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토리얼 누군가의 찬 손을 잡아 주던 눈사람에 대한 상상

김중일

정류장까지 나란히 서 있는 가로수가 어느 때보다 짙푸른 계절입니다. 폭염의 한가운데 서 있는 나무를 보고 불현듯 폭설 속의 눈사람을 떠올립니다. 지난겨울 늦은 밤 누군가의 찬 손을 잡고 일어선 눈사람이 가로수가 되어 여태 서 있습니다. 바람이 나뭇잎을 굴리고 뭉쳐 초록 눈사람을 만들었습니다. 몸 없이도 사철 두 팔은 바람 속에 남아 우리를 안아주고, 두 다리는 땅속에 남아 지구를 굴리며 우리를 찾아오는 눈사람에 대한 상상. 이제 여기 없는 누군가의 찬 손을 잡아주던 눈사람에 대한 상상. 세상 곳곳의 명백한 어떤 부재가 현재 속에서 몸을 만들고 바람을 만들고 깊은 그늘을 만들어내는 문학을 상상합니다.


<덧붙이는 원고>

시를 읽는 그대에게 상처를


 이카루스(Icarus)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요. 모두 잘 알고 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지요. 왕에 의해 이카루스와 그의 아버지는 감옥에 갇힙니다. 그들은 떨어지는 새의 깃털을 모아 날개를 만들었죠. 드디어 디데이. 감옥에서 탈출할 만큼의 높이로 비행을 하면 좋았을 것을, 이카루스는 그만 태양을 향해 너무 높게 날았던 것이지요. 아버지인 다이달로스의 충고를 무시한 채 말이죠. 결국 뜨거운 햇볕에 날개가 녹아내려 추락하게 됩니다. 흔히 이카루스의 죽음을 두고 인간이 가진 과욕의 상징으로 보기도 하고,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열망으로 보기도 합니다. 저는 후자에 해당하는 시를 좋아합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투영하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시도 좋은 시입니다. 일상이 감옥처럼 느껴질 때 시는 우리를 일상의 경계로 데려가주며 일상의 안과 밖을 동시에 차분하게 조망할 수 있도록 객관화시켜줍니다. 바로 여기까지가 다이달로스의 시입니다. 반면 시라는 장르의 최전방에서 실패를 무릅쓰고 시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고투하는 시가 있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이카루스의 시입니다. 세계와 좌충우돌하면서 자신만의 형식을 빚어가는 이런 시들은 대개 거칠고 불친절합니다. 이런 경우 시인도 ‘네 멋대로’ 썼으니, 저도 ‘내 멋대로’ 읽습니다. 

 이런 종류의 시들은 대개 뭔 소리를 하려는지 잘 모르겠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는 아트홀에서 음악을 듣거나 시립미술관에서 미술품을 감상할 때에는 그런 불평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그림 속에서 닭이 날아다녀도, 무대 위의 연주자가 악기를 부술 듯 두드려도 아무튼 왔으니 일단 듣고, 봅니다. 이미 우리는 캔버스와 무대라는 형식을 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큰둥하다가도 깜박 음악 속으로 빠져들거나, 어떤 그림 앞에 이끌리듯 오래 머뭅니다. 이유도 모른 채 말이죠. 그러기도 하기에 일단 무엇보다 우리는 시가 친절한 편지가 아닌 하나의 첨예한 예술품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앙리 마티스의 <푸른 누드 Ⅱ>라는 그림을 본 적 있습니다. 솔직히 실망했습니다. 사실 아직까지도 그렇습니다. 이게 뭔가 싶습니다. 어느 날 문득 그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았습니다. 마치 구근(球根)처럼 극도로 단순화되어 표현된 파란색 육체를 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왼쪽 팔과 몸통 사이의 흰 여백이, 마치 왼쪽 옆구리에서부터 가슴까지 깊이 박혀 있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보였습니다. 순전히 제 느낌입니다. 화가가 의도했건 아니건 중요치 않습니다. 저는 푸른 구근같은 육체에 박힌 하얀 칼날의 이미지로 마티스의 <푸른 누드>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입니다. 저는 그 어떤 대단하다는 예술작품 속에서 어떤 거창한 철학적 사유와 예술사적 의미를 찾아내는 데 언제나 실패합니다. 

 아시다시피 시는 언어를 재료로 합니다. 언어는 물감이자 악기입니다. 그러나 언어는 물감과 악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고 규율입니다. 우리가 방금 점심시간에 동료와 나눈 대화의 수단입니다. 머리털만 나면 누구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소통의 재료이지요. 어려운 시를 읽고 난 후 혹자는 한국어가 외국어보다 어렵다고 말합니다. 언어가 기본적으로 소통을 위한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에 이런 불만이 쉽게 터져나오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 문학의 한계와 위대함이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런가 봅니다. 

 그냥 시를 그림 보듯, 음악 듣듯 그렇게 읽으십시오.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어떤 시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면 적어도 여러분의 아이큐 문제는 아니니 안심해도 좋습니다. 시라는 다양하고 낯선 형식과 어법에 아직 여러분의 감성이 충분히 노출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시의 낯선 형식들도 그 종류가 다양합니다. 피곤한 독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어렵게 쓰는 것이지요. 그저 마티스의 <이카루스>와 샤갈의 <이카루스의 추락>을 각각 감상하시듯 체험하면 됩니다. 같은 주제와 소재를 자신만의 내면에 투사하여 나름의 형식으로 담아내는 것은 예술가로서 당연한 책임이니까요.


 저는 제가 소개한 시에 대해 수긍과 공감을 이끌어낼 생각이 없습니다. 당연히 수긍과 공감을 위해 없는 의미를 억지로 만들어 갖다 붙이지도 않았습니다. 그것은 저의 능력 밖이며, 특히 시에 대한 공감은 당신의 의지의 문제니까요. 아무튼, 이런 시도 있답니다, 정도를 시를 펼쳐 놓을까 합니다. 의미 있는 물음을 던지는 시, 시 자체가 물음인 시, 아무것도 묻지 말라는 듯한 시. 시는 참 다양한 빛깔로 존재합니다. 그저 드넓은 꽃밭은 산책하다가 마음에 드는 꽃을 오래 감상하고, 내 취향이 아닌 꽃은 그냥 힐끔 돌아보며 지나치듯, 그렇게 시가 가득 찬 길섶을 산책하면 좋겠습니다. 단 한가지 주의할 것은 언제 어느 순간에 멈춰서도 그곳은 우리가 피워 올린 상처의 자리입니다. 상처라는 꽃다발을 안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오래된 기도」)라고 말하는 이문재 시인의 시구절을 인용해 말하겠습니다. 


 열심히 그냥 살기만 해도

 시를 읽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