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동시대 연극 비평을 이야기하다

[리뷰] 필진 좌담

정리_웹진 연극in 편집부

제230호

2023.02.23

웹진 연극in은 2022년 연말 [리뷰] 코너의 필자 공모를 진행해, 지난 호에 그 선정작들을 게재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선정된 필진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동시대 연극 비평”이라는 주제로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좌담을 위해 사전에 필진들이 각자 두 개씩 질문을 준비했고, 현장 좌담은 별도의 진행자 없이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일시:
2월 3일 금요일 19시 20분 - 21시 20분

장소:
서울연극센터 2층

참여:
김민조, 진송, 팔도, 하라(이상 웹진 연극in [리뷰] 필진)

참관:
김슬기(웹진 연극in 편집장), 예준미(웹진 연극in 에디터), 김상민(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in 담당자)

동시대란 무엇일까

하라
저는 하라입니다. 비평, 시, 사진, 연극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팔도
저는 팔도라고 하고요. 문학 공부를 하는 학생이고, ‘누워있기협동조합’이라는 비평 콜렉티브의 조합원입니다. 비평, 아카이빙, 번역, 무용, 연극 등이 요즘 가장 주된 관심사입니다.
민조
저는 김민조라고 하고요. 2018년부터 연극 비평을 시작해서 지금은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는 프리랜서 연극비평가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연극, 포스트 휴먼 연극 등 흐름에 맞춰서 의미 있는 반응을 생산하는 비평가가 되고 싶은데, 게을러서 마감을 잘 못 지키고 글쓰기 노동자로서의 곤경에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최근에는 한국 퀴어 연극을 아카이빙 하는 작업에 관심을 두고 모임을 결성해서 동시대부터 백 년 전에 이르는 과거의 연극들까지 퀴어 내지는 트랜스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시각을 만들어나가고자 하고 있습니다.
진송
저는 시에 대한 문학 평론으로 시작해서 비평 활동을 하고 있고요. 연극 분야에서 페미니즘과 퀴어에 대해 재미있는 작업을 하시는 분들을 발견하게 되면서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연극에 대한 글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누워있기협동조합’에서 활동하고 있고,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이라는 창작 단체에서도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민조
진행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저희가 사전 모임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자 질문을 만들어봤어요. 편집부에서 정리해주신 순서가 있고, 각자 두 개씩의 질문이 있잖아요.
하라
목록을 읽어봤는데, 제 질문, ‘각자가 생각하는 동시대의 정의를 말해보자’가 가장 상단에 있더라고요. 좌담 주제가 ‘동시대 연극 비평’이길래 이 질문을 준비해보았습니다. 연극계 분들, 그리고 연극 비평을 쓰는 분들은 유독 ‘동시대’ 혹은 ‘컨템포러리’라는 단어를 선호하며, 자주 사용합니다. 저희 연극in 필진 선발 공고에도 ‘동시대의 맥락 속에 작품을 어떻게 읽어냈는가?’라는 심사기준이 포함돼 있었고요. 이 단어에 담긴 역사가 상당히 긴 것 같은데, 지금은 2023년이잖아요. 각자 이 말을 어떤 맥락 안에서 듣고, 쓰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저부터 말씀드리면, 저는 창작자의 태도에서 ‘동시대성’을 발견할 때가 있어요. 작품의 완성도를 떠나, 창작자 스스로 실험적이고 재미있는 시도를 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 혹은 ‘지금, 여기’의 화두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판단될 때…
진송
요즘 비평에서는 페미니즘과 같이 어떤 공통감각이라든지, 공통적인 화두 이런 것이 동시대적 혹은 동시대 이런 식의 의미로 많이 불려오는 것 같아요. 저는 동시대가 어떻게 정해져 있다기보다는 무엇이 동시대인지, 무엇이 그 동시대적인 감각의 질문 속으로 들어와야 되는지, 라는 담론 투쟁의 대상이 동시대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고요. 시간으로 구획해서 특정한 기간을 동시대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어떤 미심쩍은 말로서 떠돌아다니는 동시대를 생각하고 있어요. 마치 ‘우리’라는 말처럼요.
팔도
비평적인 작업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동시대적이라는 건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비판적’이라는 형용사처럼 쓰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별로 동시대적이지 못한 연극과 굉장히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 동시대적인 연극, 이렇게 분류가 자꾸 되는 것 같은데요. 어떤 건 동시대적이고, 어떤 건 그렇지 않다고 딱 잘라 나눌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은 100년 전 것에서도 동시대성을 발견할 거고, 그걸 동시대의 관점으로 생각할 수 있잖아요. ‘읽기’라는 건 매번 다시 할 때 달라지는 것이고요. 상업적이고 동시대적이지 못하고 클리셰로 범벅되었다는 연극도 어떻게 읽느냐, 동시대라고 할 때 각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민조
저는 동시대라는 것이 무엇과 무엇을 포괄하는 규정적 개념으로 쓰이기보다도 당위의 개념으로 쓰이는 케이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동시대적 감각에서 낡았다’는 언술이 가능하잖아요. 무언가를 포괄하는 개념보다 배제하는 개념으로서, 이후의 시간성을 포괄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컨대 미투 이후의 시간성이라 했을 때 미투로 인해 더 이상 자명하지 않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던 것, 되돌아와서는 안 되는 것, 그것들을 동시대적 감각이라고 모호하게 통칭하는 것 같아요. 뭔가를 거절하는 감각일 수도 있고, 무언가의 이후라는 생각이 들어요. 동시대는 이전과는 다르기 때문에.
리뷰 필진 김민조. 검은 외투 속에,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 비정형 패턴이 들어간 셔츠가 보인다. 오른손을 쥔 채로 턱에 괴고 있다.
김민조
하라
인터파크 랭킹 상위권에 위치한, 대학로 거리에서 1년 내내 만날 수 있는 오픈런 공연, 스타가 출연하는 뮤지컬 공연도 사전적인 의미만 보면 ‘동시대’ 공연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연극 비평에서 소환하는 공연은 늘 따로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연극판에서, ‘동시대성은, 이러이러한 거야’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웹진 연극in만 보아도, 특정한 경향성이나 색채가 있는 공연들이 ‘선별’돼 올라오고 있고요. 비평 공간에서 기록되는 작품의 특징이 무엇인지, 그걸 규명하다 보면 연극의 ‘동시대성’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봅니다.

연극비평은 아무도 읽지 않는다?

민조
진송 님의 질문에 동시대 연극비평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동시대라는 키워드를 공유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넘어가 볼까요?
진송
첫 만남에서 동시대 연극 비평과 연극 비평 읽기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그것을 어떻게 체감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점에서 그렇게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했어요. 왜냐면 저는 연극에 유입된 지 얼마 안 된 사람이에요. 민조 님이 첫 만남에서 연극 씬이 다이나믹하게 움직이고 있다고 얘기를 해주셨잖아요. 저도 그 다이나믹한 움직임을 통해 연극에 유입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연극이 문학, 미술 등의 장르와 협업하고, 퀴어나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기도 해서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고요. 저는 제가 본 작품에 대해 잘 알고 싶을 때 자연스럽게 연극 비평을 찾아 읽었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보니 ‘연극비평을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것이 문제다’라고 이야기하시는 거예요.
민조
상연되는 연극의 숫자에 비해 이를 리뷰하는 매체나 필자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한국연극』, 『공연과 이론』, 『연극평론』 같은 종이 잡지 같은 경우 실제 연극 관객과 접점이 부족한 게 사실이기도 하고요. 비평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글이 실제 관객과 만나는 접점이 다른 분야보다도 적다고 생각했어요.
하라
맞아요. 문학이나 미술, 영화 평론가들은 대중매체나 일간지에서 지면을 얻기도 하지만 이에 비해 연극 평론을 하시는 분들은 대중을 만날 기회가 많지 않죠. 약간의 ‘일반화’를 담아 말을 해볼게요. 꽤 많은 연극 창작자가 비평을 부담스러워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연극계의 정서, 문화와 관련이 깊다고 봅니다. 연극판은 타 예술 장르에 비해 ‘사람 간의 연결’을 중요시해요. 친밀감과 유대가 거대한 동력이고요. 극단이 유사 가족 역할을 하죠. 이런 문화가 꼭 나쁜 건 아니고, 장점도 있는데, 비평에 좋은 환경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네트워크는 좁고, 다들 친하고, 연결돼 있으니까. 서로 얼마나 척박한 환경에서 작업하는지 아니까. 비판을 꺼리는 분위기가 확실히 있다고 생각해요. 연극인들이 “고생했다.”라는 말을 싫어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잖아요. 지인들이 극장 문을 나서면서 “고생했다.”라는 말만 반복하면, 대충 ‘할 말이 없구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이게 농담만은 아니거든요. 그만큼 비판이나 평가에 민감하다는 이야기고요. 연극대학, 예술대학의 분위기도 비슷해요. 연기, 연출, 제작 활동에 비해, 비평 활동은 다소 마이너하게 취급되는 경향이 있지요.
진송
저는 비평 찾아 읽는 걸 좋아하고 주변 사람들도 재미있어 하는데, 비평이 안 읽힌다는 건 어떤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일까 궁금했던 것 같아요.
하라
장르의 한계도 있을 것 같네요. 예를 들어 영화의 경우, 특정 평론가의 책을 읽고, 책에서 언급하는 영화를 보고, 영화를 다룬 다른 평론가의 글을 읽으면서 저변을 확대하는 경험이 가능하잖아요. 연극은 장르 특성상 이런 경험을 하기가 어렵죠. 일단 비평을 읽고 관심이 생기면, 공연이 끝나 있으니까.

‘좋은 비평’ 소개하기

하라
다음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읽어본 연극 비평 중 ‘좋은 비평’이라고 생각되는 글을 한 편씩 소개해볼까요.
민조
머릿속에 떠오르는 글이 있어서, 다시 읽고 왔어요. 2021년에 제네럴쿤스트에서 <극장종말론>이라는 기획을 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중 안팎 님의 글1)이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극장종말론> 기획 자체가 아름다움, 숭고함을 위해 어떤 존재들의 출입을 불허하고 내쫓는 공간으로서의 극장이 과연 계속해서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이었고, 거기에 안팎 님께서 더한 비판을 해주셨어요. 가령 신경다양인, 아동, 동물 등은 관람을 할 수 없는 객석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거죠. “저는 여러분처럼 극장을 사랑해 본 적은 없습니다” 같은 문장들이 스스로한테 들어와서 꽂히는 말 같은 거예요. 저는 극장을 좋아하는 사람이고, 이 기획을 접한 뒤에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극장에 갈 사람인데, 자성의 목소리 뒤에서도 ‘극장을 사랑하는 마음’에 대한 미련은 여전히 온존할 것이라는 점을 이르집는 문장처럼 느껴졌다고 할까요. 극장에 갈 때마다 이 글을 희미하게나마 생각했던 것 같아요.
팔도
극장을 왜 그렇게 좋아하세요?
민조
저에게는 안도감을 주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에릭 벤틀리 같은 비평가는 극장은 현대사회에서 관계 맺기에 피로를 느낀 사람들이 가는 곳, ‘사람의 성가심을 당하지 않고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곳’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어요. 사회에서 누군가의 자식, 친구여야 하고, 대화를 하고 반응을 보여야 하고, 이런 활동을 지속 반복하는 것에서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방해받지 않는 자기만의 공간에, 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모여 앉아서 무언가를 함께 관람하는 행위가 극장의 쾌락을 이룬다고 말하는데요.2) 저도 거기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극장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비평을 접한 후에는 그렇게 편안하게 외로울 수 있었던 것 역시 제가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자격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전혀 허용되지 않는 공간이 극장인 거죠.
하라
이번에 쓰신 리뷰와 문제의식이 맞닿아있는 것 같습니다.
민조
네. 생각을 많이 했어요.
팔도
저는 관객으로서 무대 위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치거나 그 사람의 떨림이나 호흡, 시선을 완전히 감각할 때가 되게 좋거든요. 그래서 연극이랑 영화랑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그런 순간들을 잡아내는 비평을 좋아해요. 줄거리, 대사보다도 움직임이라든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포착해내는 글이요. 제가 연극에 매료되게 만들었던 비평도 그런 식이었던 것 같아요. 지난 리뷰에 인용을 많이 했던 호세 에스테반 무뇨즈라는 퀴어 퍼포먼스 비평가가 있어요. 감정을 부인하면서도 지지하고 있는 손짓, 표정, 동선 이런 걸 아주 세심하게 읽어내는 연극 비평인데 그게 되게 좋았어요. 예전에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에 관해 쓰신 양효실 선생님의 비평3)도 좋았어요. ‘울었다, 왜 울었을까, 내 옆에 사람도 울었고 그냥 눈물이 나더라’ 거의 이런 내용이었던 걸로 기억하거든요. 저는 그런 비평이 좋더라고요.
진송
말씀을 들으니까 생각나네요. 객석에서 무대 위 눈물 흘리는 사람을 보면 ‘목격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거기서 배우와 나 사이 관계에 대한 책임감 같은 게 생긴다고 해야 할까요. 제가 이번에 리뷰했던 ‘2022 코미디캠프: 파워게임’ <상식적인 접근>에서 김은한 배우님이 계속 이런 대사를 해요. “이 연극을 본다면 내가 좀 귀여워 보일 수도 있다”. 이 대사가 함축한 의미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너는 그냥 외로운 관객이 아니라 무대 위에 선 나라는 배우와 소통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어’라는 위협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하라
예전에는 혹독할 만큼 논리정연한 글을 읽으면 감동했는데, 요새는 독자의 미묘한 정서를 건드리는 글에 눈길이 가요. 연극in에 리뷰 중에, 이지현 선생님이 쓴 <이인환각연쇄고리>에 대한 리뷰4)가 있는데, 그 글이 그래요. 이 글이 의도적으로 문학적인 부분이 있어요. 굉장히 재미있어요.

리뷰 쓰기의 재미

팔도
다음은 제 질문인데요, 동시대 연극에 대해 리뷰를 쓰는 건 왜/어떻게 재미있을까? 재미있는 리뷰는 어떤 리뷰일까? 리뷰의 재미는 뭘까? 라는 질문을 가져와 봤어요. 글을 쓰는 이유는 각자 다양하겠지만, 저는 그냥 재미를 위해 쓰거든요. 순수한 쾌락과 관련해서 리뷰 쓰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꼬아보는 걸 좋아해요. 예를 들면, 아무도 작품을 보면서 동성애적인 부분에 대해 말하지 않는데, 저 혼자 ‘이 둘이 사랑을 했다’고 꼬아보거나 퀴어링 해본다든지 하는 거죠. 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상상하지 못했던 부분을 꼬아보고서 말하는 글을 보면 재미있고요.
진송
저는 뭔가를 보고 나면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단지 글을 쓰고 나면 공허할 뿐입니다.
팔도
재미는 없어요?
진송
제게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가려움에 가까워요. 어떤 작품을 보고 난 후 그 작품에 대해서 계속 생각을 하게 돼요. 집에 돌아오는 지하철에서도, 샤워를 할 때도, 쾌락과 비슷한, 한편으로는 불쾌감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해소되지 않은 사고 작용이 있어요. 그런데 글쓰기를 통해서 그걸 만족시켜주고 나면 허무해요. ‘이 모든 것은 무슨 소용일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이걸 동력으로 해서 글을 쓰고 이것에 끌려다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리뷰 필진 진송. 검은 벙거지 모자에 하얀 마스크를 쓰고 있다. 아이보리색 니트에 베이지색과 붉은색, 녹색의 체크무늬 목도리를 둘렀다.
진송
하라
저는 답답함, 불만, 의심 때문에 글을 써요. 쓰고 나면 남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하니까 또 어디 올리고. 습관인 것 같네요. 남들이 안 하는 말을 하는 글이 재밌어요. 여론과 무관하게 자기 말을 하는 글, 그런 글은 의견이 달라도 재미있다고 느껴요. 글을 쓸 때 타성에 젖지 말자는 생각을 가끔 하는데, 쓰다 보면 나도 모르게 ‘쉬운’ 결론에 도달할 때가 있거든요. 예를 들어 ‘정치적 올바름’만 촉구하다 글이 끝나는 상황, 그런 결말을 경계하는 편이에요.
민조
하라 님 말씀에 공감되는 게 마감이 급할수록 결말이 자동완성될 때가 있어요. 웬만하면 사람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당위적인 이야기로 끝날 때도 있고요. 저도 그렇게 글을 마감하게 되면 괴로운 것 같아요. 글을 쓰면서 괴로운 순간은 많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재미있는 순간을 이야기하는 건 오히려 어려운 것 같아요. 그래도 재미있는 순간을 떠올려보면, 작품과 필자가 진짜 기가 막히게 잘 만났다고 생각되는 글들이 있거든요. 그렇게 잘 만난 리뷰를 읽으면 필자가 신나서 쓴 게 느껴져요. 연극에 대해 할 말이 분명하게 있어서 시작된 글은 때로 일반적인 리뷰의 형식을 벗어나고, 방향도 예측하기 어려워지지만 ‘이 사람만 쓸 수 있는 글을 내가 보고 있구나’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라
그런 게 있어요. 공연을 보고 나서 기분이 아주 좋은데 키보드 앞에 앉으면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어떤 공연은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닌데 글을 쓰다 보니 혹평만 나오기도 하고. 어떤 원리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저는 비평가입니다’

진송
자신을 연극비평가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최소한 ‘연극비평을 쓰고 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말하지 못한다면 왜인가? 이유가 궁금하다, 이게 제 질문인데요. 비평을 하면서 ‘저는 비평가가 본업이 아니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들을 봤는데 왜 그러는지 궁금해서 가져와 봤어요. 다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사유가 있어서 별 뜻 없이 ‘제가 비평가는 아니지만’ 하는 식으로 말문을 떼시는데, 각자의 개인적인 이유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옛날에는 이렇게 말했거든요. 왜냐면 다들 이렇게 말하니까 저도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해야 되는 줄 알았어요. ‘비평가는 아니고 대학원생인데 비평을 하고 있어요’ 이렇게요. 근데 이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냥 비평가라고 하죠. 그리고 저는 그게 왜인지를 생각해보고 있어요. 비평을 통해서 돈을 벌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저는 문학 비평을 하는데 문학계에서는 등단을 했는지가 프로인지 아마추어인지 구별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되거든요. 저는 『문장 웹진』이라는 지면을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신인상이나 신춘문예 등과 같이 으레 말하는 공식적인 형태의 등단으로 간주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요. 이런 것들 때문에 제가 저 스스로 비평가라고 말하는 상황을, 듣는 사람들이 저항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 자체가 너무 짜증났다고 해야 될 것 같네요. 저는 비평가라서 비평가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이 그걸 응원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그 말을 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죠. 사실 요즘에는 저도 글을 많이 쓰고 비평가로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서 그런 일을 겪을 일은 거의 없어요. 하지만 저와 같은 그런 사람들이 자신을 아마추어가 아닌 비평가라고 말했을 때 사람들의 박수를 받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게 참 고민입니다.
민조
‘평론가’는 어떠세요?
진송
차이가 있나요?
민조
관습적인 용례와 관련해서 각각의 단어가 주는 무게나 부담의 크기가 다른 것 같아요. 저도 초기에는 비평가라는 말을 기피했어요. ‘저는 비평가입니다’와 ‘비평을 하고 있습니다’가 저에게 많이 다르게 느껴져서요. 비평가도 ‘대가’나 ‘전문가’할 때의 그‘가(家)’를 쓰잖아요. 그 단어에 자동으로 따라붙는 자격, 인정, 권한, 책임 등의 문제를 ‘나의 것’으로 당연하게 수용하고 싶지 않은 싶은 심리는 이해가 가요.
하라
사회 분위기가 그런 게 있지요. 무언가를 한다고 하면 ‘뭘 했는데, 어느 정도 되는데?’를 반사적으로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비평을 써요’가 아니라 ‘비평가예요’라고 말하는 순간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일종의 관문이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아요. 등단하거나, 단행본을 낸다거나, 네트워크에 들어가야 한다거나…
민조
대표적인 사례로 예술인패스 발급 기준이 있잖아요.

‘작품’ 단위 리뷰를 넘어서

민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볼까요. 저는 ‘작품’ 단위 중심의 리뷰에서 탈피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해보았는데요. 이 고민을 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어요. 2018년 이후 페미니즘 연극이 늘어나면서 이전까지 연극을 보지 않던 관객들이 많이 유입되었어요. 작품의 미적 구조보다도 의제나 이슈에 더 관심 갖는 관객이 등장한 거죠. 텍스트, 작품 중심으로 연극을 관람하지 않는 관객이 있다는 게 제게 문제의식으로 들어왔어요.
두 번째는 연기비평의 부재에 대한 비판이 몇 년 전부터 존재해왔던 것 같은데, 전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특히나 관객들은 배우의 연기를 중심으로 기억하고, 느끼고, 기록하는데 일반적인 연극 비평은 보통 작품론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 일종의 괴리가 존재하는 것 같아요. 관객들이 연극 비평을 잘 안 읽는다면 연기비평의 부재와도 연관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연기자의 행위로부터 관객이 받는 느낌, 형언하기 어려운 무드에 대해서 비평이 전문적인 해석을 제공하는 데 실패해온 면이 있는 거죠. 이 두 가지 계기를 통해서 우리가 공연 리뷰를 작품 단위의 해석체로 고정하는 게 조금은 관성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했어요.
진송
작품 단위에서 벗어난 비평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많다고 생각해요. 결국 돈과 매체의 문제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필자에게 돈을 충분히 지불하고 지면을 제공해줄 매체가 있다면 더욱 다양한 비평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연기비평 같은 경우 교육의 문제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학교에서 연극과 관련된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연기에 대해 비평할 수 있다는 개념도 생소하거든요. 연극이나 연기를 접할 수 있는 창구가 가까이 더 많이 마련된다면 연기비평을 쓸 기회가 많아질 것 같아요.
하라
연극 공연을 올리고 설문을 취합하면 ‘모 배우 연기 잘해요, 멋져요, 움직임이 좋아요’ 이런 피드백을 많이 읽어요. 그런데 거기까지예요. ‘좋다, 멋지다’ 차원이 아닌, 정서나 움직임, 화술, 연기를 언어화하고 비평하려면 일정한 훈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팔도
저는 배우 비평을 해보고 싶어요. 연기비평과는 또 구분될 수 있는데. 완전 사심으로 좋아하는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훑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해요.
진송
영화 쪽에는 배우론이 있잖아요
팔도
덕질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평적 작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배우가 각 작품에서 보여주는 다양한 연기들, 각각의 기술들이 작품과 관객에게 영향을 미치잖아요. 각 작품마다 배우의 연기가 달라지는 게 형식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선호일 수도 있고, 단순히 어떠한 장면의 효과를 위한 것일 수도 있고요. 이런 이야기를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요. 다만 지식이 없어서.
진송
퀴어 이론가들의 연구 중에는 배우의 몸을 연구할 때 참조할 만한 연구가 많이 있잖아요. 배우들의 물질적인 몸 자체를 탐구한 것들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민조
요즘에는 일상 속에 연기가 편재해 있어서 다들 연기를 이해하는 감각은 예민하게 발달해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저희도 연기와 비연기 영역을 오가며 이야기하고 있는 중이고요. 부족한 게 있다면 결국 언어화의 영역일 텐데, 연기가 언어화되지 않는 이 상황 자체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잠재적 욕망과 현실적 결과 사이 괴리가 큰 이유가 뭘까요.
하라
관객들이 공연 중 어떤 배우를 보면서 연기를 ‘잘한다’고 느끼더라도, 그게 비평의 언어로 언제나 ‘좋게’ 출력되는 건 아니거든요. 무대 연기는 보기보다 추상성이 큰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기자의 능력과 공연 전반의 방향, 완성도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요. 저희가 이런 논의를 했으니 앞으로 글을 쓸 때 의식하면서 써보면 재미있는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

목격자와 증인의 역할

민조
다음도 제 질문인데요. 리뷰어에게 있어 목격자와 증인의 역할이 요청되는 때는 언제인가? 각자 리뷰를 쓰시면서 내가 본 것을 기록해야겠다고 느꼈던 적이 있다면 언제인지 물어보고 싶었어요. 먼저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저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공연을 볼 땐 그 연극을 통째로 기록해야겠다는 이상한 강박이 생기는 타입인 것 같아요. 기록으로 남지 않으면 아무도 이 사람들이 모여서 이걸 했다는 걸 모를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그 전말을 기록하고 싶어지는 것 같고요. 다른 한편으로 어떤 공연은 ‘상연되고 있다’는 감각보다 ‘의례가 수행되고 있다’는 감각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요. 예를 들어 극장에서 선언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그런데, 극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어떤 의례의 증인이나 참석자로서 참여를 요청받는 순간이 있는 것 같아요.
팔도
아까 진송 님이 ‘목격했다’는 감각을 이야기했잖아요. 저는 그냥 당하는 것 같아요. ‘앗 이거 봐버렸어. 어떡해’ 그런 순간이 와요. 가령 엄청 불쾌감이 남아있을 때가 있잖아요. 너무 별로라거나 이상하다고 생각되는 게 남아있을 때 스스로 해명해야 할 것 같은 순간들이 있어요. 어떤 공연이든 내가 원치 않았는데 목격당해버리는 공연에게 역할을 요청을 받는 것 같아요.
리뷰 필진 팔도. 회색 니트 모자를 쓰고 회색 후드티셔츠를 입었다. 동그란 안경에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다. 책상 위에 노트북이 펼쳐져 있다.
팔도
진송
저는 언제나 연극에 있어 목격자이고 증인이라 생각하지만, 저에게 뭔가가 요청되고 있다고 느낄 때는 정말 드물어요. 저는 추(醜) 체험에 취약한 사람인데 그만큼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취약해요. 무대 위에서 추 체험을 하는 혹은 추 체험을 하고 있다고 짐작되는 배우나 장면을 보면 매혹 혹은 동일시의 사이에 사로잡혀서 목격에의 요청, 요구에 가까운 느낌을 받는 것 같아요. 이 목격에 대해서 너무 깊게 빠져들어서. 저도 아직 사명감을 느낄 정도로 성장하진 못해서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 같아요.
하라
무언가를 기록하고 싶을 때, 저는 제가 ‘목격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느껴요. 반면 ‘증인’은, 판단, 유불리, 좋다, 나쁘다, 불쾌함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주체라고 생각해요. 여기서 ‘다른 사람들’의 역할도 중요한데요. 증인으로 쓰는 글은 외적 동기가 강하거든요. 저는 연극 비평을, 혼자만의 활동이라기보다는, 타인들과 함께 호흡하며 만들어 나가는, 유기적인 활동이라고 느껴요. 어떤 공연이 비난받더라도, ‘아니야 이건 좋은 공연이야, 당신들이 못 본 지점이 있어’ 이런 식으로 변호하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그럴 때 증인의 자의식이 생기는 것 같네요. 저와 작품의 관계에서 나오는 글이 아닌, 저와 작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관계 맺기에서 나오는 글을 쓸 때.
민조
말씀 들으니까 목격자와 증인이 다르다는 생각이 드네요.

연극의 아카이빙

팔도
마지막 질문입니다. 연극을 아카이빙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첫 만남에서 민조 님께서 퀴어 연극 아카이빙에 관심이 있다고 하셔서 던져본 질문입니다.
민조
아카이빙을 하는 데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나는 자료들을 수집, 발굴, 범주화해서 말 그대로 문서고를 만드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어요. 두 번째는 특정한 관점에 따라 자료들을 선정하거나 의미를 부여해서 하나의 연결망에 끌어들이는 방식이에요. 첫 번째 방식이 객관적인 기준에 부합하는 사료들을 전수 수집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는 주관적인 해석을 개입시켜 자료를 선별하는 것인데, 퀴어 연극 아카이빙은 두 번째에 속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트랜스, 퀴어의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때의 어떤 실천을 퀴어 연극 아카이브에 포함시킨다는 건 현재적 관점에서 호명하는 것이잖아요. 그랬을 때 아카이브는 자료를 모으는 것이기도 하지만 해석의 지평을 늘려가는 것이기도 하고요. 사실 지금 퀴어나 트랜스의 관점에서 한국연극사를 역사적으로 접근해보려는 시도는 거의 없다시피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지금의 퀴어나 트랜스 연극에 대해 논하는 비평적 두께에도 한계가 따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라
자료는 많이 남을수록 좋은 것 같은데, 어떻게 연극을 아카이빙 할 수 있을까도 고민이에요. 요즘은 공연을 영상으로 촬영하기도 하지만, 영상이 현장의 모든 것을 담아내진 못하잖아요. 그렇다면 다른 자료들이라도 체계적으로 모아 보고 싶어요.
민조
그럼 각자 천만 원씩 주어졌다고 했을 때 아카이브 해보고 싶은 주제가 있으신가요?
하라
장소특정적 연극. 극장이 아닌 곳에서 열린 연극. ‘이런 데서 연극을 했다고?’라는 생각이 드는 작품들을 모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 공연들은 극장의 공식화된 문서로 잘 남지 않으니까요. 제작자가 마음먹고 아카이빙하지 않으면 자료가 날아가기 쉬우니까요.
민조
팔도 님은 배우?
팔도
네네.
진송
저도 젠더 횡단하는 배우들 그리고 미성년 배우들을 아카이빙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소규모 연극들.
하라
연극in도 일종의 아카이브잖아요. 그래서 저도 올해는 많이 찾아보고 발굴하며 아카이브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1. 안팎, 「친애하는 극장종말론자 여러분께 ― 적대하는 객석을 향해」, <극장종말론>, 2021, 12, 15.
    https://www.generalkunst.com/aeot
  2. 에릭 벤틀리, 한상철 역,『연극의 생명』,『연극평론』 12호, 1975, 78~79쪽 참조.
  3. 양효실, 「우루를 놓고 울었던 우리는 쥐였을까? - 안티무민클럽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웹진 연극in 제216호, 2022,4,14.
    https://www.sfac.or.kr/theater/WZ020400/webzine_view.do?wtIdx=12727.
  4. 이지현, 「누군가 머리를 늘어트리고 당신을 바라보면 눈을 감아도 좋습니다 - 콜드슬립 <이인환각연쇄고리>」, 웹진 연극in 제211호, 2021.12.9.
    https://www.sfac.or.kr/theater/WZ020400/webzine_view.do?wtIdx=12600.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