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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곡 쓰기, 희곡 읽기, 다른 손으로

‘다른 손(hands/ guests)’ 희곡 결산 수다회 (1)*

이홍도

제213호

2022.01.27

지난 몇 개월간 [희곡] 코너에서는 ‘다른 손(hands/guests)’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들이 독자를 만났습니다. 희곡 릴레이를 마치면서 극작가들이 서로의 작품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일시: 2021년 12월 18일 토요일 오후 2시
장소: 서울연극센터 아카데미룸
진행: 윤미희(극작가), 이홍도(극작가)
참여: 김옥미(극작가), 김주희(극작가), 김지현(극작가), 박아영(극작가), 박예지(극작가), 송재원(극작가), 조소민(극작가), 홍경진(극작가)

박아영 <D- (day + day)>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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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영
조소민
공존을 주장하는 인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인간들이 이용하는 수단들만 등장하는 희곡이란 점이 인상 깊었고 매력적이라고 느꼈다. 마지막 장면에서 ‘K-영희’가 날아가는 ‘하루’를 바라보는 모습과 대사에서 비질(Vigil)이라는, 축산업 현장에 가서 그것을 지켜보는 행위가 생각이 났는데 그런 상징이 있는지 작가분께 여쭤보고 싶다.
송재원
제목이 <D- (day + day)>인데, 어떻게 보면 하루살이는 ‘day’밖에 없는 존재 같음에도 그 존재가 기억을 전시하고 더 많은 것들을 가져갔다는 이미지들이 좋았다. 인간이 모르는 다른 하루를 하루살이가 이어간다는 설정도. 제목을 비롯하여 하루살이가 가지고 있는 느낌 자체가 좋았다.
이홍도
이 작품에서 ‘하루’라는 단어가 하루살이를 지칭했다가 ‘day’라는 맥락이었다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도 매력적이다.
홍경진
‘하루’들은 태어날 때부터 공생을 하려면 인간들을 도와야 한다고 세뇌된 상태이다. 공생을 위해서라 말하지만 사실 인간만을 위한 일이다. 하루가 만들어내는 기억 자체도 인간에 의해서 미화되고 왜곡된 것인데, 공생이라는 게 모두를 위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옥미
희곡은 한 방만 있으면 끝난다고 생각하는데 한 방이 있다. ‘하루’가 역할을 못 한 거고, 전달해줄 기억이 있어야 하는데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는 오늘 하루의 기억으로 자기의 존재가 증명됐다고 한다. 그것이 사랑스럽고 귀엽고 아기자기하지 않나.
박예지
제목이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D- (day + day)> 괄호를 먼저 계산하면 ’D-2day’로 읽힌다. 어쩌면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하루’들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멸종과 세계의 멸망 디데이가 하루하루 늦춰지는 게 아닐까. 그래서 ‘하루’의 행위가 하루와 인간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도 있겠다. 제목을 어떻게 짓게 되셨을까 궁금했다. ‘하루’ 같은 캐릭터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고 자기 자신을 찾아가려는 모습이 아이러니하지만, 읽으면서 인간인 내가 위로받기도 한다.
박아영
수많은 곤충 가운데 왜 하필 하루살이였을까. 하루살이가 하루를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하루살이는 태어날 땐 눈이 있는데 나중에 퇴화된다고 한다. 그 후엔 하루에서 일주일 정도 산다고 한다. 그 점에서 착안하신 걸까 싶고. 작가님이 썼던 이야기에선 하루살이가 자기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나아간다. 그 세계는 어떤 세계였을까. 약간 비판적인 생각은 하루살이를 너무 직관적으로 다룬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나중에 심사평을 읽으니 도구적으로 쓰인 작품이 여럿 있었다 했을 때 이 작품을 얘기하신 게 아닐까 싶었다. 매력적인 작품인데 소재가 1차원적으로 사용된 건 아닌가.
김지현
기억에 대해서 나누는 대화가 흥미로웠다. 기억은 현재가 아니다, 기억에 대한 자기만의 주장을 얘기하는 두 존재들이 기억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궁금했고, ‘하루’가 자신의 선택으로 하루를 보냈다 하는데 어떤 하루를 보냈을지 궁금하여 생각하게 됐다.
김옥미
자신과 가족, 자신과 사회, 자신과 세계를 다루는 희곡이 있다면 그 가운데 제일 다루기 힘든 게 자신과 자신의 싸움에 대한 거라고 생각한다. 이 ‘하루’는 표면적으로 보면 ‘K-영희’와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도구적으로 쓰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김주희
기후위기, 동시대에 대한 글, 다가올 미래에 대해 예견되는 게 있는데 하루살이라는, 정말 너무나도 작고 누가 죽든 살든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존재로 매일의 멸종, 죽음부터 아주 거대한 죽음까지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작가의 시선에 포착된 세계가 인상 깊었다. 이렇게 따듯한 시선을 가진 작가님과 얘길 나누면 아주 작은 존재들이 치유 받을 것 같은 느낌이다.

김옥미 <연극모독>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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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미
송재원
이 작품을 보면서 연극을 모독하기 위해선 연극을 잘 알아야 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어떤 희곡을 써야 할지에 대한 생각들, 일상에서 보는 것도 연극이 될 수 있는데 어렵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들을 많이 했다.
김주희
물론 희곡은 세분화된 설계를 바탕으로 쓰이지만, 어쩔 줄 모르는 내면의 충동을 동력으로 삼아 쓸 수 있는 희곡도 있는 것 같다. 이 희곡이 그런 희곡이지 않을까 싶다. 동시에 젠가와 도미노를 쌓고 무너트리는 이미지 속에서 규칙들이 정해지는데 그런 규칙마저도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스스로를 의심하는 장치들로 작용하면서 흥미로운 형식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배우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좀 더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배우의 몸을 통해서 희곡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데, 한편으로 배우는 얼마만큼 폭력을 감당해야 하는가, 우리가 무대에서 아름답게 바라보는 일련의 행위들 속에 배우는 정작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가 싶었다. 이 작품이 또 좋았던 게, 연극에서의 허상에 대해 짚어나가는데, 그게 비판으로 그치지 않고 무력감과 슬픔을 주는 지점이 있다. 그래서 당신이 하려는 그게 과연 뭔가요, 라고 묻기 위해 작가가 이야기를 짓고 쓰러트리는 방식이 인상 깊었다.
박아영
이 작품 보고, 작가님 신춘문예 당선 소감문도 잘 보았다. 너무 좋았던 게, 배우들을 위한 규칙의 마지막 부분으로 손이 주제지만 주제에 연연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다. 다른 작품들 보면 손이라는 주제에 억지로 맞추려는 느낌을 주는 작품도 있었다. 그렇다는 평가도 있었던 것 같고. 근데 그런 걸 한 방 먹이는 듯해 재밌게 보고 쭉쭉쭉 읽었다. 이걸 실험극으로 만들면 재밌겠다. 어떤 배우를 캐스팅하느냐에 따라서 배우들이 다른 대사를 더 만들어서 당대에 말하고 있는 다른 메시지를 넣을 수 있겠다. 이런 저런 재밌는 방식으로 공연화될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홍도
많은 것들을 멕이는 작품인데 그 가운데 ‘다른 손’이라는 주제도 있었던 것 같다.
김옥미
주제를 억지로 덧대기 위한 지면이라고 마지막 결말을 내버리는 삐딱한 발상이 좋았던 것 같다. 장점이 있다면 순서를 거꾸로 읽어서 1, 2, 3장을 섞어도 문제없을 것 같고. 배우들이 알아서 다 엎어도 좋을 것 같고 그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이홍도
형식 자체가 대단히 강력한 형식을 차용하고 있는 것 같다.
홍경진
작품을 읽으면서 연극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연극에는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도 많은데, 이 작품은 사회를 고발하지만 관객들이 불편해할 수도 있다고 변명을 하면서, 좀 더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안전한 작품을 올림으로써 관객과 창작진 모두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고.
윤미희
지금 살짝 거꾸로 읽어봤는데 잘 읽힌다. 기회가 되고 상황이 된다면 낭독 공연 같은 걸 하고 싶다는 생각을 계속 해왔는데, 오늘 모임 시간이 열 시간이었다면 한 편씩 낭독하자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박예지
신랄하고 날카롭단 인상을 받았는데 그게 매력적이었다. 작가님이 쓰시면서 스스로 재밌게 쓰시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했다. 그리고 어떤 이미지에 멈춰 있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난 인간을 위해 인간이고 싶지 않아요. 나는 연극을 위해 연극이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을 하는 그 장면이 좋았다. 작가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형식을 파괴하면서도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잘한다고 느꼈고,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이 작가님은 계속계속 앞으로 나아가시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윤미희
오늘 여기 오신 분들에게 사전에 받은 감상평 가운데 ‘희곡 자체로 연극임을 확인할 수 있어서 읽으며 기뻤어요’라는 말이 있었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홍도
이 작품의 언어는 뒤섞이고 범람하고 서로가 서로를 벗어난다. 말이 말을 타고 넘으면서 뭉개뜨리는 과정에 말하지 못한 말로 뻗어 나가는 힘이 있다. 내용적으로 작품이 넘지 못하는 한계는 현실의 한계이기 때문에 작품도 그걸 두드리지 내용적으로 넘을 수 없는데, 그 지점에서 넘어내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주는 건 언어적인 힘이었던 것 같다.

홍경진 <Raison d’être (부제: 염소의 꿈)>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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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진
조소민
존재에 대한 고민이 담긴 제목인 것 같다. ‘다른 손’ 공고를 보자마자 인간이 손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주제라는 생각을 했었다. 이 작품은 특히 손이 없는 존재를 끌어냈단 점에서 아이디어의 참신함과 그것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전개가 좋았다. 내용적인 측면에선 소속되어 있는 구조 안에서 분리되고 싶은 욕망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한다. 회사에 다니면 퇴사하고 싶고, 연극을 하고 있으면 연극 탈주하고 싶고 그런 마음이 염소한테도 있구나, 싶어서 재미있었다. 염소는 이렇게 분리가 됐는데 그 이후의 이야기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처음에 읽었을 땐 들었다. 그런데 두 번 정도 읽어보니까 이 분량에서 다룰 수 있는 카타르시스는 이게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항상 이걸 했을 때 그다음은 뭐가 올까 하는 강박에 시달린다. 염소뿐만 아니라 타인의 서사에, 모든 인물에게 나도 모르게 다음 행동을 강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염소는 이미 나트륨과 떨어진 것만으로 욕망 해소가 되었는데 독자인 내가 거기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걸로 그치지 않고 요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던 재미있는 희곡이었던 것 같다.
송재원
재미있게 봤던 건 염소가 끊고 나가고 싶어 하는 감정과 끝에 집주인이 그만두고 싶어 하는 감정이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져서다. 염소가 끊고 나가서 하고 싶어 하는 일들이 결국에는 인간이 다른 것이 되고 싶어 하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지금 이 상태에서 벗어나도 크게 별다르지 않은 삶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을 본 것 같다.
이홍도
이 작품에서 염소와 나트륨은 인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로움이나 주체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언뜻 보기엔 비인간 주체들에 대한 이야기가 인간에 대한 걸로 수렴되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인간의 삶이 사실은 직장 때문에 쩔쩔매고 전혀 주체적이지 않고 자유롭지 않은 모습으로 나오는 걸로 내용이 뒤집혔다. 저도 결말의 유머랄까 반전에 대해 비슷한 맥락으로 느꼈다.
박아영
귀여워서 <토이 스토리>가 생각이 났다. 다루고 있는 게 인간 행위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갈등 같다. 인간의 판단 자체도 사람이 하는 건데, 얘네도 본의 아니게 갑작스러운 실수, 인간이 물을 떨어트려서 분리된다. 우리도 살다가 벼락 맞듯이. 다른 애들도 나오면 어떨까, 아동극으로 해봐도 재밌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귀여운 발상이 자연스럽게 교육연극으로 발전할 수 있는.
박예지
손을 맞잡는다는 발상이 너무 귀엽다고 생각했다. 처음 지문을 읽을 때, 아주 좁고 깊게 들여다보다가 어느 순간 분자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세계가 확 넓어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 재미있었다. 중간에 보면 “왜 하필 소금이 됐을까 물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말이 나오는데, 마지막에 물이 쏟아져서 끊기니 어떻게 보면 꿈을 이룬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혼자 했다.
김옥미
의인화하는 게 어려울 것 같다. 고전서사 원형을 그대로 오마주해서 넣으면 재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소금이 된 선왕이 나타나고, 햄릿 같은 염소가 나오고. 이렇게 오마주하면 재밌는 코미디극, 그러면서도 주제를 크게 담는 희곡이 되지 않을까. 그런 아이디어가 마구 샘솟는 좋은 작품이었다.
김지현
아이디어 자체도 너무 신선하고 흥미로웠는데 자유로움에 대한 관점도 재미있었다. 자유라는 게 혼자서 온전할 수 있는 것이라는 그런 관점 자체. 그들이 말하는 결합도 물론 인간과 닮아 있지만 새로운 관점이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송재원 <바깥의 호흡>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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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원
이홍도
‘다른 손’ 주제 중에 장르 자체가 SF인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것 같다.
윤미희
한국 희곡에 아직 SF가 별로 없는데, 이번 공모에 로봇이나 SF 관련 이야기가 많이 들어와서 굉장히 고무적이라고 생각했다.
홍경진
희곡에선 이런 SF 작품을 처음 봐서 신선했다. 인간에겐 자연스럽게 있을 거라 생각되는 공기가 인간을 거부한다는 발상도 너무 참신했다. 장르는 SF지만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되는데, 사회적으로 실격당한 존재가 자신을 가지라는 인공지능의 말을 듣고 중요한 선택을 한다는 결말이 좋았다.
김지현
‘천태하’는 SOS를 했는데 사람들이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어느 정도 대화가 된다는 인공지능마저도 “저도 천태하 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한다. 그러니까 ‘천태하’가 원한 건 완전한 대화 같은 게 아니라 이 정도의 거리감을 가진 대상이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했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다.
박아영
‘천태하’가 인류 중에 선택됐을까. 그 생각을 계속하며 읽게 됐다.
김주희
많은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주제 같다. 연출분들이 탐을 내는 작품이지 않을까 싶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재미있던 건 시뮬레이션이다. ‘천태하’는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하긴 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는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방어코드가 해제되며 그 결과 역시 예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인물은 결국 그것을 행하는데, 이 드라마틱한 과정이 ‘천태하’라는 뒤처지고 고립된, 그래서 개성적인 삶을 살 수도 있는 인물에 의해 빚어지는 게 좋았다. 이 인물은 스스로 많은 시뮬레이션을 하며 살아오지 않았을까 싶다. 작가님은 나중에 더 암담한 미래가 찾아왔을 때 제일 뒤처진 사람이 뭔가 큰 결단을 내리는 존재가 될 것이라고 보지 않으셨을까 싶다.
조소민
이래서 사람들이 SF를 즐겁게 읽는구나, 생각을 했다.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과학을 다루면서 사람들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뭔가가 나오는데도 지금과 현재를 생각하게 한달까. 왜 이름은 ‘천태하’고, 어떤 집단도 아니고 여기 연극 안에서 부여가 됐을까. 인간이든 자연이든 동물이든, 생존하기 위한 과학이 있고, ‘천태하’도 우연히 발생한 존재인데, 그걸 귀중하게 사람들이 생각해야 하는데, 숨 쉴 수 있는 기회니까 그걸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평소에도 사람들은 숨을 쉴 수 없게 되는 선택지만 선택해왔다고 생각한다.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걸 잃어버리고 다른 걸 만든다든지. 그런식으로 ‘천태하’도 없어져 버렸다. 어쩌면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인간들의 선택이 생각나고 많은 고민을 하게 하는 연극이었던 것 같다.
박아영
숨 쉬면 마비되어서 자살하고 그런 영화가 있었다. 연극이든 영화든 이런 게 뜨는 이유가, 시대 흐름이 되게 무서워서인 것 같다. 예전에 친구가 나중에는 방독면 쓰고 다니게 될 수도 있을 거라 말하는 걸 들었는데. 지금처럼 마스크를 오래 쓰게 될 줄 몰랐다.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이 최종포식자가 되어서 인간에게 너희 여기서 살 수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다. 세상이 참 살기가 힘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홍도
SF적인 그 숨막힘이 오늘날의 현실과 닿아 있는 얘기로 느껴진다. 그 점 때문에 정보들이 많이 생략되어 있고 여백이 있어도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윤미희
제목이 굉장히 좋았다. 또, “그러니까 조금 더 자신을 가지셔도 됩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이런 따뜻한 대사를 희곡에서 본 게 좋았다.

김주희 <마지막 미노타우로스>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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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희
송재원
인간만이 순환되지 않는단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인데, 어떻게 보면 인간이 먹었던 존재, 인간이 지배했던 존재와 관계가 역전되는 작품이다. 동등한 위치에 놓이고, 어떻게 보면 섞인 존재까지 나오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인간은 과거에 자신이 지배했던, 또는 먹었던 기억을 가지고 압박하고, 폭력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이 인간의 본질인가 하는 생각들을 하게 됐다.
김지현
인간이랑 짐승이 각자 다른 생존방식을 가르친다. 거기서 새끼가 던지는 질문이 흥미로웠다. 계속 질문을 던지다가 마지막에는 슬픔이라도 알려 달라는 질문을 한다. 이 세계의 거의 마지막 질문인 것처럼 말하지만 타인한테 가장 배우고 싶은 것이 그 사람의 슬픔일 수도 있어서 이 질문이 와닿았고 마지막에 새끼가 혼자 스스로 배워야 하는데 어떤 것들을 배우게 될까 상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조소민
미노타우로스 신화 자체가 인간이 인간 아닌 짐승을 먹이 혹은 괴물로만 생각해왔다는 걸 보여주는 신화라고 생각하는데, 미노타우로스 신화를 통해서 굉장히 직접적으로 육식에 대해 비판하는 태도가 존경스럽다고 생각했다. 나는 쉽게 말해서 욕먹을까 봐, 주제를 항상 작품 속에 방어적으로 제시했는데, <마지막 미노타우로스> 같은 작품을 보면 감사한 마음이 든다. 적극적인 태도로 말씀을 해주시니까. 또 그게 재밌게 읽히는 작품이어서 신선하고 존경스러웠다.
김옥미
단막극에서 다룰 수 있는 주제가 한정적인데 이렇게 거대한 담론, 주제를 다뤘다는 시도가 놀라웠다. 단막에서 누굴 죽이기 쉽지 않은데 죽였단 것도 놀라웠고 완결감 있게 처리가 됐다는 것도 놀라웠고, 많이 놀랐던 것 같다. 특히나 많은 생각거리를 가지게 됐는데, 생존을 위한 삶과 삶을 위한 생존이 다르고도 같구나 생각을 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생명은 어떻게 교차점을 찾아서 나아갈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박아영
다른 얘기인데, 교잡이라는 단어가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씁쓸했다. 이방인 같은 느낌이 들어서 새끼가 너무 불쌍했다. 교잡, 이방인 그런 슬픔이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태어났는지도 모른 채, 자신을 살리기 위해 무엇이든 한단다”라는 그 대사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되게 이기적인 마인드인데 그런 포인트가 와닿았던 것 같다.
이홍도
이 작품을 읽으면 물리적으로 드는 감각이 있는데 그걸 풀어서 말씀해주신 것 같다.
윤미희
이 작품은 비인간의 이야기면서, 가장 인간적인 듯하다. 우린 인간이야, 어쩔 수 없는,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박예지 <갈라테이아는 행복하지>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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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지
이홍도
갈라테이아라고 하는 소재가 흥미로웠다. ‘다른 손’이라는 주제 하에서 기가 막히게 사용이 되었다. ‘갈라테이아는 행복하지’ 이후로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듯한 제목도 매력적이었다. 오늘 좌담회 대상작 중 분량은 가장 짧은 작품 가운데 하나일 텐데 이야기할 거리와 여백은 대단히 많게 느껴진다.
조소민
피그말리온 신화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왔었다. 이 신화에서 갈라테이아라는 인물은 주인공 캐릭터임에도 지워져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걸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을 만나서 반가웠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작품으로 다룰 때 인간이 존재론적으로 디폴트고 우월한 존재라고 전제한 작품이 많은데, 비인간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보통 생각하기에 동물이 인간으로 태어나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인간은 나중에 벌을 받는단 맥락에서 동물로 태어나기도 하는데 그건 인간으로만 살아본 존재가 하는 생각이란 의견이 떠올랐다. 비인간이어서 인간으로부터 행해지는 폭력이 있을 수 있고 약체로서 느끼는 한계일 수도 있지만. 사회 안에서 내가 여성으로 차별받았다고 해서 다음 생에 남성으로 태어나란 말이 위로가 아닌 것처럼 비인간도 똑같은 건데 그걸 간과하고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인 것이다. 읽으면서 다른 손을 가지게 된 1이 나중에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했는데, 지문에 “1의 행동은 1만 알 수 있다”라고 되어 있어서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김주희
마지막 문장에 “그래서 결국 이 희곡은 절대 완성되지 못할 거야. 넌 평생 나를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라는 게 묘하게 극작가라는 존재에게 던지는 말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점점 SF적인 형식과 다양한 비인간 존재에 관심을 가지며 글을 쓰고 있는데, 그것이 결국은 인간에 의해 쓰이기 때문에, 그들을 인간처럼 이해하려는 태도가 없지 않다. 그런 한계를 짚는 대사 같기도 하면서, 극작가에 대한 묘한 희망 또한 느껴졌다. 어쩌면 그걸 극복하려고 부단히도 노력할 존재가 바로 극작가이지 않을까 싶어서. 또 극작가에 의해서만 발견되는 지점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미래의 시점이지만 현재의 극작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홍경진
여러 번 읽을수록 좋았다. 0은 희곡을 쓰는데 어떻게 전개해야 될지를 몰라서 1과 대화를 해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피조물이 나오는 작품에서는 그들이 대개 인간을 동경하거나 인간 사회에 속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1이 인간의 삶과 자의식을 가지고 사는 게 축복이 아니라는 점을 짚어주는 것이 좋았다. 마지막에 1이 0한테 너는 영원히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까 이 희곡은 완성되지 못할 거라고 하는데, 이 자체로 희곡은 완성됐다는 점이 재미있었다. 0과 1이 디지털에서 상반된 상태란 점이 0과 1의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을 나타낸 것 같아서 좋았다.
김옥미
피노키오가 생각났다. 피노키오가 제페토 할아버지를 막연히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의 이상향으로 태어나는 존재도 참 고독하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신선한 의문이다.

김지현 <넥스트 타로>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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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박아영
너무 귀여운 거다, 로봇이 자기 혼자 식식거리면서 여의도 가서 타로를 보고 왔다는 설정이. 그런데 로봇이 맞는 말만 해서. 로봇이 인간에게 손금을 왜 대강 그렸느냐 묻는 게 인상 깊었다. 옛날엔 손금성형도 있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대단한 일을 할 것 같은데, 여기 나온 인간 캐릭터는 그런 캐릭터는 아니잖나. 그런 걸 보면 인간이 미개한데, 로봇이 인간을 많이 닮아 있어서 흥미로웠다. 결말에서 로봇이 왜 피아노를 치면서 끝날까 궁금했다.
김옥미
‘다른 손’이라는 주제 때문은 아닐까. 손금이 그려진 손과 연주에 나오는 손이 다른 손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봤다. 시리즈로 제작되길 바랐다. 관상도 보고. 로봇 광대뼈가 두툼하게 깎였구나, 이러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로봇을 대상으로 한 관상가가 나왔으면 재미있겠다. 타로뿐 아니라 관상도. 굿도 해주고. 아이디어가 많이 생산될 수 있는 좋은 작품으로 느껴졌다.
이홍도
피아노 치는 것이, 과거부터 로봇이라 하면 지적으로 인간을 뛰어넘되 감성이 없고 결격된 존재, 부족한 존재로 나타난 반면 이 작품의 결말은 편견과 과거의 관습들을 깨트리는 장치 같아 보였다. 그래서 뚜렷한 인과관계에서가 아니라 그냥 정서적으로도 마지막 장면이 이해가 됐다.
송재원
로봇에 대한 설정이 부여되는 부분부터 좋았고 하루 만에 만들어졌다. 무엇보다 ‘다른 손’에 집중되었던 작품, 가장 충실했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손금에 운명이 나오고 한다는데 로봇도 손금에 따라 능력이 바뀌는 건가 생각이 들었다. 손금이 바뀌었을 때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 다른 손에 집중되어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그런 점들이 좋았고 잘 와닿았다.
이홍도
맞다. ‘다른 손’에서 어떻게 로봇 손금 발상이 나왔나 무척 궁금하고 기가 막히다.
박예지
어렸을 때 인형을 좋아했는데, 인형을 새로 사면 생일도 산 날짜에 맞춰서 정해주고 여기 나오는 것처럼 별자리도, 운세 같은 것도 봐주고 했다. 그래서 추억이 떠올랐다. 귀여운 작품이다. 인간이 아닌 로봇의 손금을 새로 그어준다는 설정은 처음 봐서 흥미로웠다. 로봇은 손금이 바뀜으로써 자신의 운명이 바뀐 건데, 스스로 그렇게 운명을 개척하려고 했다는 게 일반적으로 봐왔던 설정과 차별점이 느껴져서 좋았다. 마지막에 “새로운 언어를 배워보듯, 틀리기도 하면서 건반을 짚어나가는 손”이라고 묘사해주신 장면이 좋았다. 묘하게 따뜻해지는 문장이었다.
김옥미
아이디어가 있다. 무당은 스스로의 운명을 알지 못하고 그게 업이라고 한다. 자신의 운명을 알려면 남의 운명을 봐줄 수밖에 없는데 남의 운명을 봄으로써 자신의 운명을 볼 수밖에 없는 형식으로 살아나가는 저주이자 축복인 거다. 로봇이 서연의 결핍을 알아서 서연을 위해 다른 로봇을 추천해주거나 인간의 운명을 로봇이 점점 알아나갈 수 있게끔 데이터를 모아나가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 SF는 휴머니즘으로 끝나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박아영
로봇의 시선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모습이 들어가면 어떨까 싶었다. 손금 대강 그렸다고 분노하는 장면도, 신이 있으면 죄지은 놈들 죽여야지 왜 이렇게 살게 하는가 싶은 것처럼 로봇 입장에서도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가 시답잖은 애인데, 이런 식으로 스토리텔링을 더 할 수 있지 않을까.
조소민
손금 성형을 처음 접했을 때 되게 우스웠다. 손금이 잘못 그어져서 운명이 이런 건가, 운명이 이렇기 때문에 손금이 그런 걸까. 앞뒤가 헷갈린다. 로봇이 자신의 목적에 대해 고민하는데, 사람은 목적이 있어서 태어난 건지, 태어나서 목적을 만들어가는 건지 하는 생각도 이 작품을 통해서 생겼던 것 같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힘들고 그럴 때, 타로를 많이 보러가서 위로받는 터라 로봇의 분노가 백번 이해가 간다.
홍경진
로봇이 왜 피아노를 치게 되었는가에 대한 생각인데, 서연이 사실 어릴 때는 피아노를 좋아해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거나 했는데 어떤 이유로 그만두게 된 게 아닌가. 그런 꿈이 로봇을 만들 때 무의식적으로 들어간 게 아닐까. 그래서 마지막에 음악이 나올 때 서연이 속수무책으로 눈물을 흘린다. 이게 로봇이 자신의 꿈을 대신 이뤄져서이지 않을까.

조소민 <세면대 옆 세이렌>
https://www.sfac.or.kr/theater/WZ020700/webzine_view.do?wtIdx=1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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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소민
김옥미
이걸 보고 나는 얼마나 때 묻은 인간인가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아름답고 착한 작품이 있구나 생각했고. 세이렌을 차용한 거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었고. 정말 코랄빛 같다, 아름답고 착한 작품이다, 나는 쓸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했다.
이홍도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이너피스(Inner peace)가 있다. 작가님이 가지고 있는 그것일 텐데 읽는 사람도 이입되어서 보게 된다.
윤미희
사전에 받은 감상평 가운데 ‘축축한 동화 속에 풍덩 빠졌다 나온 느낌’이라는 멘트가 있는데 이 맥락과 어울리는 것 같다.
송재원
제일 좋았던 게 욕실 겸 화장실이라는 무대가 주는 힘이었다. 어떻게 보면 일상적인 공간 같은데 그걸 우주적인 공간으로 만드는 힘이 있다. 주제를 굉장히 극적으로 만들 수 있는 공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꼭 이곳이어야만 해’라는 느낌을 줄 수 있는, 무대가 그려지는 작품 중에 하나였다.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습한 그런 분위기를 줄 수 있는 힘이 있게 무대 공간 설정이 잘 되어 있다.
이홍도
기능적인 지문으로 그치지 않고 정확한 분위기로 끌고 가는 문체가 작가님께 있다.
김옥미
읽고 있으면 약간 은총 받는 느낌.
이홍도
언어적인 질감도 너무 좋고. 현실적인 세면대와 환상세계, 물 속 세계와 같이 이질적이고 서로 먼 것들이 결합되어 있는 게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 같다. 작가님의 구력과 에너지 때문에 잔잔한 가운데서도 동시에 역동적이고 뭉클한 무언가가 작품 안에 있다.
박아영
화장실은 씻는, 정화 같이 의식적인 행위를 하는 곳이다. 화장실을 무대로 한 게 지구를 정화시키는 느낌을 줘서 좋았다. 따뜻하고 몽글몽글하고 파스텔톤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지면 진짜 행복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족이 진화되면 포식자가 되어서 살아갈 텐데 ‘왜 인간이 사라지면 모든 게 완벽해질 거란 것에 의심을 안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마다 인간은 사라져도 된다 해석하고. 그래서 또 궁금했던 게 세이렌은 얘를 왜 도와줬을까. 선혜와 세이렌의 관계는 어땠을까. 이단아라서 도와줬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그 세계 안의 이단아들이 모인 건데 그들만의 세계는 무엇일까 생각이 들었다.
김주희
우리가 미래에 노인이 되었을 때, 그간 저지른 책임에 대해서 과연 어디까지 떳떳할 수 있을까, 또는 그런 기억을 회복하지 못해서 굉장한 고통 속에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작품 속 선혜를 통해 하게 된 것 같다. 세이렌의 이야기라든지 세희란 인물이 선혜가 갖고 있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정돈하기 위해 창조해낸 인물처럼 느껴져서, 그런 지점에서 미래의 내가 어떤 기억에 갇혀 있을까 상상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의 좋은 점 중의 하나가 인간의 따듯한 구석이라든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주고받는 작은 정, 작은 메시지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그것이 희곡 곳곳에 묻어나서 너무 멋졌다. 작가님께서 자신이 해야 될 말을 작품으로 전하면서도 그 안에서 여러 종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박예지
읽으면서 마음이 먹먹해진달까, 굉장히 다정한 희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혜는 “상대가 제 말을 알아듣지 못할까 봐, 일부러 본래 자신의 속도보다 느리게 말을 하는” 버릇이 있다고 묘사를 해주셨는데, 여기에 맞춰 엄청 섬세하게 대사들을 쓰신 것 같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런 어투로 얘기하고 있겠구나 상상이 되었다. 중간에 세희가 “그냥 이 일을 계속 함께 이야기했으면 해서”라고 말하는데 이게 어쩌면 작가님이 하고 싶은 말은 아니었을까 싶었다. 화내지 않고,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상처 주지 않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나도 이런 마음씨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김옥미
아이디어로, 산호가 백화 현상이 있다. 엘니뇨와 온난화로 플랑크톤이 너무 많아져서 생긴다. 원래는 조류와 공생 관계를 형성해야 하는데. 그래서 <Raison d’être (부제: 염소의 꿈)>과 연계해 생각했을 때, 재미있는 의인화된 연극이라든지, 산호의 입장도 있지 않을까? 산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산호가 먹히는 것도 있고 백화 현상도 있고 세이렌이랑 공생하는 것도 있을 텐데. 산호는 무슨 생각하고 살까? 산호의 입장도 궁금하다는 생각을 했다.
윤미희
희곡 배울 때 갈등 심해야 되고 싸워야 한다고 배우지 않나.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지금 이 희곡은 싸우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다시 보니 오히려 다른 방식으로, 온힘으로 나와서 세상과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작품을 비롯해서 여러 ‘다른 손’ 작품들이 다 그런 맥락을 가지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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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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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도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 실제 수다회 자리에서는 이름을 밝히는 대신 별명을 부르면서 대화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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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도

이홍도
『이홍도 자서전(나의 극작 인생)』 외.
ghdehsl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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