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창문을 통해 방 안으로 길게 들어온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바닥에 앉아 해를 쬐고 있다. 소파에는 누군가 읽다 만 듯 책이 펼쳐져 있다. 커튼, 시계, 포스터, 선반 위의 책 등 집 안의 모든 물건이 부드러운 햇빛에 잠겨 있다.

오늘 며칠이고? 고개만 돌리면 알 수 있는데도 국화는 물었다. 벽에 걸린 달력은 붉은 동그라미로 빼곡했다. 10월 16일. 호수가 답하자 국화는 그제야 달력을 쳐다봤다. 아, 마리 앙투아네트. 국화는 달력에 유명인들의 기일을 적어두곤 했다. 존 레넌의 기일, 기형도의 기일, 정주영의 기일…… 전부 그녀가 공장에서 듣는 라디오나 책을 통해 주워 담은 정보들이었다. 덕분에 호수는 그들의 얼굴보다 죽은 날을 먼저 알게 됐다.
  “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뭔지 아나.”
  이혼하기 전 국화는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점을 보러 갔다가 뜻밖에도 단명할 팔자라는 말을 들었다. 그후로 아침마다 죽은 사람들에 대해 얘기했다. 인기가수가 극성팬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 생일을 앞둔 젊은 시인이 심야 극장에서 홀로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 호수는 지루했다. 국화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얘기들을 외는지 알 수 없었다. 혹시 국화는 두려웠을까. 살고 죽는 것쯤은 별거 아니라고, 매해 찾아오는 절기처럼 심상한 일이라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나. 그런 물음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호수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그때의 호수는 아직 어렸다. 건너편 티브이에서 미소 짓는 기상 캐스터에게 쉽게 시선을 빼앗겼다. 울산 주간 날씨. 해. 구름. 해. 비가 오니 우산을 챙기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간혹 어떤 말은 발이 달려서 탁자를 벗어나 등교하는 거리를 지나고 수많은 밤을 넘긴 후에도 호수의 뒤꽁무니를 쫓아왔다. 실례합니다, 무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언을 들은 그날 밤, 호수는 국화로부터 야간 근무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국화가 늦게 들어오는 날에는 혼자 저녁을 만들어 먹었다. 메뉴는 언제나 날계란밥. 날계란밥은 간단했다. 하얀 쌀밥에 날계란을 올리고 간장, 참기름만 두르면 끝. 불을 쓸 필요도 없었다. 부산에서 자란 국화는 어릴 때부터 모든 음식에 날계란을 넣어 먹었다고 했다. 비빔밥에도, 곰탕에도. 심지어는 날계란만 앞니로 톡톡 깨뜨려 삼키기도 했다고. 손가락에 묻은 계란 흰자가 끈적이게 달라붙었다.
  열 살이면 92년생…… 딸내미랑 이 집이랑 나이가 같네. 보름 전 아파트를 떠난 그들 모녀가 이곳으로 이사 왔을 때 집주인은 말했다. 호수는 코를 찌푸렸다. 빨랫줄에 널린 가자미와 미역이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며 냄새를 풍겼다. 정자해변에서 싸게 구해왔다는 주인의 자랑을 들으며 그들은 마당을 가로질렀다. 북구 양정동. 자동차 공장 건너편 골목에 있는 3층짜리 다가구주택은 붉은 벽돌을 올려 지었다. 각 층 발코니 밑부분은 민트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벗겨진 페인트 조각이 복도에 흩어져 걸을 때마다 밟혔다. 국화와 주인아저씨가 집을 둘러보는 동안 호수는 발코니에 기대어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물이 괸 고무 대야가 커다란 웅덩이처럼 보였다.
  집주인이 사는 1층을 제외하고 2층과 3층은 복도를 따라 두 개의 집이 있다. 국화와 호수는 2층의 첫번째 집에 살았다. 중문을 사이에 두고 분리된 주방을 빼면 남는 공간이 하나밖에 없는 단칸방에서 모든 가구와 장식품은 사치였다. 한쪽 벽에는 커다란 달력만이 액자처럼 걸려 있고, 그들은 식사 때마다 그 앞에서 접이식 탁자를 펼치고 밥을 먹었다. 호수가 저녁 식사를 마친 뒤에도 국화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부자리에 눕자 단조롭게 어둠에 잠긴 방이 한눈에 들어왔다. 방을 바라보던 호수는 혀로 메마른 입술을 훑었다. 그리고 까무룩 잠이 든 순간, 그때 호랑이는 찾아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호수는 가늘게 눈을 떴다. 비몽사몽 찬 바닥에 발을 디디고 소리를 따라 걸어갔다. 현관문 너머로 아기의 울음 같은 것이 들렸다. 문고리를 잡고 열었을 때 복도에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노란 고양이가 호수를 올려다보며 먀, 하고 울었다. 한 발짝 다가가자 고양이는 부드럽게 몸을 피하더니 위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총총 뛰어올라갔다. 호수도 고양이를 따라 층계를 밟았다. 바로 윗집, 3층 첫번째 집의 문이 열려 있었다. 몽환적인 밴드 음악이 새어 나오는 문틈 사이로 고양이가 기다란 꼬리를 보이며 들어갔다. 호수는 홀린 듯 걸어가 문을 열었다. 푸른 병에서 날 것 같은 향수 냄새가 쏟아졌다. 주방 중문을 지났을 때 호수의 집과 같은 단칸방이, 하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널찍한 방이 나왔다. 고양이는 소파 위로 올라가 쿠션을 물어뜯었다. 바닥에는 책을 올려 쌓은 탑이 여기저기 놓여 있고 한 남자가 서서 전신거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황색 칼라가 달린 반소매 셔츠를 입은 남자는 이내 거울 속 아이를 발견하고는 뒤돌아보았다. 디지몬 캐릭터가 그려진 잠옷을 입은 아이에게 그는 물었다.
  “넌 누구니?”
  쿠션이 팟 하고 터졌다. 나풀거리는 깃털 하나가 호수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4월은 에이프릴, 5월은 메이, 6월은 준. 남자의 이름을 들었을 때 호수는 학습지를 할 때 배웠던 영단어를 떠올렸다. June이라는 단어 옆에는 초록 나무와 작은 새가 그려져 있었다. 준은 그 새를 닮았다. 쌍꺼풀 없이 기다란 눈, 오밀조밀한 코. 부리처럼 살짝 나온 도톰한 입술. 준의 말투에는 사투리가 거의 묻어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서울의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줄곧 울산에서 자랐다고 말했을 때 호수는 조금 놀랐다. 그는 아빠처럼 무뚝뚝하게 말을 던지지도, 옆집 배관공 아저씨처럼 욕설을 섞어 말하지도 않았다. 준은 그가 즐겨 입는 하얀 티셔츠처럼 깨끗한 목소리를 가졌고 끝을 조금 늘여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했―니―이―. 구―나―아―. 마지막 두세 음절을 들을 때마다 호수는 몸을 조금 움츠리게 되었다. 누군가 새하얀 깃털로 가슴 안쪽을 간질이는 듯했다. 아저씨, 무슨 일 해요? 아저씨, 뭘 좋아해요? 서툴게 서울 말씨를 흉내내기 시작한 건 어쩌면 그때부터였다. 준과 비슷한 말투를 가지고 싶어서. 끝을 올리고 상냥하게.
  준은 대학을 졸업하고 몇 달 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준이 기르는 고양이는 예전에 가족들이 돌보던 반려묘였다. 이제 내 유일한 가족이야. 호수가 ‘이제’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할 겨를 없이 준은 말했다. 이름을 바꿔주고 싶어. 네가 지어줄래? 고양이는 옅은 노란 털에 초콜릿색 무늬를 가졌다. 눈 주변의 테두리는 국화가 자주 그리는 아이라이너처럼 새까매서 마냥 온순해 보이지만은 않았다. 꼭 작은 호랑이 같았다. 호랑아, 하고 호수가 불러보았다. 호랑이는 심드렁하게 하품했다.
  계절이 바뀌고 겨울방학이 되자 호수는 혼자 남겨지는 일이 많았다. 국화는 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일했다. 국화가 다니는 공장은 대기업 자동차 공장에 납품할 차량 시트를 만드는 하청 업체였다. 울산에 공장이 그렇게 많아도 ‘아지매들’ 일자리는 이 근처가 아니면 별로 없다고 국화는 말했다. 그건 그녀가 이혼 후에도 지금의 동네를 떠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국화가 만드는 시트가 납품되는 공장은 호수의 아빠가 있는 회사였다. 국화는 종종 자조적으로 말했다. 네 애비 배불리는 일을 내가 하고 있다고. 호수는 이제는 얼굴조차 보지 않는 두 사람이 각각 다른 공장에서 하나의 자동차를 만드는 일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이 함께 살 때 집안은 소란했다. 전혀 맞지 않는 두 사람이 만나 자신을 만들고 길러낸 이유가 무엇인지 호수는 알 수 없었다.
  밤 9시가 넘어서 귀가하는 국화는 티브이를 보고 잠시 웃다가 잠들기에 바빴다. 종이처럼 바싹 마른 마스크 팩을 얼굴에서 떼어내고 하얀 발목을 이불로 덮어주는 건 호수의 몫이었다. 그것 말고도 집에는 호수가 정리하고 치워야 할 일이 넘쳤다. 바닥은 늘 옷가지들로 어지럽고 개수대에는 설거짓거리가 쌓여 있었다. 고무장갑을 끼고 온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국화가 허물처럼 벗어 던진 속옷을 줍다가 호수는 수시로 준의 집으로 향했다.
  준의 집은 호수의 집과 달랐다. 그곳에서는 지겨운 날계란밥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메가마트에서 일하는 준은 가방에 몰래 폐기 음식을 담아 집으로 가져오곤 했다. 살얼음이 낀 냉동실에는 각종 빵과 디저트들이 쌓여 있었다. 그중 냉동 치즈케이크는 혀에 닿자마자 아이스크림처럼 사르르 녹았다. 처음 맛보는 슈가 하이.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롤러코스터의 〈어느 하루〉가 흐르고 호랑이는 푹신한 양탄자 위를 사뿐사뿐 걸어다녔다. 호랑이는 자주 창틀에 올라가 바깥을 구경했다.
  “쟤들은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습성이 있대.”
  준이 말했다. 호랑아, 호랑아. 하루 또 하루 반복하여 부르니 어느 순간부터 호랑이는 제 이름을 알아듣는 듯했다. 다음 해부터는 먼저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설 연휴에 그들은 바닥에 나란히 누워 있다. 국화가 갑작스럽게 특근 연락을 받고 나간 대낮이었다. 호수는 아침에 떡국을 먹어서 열한 살이 되었다고 말했다. 준은 웃으며 호랑이도 올해 세 살이 되었다고 했다. 세 살이면 아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알고 보니 호랑이는 그들 가운데 나이가 가장 많았다. 호랑이한테 세 살은 사람으로 치면 서른에 가까운 나이라고 준은 알려주었다. 호랑이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보다 빠르게 흐른다고. 그날따라 근엄해 보이는 호랑이의 표정을 살피던 호수에게 준은 물었다. 넌 꿈이 뭐야? 호수는 지난가을까지 아빠와 살았던 아파트를 떠올렸다. 곰돌이 얼굴 모양의 헤드가 달린 침대와 포근히 몸을 감싸주던 누빔 이불도, 친구들이 부러워하던 금발 머리 인형도. 노크 필수. 직접 만들어 걸어두었던 문패도.
  “방을 가지고 싶어요.”
  호수는 뱉고 나서 놀랐다. 그런 걸 한 번도 꿈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 꿈이란 항상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을 뜻했으니까. 과학자, 만화가, 과일 장수. 호수는 장래희망 칸에 아무 직업이나 생각나는 대로 쓰곤 했다. 호수는 준에게 한 번 더 말했다. 혼자만의 방이요. 그렇게 얘기하고 나니 정말 원하게 되었다.
  준 또한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준은 마트에서 일한 돈을 모아 언젠가 서점을 열고 싶다고 했다. 희곡이 뭔지 알아? 연극 대본. 희곡만 파는 서점을 만들 거야. 가끔 낭독극도 하고. 내가 여기 살 때 동네에 서점이 없어서 아쉬웠거든. 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들떠 있었다.
  “서점의 이름은 ‘페이드인’.”
  “페이드인이 무슨 뜻이에요?”
  준은 고민하다가 답했다. 시작한다는 뜻이라고. 자, 여러분. 지금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볼게요. 다들 주목해주세요. 오후 2시. 그들 사이로 창을 통과한 햇빛이 드리웠다. 볕이 가장 좋은 시간이었다.
  저녁이 되면 거리에서 시끄러운 배기음이 울렸다. 자동차 공장에서 퇴근하는 노동자와 교대로 출근하는 노동자들이 오토바이를 떼로 몰고 지나가는 소리였다. 준은 대로변에서 그 광경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호수도 종종 함께 따라 나갔다. 준과 같이 건조한 바람과 회색 먼지를 뒤집어쓰고서 그가 바라보는 곳을 보고자 했다. 수십 대의 오토바이가 정문에서 쏟아져나와 그들 앞을 직선으로 가로질렀다. 도로를 붉게 물들이는 행렬들. 호수는 헬멧을 쓰지 않은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늙은 남자, 젊은 남자, 외국인 남자, 모조리 지친 남자들. 마지막으로 따라붙던 오토바이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뒷좌석에서 몸을 포개고 있었다. 그 오토바이가 사라질 때까지 준은 눈을 떼지 못했다.

*

새 학기가 시작하고 며칠 후 호수는 하굣길에 한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대로변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깡마른 몸에 자기 덩치만 한 백팩을 메고 있었는데 통통한 두 뺨은 봉숭아 물을 들인 듯 생기가 돌았다. 꼭 티브이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았다. 긴 곱슬머리와 잔꽃이 수놓아진 녹색 롱스커트, 군데군데 구멍이 난 보라색 니트를 훔쳐보며 호수는 그녀의 앞을 지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여자가 얘, 하고 호수를 불러 세웠다.
  “너 여기가 어딘지 아니?”
  여자는 무언가 적힌 종이를 펄럭였다. 서울 여자구나, 하고 호수는 생각했다. 다가가서 보니 호수의 집 주소였다. 호수는 경계를 풀지 않고 물었다. 여기는 왜요? 끝을 올리고 상냥하게. 배신자 잡으러 왔지. 여자가 답했다. 배신자라는 단어를 들은 호수의 눈동자가 커졌다. 국화가 카이사르 얘기를 해준 게 그저께였다. 브루투스, 너마저!
  여자의 이름은 소라. 서울에 있을 때 소라는 준과 같은 극단에서 활동했다고 했다. 공연을 준비하는데 얘가 도망간 거지. 소라가 말하자 준이 그만하라는 뜻으로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대었다. 머지않아 호수는 두 사람이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소라는 준에 대해 잘 알았다. 호수가 학교에 다녀온 어느 날, 준이 일하러 간 사이 소라는 냉장고를 비우고 있었다. 알레르기도 있으면서 먹지 못하는 것들을 가져왔다며 폐기 음식을 꺼내 버렸다. 주로 요구르트와 크림빵처럼 유제품이 든 음식들이었는데 호수가 먹던 치즈케이크도 포함되었다.
  “하여간. 전에도 못 쓰는 물건을 모아두더니.”
  소라가 중얼거렸다. 나중에 빈 냉장고를 본 준은 건드리지 말라고 투덜대면서도 내심 싫지 않은 눈치였다.
  한번은 셋이서 시내에 있는 백화점에 갔다. 소라가 울산을 구경시켜달라고 졸랐기 때문이다. 준과 호수는 마땅한 장소를 떠올리기 어려웠다. 울산에서 자란 그들에게 고향은 익숙했다. 백연을 토해내는 공장과 네모난 컨테이너가 깔린 공업단지, 거대한 낚싯대처럼 짐을 건져올리는 크레인이 그들이 보는 일상의 풍경이었다. 쇠와 기름의 도시. 이곳에 여행자가 즐길 만한 재미라고는 없어 보였다.
  한참 뒤에 떠올린 곳이 백화점 옥상에 있는 대관람차였다. 작년 삼산동에 백화점이 개점하면서 함께 설치된 놀이 기구였는데 울산의 관광 명소라고 홍보하는 걸 소라가 티브이에서 보았다고 했다. 토요일의 백화점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호수도 아파트에 살 때 가족과 종종 쇼핑이나 외식을 하러 오던 곳이었다. 백화점을 돌아다니다 보면 아빠의 직장 동료나 친구를 쉽게 마주치곤 했다. 호수는 고개를 숙이고서 준과 소라를 뒤따라갔다. 화려한 옷을 입은 이들이 양손에 쇼핑백을 들고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뒤처진 호수가 달려가 준의 옷자락을 쥐었다. 소라가 손을 내밀었다.
  매표소에 도착한 뒤에도 관람차는 탈 수 없었다. 안전 문제로 다음주까지 내부 수리가 있을 예정이라고 했다. 그들은 별수 없이 식당가로 내려가 늦은 점심을 먹기로 했다. 지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누군가 쑥덕였다. 글쎄, 기구가 멈췄다니까. 반나절이나 갇혀 있었대.
  식당가에는 처음 보는 가게가 입점해 있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는데 서울에서는 흔한 식당이라고 했다. 음식은 소라가 알아서 주문했다. 전에 다른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일할 때 비슷한 음식을 많이 먹어봤다고 했다. 메리, 에바, 써니. 다른 사람들은 가명을 썼는데 나는 그냥 소라라고 불렸어. 내 이름 예쁘잖아?
  몽골리안 누들, 칠리 새우, 빠에야……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음식들이 테이블에 깔렸다. 소라는 그중 까르보나라를 골라 호수의 앞으로 밀어주었다. 준이 유제품을 먹지 못하니 온전히 네 것이라고 소라는 말했다. 크림수프 같은 걸쭉한 소스에 면이 버무려져 있었다. 호수는 망설였다. 그때까지 호수가 먹어본 파스타라고는 급식으로 나온 묽은 케첩 스파게티뿐이었다. 애초에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한 종류라는 것도 몰랐다. 첫입은 조금만 집어 먹었다. 두 입 세 입 먹다보니 고소한 맛에 자꾸만 손이 갔다. 식사를 마쳤을 때는 분홍색 니트 여기저기에 소스가 묻어 엉망이었다. 휴지로 옷을 닦아주던 소라는 호수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어디 봐. 턱에 구멍 난 거 아니야? 소라가 능청스럽게 말하자 준이 웃었다. 호수의 얼굴이 뜨거워졌다.

준의 하루는 조금씩 달라졌다. 준은 이제 오토바이의 행렬 같은 건 구경하지 않았다. 휴일이 되면 소라와 희곡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일기예보에서 때늦은 봄눈이 내린다고 한 토요일, 호수는 오전 수업을 듣는 내내 창밖을 보며 눈을 기다렸다. 울산에서는 눈이 귀했다. 호수는 눈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갓난아기일 때 함박눈이 내렸다고 국화가 알려주었지만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꽃샘추위로 얼어붙은 길을 걸어 귀가했을 때 준과 소라는 소파 양쪽에 몸을 기댄 채 극본을 보는 중이었다. 포개어진 그들의 다리 위로 보랏빛 담요가 덮여 있었다. 호수를 발견한 소라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기며 눈인사했다. 이내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고 공중으로 피어오르던 흰 연기가 차차 희미해졌다. 그 순간 호수는 준이 알려주었던 용어를 떠올렸다.
  페이드인.
  그들 사이에서 무언가 시작되고 있었다.
  허구의 세계에서 신은 커다란 시계를 가지고 논다. 신이 시곗바늘을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인간의 하루는 어떤 날은 빠르게, 어떤 날은 느리게 흐른다. 변덕스러운 신.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은 돌연히 시계 놀이에 싫증이 난다. 숲속에 시계를 버리고 방치한다. 시계 판과 바늘 사이로 나날이 먼지와 나뭇잎, 기다란 나뭇가지 따위가 끼어든다. 그러다 신의 시계가 멈춘 어느 날, 인간의 시간이 고인다. 아무도 늙지 않고 누구도 죽지 않는다. 새로 태어나는 생명도 없다. 그런 세계 속에서 두 사람은 신의 시계를 찾아 헤맨다. 남자는 만삭인 아내의 출산을 위해, 여자는 항암치료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를 무사히 보내드리기 위해 숲을 걷는다.
  준이 여자를, 소라가 남자를 연기하지만 두 사람은 성별에 맞추어 목소리의 굵기를 바꾸거나 비음을 섞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 그대로 대사를 읊고 그래서인지 정말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두 사람의 대화로 이어지는 극은 마지막 장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거대한 벽과 같은 시계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여자는 행동을 주저한다. 시간을 다시 흐르게 만드는 것이,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 확신할 수 없다. 시곗바늘에 손을 얹은 채 여자는 말한다.
  “시간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나요……?”
  준은 남은 대사를 마저 이어가지 못했다. 물을 머금은 사람처럼 발음을 웅얼거렸다. 소라가 다가가 준을 품에 안았다. 준이 천천히 눈물을 흘렸고 소라도 그와 닮은 표정이 되어 갔다. 다시 돌아가자. 다들 너를 기다리고 있어. 소라가 말했다.
  호수는 준이 서울에서 살던 시절을 모른다. 무대에서 준이 어떤 배우였는지 어떤 연극을 했고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알 수 없다. 보지 않은 장면을 그려 보려 했지만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어느 날의 대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왜 고향에 왔는데도 가족과 살지 않느냐는 호수의 질문에 준은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끝날 때까지 침묵하다가 답했다. 모두 떠났어. 울산에는 나 혼자야. 호수는 더 묻지 못했다. 그가 처음으로 끝음절을 늘이지 않고 말했기 때문이다.
  창 너머로 쌀알 같은 눈이 흩날렸다.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 호수는 허공에 손바닥을 내밀어보았다. 구원. 뜻 모르는 단어를 속으로 되뇌었다. 소리 없이 눈이 닿았다가 사라졌다. 작은 것. 처음 쥔 것.

준과 소라는 서로를 아끼는 만큼 서로를 미워했다. 호수가 보기에는 그랬다. 두 사람은 자주 다투지만 하루를 채 넘기지 않아 없어서는 안 될 사이인 양 굴었다. 그들은 종종 옆에 호수가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했다. 그들은 매번 비슷한 말을 주고받았다. 내가 말했잖아, 너무 큰 비극을 겪어서 연극 속 삶이 전부 가짜처럼 느껴진다고. 준이 말하면, 소라는 한 마디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되받아쳤다. 너 그거 도망치는 거라고, 네가 그렇게 살길 네 가족들이 바랄 것 같으냐고. 그들의 말투는 과장되어 있었고 호수는 그들이 연극 대사를 읊는 건지 실제로 대화하고 있는 건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럴 때는 조용히 준의 집을 나가 계단을 밟았다.
  호랑이도 자주 집을 나갔다. 혼자 현관문을 여는 법을 터득한 것 같았다. 먀, 소리가 들려 나가면 언제나 호수의 집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방에서 호랑이와 누워 있으면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천장에서부터 벽을 타고 내려왔다. 웅웅 울리는 소리들, 호수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 소리들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장대비에 온몸이 젖어가는 듯했다. 호수는 눈을 꼭 감았다. 비가 금방 그치기를 바랐다. 어떤 날에는 비가 종일 왔지만 어떤 날에는 한 시간만 지나서 올라가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두 사람이 안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호수는 그럴 때 당황스러웠다. 그들은 서로를 미워하는가 좋아하는가. 그 두 가지가 공존할 수 있다는 것, 공존하는 것만이 사랑이라는 것을 호수는 모른다. 호수는 아직 어리고 쉽게 단정 짓는다. 모든 연인의 운명은 하나이다. 결국 그들은 등을 돌리고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던 사람들처럼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국화와 아빠가 그러하듯. 감았던 눈을 떴다. 호랑이는 어느새 옷장 위로 올라가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금 더 자란 얼굴이었다.

*

벚꽃이 진 거리에 초록 그늘이 드리우는 동안 소라는 점점 울산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소라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많은 여행자가 그러하듯 낯선 도시에서 전에 본 적 없는 풍경과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소라는 태화강변을 거닐며 낚시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울산항에 늘어선 어선을 구경했다. ‘젊음의 거리’에서 쇼핑한 옷들을 준과 호수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모든 것에 시들해졌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과 통화하며 소라는 투덜댔다. 태화강은 똥물이고 시내에는 둘러볼 만한 미술관 하나도 없다고. 소라는 점차 외출을 줄이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집을 나가지 않았다.
  마트 행사로 바빠진 준은 집을 비울 동안 소라에게 호랑이를 돌보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소라는 호랑이에게 무심했다. 먹이를 주지 않았고 지저분한 화장실 모래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호수가 뒤늦게 호랑이를 챙기곤 했다. 난 쟤 마음에 안 들어. 호수와 단둘이 있을 때 소라는 말했다. 자기를 보는 눈빛이 기분 나쁘다고. 저것 봐. 소리도 안 내고 뚫어지게 쳐다보잖아. 꼭 뭐라도 알고 있는 것처럼.
  소라는 준을 강하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도서관도 찾기 힘든 도시에 서점을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예전처럼 다시 연기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얼마 전 메일로 친구에게 재밌는 극본을 받았다며 보여주기도 했다. 준은 겉으로는 싫은 티를 내었다. 하지만 소라가 토라져 샤워하러 간 사이 몰래 극본을 읽는 모습을 호수는 보았다. 사위가 잿빛으로 가라앉는 저녁, 노트북 화면을 보는 준의 얼굴이 푸르게 물들었다. 그들에게서 점점 밀려나고 있다고 호수는 생각했다.

만약에, 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며칠을 부유하던 그 단어는 어느 날 호수의 머리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린다. 그 단어는 과학책에서 본 끈끈이주걱과 같다. ‘만약에’는 순식간에 자라난다. 줄기를 뻗고 향기를 풍겨 다른 상상을 끌어들인다. 여러 상상이 날갯짓하며 그 단어에게로 날아든다. ‘만약에’는 끈적끈적한 액체로 그것들을 붙잡는다. 그리고 다시는 놓아주지 않는다. 제 몸으로 흡수하여 몸집을 불려나간다.
  그날 호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오랜 시간 스스로 다독여야 했다. 볕이 좋은 어느 5월, 마당에는 이팝나무가 하얗게 꽃을 피웠다. 그런 날 봄바람을 쐬고 싶다며 창을 열어둔 건 소라였다. 방충망이 없는 걸 확인하지 않은 사람도, 나른한 햇살에 졸음을 참지 못한 사람도 소라였다. 바람이 부는 방향에 따라 나무는 천천히 가지를 흔든다. 하얀 털로 뒤덮인 짐승이 손짓하는 것처럼 보인다. 호수의 무릎에 앉아 있던 호랑이가 꼬리를 세운다. 일어서서 양탄자를 밟는다. 호랑이가 잠시간 얼어붙은 채 창밖을 바라보는 광경을, 이내 소파 위로 뛰어오르는 모습을 호수는 그림처럼 바라본다. 그 순간은 호수의 기억 속에서 아주 느리게 흐를 것이다. 호수는 모른다. 바라만 본다. 호랑이는 어느새 창틀에 올라가 있다. 창 너머 풍경을 바라본다. 호수는 움직이지 않는다. 호랑이는 뛰어오른다. 짧은 울음소리. 나무가 흔들린다. 5월 13일. 다음 날 아침 국화는 말했다. 쳇 베이커가 호텔 창문에서 추락한 날이라고.

*

남은 봄 동안 비가 자주 내렸다. 그칠 생각을 안 하노. 매일 아침 눅눅한 신발을 헤어드라이어로 말리며 국화는 투덜거렸다. 주택은 소란했다. 빗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3층에서 젊은 연인이 날 선 말로 서로를 할퀴는 소리가 밤낮으로 울려퍼졌다. 국화는 혀를 차면서도 궁금해했다. 반찬을 나누러 온 옆집 아주머니와 현관에 선 채 말을 주고받았다. 뭐 때매 싸우는데? 몰라, 고양이가 뭐라 뭐라 카던데. 설마 고양이 때매 싸우겠나. 꼬롬한 게 있겠지. 전봇대에는 호랑이를 찾는 전단이 비에 젖은 채 나부꼈다. 며칠이 지나 길목에 생긴 웅덩이가 말라가고 복도에 펼쳐둔 우산이 하나둘 사라질 즈음 그들은 다시 떠들었다. 같이 살던 아가씨 서울로 갔다매. 아가씨가 영 까탈시러워 보이더라.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눈 그날 저녁, 국화는 발톱을 깎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하기야. 젊은 아가씨가 여기서 뭐 해 먹고 살 끼고.
  혼자 있을 때 호수는 몰래 교과서를 펼쳤다. 준이 만든 전단을 길에서 주워 교과서 사이에 꽂아둔 참이었다. 빗물에 젖었던 전단이 마르면서 다른 종잇장에 눅눅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호수는 조심스럽게 전단을 떼어내었다. 얇은 종이가 갈라지며 호랑이 사진의 한쪽 귀퉁이가 찢겨나갔다. 삼각형 모양으로 잘린 조각만이 호수의 손에 남았다. 종잇조각에 쓰인 대부분의 글씨는 잉크가 번져 알아볼 수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그 글씨만이 선명했다.
  물론 호수는 상상한 적이 있었다. 매일 밤 ‘만약에’로 시작하는 수많은 가능성을 머릿속에 그리며 잠들었다. 만약에 호랑이가 집을 나간다면…… 만약에 호랑이를 훔쳐 바닷가에 버리고 온다면…… 그러니까 호랑이가 사라진다면. 그렇게 된다면 준을 소라와 멀어지게 하고 그의 발을 이곳에 묶어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호랑이를 되찾기 전까지는 준이 울산을 떠나지 못할 거라고.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날 호수가 잘못한 일은 없었다.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호수는 준을 마주하는 게 두려웠다. 등교 시간에는 준을 피해 서둘러 집을 나섰고, 문밖에서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뛰었다. 준이 자신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알아챌까봐, 자신을 영영 멀리하게 될까봐 겁이 났다.
  어느 날 호수는 학교 컴퓨터를 이용해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고양이가 창문에서 떨어졌어요. 죽었을까요?’
  답변이 달리지 않았다. 다른 아이디로 또 물었다.
  ‘3층에서 떨어졌는데 죽었을까요?’
  이틀 뒤에 답변이 달렸다.
  ‘살긴 살 거임. 근데 다리는 절 수도.’
  호수는 매일 골목을 지나며 길고양이들이 걷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외눈박이 고양이를 만난 저녁, 그날 먹은 날계란밥에는 계란 껍데기가 제법 섞여 있었다. 가시처럼 입에 걸리는 조각들을 빼내고 끈적끈적한 밥을 목구멍으로 밀어넣었다. 아주 큰 침 덩어리를 삼키는 기분이었다.

준을 다시 본 건 5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오래간만에 야근 없이 귀가한 국화와 저녁을 먹은 뒤 두 사람은 일찍 잠자리를 펴고 누웠다. 국화는 깊게 잠이 든 듯 이내 코를 골았다. 이부자리에서 나온 호수는 복도로 나가 밤하늘을 보았다. 만월이 지나며 달이 서서히 이지러지고 있었다. 잠시 후 대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호수는 알고 있었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그가 운동화를 신은 채 터벅터벅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도망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준과 눈을 마주친 후였다.
  “거기서 뭐 해.”
  호수를 올려다보며 준이 물었다. 오랜만에 듣는 음성이었다. 뭐―해―애―. 준이 뱉은 음절을 마음속에 하나씩 눌러 담으며 호수는 말했다.
  “잠이 안 와요.”
  호수는 준과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하던 그날 밤을 오래 기억했다. 슬리퍼를 신은 맨발은 시렸고 파자마 위에 걸친 준의 여름 셔츠에서는 향수 냄새가 났다. 준과 늦은 시간까지 함께 있는 건 처음이었다. 옆자리에서 바라본 준은 조금 수척해 보였다. 백화점 앞에 다다를 때까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택시 기사만 이따금 룸미러로 뒷좌석을 살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꽃도 다 떨어지고…… 더울 일만 남았네.
  그들은 그날 관람차의 마지막 손님이었다. 백화점 옥상에서 보는 관람차는 건물 바깥에서 바라볼 때보다 훨씬 웅장했다.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화려하게 빛나며 돌아가는 원형의 구조물을 따라 수십 개의 캐빈이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거대한 시계처럼 보인다고 호수는 생각했다. 그들은 노란색 캐빈에 올라탔다. 관람차가 느리게 움직이면서 캐빈을 높은 곳으로 이끌었다. 그들의 작은 움직임에도 캐빈은 크게 흔들리는 듯했다. 호수는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곳이었구나, 하고 준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도로 위를 바삐 움직이는 자동차들. 멀리 빛나는 석유화학 공단의 증류 타워. 더 먼 곳에서 철썩이고 있을 까만 바다. 호수가 태어나고 자란 도시가 한눈에 보였다. 매일 보아온 풍경이었다. 그런데도 멀리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어딘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전에 이미 떠나온 곳을 보는 듯했다. 호수는 풍경에 가까이 다가갔다. 유리창에 비친 호수의 얼굴이 풍경 속에 녹아들었다. 우리 집은 어디지? 준이 물었다. 저쪽일까요? 호수가 말했고 이쪽인 것 같다고 준이 말했다. 그들은 집의 위치를 가늠하며 손가락으로 점을 찍었다. 창문 위에 그들의 지문이 뿌옇게 묻어나왔다. 희미하게 겹친 두 개의 동그라미. 그쯤 어딘가에 그들의 집이 있을 터였다.
  작다. 그치? 준이 말했다. 호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작았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한 손으로 돌돌 뭉쳐 꿀꺽 삼켜버릴 수 있을 만큼.
  캐빈은 천천히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들이 흔들림에 익숙해질 때쯤 오차 없이 하강하여 지상에 내려앉았다.
  되돌아가는 택시에서 시간은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준은 창밖을 바라보았고 그의 손은 호수의 손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얼마 전에 호랑이가 사라졌다고, 그후로 곧장 집에 들어가는 일이 잘 없다고 준은 말했다. 준의 말투는 담담했다. 호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가는 게 싫었고 슬퍼요, 하고 짧게 뱉었다. 그러자 죄책감이 몰려왔다. 건널목 앞에서 차가 멈췄을 때 옆 인도에서 자전거를 타는 여자가 보였다. 호수가 보는 창틀 안에서 여자는 페달을 밟고 또 밟았다. 이내 택시가 다시 출발했다. 차가 여자를 앞지르고 여자는 프레임의 왼쪽으로, 왼쪽으로 옮겨가다가 시야에서 멀어졌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국화가 어두운 구석에 등을 보인 채 잠들어 있었다. 코 고는 소리가 여전히 방 안을 울렸다. 호수는 국화의 옆에 누웠다. 파자마 상의를 뒤집어 코끝까지 들어올렸다. 준의 여름 셔츠에서 밴 향수 냄새를 맡았고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잠시라도 붙들 수 있을 것처럼.

*

며칠 후 준은 그 동네를 떠났다. 아무도 죽지 않은 날이었다. 아니, 아무도 죽지 않는 날은 없다. 국화가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준이 떠나고 일주일 동안 호수는 크게 앓았다. 여름의 초입에서 사람들은 월드컵 경기에 열광했다. 잔디밭을 뒹구는 축구공을 보며 외치는 환호성과 야유가 창 너머로 울려퍼졌고 호수는 그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고 다시 자기를 반복했다. 눈을 뜨면 언젠가는 집에, 언젠가는 흔들리는 택시 뒷좌석에 누워 있었다. 빨리 좀 가 주이소. 국화의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남자가 무심한 표정으로 호수를 내려다보았고, 집주인 아주머니가 집에 들락거리며 차가운 물수건을 이마에 새로 얹어주었다. 그 사이사이의 모든 꿈에 호랑이가 나왔다.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어느 틈에 눈을 떴을 때는 국화가 머리가 하얗게 센 채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수는 예지몽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자라고 국화가 나이 든 미래를 보고 있는 거라고. 아니면 눈이라도 내린 걸까. 쌀알만 한 눈 말고 알사탕만큼 굵은 눈이 펑펑.
  “눈 왔어?”
  그것은 아마도 호수가 며칠 만에 입 밖에 낸 첫마디였다. 국화는 그제야 손거울을 보고 말했다. 여름에 무슨 눈이냐고. 공장에 먼지가 너무 많은데 털고 오는 걸 깜빡했다고. 먼지를 뒤집어쓴 얼굴로 국화는 가만히 호수의 배를 토닥였다. 그래, 여름이네. 참말로 여름이네. 배를 다독이는 손은 일정한 리듬을 가졌다. 노래 없는 자장가 같았다. 쪼매만 기다려 봐라, 하고 국화는 말했다. 여름이 가기 전에 면허를 딸 기다. 국화는 침을 삼키며 덧붙였다. 금방 딸게. 네 할미가 대학을 안 보내줘서 그렇지. 엄마가 머리는 좋다.
  톡. 톡. 배를 두드리며 국화는 계속했다. 차 사면 다 데려다줄게. 병원도 쉽게 가고, 부산도 가고…… 호수는 몽롱한 기운 속에서 그 얘기를 들으면서도 국화가 자신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런 걸 방백이라고 부른다고 알려준 건 준이었나 소라였나. 호수는 말하고 싶었다. 엄마, 연극에서는 하소연을 방백이라고 부른대. 그 하소연은 혼잣말인데 모두가 들을 수 있어. 모두가 듣고 있는데 배우는 혼잣말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숨김없이 말해. 그건 좀 무섭지 않아? 내 마음을 모두가 듣는다는 건…… 아니지. 그건 외로운 일이다. 내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면서 누구에게든 털어놓고 싶어 하는 건. 호수는 생각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국화의 방백이 끝없이 길어지고 이내 호수의 얼굴에 미지근한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졌기에 아, 이것은 정말 꿈이구나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여름은 순식간에 코앞에 당도한다. 달력 한 장 차이로 햇볕은 사나워졌다. 모두가 소매가 짧은 옷으로 갈아입고 맨살을 드러내는데 호수만 여전히 긴소매를 입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날 담임은 말했다. 야들아, 열한 살의 여름방학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비장한 말투에 아이들이 야유를 보냈다. 방학 때마다 아이들은 비슷한 말을 들었다. 호수도 작년 겨울방학에 들었던 말을 기억했다. 지나간 계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말. 그러니 숙제를 잘 하고 일기를 꼬박꼬박 쓰라는 말. 하교하는 길에는 화단을 파헤치는 아이들이 보였다. 나무꼬챙이를 든 아이들이 개미집을 찾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호수의 등줄기에는 땀이 흘렀다. 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마당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1층에서 티브이 소음이 들리고 집 전화기가 몇 번 울리더니 호수가 계단을 오르는 사이 끊어졌다. 호수는 제자리에 멈추어 서서 위쪽을 바라보았다. 계단을 조금 더 밟았다. 3층 복도는 깨끗했다. 준의 집을, 준의 집이었던 집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기 전에는 몰랐다. 어떤 가구도 남아 있지 않은 방을 보자 호수는 자신이 무엇을 기대했는지 알 수 있었다. 빈집은 볕이 들어와서 따듯한 기운으로 데워져 있었다. 노랗게 익은 햇빛이 창을 통과하여 평행사변형 모양으로 납작 엎드려 있었다. 불과 얼마 전 그곳을 가로지르는 소파가 있었다. 책으로 쌓아올린 탑이 있었다. 폐기 음식으로 가득한 냉장고가 있었다. 노란 털에 줄무늬를 가진 호랑이가, 수시로 창틀에 올라가 밖을 바라보던 짐승이 있었다. 있었다는 기억이 유일했다.
  호수는 평행사변형에 반쯤 몸을 걸친 채 누웠다. 잠깐 누웠을 뿐인데도 빛을 받은 다리가 금세 뜨거워졌다. 호수는 피하지 않았다. 그것이 마치 어떤 형벌이라도 되는 양 가만히 열을 쬐었다. 시간이 지나며 빛이 서서히 얼굴 쪽으로 기울었다. 천천히, 호수에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해― 애― 지― 몸 깊은 곳에서부터 음절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준의 입에서 나와 호수에게 내려앉은 음성들, 두 사람이 소파에서 주고받던 대사들, 신의 시계를 찾아 숲속을 헤매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호수는 그 연극을 다시 보고 싶었다. 준이 읊었던, 그가 차마 끝맺지 못했던 대사가 떠올랐다.
  훗날 호수는 그 문장을 자주 곱씹을 것이다. 조금 더 자라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몇 번의 여름방학을 보내고 나면, 자기만의 달력을 갖게 될 것이다. 호수는 그 달력에 생리를 기록하고 친구의 생일을, 때로는 누군가의 기일을 쓰게 된다. 반면에 어떤 날은 하얀 공백으로 남는다. 호수는 그날에 대해 쓰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길고양이의 울음이 유독 크게 들리는 밤에 조용히 눈을 감을 뿐이다. 그런 밤이 무수히 흐르면, 그때도 호수는 국화와 함께 살고 있을까. 국화가 모는 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을까.
  어쩌면…… 호수도 이 집을 떠나게 될까. 언젠가는 이 지루한 도시를 떠나 더 큰 도시로 향하게 될까. 그리하여 대도시의 화려함이 더는 눈부시게 다가오지 않을 때, 너무 많은 소음과 너무 많은 눈들이 두 귀와 머리를 짓누르는 것만 같을 때, 그때 다시 고향을 그리워하게 될까. 어느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체된 차 안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면, 도로를 빼곡히 메운 차들 사이로 오토바이를 타고 있는 연인이 눈에 들어온다면, 호수는 창문 가까이 입술을 대고 숨을 불어넣을 수 있다. 창문에는 뱉은 숨의 크기만큼 희뿌연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이내 사라져간다. 천천히 이지러지는 자국을 보며 호수는 떠올릴 수 있다. 기록하지 않아도 살아 있는 날들, 호랑이와 작은 사람들이 있던 집, 다리를 절룩이는 호랑이가 배회하고 있을, 어쩌면 호랑이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그 도시를. 그러나,

입속에 어른거리는 문장을 입 밖으로 내었다.

“시간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나요?”

날이 저물기 전, 붉은 볕이 얼굴을 물들였다.

아직은
모른다.

아직은.

하가람

202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중학교 때 담임선생님은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그맘때 선생님의 관심사는 오로지 미래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훗날 딸을 낳으면 절대로 자식의 이름을 꽃 이름으로 짓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녀가 선생 노릇을 하며 보아온 학생 중에서 꽃 이름을 가진 여자애들은 모두 문제가 많았다고, 어지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고 했다. 그 오래 묵은 얘기가 이제야 떠오른 건 이 소설에서 가장 먼저 이름 붙인 인물이 국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을 끝마친 뒤에는 인물들에게 얼마간의 부채감이 남는다. 언제나 인물들은 나에게 무언가를 주는데, 나만 어느 것도 돌려주지 못한 채 그들을 먼 곳에 두고 빠져나오는 기분이 든다. 호수와 국화, 준과 소라, 그리고 호랑이. 소설을 쓴 지난봄 이들과 함께 나도 민트색 발코니가 있는 집에서 살았다. 느리게 작별하고 싶다. 어디에 있든 그들이 원하는 만큼만 나아가기를 바란다.

2025/07/02
7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