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
연주를 시작하세요

김뉘연의 시 「목소리의 충동」은 이렇게 끝난다.
여기에서는 말함으로써 소리의 멎음이라는 사건이 발생한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그 말 한마디에 휩쓸려 사라지고, 소리가 울려퍼졌던 빈 자리가 생겨난다. 마침표를, 오선보의 끝세로줄을 떠올린다. 그 앞에 놓인 소리가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분명 소리를 들었다고 믿는다. 눈앞에는 종이 한 장이 남아 있다.소리가 멎었다.
소리들이 고여 있었다.
종이 아래의 일들.1)
현재까지 발견된 악보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알려진 것은 ‘세이킬로스의 비문’3)이다. 튀르키예의 고대 그리스 유적지에서 발견된 이 비문은 약 1-2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둥그스름한 대리석 비석에는 짧은 시 두 편이 적혀 있는데, 하나는 여기에 적힌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시, 다른 하나는 음악 기호들과 함께 새겨진 시이자 노래 가사다. 무언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쓰인 이 악보는 과거의 존속을 지향한다.
반면 어떤 악보는 미래의 사건만을 기다린다. 그런 악보들이 등장한 건 한참 나중의 일로, 모든 것이 노래되던 시절을 지나 문자의 세계와 음악이 오래도록 맞물리고, 듣지 않고 노래하지 않고도 음악을 만든다고 믿을 수 있게 된 때부터다. 상상 속에서 악보를 써내려갔던 이들은 때론 그가 쓴 악보가 수행되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미래의 어느 시점을 기다리며 악보를 서랍에 고이 보관했다. 가까운 미래가 될지 먼 미래가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악보들 앞에는 미래 방향으로 시간이 쭉 펼쳐지곤 했다.나는 돌이고, 형상이다. 세이킬로스가 죽지 않는 기억의 상징으로서 나를 이곳에 둔다.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빛나기를. 결코 슬퍼하지 않기를. 인생은 찰나와 같고, 시간은 끝을 청할 테니.
악보는 누군가 무언가를 수행한 결과, 혹은 누군가 무언가를 수행하게끔 하는 텍스트다. 바꾸어 말하면, 악보는 과거 혹은 미래의 수행을 바라본다. 여기서 조금 궁금해지는 건 그 사이의 시간이다. 악보의 현재는?
영화 〈아마데우스〉의 두 장면.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아내가 몰래 가져온 악보를 펼쳐 읽으며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느낀 나머지 모차르트의 악보를 손에서 놓쳐버린다. 시간이 흐른 뒤, 살리에리는 죽어가는 모차르트가 불러준 음표들을 빈 오선지에 하나씩 받아적으며 경탄하고, 악보를 적는 것만으로 그 음악의 세계에 완전히 몰입한다.
어느 고등학교 수업 시간. 음악을 전공하는 한 학생은 교과서 아래 악보를 숨겨 두고 읽는다. 쉬는 시간이 되면 드디어 손을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숨통이 트인다는 듯 악보를 보며 손가락을 끝없이 움직인다. 그는 여전히 책상에 앉아 있다.
한밤중에 오케스트라 총보를 펼친 지휘자는 악보를 차근히 읽어내려가며 그가 만들고 싶은 연주를 듣는다. 그는 악보를 보는 동시에 상상 속에서 그 연주를 끊임없이 조율한다. 때론 머릿속에서 흐르는 음악에 맞추어 악보에 여러 기호를 새로 적어넣는다.
어느 서점. 악보를 읽지 못하는 한 사람은 외국어로 된 책을 읽듯 악보를 읽어나간다. 악보를 양손에 쥐고, 눈으로 그 기호들을 한 줄씩 훑어본다. 그는 기호 하나하나에 매칭되는 소리를 떠올리는 대신 악보에 그려진 기호들의 위치와 밀집의 상태, 흐름을 이해해본다.
연주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이렇게 악보를 읽는 시간은 응당 거치는 연습 과정의 일부고 어쩌면 대단히 특별하지 않은 순간이겠지만…… 악보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이런 시간은 악보가 평소와 다른 지위에 오르는 특별한 순간이다. 이때만큼은 악보가 ‘읽기의 목적’이 되기 때문이다. 눈앞에 놓인 악보는 연주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내가 정보를 읽어낼 수 있는 어떤 문서가 된다. 악보는 말하자면 ‘독서’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보통 책도 악보도 읽는다고 표현하지만 이 두 읽기의 방향은 사뭇 다르다. 잠시 독서와 독보를 구분해보자. “독서는 인지, 다시 말해서 텍스트 속에 기입된 의미를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의 예시다. 반면에 독보는 퍼포먼스, 다시 말해서 악보에 기입된 지시를 밖으로 행하는 것의 예시다. 말하자면 전자는 내향으로, 재귀적인 사고의 영역으로 데려가고, 후자는 외향으로, 소리로 둘러싸인 공간감으로 데려간다. 우리는 저자의 사고와 의도를 발견하기 위해 텍스트를 읽지만 악보에 지시된 작곡가의 의도를 읽는 것은 음악을 경험하기 위해서일 테다.” 그러나, “언어와 음악을 이러한 방식으로 엄격하게 분할하면 둘 사이의 경계면에서 피할 수 없는 변칙들이 발생한다.”4)
악보를 눈으로 읽는 시간도 아마 그 변칙 중 하나일 것이다. 독서에서 그러하듯이 누군가는 사고와 의도를 발견하기 위해 악보를 읽고, 무언가를 안으로 받아들이며 악보를 읽는다. 누군가에겐 음표와 여러 악상기호의 연쇄가 마치 문장과 같고, 악보에 적힌 모든 것이 이야기와 같다. 그들에게 악보는 독서의 대상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하지만 악보에는 기본적으로 수행을 위한 지시사항이 담겨 있고, 그런 의미에서 이 일을 독보로부터 완전히 분리시킬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독보의 방향을 살짝 비틀어,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겠다. 어떤 독보는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향한다. 소리로 변환되지 않지만, 그 또한 읽는 즉시 무언가를 수행하는 일이다. 누군가는 악보를 읽음으로써 소리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음악을 경험하며, 무언가를 듣는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연주에 준하는 집중력으로 악보를 읽고 거대한 심상을 떠올린다. 그런데 양손으로 악보를 펼쳐 읽는 이 과정에서 어디까지가 독서이고 어디까지가 독보인지 구분하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한 것 같다. 독서인 동시에 독보하는 상태가 오래 유지될 수도 있고, 독서와 독보가 계속해서 교대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독서와 독보는 한 덩어리로 겹쳐진다.
나는 이런 변칙적인 순간을 악보가 현재에 놓이는 시간이라 이해한다. 지금 누군가가 페이지를 한쪽 한쪽 넘겨가며 충실히 읽고(독서하는 동시에 독보하고) 있는 악보. 그리고 그 악보를 읽고 있는 누군가의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 나는 그 일에 관심이 있다.
위의 내용은 슈톡하우젠의 ‘그것’(Es)의 악보 전문이다(이것을 〈〉 괄호에 넣을지, 「」 괄호에 넣을지 고민이 되어 우선은 홑따옴표로 묶는다). 이건 글자로만 이루어진 악보, 즉 텍스트 스코어다. 음악적 수행을 위해 쓰인 글이라 바꾸어 부를 수도 있겠다.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 안에서 그것이 완전히 고요해질 때까지 기다리세요
그 상태에 도달했다면
연주를 시작하세요
생각을 시작하자마자 멈추세요
그리고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세요
그후 연주를 계속합니다
적지 않은 음악가가 이 곡의 연주를 시도했다. 대부분 악기를 손에 쥔 연주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동안 침묵하다가 불현듯 연주를 시작했고, 다시 연주를 멈추며 연주의 재개와 중단을 반복했다. 때때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고, 이따금 무언가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의 지시는 까다롭고도 가혹했다. 음악가의 손은 대체로 한 음을 연주한 즉시 다음 음을 예비해왔고 그들의 귀는 연주된 것을 들은 즉시 지난 소리들을 복기해왔다. 즉 연주라는 행위는 꽤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해왔을 뿐 아니라 즉흥에 기반한 연주자들의 경우 바로 그 생각이 연주의 재료인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연주는 꽤 자주 중단된다. 스코어를 이해하고 있는 한 그 멈춤은 자연스럽게 느껴지고, 그런 의미에서 너무 오래 지속되는 연주는 믿음직스럽지 않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마 이 곡에서 들어야 하는 것은 그들이 낸 소리 자체만이 아니라 이들의 생각이 시작되었다가 사라지는, 그 생각의 리듬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따라 듣다보면, 어느 순간 청중인 내가 이것을 꼭 들어야 하는지 의심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것은 정말로 듣기 위한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스코어일까?
이런 질문을 해소시켜줄만한, 대단히 만족스러운 ‘그것’의 연주를 찾아보았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은 없었고, ‘그것’을 둘러싼 것 중 내게 가장 만족스러운 것은…… 다름 아닌 이 텍스트 스코어를 읽는 시간이었다. ‘그것’의 스코어를 한 줄 한 줄 읽고 그 지시를 이해하려 애쓰는 동시에 내게서도 어떤 일이 자연스레 수행되고, 그것이 마음속에서 작은 사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받아들이고, 뇌리에 남은 언어들이 서서히 자리를 뜨게 한다. 생각이 떠난 고요한 자리에서 어떤 웅성거림을 발견한다. 그 소리들은 발견된 즉시 자라나고, 조금 더 분명해진다. 때로 웅성거림은 더 많은 소리가닥으로 분화되고, 나름의 질서와 구성이 생겨나거나 조금 더 의지를 가진 소리들로 바뀌어간다. 그 상상의 소리를 만들고 듣는 시간을 연주와 듣기라고 믿어본다. 그리고 상상 속에서 자라나는 소리가 더욱더 구체화될수록, 보통 ‘생각’이라 부르는 것에 가까워질수록 이 상상의 연주를 멈춰야 한다고 여긴다. 이 판단은 생각임이 분명하다. 모든 것을 멈추고 다시 비우는 시간을 가진다. 울렁이던 소리들이 다시 잦아들고, 다시 고요를 찾는다.
생각의 멈춤과 시작은 연주와 침묵처럼 명확히 교대되는 것이 아니라 밀물과 썰물처럼 점진적인 것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이 스코어를 수행하는 더 좋은 방법은 그 점진적인 변화를 계속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읽기’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읽고, 읽음으로써 무언가를 수행한다. 오선보를 읽고 누군가 그러했듯, 나 또한 읽는 동안 무언가를 들은 것 같다고, 적어도 들은 것에 준하는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고 느낀다. 이 스코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성취되는 단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그건 생각이 사라진 상태에서 연주하는 경험이 아니라 무언가를 읽는 동시에, 생각과 연주와 침묵과 듣기를 한데 엮어보는 읽기의 경험을 택하겠다.
「그것」은 “소리가 멎었다. 소리들이 고여 있었다”라는 김뉘연의 시를 읽는 순간 사라져버린 소리처럼, 어스름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어떤 것을 내게 준다. 독자에 불과한 나에게도 소리의 감각이 슬며시 찾아온다. 읽기를 통해, 진동 없이도 소리에 준하는 어떤 감각을 찾을 수 있을까? 혹은 그렇게 쓰이지 않았더라도, 읽기를 통해 그것을 소리에 관한 것으로 감각할 수 있을까? 동시에 그것을 소리내는 사건을 위한 악보가 아닌, 읽기 위한 글이라고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누군가는 그렇다고 믿는다.
이것으로 1부의 연주가 끝난다. 여기에는 책을 읽기 위해 수반되는 행동과 읽기, 그리고 읽은 이후의 행동이 있다. 들려오는 소리는 책을 집어들거나 종이를 넘기거나 찢는 소리다. 중요한 건 소리내는 일보다는 다른 방식의 읽기를 시도해보는 일, 그것을 연주로 만드는 일인 것처럼 보인다.1) 책을 집어듭니다.
2) 책 표지를 살펴봅니다.
3) 총 페이지수를 확인합니다.
4) 공간에 있는 색상(검정, 흰색, 빨간색, 노란색 등)에서 영감을 받은 페이지수를 선택하고 페이지를 넘기거나 뒤적여서 펼칩니다. 리허설에서든 공연에서든 매번 새로운 페이지수를 생각해봅니다.
(…)
8) 공간에 있는 재료(플라스틱, 천, 금속, 거친, 부드러운, 광택 등)에서 영감을 받은 마지막 페이지수를 선택하고 페이지를 넘기거나 뒤적여서 펼칩니다. 리허설에서든 공연에서든 매번 새로운 페이지수를 생각해봅니다.
9) 페이지에서 이 페이지에서 시작하는 단락을 찾아서 끝까지 읽습니다. 손가락을 사용하여 읽고 있는 단어 아래를 따라갑니다.
10) 방금 읽은 페이지를 찢어 책과 함께 책 옆에 놓습니다.
이어지는 2부에는 오선보가 있지만 이것 또한 소리내는 연주를 위해 쓰인 것은 아니다. 이 곡에 대한 지시대로 “마음속으로만 음악을 연주”해야 한다. 마디마다 박자가 바뀌고, 반복되는 패턴이라고는 잘 등장하지 않으며, 굉장히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마음속으로도 잘 연주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악보를, 아마도 연주자는 굉장히 집중해서 읽었을 것이다. 눈으로 빠르게 훑을 수 없고 쉽게 기억할 수 없는 이 악보를 (손가락으로 읽고 있는 단어 아래를 따라가듯) 꼼꼼히 한 음 한 음 읽어내려갔을 것이다. “마음속으로만 음악을 연주”하라는 지시는 집중도 높은 읽기를 통해서 성취된다.
두 세기 전 로베르트 슈만은 〈유모레스크〉에서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 하나의 성부를 써놓고 그 위에 ‘Innere Stimme’(내부의 목소리)라 적었다. 건반을 누르는 대신 마음속으로 떠올리라는 지시였다. 여기에서도 악보에 기입된 지시를 밖으로 행하는 독보와 텍스트 속에 기입된 의미를 안으로 받아들이는 독서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문석민과 오민은 한 악장의 전부를 마음속으로 연주하게 한다. 먼저 책을 펼쳐 글자를 읽고, 그 읽기의 감각을 이어가며 악보 위 기호들을 읽는 방식으로. 그것은 통상적인 방식으로 소리내지 않지만, 통상적인 연주만큼의 집약적인 수행, 즉 읽기로써의 연주를 요구한다.
누군가는 실제로 들리지 않는 음악을 마음속으로 상상하며 듣고, 누군가는 바로 그런 수행을 위한 악보를 쓴다. 그렇게 쓰인 악보가 정말로 충실히 수행되었는지는, 그가 진짜로 상상하고 들었는지는 아마도 연주자 스스로 ‘내청’(inner hearing)한 결과로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소리를 들었던 기억에 의지해, 이 악보의 소리를 마음속에서 만들어내고, 그것을 연습과정에서 여러 차례 조율하고, 다시 듣는다. 소리는 바깥으로 새어나오지 않는다.
말함으로써 있게 하고, 말함으로써 심상을 떠올리게 하고, 말함으로써 무언가를 침묵 속에서 수행하게 하고, 다시 말함으로써 그 모든 것을 끝내는 텍스트를 떠올려본다. 이것이 아마 넓은 의미의 수행적 텍스트일 것이고 텍스트 스코어가 바로 여기에 속하겠지만 다른 한편, 문학이 여기에서 배제되어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처음부터 연주를 위해, 듣기를 위해 쓰인 텍스트는 아니었지만 로 위에는 이를 수행적 텍스트로 사용한다. (로 위에는 텍스트 스코어를 때때로 그의 공연 시리즈 ‘남산’에서 연주한다. 그가 텍스트를 연주하는 방식은 ‘남산’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나는 그의 연주가 낭독과 듣기, 연주, 관찰을 포함하는 넓은 것이라 이해하고 있다.) 애초에 허정은의 글에 그 일말의 가능성이 숨어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로 위에의 스코어를 읽고 텍스트가 읽는 자에 따라 듣기 위한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내일의 나무가 보이는 곳에 서 있었다.
나무 가지의 흔들림이 필요했다.
어떤 이름, 어떤 질문, 어떤 고백,
나타나고 사라진다.
그리고 온 마음을 기울여 듣는다.5)
그 사실은 다시 한번 허정은의 글을 바꾸어 읽게 한다. 허정은의 근간 『세계의 싹들』에는 “오래된 책들의 문장을 잘라 분절된 낱말들을 이어가며” 지은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여러 곳에서 온 낱말들을 이어 만든 글들 중 일부를 로 위에의 텍스트 스코어와 나란히 놓아본다. 이것 또한 수행을 위한, 듣기 위한 텍스트가 될 수 있다고, 혹은 허정은이 낱말들을 이어가는 동안 이미 그런 시간을 거쳐왔다고 생각해본다.
앞서 다른 사례에서는 음악을 위해 쓰인 문서 또는 텍스트에서 독서의 가능성을 찾고, 독서와 독보가 하나로 겹쳐지는 순간을 목격했다면 이 두 사람의 작업에서는 그 반대의 경우가 발생한다. 독서를 위해 쓰인 텍스트에서 독보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대단히 많은 변형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다. 그저 이것이 수행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뿐인데, 이 글을 읽는 시간은 독서인 동시에 독보로도 확장된다. 두 사람의 작업에서 나는 글을 읽는 경험과 스코어를 읽는 경험을 더이상 변별할 수 없다.노래의 설계도를 펼쳐요.
천정이 높은 이 노래에
음(音)의 층계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의 이야기,
나선 모양으로 끝없이 이어지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노래인 것처럼. 6)
커다란 음악이야.
기나긴 이야기야.
완전한 울림이야.
오랜 침묵은.7)
그리고 나는 독서를 위해 쓰인 또다른 글들을 조금씩 의심해보거나, 거기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기에 이른다. 그 읽기는 텍스트 스코어 읽기와 어떻게 다른가? 이 독서가 내게 자연스레 수행시키는 것은 텍스트 스코어가 내게 수행시키는 것과 얼마나 같거나 다른가? 우리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듣고 마음속으로 상상하고 움직이고 바꾸어보는 것. 그것이 곧 텍스트 스코어가 하는 일이라면, 문학이 하던 일은 그것과 얼마나 다른 것이었을까? 이건 생각보다 그렇게 멀지 않은 이야기인 것은 아닐까?
팀 잉골드는 이렇게 말한다. “수사들은 글의 종이면이 이야기한다는 상가마의 주장이나, 읽기는 종이면의 목소리가 하는 말을 듣는 문제라는 발상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그 말이 이전에 노래로 불리고 말해져온 것들을 들어왔기 때문에, 그리고 숙련된 반복을 통해 청각과 근육의 자각 속에 말의 표시가 남겨졌기 때문에 들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읽기는 단지 듣기가 아니라 기억하기이기도 하다. 글이 말한다면 과거의 목소리들과 함께 말하는 것이며, 독자는 마치 그 목소리들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것처럼 그것들을 듣는다.”8)
문학적 텍스트를 스코어로 사용하거나 텍스트 스코어를 시의 일종으로 읽고, 시와 노래를 변별하지 않은 채 한 지면에 두고, 종이 아래에 그 말과 소리 모두를 뭉뚱그려놓을 수 있다면, 글자를 읽는 동시에 우리는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
김뉘연의 시 「목소리의 충동」은 이렇게 시작하고 끝난다. 말과 소리는 한 종이 아래에 넘어져 있고, 고여 있다.
어떤 정체 모를 텍스트를 읽는 즉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감각, 우리에게 떠오르는 정보, 우리가 뒤따르게 되는 여정, 우리가 듣게 되는 소리, 우리가 수행하는 사건, 이 모든 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 모든 것을 불러일으키는 ‘읽기’라는 하나의 동사를 이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낮은 출구를 찾았다.
말이 멈췄다.
말들이 넘어져 있었다.
소리가 멎었다.
소리들이 고여 있었다.
종이 아래의 일들.9)
신예슬
배움을 위해 가끔 글을 쓴다.
2025/04/16
72호
- 1
- 김뉘연, 「목소리의 충동」, 『모눈지우개』, 외밀, 2020, 11쪽.
- 2
- 오민, 『스코어 스코어』, 작업실유령, 2017, 59쪽.
- 3
- 저작권이 만료된 악보 파일을 제공하는 사이트 IMSLP(International Music Score Library Project)에도 이 비문의 이미지가 올라와 있다. 바로가기
- 4
- 팀 잉골드, 『라인스』, 포도밭출판사, 2024, 45-46쪽.
- 5
- 로 위에, ‘htlb_순간_내일의’, 2024. 이 텍스트 스코어의 원문은 다음의 책에서 발췌한 것이다. 허정은, 『영원 구름 순간』, 거울, 계단, 2020, 71, 40, 74, 79쪽.
- 6
- 허정은, 『세계의 싹』, 거울, 계단, 2024, 65쪽.
- 7
- 허정은, 같은 책, 84쪽.
- 8
- 팀 잉골드, 같은 책, 93, 53쪽.
- 9
- 김뉘연, 「목소리의 충동」, 『모눈지우개』, 외밀, 2020, 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