 초반에는 이 작품을 통해서 그런 지점을 말하고 싶기도 했어요.
김태희
연재 작가님 전작인 <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를 보면 제도나 구조가 어떻게 인간을 악하게 만드는지,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고 악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되는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들이 나타나요. 이번에도 주인공인 아이가 보여준 행동은 사랑받기 위해서 혹은 나름의 생존을 위해서 하는, 어떻게 보면 순진하고 미워할 수 없는 행동이잖아요. 근데 결과적으로 보면 악한 행동이기도 하고요. 그런 부분을 늘 세밀하게 관찰하시는 것 같아요.

김연재

김연재
제가 가장 잘 쓰고 싶은 게 그런 부분이에요. 저 스스로 제가 선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제 인간성을 제가 못 믿는 것 같아요. 어디서 봤는데 악역을 공들여 쓰는 작가는 다 이유가 있는 거라고, 그거 보고 어찌나 찔리던지요. (웃음)
김태희
왜요? 왜 하필 그런 걸 잘 쓰고 싶으신 거예요?
김연재
기본적으로 제가 어두운 사람은 아닌데, 나는 나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에, 체념을 하고 수긍하는 과정을 거치며 살아온 것 같아요. 제가 비열한 행동을 하거나 혹은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말이나 생각으로 죄를 저질렀을 때 거기에 대해 고민을 해요. 그런데 그렇게 싫으면서도 계속 끌림을 느끼는 것 같아요. 나는 이걸 마주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강박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게 모두가 알지만 잘 말하지 않는 부분이 아닐까, 내가 이걸 잘 감지할 수 있는 작가라면 내가 이걸 쓰는 것도 인간에게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아요.
김태희
쓰면서 마음이 황량할 것 같아요. 그걸 집요하게 생각해야 하잖아요.
김연재
사람을 이렇게까지 만들어도 되나, 그런 생각을 이제야 좀 하는 것 같아요. 전작들을 다시 보면서 나의 쾌감을 위해 한 인간을 추락시키는 것은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해요.

동료를 만난다는 것

김태희
전작 이야기가 나왔으니 작품 외적인 이야기를 좀 이어가볼까요. 저는 두 분의 전작들을 인상 깊게 봤어요. 보름 연출님의 <레디메이드 인생>(2017)은 공연을 봤었고, 연재 작가님의 <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2017)는 희곡으로, <팬티 벗는 시간>(2017)은 낭독공연으로 봤었어요. 전작들을 떠올려 봤을 때 두 분의 만남이 참 잘 어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극장을 찾았던 것 같아요. 어떻게 같이 작업을 하시게 된 건가요?
김연재
제가 젊은 창작자와 작업을 하고 싶은 갈증이 컸었고 또 하나는 보름 연출이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소설을 각색해서 무대화하는 작업을 했었기 때문에 제 작품과 잘 맞지 않을까 싶었어요.
강보름
연재 작가가 인터뷰와 청년예술가 집담회에서 안전하고 소모적이지 않은 환경에서 작업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게 뇌리에 남았는데, 마침 같은 학교에 들어간다는 걸 알게 돼서 제가 먼저 연락을 했어요. 대화를 해보니 예상했던 것처럼 서로 관심사도 잘 통하더라고요. 그래서 사실 이 작품을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같이 한다고 했어요. 결과적으로는 제가 선견지명이 있었죠.
김태희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요. 평소에 연재 작가님 작품을 읽으면서 희곡도 문학성이 강할 수 있구나, 생각했었어요. 언어의 밀도가 높기도 하고 그 언어들을 통해 만들어내는 비유가 촘촘하기도 해서요, 희곡도 읽는 재미가 있구나 싶었거든요. 또 보름 연출님의 <레디메이드 인생> 공연을 보면서 소설을 연극 무대로 가지고 오면서도 이렇게 연극적으로 무대에서 잘 소화할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서 둘의 조합이 참 좋을 수 있겠구나, 감히 생각을 하면서 갔었죠.(웃음)
김연재
공연을 보면서 연출가가 희곡을 정말 아끼고 있다는 것이 절실하게 느껴져서 저한테는 엄청 의미 있는 경험이었어요. 개인적으로 제가 쓴 희곡이 구현된 것보다 읽는 게 더 좋은 것 같아서 고민이에요. 제가 너무 연극을 모르나 싶기도 하고, 제 글이 무대에 올라가면 힘이 빠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았었거든요. 근데 제 글도 무대에서 힘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경험해 본 것 같아요.
김태희
의외의 고민인 것 같아요. 문학적인 희곡, 이런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희곡 작가로서의 약점이 아니라 작가님만의 특징일 수 있는 것 같아요. 희곡도 따지고 보면 문학인데 우리가 그걸 자꾸 잊잖아요. 그런 면에서 연재작가님은 연재작가님만의 좋은 특징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요.
김연재
정말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어요. 제가 일주일 정도 다른 일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연습실을 갔었어요. 그런데 배우들이 “대본을 조졌어요.” 이러는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깜짝 놀랐는데, 알고 보니 일주일 동안 정말 적은 양씩 나누어서 모든 표현과 모든 대사를 높은 밀도로 토론을 하면서 읽어 나갔다는 거예요. 그날 너무 행복했어요. 처음으로 극작가가 되길 잘했다,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김태희
사실은 그렇게 읽어야지만 대본의 내용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건데, 일반적인 작업 환경이 그렇게 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런 노력들을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보름 연출님한테 궁금했던 건, 예전에 그런 말씀하신 걸 봤어요. 지원금을 받아 <레디메이드 인생>을 올리고 나서, 대학교 극회에서 작업을 할 때 보다 모든 게 다 좋아질 줄 알았는데 사실은 해결해야 될 게 너무 많아졌고 그래서 결국 실패를 경험했다. 그게 저한테는 굉장히 의외여서 인상적이었어요. 이번이 학교 밖에서 하신 두 번째 작업인데, 첫 번째 작업과 어떤 게 바뀌었는지 혹은 어떤 게 여전했는지 궁금해요.
강보름
연출이라는 포지션이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대학교 극회에서 작업을 할 때에는 서로가 돈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대학교 시절의 추억이니까 서로 즐기면서 했었거든요. 근데 이게 밖으로 나오게 되면서 다른 동료들이 없는 상태에서 정말로 저희 친구들을 끌어당겨서 공연을 하려고 하니까 저 스스로가 다른 사람의 돈과 시간을 착취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걸 최선을 다해서 막으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안 되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생각했어요. 다른 사람을 착취하면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는 거, 모든 게 연출의 공으로 돌아가는 시스템하에서 보람으로 땀과 눈물을 커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런 거에 강박이 좀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에 작업을 할 때는 어떤 포지션이든 상관없이 동등하게 인건비를 나누었어요. 좀 덜 착취하는 과정을 만들어 보고 싶었고 평등 수칙 같은 것들도 만들었어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앞으로 계속 연극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밑바탕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김연재
보름 연출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게 연습 계획을 시간별로 매주 공유해 줘요. 그리고 연습시간을 1분도 넘긴 적이 없었어요. 저라면 공연이 임박해오면 다급해져서라도 그렇게 못 할 것 같아요.
강보름
기본적으로 배우나 스태프에 대한 믿음이 있었으니까요. 저는 연출이 얼마만큼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착취의 정도가 달라진다고 생각했어요. 결과적으로 제가 저 스스로를 착취하는 거긴 한데 이게 제일 마음이 편하고 저랑 잘 맞는 방법인 것 같아요.
김태희
일을 몰고 다니는 스타일이시네요. (웃음)
김연재
연습 때 체크인 시간과 체크아웃 시간을 주셨어요. 가령 연습이 끝나고 술자리에 가서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 다음날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이 소외되잖아요. 그걸 방지하려고 노력하셨어요.
강보름
이런 걸 제안했을 때 거부감을 표할 수도 있고 겉으로는 수용을 해도 적극적으로 실천을 못 할 수도 있는데 모든 분이 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주셔서, 너무 좋은 동료를 만나서 감사했어요.

안전한 환경에서 작업을 하고 싶었다는 두 창작자의 얼굴 위로 청결하지 않은 환경에서 누구에게도 구원받지 못한 채 내던져진 아이의 모습이 겹쳐졌다. 곱씹을수록 우리는 고아 같은 존재들이었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는 결국 우리를 구원해줄 초월자가 없음을, 버림받았다는 그 처절한 상태에 대한 재확인의 여정이기도 하다. 모두가 세계에 던져진 고아들이라면, 기왕 버림받았다면 남은 것은 고아들끼리 손을 잡아보는 일이 아닐지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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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

김태희
한국연극사를 공부하고 있고 연극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shykt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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