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추석
가을이 왔다고 생각했다. 열차가 멈춰서자 문이 열렸고, 바람은 줄을 지어 선 승객들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직은 모두가 발을 떼지 않은 순간, 엄마 손을 꼭 잡고 선 네 살배기 꼬마 아이는 내 쪽을 돌아보며 웃음 지었다. 뒤이어 엄마 뒤로 몸을 반쯤 숨기며 앙증맞은 손을 흔들어 보이던 꼬마. 이제 안녕히 가세요 해, 하며 그 작고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던 꼬마의 엄마. 두 사람을 처음 본 건 쪽잠에서 깨어난 뒤였다. 열차가 몸을 흔들어 깨우자 노란 빛줄기가 눈꺼풀 사이를 찔렀다. 멍하니 창밖을 보다가 주위를 살폈을 때, 대각선 방향으로 두 칸 뒤 복도 쪽 좌석에 포개어져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잠들기 전에는 보지 못한 두 사람. 엄마는 눈을 감고 있었던 반면 아이는 엄마 품에 안긴 채 열차의 내부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신비롭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그때 시간은 꼬마의 눈동자를 중심으로 더욱 느리게 흐르는 듯 보였다. 어릴 땐 그랬지. 하루하루 아득하면서도 새로운 사건으로 가득했지. 매 순간 가슴 벅찼지. 꼬마의 눈길 덕분이었는지 나는 무심결에 스쳐온 열차 안의 사물들, 익명의 승객들, 창밖 풍경의 요소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종착역에 도착할 무렵 꼬마가 내게 손 인사를 건네기까지. 이제는 그 순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얼굴마다 암시하는 긴 휴일의 내용을 눈앞에 그려낼 자신이 없다. 없지만, 그래도 뭐라 할까. 뭐라고 하면 그나마 그때 그 공간에 가장 가까운 표현이 될까 궁리하다 보면, 나는 멈춰선 열차의 좁다란 통로에서 겪은 십여 초의 분위기만큼은 추상적이면서도 선명한 형태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한 한 분명하게 말하고 싶어진다. 말없이 함께 서 있었던, 하나같이 지친 기색이 역력했던 사람들에 대해. 객실 복도에 선 채로 먼 길을 온 승객이었거나, 눈 둘 곳을 모르고 온 좌석 승객이었던 그들. 가방을 뒤로 메고 양손에 보따리와 선물세트 따위를 챙겨든, 대체로 두 눈이 퀭했지만 여느 가을 들녘처럼 풍요로운 구석이 얼굴에 남겨져 있던 그들. 그들은 이제 기차역 플랫폼이 아닌, 각자만의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처럼, 나는 나의 집을 보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집에 도착했을 때, 같은 열차를 타고 온 이들 중 누구도 곁에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외로워졌다. 여지껏 지나쳐 온 숱한 공간과 시간이 무색하게 느껴졌다고 할까. 가야 할 일이 있어도 혼자서 갈 용기가 나지 않는, 그러나 기어코 혼자 가지 않을 수 없는 곳. 달 뒤편의 분화구 같은 곳. 나는 이만 열차 문간에서 발을 떼어 그곳으로 가야 했다. 플랫폼을 지나 에스컬레이터가 솟아있는 방향으로, 인파의 흐름에 따라 대합실로 밀려나가야 했고 될 수 있는 한 빠르게 역사를 빠져나가야 했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앞다투어 저녁 공기를 가로질러 갔다. 그들과 두어 번 어깨를 부딪히기도 하면서, 나는 잠깐 흐르는 물에 박힌 돌처럼 서 있었다. 서둘러 걸어 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조바심이 들기는 했지만 해마다 누적된 경험에 비추어 분명해진 예감,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예감은 발걸음을 주저하게 했다. 별다른 수는 없었다. 나는 고향 역에 내려왔고, 이곳은 예정된 사건을 미루기에 마땅한 핑계거리를 찾기 어려운, 숨이 턱턱 막히고 상상력이 척박해지는 땅이었으니까. 나는 발을 내디뎠다. 앞서 걷는 뒷모습들 사이로 검푸른 제복을 갖춰 입은 역무원이 몇 보였다. 귀성객들을 보던 그들의 무표정이 자못 생생한 걸 보면 나는 그들에 의해서도 등을 떠밀리듯 걸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권태로운 눈길 속에서 언제까지고 넋 나간 듯 서 있을 수 없었기에, 아무 일 없음을 해명이라도 하듯 바른 자세로 걷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꾸역꾸역 발걸음을 내밀수록 걸음걸이는 되레 낯설어지고,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걷는 법을 아주 잊어버린 듯 아찔하기까지 했다. 힘이 들어간 발바닥을 땅에서 뗄 때 발목은 몇 도 정도로 꺾어야 하며 무릎은 또 언제쯤 접어야 하는지, 종아리나 허벅지 근육에는 얼마만큼 힘을 주어야 하며 정강이를 내뻗을 때마다 좌우 골반은 또 얼마나 비틀어야 하는지. 하반신의 감각은 이미 오래전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는 듯 생경해져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걸음마를 다시 하듯이. 살다보면 이따금씩 그런 순간이 있다. 걷는 일뿐만 아니라 내 이름자 적는 일이나 숨 쉬는 일 따위가 한없이 낯설어지는 순간. 나는 지극히 당연해야 하는 일들에 한참 서툰 사람이 되어버리곤 했다. 평상시에는 의식하지 못할 만큼 자연스러웠는데, 그땐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의아해지는 순간. 무의식 깊숙이 침잠해 있을 생의 감각을 되살리려고 온갖 애를 쓰는 순간. 운이 없으면 길 위에서든 도서관에서든 어처구니없는 끝을 마주할 수 있겠구나 싶기도 했다. 너무나도 분명한 것이라 믿었던 삶이,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어려울 만큼 가볍게 끝날 수 있겠구나. 단, 간혹가다가는 그냥 이대로 죽는 편이 낫겠다 싶은 때도 있다. 가령 나 자신 살아있는 것으로서 존재감을 느끼기 어려울 때. 자취방에서 수면제를 한 움큼 집어삼키더라도 수개월은 지나서야 발견되겠구나 싶을 때. 돌이켜보건대 삼시 세끼 밥을 먹듯, 죽지 못해 산다거나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엄마의 여러 순간도 그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석을 앞두고, 정확히는 고향에 내려가야 한다는 시한부 같은 사실을 앞두고 나는 곧잘 그 순간들을 마주했다.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죽지 못해 사는 거다, 너는 나처럼 살지 마라, 마음 같아서는 그냥 확……, 그냥 확……, 그냥 확 뭐, 나랑 동생이랑 버리고 도망이라도 가게? 아니면 확, 나만 버리고 꼭꼭 숨어버리게? 그것도 아니면 그냥 확, 죽어버리게?……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아버지를 오롯이 나 혼자서 감당하는 일이 벌어질까 봐, 나는 엄마 스스로 위독을 알리고자 보내왔을 신호를 언제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말았다. 그러나 어린 날의 내가 몇 번이고 다시 엄마 앞에 서고, 엄마는 보란 듯이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라거나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중얼거린다고 해도 나는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엄마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으리라는 단순한 사실처럼. 그날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심히 핸드폰 뉴스 기사를 보던 오후, 긴급 속보를 통해서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접했으니까.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엄마가 어린 자식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끌어안은 채 발견되었으며 함께 있던 많은 사람이 죽거나 실종됐다는, 그처럼 기가 차는 소식을 대학 캠퍼스 야외 벤치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접했으니까…… 그러니까 그 순간, 엄마와 동생의 생애 마지막 순간,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다. 그 사실은 여전히 단풍처럼 물들거나 지고 바스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냥, 시간만 흐른다. 지구는 일 년에 한 번 태양을 빙 돌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은 세 달에 한번 꼴로 서로 교차하며, 환절기마다 하늘과 바람과 꽃나무는 일 년 전을 기억하듯 표정을 바꾼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은 모습을 달리하는 듯하면서도 가만 보면 시간의 규칙을 철저히 따르고 있는 셈이다. 열차에서 내리기 전, 가을이 왔다는 생각이 불어온 순간 또한 다르지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저녁 어스름이 깔리듯 해마다 추석은 오고, 나는 세월의 중력에 질질 끌리듯 기차를 타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매년 같은 때 으레 느끼곤 했던 초조한 기분을 느끼며, 반복되어온 패턴의 한 지점, 고향 역 플랫폼 위에 서 있었다. 제아무리 더디 걸어도 나는 예년처럼 멈춰 선 기차를 뒤로 한 채 그곳을 빠져나갈 것이었다. 역사를 나와서는 역전 도로변에 차를 댄 아버지를 찾아 두리번거릴 것이었고, 집에 도착하면 아버지와 딱히 할 말 없는 밤을 보낼 것이었다. 아침이 밝으면 서둘러 할머니 댁으로 나설 것이었고, 차 안에서는 가는 길보다 더 긴 침묵의 시간을 보낼 것이었으며, 도착해서는 야윈 팔뚝으로 국자를 휘젓거나 밥주걱을 뒤집다 마중 나온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주무를 것이었다. 이제 걷는 일에 서툴러진 플랫폼의 순간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일처럼 여겨진다. 출발을 앞둔 기차에 올라 고향 역 플랫폼에 발을 내리기까지 연락 한 통 받지 못했음에도, 아버지의 기다림을 의심하지 않은 건 그 때문이다. 다만 아버지가 처음부터 전화 한 통 없이 나를 기다렸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는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연락이 잦은 사람이었다. 그는 추석 연휴를 한 달여 앞두었을 즈음부터 연휴 전날 내려올 건지, 표는 예매했는지, 몇 시에 출발해서 몇 시에 도착하는지, 이번 연휴에는 며칟날 올라갈 거며, 올라갈 표는 예매했는지 등을 캐물었고, 내가 고향에 내려가기로 한 날이면 새벽부터 일어났느냐, 준비했느냐, 출발했느냐, 어디쯤이냐 묻는 문자를 시도 때도 없이 보내왔다. 그랬던 그가 며칟날 몇 시쯤 내려오는지만 물을 뿐, 그 밖의 연락을 하지 않게 될 줄이야. 몇 해 전이었을까. 내가 고향 역에 도착할 무렵, 아버지는 역전에 마중 나와 있었다. 정확히는, 역전 시장을 차로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유달리 연휴가 길었던 까닭인지 거리는 귀성객으로 넘쳐흐르고 도로는 붐벼서 길가에 차 댈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하필 열차는 예정보다 한참 늦은 시각에 도착했는데 그럼에도 아버지는 내게 전화 한 통 없었기에 나로서는 아버지가 아무 일 없이 기다리고 있을 줄로만 알았다. 역전 도로변에 도착해서, 나는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다마스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전화를 걸었다. 큰길가에 서 있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들려온 아버지의 짧고 굵은 목소리로부터 나는 비로소 고향에 내려왔음을 실감했다. 기차에서 낯을 익힌 사람들은 버스나 택시에 올라 저마다의 목적지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들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치던 찰나,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눈에 익은 차 한 대가 보였다. 다마스는 경적을 울리며 나를 스윽 지나쳐가더니, 내가 선 곳으로부터 십여 미터 떨어진 길가에 멈춰 섰다. 터벅터벅 걸어가 조수석 쪽 문을 열고서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차는 출발했고, 말 없이 앞 유리를 쳐다볼 뿐인 아버지를 나는 흘긋 보고는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예전 같았으면 열차의 도착이 늦어진 일이나 차를 세워두지 못하고 역전 시장을 싸돌아다닌 일을 가지고 내게 화풀이를 쏟아냈을 텐데, 이제 아버지는 말이 없구나, 생각하면서. 침묵을 견디기 어려웠던 나는 유료 주차장에라도 세워두시지 그러셨어요, 하고 따져 물을 수도 없었는데, 어느새 머릿속으로는 거기 차를 세워두기에는 돈이 아깝지 않겠느냐는 대답과 귀 따갑게 이어지는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몇 분을 기다릴지 모를 일이었다만 일 분을 세워두고 얼마를 날릴지 모르는데 그 돈이 가볍냐, 어디 가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돈이냐, 시내 길거리에 엎드려 구걸을 해봐라 아스팔트 땅을 파봐라 돈 백 원이 나오는지, 작은 것부터 아껴야지, 요즘 것들은 도대체 아낄 줄을 모르고 막 써대는데 꼴 뵈기 좋을 리가 없지, 한 번 혹독한 시절을 겪어봐야 알지, 너도 대학씩이나 졸업했으니 뭐 보릿고개 같은 말 들어는 봤겠지, 그런데 요즘 대학이 대학이냐, 네가 그걸 아냐. 나는 지기 싫어서 말대답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보는 거면서 만나자마자 언성을 높이셔야겠어요, 제가 잘못했으면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기차가 늦었지 제가 늦었나요, 주차 값이 뱅글뱅글 돌았던 차 기름값보단 덜 나왔겠어요, 지금 하시는 말씀 앞뒤가 하나도 안 맞잖아요. 이 정도로 말꼬리를 물고 늘어져봤자 욕 먹을거리를 손아귀에 직접 쥐여 주는 꼴이 아닐까 싶다가, 나는 차 안의 정적을 느꼈다. 실제로 들려오지 않은 잔소리에 대고 실제라면 하지도 못했을 말대답이라니. 끝이 없을 듯 속 시끄러웠던 머릿속으로부터 눈을 돌려 나는 다시 창밖을 보았다. 낯익은 찻길을 달리는 자동차들과 길가에 가지런히 선 낮고 허름한 건물들, 일테면 엄마가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보곤 했던 대여점이나 동생이 다니던 피아노 학원, 아버지의 단골 낚시용품점이나 나의 모교 앞 문방구 따위가 스쳤다. 나는 차츰 가라앉아가는 몸의 열기와 심장 박동을 느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없이 앞 유리만 쳐다보는 듯했다. 마음 한편으로는 안심하게 되면서도 아버지가 어울리지 않게 유순해진 듯한, 어색한 시간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기억이 쌓여도 익숙해지지 않는 시간. 나는 아버지나 나나 우리가 처한 시간이 정상이 아님을, 어디서부턴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고, 아직까지 조금도 고쳐지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알고도 섣불리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음을, 아울러 그 고백이 튀어나오지 않는 이상, 일상의 말들은 목구멍을 맴돌 것임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는 명백한 사실까지, 적어도 나는 알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갔고, 그날 엄마와 동생과 함께 있던 사람 대부분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며,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고민으로는 죽어버린 자를 눈앞에 데려올 수 없다는 것을.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리면서 균형을 잃고 뒤틀린 삶의 황막함을. 아버지 역시 모르지 않을 것이었다. 두 구의 시신을 받아 안고 어쩔 줄 몰라 했던 그날부터 줄곧.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되돌아갈 방법을 궁리했고 그런 방법이란 있을 리 없었다. 그날,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은 소리 없이 흐느끼거나 핸드폰을 보며 욕지거리를 뱉어냈고, 소식을 듣고 내려온 외가 친척들은 아버지의 멱살을 잡고 부르르 떨거나 주먹을 내질렀다. 맞을 땐 맞고 흔들릴 땐 흔들릴 뿐, 아버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고, 바닥에 주저앉은 할머니는 앙상한 주먹으로 말라붙은 가슴팍을 내리치며 목놓아 울었다. 나는 우리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무슨 일로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갔으며, 내겐 연락 한 통 없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버지가 기어코 다른 살림이라도 차렸는지, 아니면 회생 불가능한 수준의 도박 빚이라도 졌는지, 그것도 아니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서는 엄마나 동생을 죽도록 팼는지.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는 하나하나 현실이었던 것처럼 분노에 차서 얼굴을 붉히곤 했다. 확실한 건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갔다가 변을 당했고, 외가에서는 분통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나는 찾지 못한 퍼즐을 찾아 끼워 맞추고 싶었지만 누구에게 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외가 사람들에게 묻기에는 그들의 눈을 떳떳하게 쳐다볼 수조차 없었는데, 그건 엄마가 꽃다운 나이에 나를 낳았던 것이 모든 일의 원흉이 된 게 아닌가, 하고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였다. 꼭 그러한 죄의식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 일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일한 생존자인 아버지에게서만 진실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며칠이고 땅만 쳐다보고 있는 아버지의 눈을 보며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자신이 없었다. 우습게도, 무서웠던 것이다. 미치도록 묻고 싶은 마음을 뒤로할 만큼 나는 아버지가 두려웠다. 게다가 이전까지 보지 못한 그의 묵묵한 태도는 나의 공포를 밑도 끝도 없이 부풀렸다. 몇몇 조문객들은 그러한 아버지와 나를 흘긋거리며 수군거렸다. 나는 그저 밥맛없이 서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사진을 찍어가는 신문 기자들, 다양한 유골함과 장례 절차를 소개하는 장례전문업체 직원들을 아무런 감정 없이 보았다. 빈소에는 무의미만 차고 넘쳐 보였다. 두 눈을 스치는 모든 시공간이 의미를 되찾으려면 엄마와 동생이 산 사람의 모습으로 이곳에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랬다간 저기 저편에 누워있는 두 구의 시신이 다른 누군가의 식구 두 사람이 되는 거 아닌가 싶고, 그럼 그게 또 무슨 의미인가, 생각했다. 차츰 혼미해진 나의 정신머리는 안개처럼 희뿌연 형상으로 비어져 나와 눈앞에서 꼬물거렸다. 이해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분명 수천수만 가지 생각을 한 것 같기는 한데 며칠간 같은 자리에 서 있으면서,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어거지로 쌀밥과 육개장 국물을 떠먹으면서, 화장실 좌변기 칸에 들어가 오래 앉아있으면서 한 생각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모든 게 다사다난했던 하루를 마치고 잠자리에 누워서 꾼 꿈의 일부 같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꿈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때마다 단어 하나 안에 가둘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옆 호실이나 복도에서는 가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름 모를 그들을 원망할 일이 아니었는데도 내 옹졸한 마음 한켠에는 원망이 자리 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간은 흘렀고,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남은 건 아버지와 나였다. 그렇게 엄마와 동생의 자리가 얼마나 커다란 공백이 되었는지를 깨달아갔다. 그 공백.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면서도 틈틈이 도서관에 가 책을 읽곤 했을 때 아버지는 그 공백을 무엇으로 채웠을까. 내가 취업도 무의미한 것처럼 느끼고, 그래서 더욱 책을 내려놓지 못하고, 그럼에도 해답을 찾지 못했을 때 아버지는 무엇으로 삶을 연명했을까. 나는 알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내 인생에서 아버지와 함께 있는 시간이란 일 년 삼백육십오 일 중 며칠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나마 나의 뇌리에 남은 것은, 아버지가 혼자 있을 때면 라디오를 듣는다는 사실이었다. 장례식 이후 처음으로 고향에 내려온 저녁이었을 것이다. 간단히 식사를 마친 뒤 나는 거실 소파에 쭈뼛쭈뼛 앉아서 아버지와 밤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버거워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안방으로 문을 닫고 들어갔다. 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내 방 침대에 누워서 책 한 권을 펴들었다. 잠시 뒤 안방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연상시키는 음질의 목소리들이 소곤거리듯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안방에 라디오가 있었나.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것 같긴 한데,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굳게 닫힌 안방 문 앞으로 가서 귀를 기울였다. 안방에서는 인재, 구조, 수색, 철수, 보상 따위의 단어가 툭 툭 튀어나왔고, 그곳엔 그들이 아닌 우리가 있을 수 있었다거나 돈보다 중요한 건 진실이라거나 우리는 여전히 그날을 살고 있다 와 같은 끝이 뾰족한 문장들이 콕 콕 가슴을 찔렀다. 아버지는 요즘 이런 걸 듣는구나, 생각하면서 나는 엄마와 동생의 자리를 그대로 둔 아버지가 등에 지고 살아가는 감정이란 무엇일까, 죄책감일까, 책임감일까, 책임을 돌리고 싶은 마음일까, 시간을 돌리고 싶은 마음일까, 생각했고, 문득 안방을 가득, 다만 쥐죽은 듯 채우고 있는 정의감에 찬 목소리들이 신음처럼 들렸다. 그것이 핸드폰으로 틀어놓은 팟캐스트 라디오라는 건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아버지는 시간이 나는 대로 그것을 듣는 듯했는데 무슨 까닭에서인지 내 앞에서만큼은 라디오의 라자도 보이지 않으려 애를 쓰는 듯했다. 아버지와 나, 단둘이 앉은 차 안은 변함없는 침묵으로 갑갑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동생이 함께 있던 차 안을 돌아보곤 했다. 이를테면 이날저날 뒤섞인 기억 속 할머니 댁으로 가는 길. 무언가 꼬투리 잡힌 내가 아버지로부터 잔소리를 듣고 있으면, 뒤에서 불쑥 나타난 엄마는 그러다 우리 연이 죽겠네 제발 그만 좀 하세요 하고 급한 불을 끈다. 뒤따라 끼어든 동생은 그래그래 그만 좀 하시고 운전에나 집중하세요 하고 상황을 매듭짓는다. 그러면 나는 속이 시원하면서도 가슴 아래 남은 울분을 삭이느라 한동안 창밖만 본다. 보는데, 아버지는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뜨리고는 끊겨버린 잔소리를 잇지 않고, 동생에게 요즘 학교생활은 어떤지 묻는 것이다. 동생은 신이 나서 옆 반 누가 자기한테 관심이 있다나 없다나 급식 때 계속계속 쳐다보다 눈만 마주치면 시선을 휙 돌리고 얼굴이 빨개진다나 어쩐다나 귀엽게 생기긴 했는데 자기 스타일은 아니라나 맞다나 그러면서도 이번 달 안에 고백하면 받아줄 생각은 있다나 없다나 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보따리를 재잘재잘 풀어놓고, 아버지와 엄마는 하하호호 웃음을 터뜨리고, 나는 머리를 기댄 차창에 어슴푸레 비치는 내 입가의 미소를 본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와 나, 단둘이서만 있게 된 차 안에서는 그런 웃음을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와 나 사이에는 정적만이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소리를 전달할 매질이 없는 우주 공간처럼, 동시에 불규칙적이면서도 균일하게 지지직거리는 라디오 잡음처럼 아버지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나는 그것을 가만두고 볼 뿐이면서 아무래도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생각,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하는 생각에만 골몰한다. 작년 추석, 할머니 댁을 향해 가던 차 안에서도 그랬다. 나는 거의 기어가다시피 하는 차 앞으로 곧게 뻗은 길과 그 길을 따라 기다랗게 줄을 선 자동차들을 뚫어져라 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침묵이 펼쳐져 있는 것 같아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를 덮쳐온 느낌이, 지금 뒤를 돌아보면 엄마가 소파 목 받침에 고개를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을 것 같았고, 동생은 그런 엄마의 무릎 위에 머릴 뉘인 채 여린 숨을 새근거리며 곤히 잠들어 있을 것 같았다. 속는 셈 치고 뒤돌아보았다. 너저분한 짐들과 동생이 끌어안고 자곤 했던 검은 때 묻은 토끼 인형이 물끄러미 차 앞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허탈한 기분으로 아버지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아버지도 여전히 이런 기분을 느끼거나 유사한 경험을 하는지, 나는 궁금해졌다. 나와 함께 있지 않은 대부분의 시간, 엄마와 동생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 어떻게 먹고 사는지. 낚시나 등산같이, 그가 좋아했던 취미를 모르지 않지만 그건 옛날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런 일들로는 돈을 벌 수도, 먹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차치해두고. 환갑이 다 된 이 인간, 남은 생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슨 요리를 해 먹고 살며, 무슨 일로 생활비를 버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낯이 뜨거워져서, 나는 아버지의 삶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아버지의 지금은 어떠한 의미인지 찬찬히 아버지를 엿보며 궁리했다. 겨울 산 머리처럼 듬성듬성하고 허연 머리, 이듬해 봄을 고대하는 논밭 같은 이마, 몰라보게 핼쑥해져서 더 움푹 들어간 눈매와 더욱 돌출된 광대, 욕망을 잊은 듯 기억하는 듯 검붉고도 메마른 입술, 세월 같은 목울대, 그리고 핸들을 꼭 붙잡은 우람하면서도 예전보다 뼈를 드러낸 손등. 아버지는 혼자서도 늙어있었다. 이제라도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하고 묻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나는 망설였고, 망설이면서는 아버지가 무덤덤하게 답하는 모습을 보았다. 별일은 없다. 김이 빠지는 대답이었지만 나는 그 정도의 대답도 듣지 못했고, 그전에 간단한 안부도 묻지 못했다. 아버지와 나 사이 완고하게 버티고 선 정적을 깨트리지 못하는 한, 나로서는 아버지가 어떻게 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물론, 어쩌면 영영 모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오래전 그날과 다를 바 없이, 나는 엄마가 무슨 일로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갔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말해주지 않을까, 말해줄 수밖에 없는 날을 기다리고 있을까, 죽어도 말해주지 않을 생각일까. 나는 바로 옆에 앉은 아버지를 마음으로만 보고 또 보다가, 운전대를 잡고 먼 곳을 보고 있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졌다. 혹, 아버지는 우리 앞으로 줄지어 선 자동차들이 아니라 그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쌍욕을 먹고 얻어맞기도 했던 그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늦은 밤중 도착할 시골이나 꾸벅꾸벅 졸면서 앉아있을 노모를 보고 있는지. 노모 홀로 차려두었을 식어가는 저녁상을 보고 있는지. 그것도 아니면 시골에 도착해서도 어엿한 모습일 고요를 걱정하고 있는지. 아내와 어린 자식을 보고 있는지. 그날 아내와 어린 자식이 집을 나가지 않았다면, 하고 자책하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엄마와 동생은 정말 아버지 때문에 죽었는지…… 나는 끝없이 정체되는 고속도로로 눈길을 돌렸다. 세상은 어느새 짙은 어스름에 깔려 있었다. 앞서가는 수많은 자동차는 빨간 후미등을 슴벅거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컴컴한 하늘엔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때 그 차 안에서도 가을이 왔다고 생각했던가. 아닌가.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여전히 추상적이면서도 선명한 형태로, 그 순간을 느낄 수 있다. 가을이 왔다는 생각이 자꾸만 발목을 붙잡던 순간처럼 말이다. 갑작스레 걷는 일에 서툴러진 플랫폼의 순간, 흐르는 물에 박힌 돌처럼 주저했던 나는 힘을 내서 걸었다. 플랫폼에서 에스컬레이터가 솟아있는 방향으로, 나보다 앞서 걷는 사람들을 따라, 무표정하던 역무원 몇을 지나, 기다리는 이들이 모여 텔레비전을 보던 대합실도 지나, 귀성객으로 붐비는 역사를 빠져나갔다. 집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전에 아버지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방처럼 등에 지고서. 나는 역전 도로변에 서서, 같은 열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택시나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중에서도 네 살배기 꼬마와 그 엄마가 시내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두렵고도 외로운 마음으로, 다마스 한 대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문득 귀에 익은 경적 소리 들리고,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역전 로터리 건너편에 서 있는 눈에 익은 차 한 대, 그 차창 밖으로, 아버지는 한쪽 팔을 내뻗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이연
불가능 속에서, 제가 주로 하는 일은 기억하는 일인 듯합니다.
2018/07/31
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