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로움의 경제

새로움은 새로움 자체라기보다는 새로움에 대한 동경이다. 새로움은 언제나 그러한 점으로 인해 난관에 부딪친다. _테어도르 아도르노1)

동시대 문화의 장(field)에서 ‘새로움’이라는 카테고리의 중요성에 관해 언급하는 것은 다소 새삼스럽게 들릴 수 있다. 독창성, 원본성, 실험성, 창조성 등의 어휘들과 느슨하게 등가 관계를 맺고 있는 새로움은 대상들 사이의 차이를 분별하고, 그 차이가 지닌 문화적 의의를 가시화하기 위한 유력한 방법론적 기호이다. 새로움이 수행하는 시간화(temporalization)의 변증법은 문화적 변동과 질서의 재편을 정당화하는 기초 논리를 표상한다. 새롭다는 평가 속에서 현재는 기존과 다른 낯선 것으로 식별되며 과거는 더이상 새롭지 않은 것, 결과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는 오래된 것의 영역에 재배치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움이 문화적 대상에 대한 평가 척도로 자리잡는 과정은 잘 알려져 있듯 모더니티(modernity)의 역사적 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근대 이전에 새로운 어떤 것이 부재했다는 뜻이 아니다. 핵심은 새로움이 단순한 차이 이상의 특별한 미학적 가치(value)로 인지되기 시작했다는 사실, 즉 새로움의 가치화 현상이다. “현대적 전통은 새로움이 곧 가치라는 생각이 탄생한 것과 더불어 시작되었다.”2)
  새로움이라는 가치의 현대적 성격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세부 명제들을 통해 좀더 구체화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새로움은 혁신적이다. 혁신은 차이를 산출하고, 그것에 유의미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방법론적 이념이다. 새로움의 가치화가 문화적 혁신 행위들에 대한 지지로 이어지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필연적이다. 둘째, 새로움은 미래적이다. 혁신에 대한 문화적 지지는 새로움이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진보, 미래에 대한 유토피아적 비전을 반영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셋째, 새로움은 불온하다. 미래를 향한 혁신적 상상이 과거에 대한 평가 절하, 즉 기존 질서를 향한 전면적 부정과 도전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넷째, 새로움은 정치적이다. 문화적 혁신의 불온한 열정이 현재에 대한 불만, 더 나아가 동시대와의 전투적 불화를 촉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움의 절대성을 추구했던 역사적 유파이자 오늘날까지도 미학적 혁신의 상징어로 사용되는 아방가르드라는 개념이 최전선을 지칭하는 군사 용어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3)
  그런데 콩파뇽이 제시한 ‘현대적 전통’이라는 단어는 새로움이 직면하게 될 모종의 숙명적 아이러니를 예고하는 것 같다. “새로움을 지향하는 것만큼 전통적인 것은 없다.”4) 모든 새로움은 전통에 대한 맹렬한 저항이지만 성공적인 새로움은 그 스스로가 전범, 유행, 제도가 되고, 마침내 전통에 편입되어버림으로써 생명력을 잃기 마련이다. 현재의 새로움은 결과적으로 후대의 새로움과의 비교 속에서 가치 절하를 감수해야 하는, 미래의 예정된 낡음이다. 새로움이 고정된 가치가 아니라 특수한 시간적 원리에 따라 변화하는 제도적 가치(전통)라는 사실은, 문화적 변화를 추동하는 새로움의 변증법이 가치 변동의 차원에서 탐구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현대적 ‘전통’이라 일컬어지는 문화적 가치 변동의 일반성 혹은 특수성은 새로움의 역동성을 가격 변동이라는 경제 원리에 비유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이른바 새로움은 일종의 경제적 현상이다. 여기서 경제라는 단어를 단지 시장에서의 상거래 행위라는 좁은 의미로 제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가치가 발생하는 곳이라면, 그것에 대한 측정을 바탕으로 거래, 교환, 유통, 분배, 생산, 소비가 실천되는 시공간이라면 반드시 남다른 경제적 원리가 작동하기 마련이다. 상품경제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언어의 경제, 욕망의 경제, 더 나아가 문화의 경제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다.5) 문화의 경제라는 관점에서 새로움에 접근하는 것의 이점은, 문화적 대상의 가치를 그 실체적 속성과 구분해서 분석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가령 예술작품의 객체적, 물리적 속성(크기, 모양, 색, 내용, 형식 등)은 대상의 가치를 구성하는 필수 재료이지만, 그것만으로 작품의 동시대적 가치가 온전히 해명되지는 않는다. 특정 작품에 대한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아카이브로 편입되어야 하며, 특수한 비교의 원리와 체계 속에서 그 가치가 인지, 평가되어야 한다. 이때 새로움이라는 단어에 내포된 경제적 의미는 중층적이다. 첫째, 새로움은 동시대 문화 아카이브와 관련하여 특정 대상이 갖는 가치를 지시, 재현, 측정하는 (유일하지는 않지만) 유력한 기호이다. 둘째, 새로움은 문화적 아카이브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생산, 소비, 교환, 유통을 활성화하는 가운데 그 역사적 성격을 반영하고, 아카이브 자체의 혁신적 재구성의 원리를 표상한다. 특정 시기에 새롭다고 평가되는 예술작품을 탐구함으로써, 그 시대의 문화적, 정치적 (무)의식에 다가갈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처럼 이 글에서 새로움은 문화적 대상의 가치를 측정, 평가, 표시하는 기호(화폐)를 지시하며, 새로움의 경제(economy of the newness)는 문화적 혁신을 독려하고 정당화하는 특수한 문화적 통화 체제(monetary system)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


2. 새로움의 인플레이션

새로움의 경제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동시대 새로움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이론적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새로움의 경제가 원활히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현재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더이상 새로움이라는 어휘가 사용되지 않는다는 뜻일까. 상황은 정반대에 가까워 보인다. 동시대 문화적 현실을 묘사하는 데 적합한 표현은 (경제 용어를 빌리자면) 차라리 공급 과잉, 즉 새로움의 인플레이션에 가깝기 때문이다. 문화계 전반을 돌아보면 이러한 상황을 확인하는 것은 경험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다. 젊음, 혁신, 파격 등의 비평적 수사와 함께 열렬히 환영받고 있는 예술장 전반의 새로운 작가와 작품들, 그리고 인터넷, SNS, 시장 등에서 끊임없이 창출되고 있는 신선한 문화적 유행과 트랜드는 우리의 일상이 그 어느 때보다 새로운 것들로 넘쳐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질문은 현재 공급되는 새로움의 물리적 양이 아니라, 그것의 가치와 효과로 좁혀질 수밖에 없다.
  동시대 미술계의 영향력 있는 이론가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새로움의 불가능성을 주장한 대표적 회의론자 가운데 하나이다. “더이상 새로움은 기준이 아니다. 다만, 현대 예술의 후기 비판자들 사이에서만 예외적으로 유효할 뿐이다. 이들은 현재를 저주할 때에만, 전통주의적 문화가 가르쳐준 과거 예술의 혐오에 매달릴 뿐이다.”6) 그에 따르면 새로움에 대한 강박은 전통주의자들의 시대착오적 집착을 보여줄 뿐이다. 현대적 전통으로서의 새로움이 시효를 다했음을 믿고 싶지 않은 자들만이 힘겹게 그 단어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움은 과거와 현재의 예술을 비난하고 혐오하기 위한 개념적 도구일 뿐이며, 동시대 예술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 왜 이런 진단이 내려진 것일까. 또 한 사람의 영향력 있는 동시대 이론가 피터 오스본(Peter Osborne)은 그 원인을 새로움과 미래 사이의 완전한 이념적 단절로 분석한다. 모더니즘과 아방가르드가 가능했던 역사적 시대와 달리, 동시대에 생산되는 문화적 새로움은 더이상 미래에 대한 비전과 관계를 맺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연대기적 상상력이 진보적 미래에 대한 감각의 붕괴로 인해 전혀 다른 시간 감각으로 대체된 셈이다. “새로움의 시간적 변증법은 (시간적 통일성을 구성하기 위한 기점으로서) 역사적 현재에 질적 정의를 부여했다. 그러나 동시대(contemporary)라는 개념으로 인해 현재가 미래로부터 단절되면서, 새로움은 공동의 현재라는 현실성으로 대체되어 버렸다.”7) 왜냐하면 미래와 단절된 현재적 지평 위에서 가능한 것은 무수히 많은 시간성들의 공존, 대립, 충돌이라는 혼종성의 사태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현재로서의 동시대성 위에서 유통되고 있는 새로움은 시간적 위계를 나타내지 않으며, 다만 시간적으로 무차별한 차이들을 표식하는 구별의 징표에 불과하다.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사이먼 레이놀즈는 전지구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대중문화 영역에서의 과거적인 것에 대한 열풍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21세기 들어 나타난 레트로 트렌드는 새로움이 불가능한 시대의 자기 은폐, 사실상 퇴행을 의미하는 기만적 환영에 지나지 않다. “재활용과 되풀이가 구조적 특징으로 자리한 탓에, 반짝 하는 신기함, 즉 바로 전 유행에서만 벗어나는 유행이 진정한 혁신을 대체해버렸다.”8) 진보와 퇴행이 구별되기 어려워지고, 눈앞의 차이와 ‘진정한 혁신’이 무분별하게 혼동되는 상황이 전면화되면서 과거의 “새것 애호증이 시체 애호증으로”9)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도발적인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과거를 통해 새로운 것을 부활시키려는 모든 시도들은 잃어버린 전망에 대한 향수, 몰락한 미래를 향한 시대착오적 노스탤지어에 불과하게 된다. 이러한 논의들에 따르면 동시대가 직면하고 있는 새로움의 인플레이션은, 역설적이게도 영원한 현재라는 역사철학적 시공간에 갇혀 있음을 증언하는 수행적 자기 선언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와 같은 새로움의 인플레이션 현상을 낳은 근본 원인 가운데 하나로 시장과 자본주의를 지목하는 것은 전혀 새롭지 않지만, 여전히 설득력 있는 접근법일 것이다. 예술과 미학의 영역에서 새로움이 해소불가능한 권태에 감염되었다면, 시장에서의 새로움은 상품의 가치를 호소하고 소비자를 유혹하는 매력의 기호로 유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에르네스트 만델(Ernest Mandel)의 용어를 빌려, 시장이 문화의 논리(새로움)를 완벽히 전유해버린 현실을 후기 자본주의(late capitalism)의 일반적 양상으로 묘사한다. “오늘날에는 미학적 생산이 상품생산 일반에 통합되어버렸다. (의류에서 비행기에 이르기까지) 한층 더 신기해 보이는 상품과 새로운 유행을 한층 더 빠른 주기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경제적 압박은, 이제 미학적 혁신과 실험에까지 본질적으로 구조적인 기능과 위상을 부여하고 있다.”10) 이와 같은 전도된 미학적 혁신 양식이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의 층위에도 깊숙이 침투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혁신적 예술작품이 선사했던 전통적 감각들, 이를테면 충격, 놀라움, 감탄, 공포는 이제 혁신적 상품이 제공하는 기쁨과 만족, 그리고 그것에 대한 열렬한 기대와 환호로 대체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제임슨은 이러한 자본주의적 정동의 미학적 성격을 일컬어 강렬함(intensity)과 희열(euphoria)이라고 명명한다. “리오타르를 따라 ‘강렬함’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가장 정확해 보이는 이러한 감정들은 자유롭게 유영하는 몰개성적인 것이며, 특별한 종류의 희열(euphoria)에 의해 지배된다.”11)


3. 예술가로서의 기업가

나는 위대한 예술가와 위대한 엔지니어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양자 모두 자기 자신을 표현하기를 욕망하기 때문이다. 오리지널 맥(Mac)을 개발한 내 최고의 동료들은 어떤 면에서는 시인이자 음악가 같은 존재들이었다. _스티브 잡스

새로움이라는 문화의 원리가 시장에 의해 장악당한 현 상황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혁신가-기업가 모델의 부상일 것이다. 오늘날 기업가에게 요구되는 과제는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라, 혁신적 제품을 발명하는 것이다. 기업가는 창조적 혁신에 대한 의지와 함께 전혀 새로운 상품을 사람들에게 선보여야 하는 모험가이자 발명가, 더 나아가서는 예술가의 동의어이다. 오늘날 유행하는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의 저작권자인 경제학자 슘페터(Joseph Schumpeter)는 기업가의 혁신 정신을 자본주의의 핵심 동력으로 꼽는 가운데, 기업가와 예술가 사이의 유사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기업가는 경제적 요소들에 새로운 형식을 부여하고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한다. 위대한 창조적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을 다루는 방식처럼 말이다. (…) 경제적 대상들에 새로운 형식을 부여하는 창조의 기쁨은 예술가들이 예술작품을 창조하는 행위와 동일한 기반에 근거하고 있다.”12)
  아마도 스티브 잡스는 슘페터가 강조한 예술가로서의 기업가라는 형상을 동시대적으로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혁신의 아이콘일 것이다. 그는 상품의 혁신성이 기능적 유용성을 통해 온전히 충족되지 않음을 누구보다 정확히 간파한 사람 중 하나였다. 비정한 사업가이자 완벽주의적 예술가라는 잡스의 이중적 초상은 그가 상품의 디자인(design)에 투여한 강박적 열정을 통해서도 명료하게 확인된다. 이때 디자인에 대한 그의 투철한 신념은 상품이 기능적으로 새로울 뿐만 아니라 미학적으로도 새로워야 한다는 현대적 믿음을 반영한다.
  왜 디자인인가? 일찍이 빌렘 플루서(Vilém Flusser)는 디자인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예술과 기술의 통합에 모종의 기만적 성격이 은폐되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디자인이라는 단어에는 ‘음모, 비밀 계획, 공격적 의도, 계략, 사악한 목적’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데, 기능적으로 더욱 강력하고 미학적으로 더욱 아름다운 디자인이 각광받는 오늘날의 추세가 결국 문화적 속임수에 대한 폭로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견한 것이다.
우리가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와 관련하여 한 가지 대답을 제시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음모나 사악한 목적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디자인이 우리 시대를 더욱 특징지을수록, 문명이 본래 우리를 속이기 위한 교묘한 장치라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 우리는 이제 문화에 그 어떤 진짜도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모든 것은 기만적 시도이며, 가짜를 진짜로 대체하려는 교묘한 속임수일 뿐이다. (…) 디자인의 본질을 깨달을수록 우리는 기계, 기술, 예술, 그리고 궁극적으로 문화 자체에 대한 믿음을 잃어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탈역사”(post history)라 불릴 수 있는 시대이다. 탈역사의 시대는 인간이 더이상 가짜를 진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치의 개념을 상실하며, 자연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순간을 가리킨다. “탈역사”는 마침내 디자인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렸기에 디자인이 작동하지 않는 끔찍한 시기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13)
디자인이 왜 탈역사와 문화적 가치 상실과 탈역사의 국면을 초래하는 것일까. 디자인의 지배적 영향력을 강화하게 만드는 기술력의 발전과 대량 생산 체제가 상품의 평준화 및 가치 하락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상품에 내포된 문화적 가치와 가격 사이의 역설적 반비례 관계를 정초하는 근본 계기가 디자인에 있다. “디자인적으로 모든 것이 점점 더 기능적이고, 더 아름답고, 더 강력해지고 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점점 더 저렴해지고 있다. 문화 전체는 점점 더 경멸적인 장치들의 집합체가 되어가고 있다.”14)
  디자인에 대한 플루서의 사유가 지닌 비판적 통찰력과 별개로, 그의 예측이 빗나갔다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그가 위 글을 썼던 1990년대 초반과 달리, 이제 디자인은 상품의 가격을 더욱 상승시키는 데 요구되는 필수적 요소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탈역사의 문화적 국면은 디자인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디자인의 전방위적 승리 속에서 전개된다고 봐야 한다. 디자인에 대한 잡스의 다음과 같은 재정의는 디자인의 종말을 예견했던 플루서의 예견을 도착적으로 반박하는, 일종의 예술적 신앙 고백처럼 들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디자인은 ‘겉모습’을 뜻합니다. 하지만 내 생각엔, 그건 디자인의 의미와 정반대입니다. 디자인은 인간이 만든 창작물의 근간을 이루는 영혼입니다. 그 영혼이 결국 여러 겹의 표면들을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는 겁니다.”15) 디자인에 대한 잡스의 신념이 내면, 외면, 영혼, 표현 등의 예술작품에 관한 낭만적이면서도 신비평적 수사들로 피력되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디자인은 단순히 예술과 기술을 연결하는 매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기술로의 완전한 통합, 즉 예술로서의 상품의 자율성을 표현하는 돌이킬 수 없는 증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때 혁신을 매개로 이루어지는 상품과 예술 사이의 특수한 공조 현상은 상품의 예술화를 독려하고, 양자의 분리불가능성을 정당화하는 원천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폰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잘 빚어진 항아리’(the well wrought urn)이다.


4. 미학적 자본주의(aesthetic capitalism)

상품의 예술화는 동시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의 상품의 가치와 그 존재 방식이 더이상 기능이나 유용성에만 근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시장이 본격적으로 관심을 쏟는 대상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것의 쓸모이다. 첨단의 자본주의는 유용한 상품의 공급을 넘어, 시장 바깥의 쓸모 없는 것들을 가치화함으로써 수요와 소비를 끝없이 창출하는 데까지 진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사회학자 뤽 볼탕스키(Luc Boltanski)와 아르노 에스케레(Arnaud Esquerre)는 최근 저서 『풍요: 상품에 대한 비판 Enrichment: A Critique of Commodities』에서 이와 같은 새로운 가치화 현상을 토대로 창출되는 부의 경제와 불평등의 심화 양상을 상품의 미학화라는 층위에서 분석한다. “필요와 필연성, 그리고 유용성의 문제를 통해 정당화되었던 자본주의가 고갈과 소진이라는 난제를 야기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수집(arrangement of collection)의 일반화는 소비주의적 축적을 재가동할 수 있는 새로운 자원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새로운 수요는 유용성을 참조하는 대신 오히려 쓸모없는 것들을 축적하는 가치, 다시 말해 축적 그 자체를 위한 축적에 기반을 둔다.”16) 유용한 상품들의 생산과 공급만으로는 고갈에 직면하게 될 자본주의가 스스로의 동력을 얻기 위해 예술의 가치를 참조했다는 가설은 주목할 만하다.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상품, 도구적 유용성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하는 상품들은 시장에서 더이상 특별한 매력을 호소하지 못한다. 관건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의 가치화, 즉 쓸모 없는 것에 경제적 부가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용가치가 없다는 예술의 속성이 새로운 형태의 이익(interest)을 창출하기 위한 각별한 관심(interest)의 대상으로 포착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언급된 ‘축적을 위한 축적’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자율성 이념의 전도된 버전처럼 들린다는 사실이다. 좀더 이어가보자.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 불리는 것은 본질적으로 수집가들을 위한 예술이었다. 예술이 외부적(혹은 ‘사회적’) 기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일부 주장과 달리, ‘예술을 위한 예술’은 그 자체의 기능적(그리고 사회적)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방향성은 자신의 컬렉션을 완성·확장하려는 수집가들이 직면하는 제약들에 의해 형성되었다.”17)
  자본주의가 발달한 사회에서 부상하고 있는 새로운 소비 형식은 사용이 아니라 수집이다. 이제 소비자는 상품을 사용하기 위해 구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예술작품을 수집하듯 상품을 욕망한다. 과거에는 예술 애호가들의 소비 방식에 가까웠던 수집이 이제는 상품 일반에 대한 소비 형식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상품의 상징적 위계질서가 재편되는 중이다. ‘풍요의 경제’(economy of enrichment)라는 그들의 테제는 이른바 모든 것의 상업화라는 자본의 논리 속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상품의 미학적 위계질서의 원리를 일컫는 것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미학화(aesthetization of capitalism) 또는 미학적 자본주의(aesthetic capitalism)18)로도 명명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체제 속에서는 무용한 것과 유용한 것에 대한 기존의 구분이 철폐되고, 무용성을 근거로 유용한 것들의 세계를 비판하는 전통적인 예술의 정치가 난관에 봉착한다. 경제적 부가가치로 계측, 환산될 수 없는 무용성의 영역이 급격히 축소되고, 현재의 무용성은 미래의 교환 가치로 어렵지 않게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용한 것에 대한 소비는 결국 투자와 구별되지 않는데, 그것은 수집될 만한 가치가 있는 상품은 투자를 위한 자산 형식(asset form)으로 언제든지 전환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제 미술작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미학적 안목과 투자에 대한 감각은 별개의 능력이 아니다. “개인의 고유성을 표현하는 예술은 그간 전면적 획일화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 동안 이러한 경향은 예술과 금융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구조로 이동하는 듯하다.”19)사용가치는 부재하지만, 막대한 교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작품과 가장 유사한 존재 방식을 공유하는 대표 재화는 금융 상품이다.


5. 미학적 호모 에코노미쿠스

조금 다른 각도에서 아감벤은 볼탕스키와 에스케레가 강조한 자본 축적의 자기 목적적 무한성의 원리를 자본주의에 내포된 종교적 성격과 결부시킨 바 있다.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이론 그리고 벤야민의 「종교로서의 자본주의」를 더욱 급진화하는 가운데, 아감벤은 “자본주의는 모든 경험 영역에서 그 종교적 성격이 증명되고 있으며 기독교와의 기생적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20)고 선언한다. 그의 도발적인 주장을 관통하는 여러 이론적 근거 가운데 그가 강조하고 있는 종교적 믿음(faith)과 경제적 신용(credit) 사이의 어원학적·신학적 기원의 동일성, 나아가 신앙과 자본의 무한한 자기 목적성은 주목될 필요가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본주의와 기독교 사이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벤야민의 가설은 또 한 번 확증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전적으로 신앙에 기반한 종교이다. 자본주의의 신자들은 오직 신앙(Sola Fide)에 의지해 살아간다. 벤야민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숭배 행위가 모든 대상으로부터 해방되고, 죄의식(guilt)이 모든 죄(sin)로부터 자유로워진 종교, 그리하여 결국 구원의 가능성조차 사라진 종교이다. 신앙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그 어떤 구체적인 대상을 갖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믿는 행위 자체를 믿으며, 순수한 신용(credit), 즉 돈을 믿는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신앙(즉 신용)이 신을 대체한 종교이다. 달리 말해 신용의 순수 형식이 돈이므로, 자본주의는 돈이 곧 신인 종교인 것이다.21)
‘믿음에 대한 믿음’ 그리고 ‘신용에 대한 신용’을 동일시하며, 아감벤은 현대 자본주의를 작동하게 하는 무한한 재생산의 스펙터클적 메커니즘을 강조한다. 제임슨이라면 자본주의적 희열이라고 불렀을 이러한 소진되지 않는 종교적/경제적 열정은 부채로 인한 쉼 없는 노동을 강요하고,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모든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원천이기도 하다.22) 측정된 미래 가치에 대한 믿음과 함께 끊임없이 현재에 부채를 안기는 현대 금융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목적으로부터 탈구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파멸을 향한 영구적 자기 증식을 이어가는 중이다. 이와 같은 오늘날의 첨단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를 물질만능주의 등의 당위적 어휘로 비판, 분석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 돈이라는 기호의 추상적 보편성은 돈을 향한 갈망이 세속적 욕망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될 수 없는, 고도로 물신화된 믿음이라는 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어떤 내용적 진실도 담지 않는 순수 형식으로서의 돈이라는 기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참조 대상으로 삼는 무한한 운동 속에서 종교적 영향력을 광범위하게 확장해 나간다.
  아감벤의 테제(‘종교로서의 자본주의’)로부터 예술에 관한 직접적 언급이 발견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도발적인 주장은 새로움과 자본주의적 스펙터클 사이의 공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는 것 같다. 자본주의가 맺고 있는 기독교와의 기생 관계는 그것이 문화와 맺고 있는 관계 논리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본의 무정부상태는 끊임없는 혁신의 필요성과 일치한다.”23)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 ‘혁신을 위한 혁신’이라는 예술의 자기 충족적 논리의 도착적 세속화는, 종교와 자본주의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만드는 데 예술과 미학이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혁신에 대한 시장의 명령이 단지 비즈니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후는 오늘날 광범위하게 선호되는 주체성의 양식이다. 자본주의의 신학적 명령을 끊임없는 부채로 인한 노동으로 파악했던 아감벤의 사유를 보다 당대적인 맥락으로 보충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혁신으로 대체하면 된다.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전통적인 개념으로서의 노동이 아니라, 혁신을 위한 노동이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그 영향력이 감소되지 않은 자기 계발의 신화는, 사실상 무한한 자기 혁신에 대한 미학적 요구의 동의어에 다름 아니다. 이때 새로운 나를 창조하는 과정이 단지 더 많은 역량,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재가 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는 푸코가 언급했던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개발, 관리하는 경제적 주체,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이제 주체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예술가, 새로운 나를 디자인하는 자기 자신의 혁신가로 거듭나야 한다. 이제 세계를 미학화하라는 낭만주의의 근본 강령은 세계를 혁신하라는 시장의 정언 명령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인스타그램, X(트위터), 페이스북, 유튜브 등은 일상의 모든 장면들을 프레이밍하고, 삶을 아름답게 크로핑 하도록 강요하는 우리 시대의 미학적 자본주의 장치들이다. 자아의 전시적 가치를 극대화시키는 풍요의 경제 속에서 우리의 삶은 언제나, 어디서든 예술적으로 수집될 수 있는 잠재적 포섭 대상이다.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에 대항하기 위해 말년의 푸코가 착목했던 ‘삶의 미학화’가 애초의 의도와 달리, 오늘날의 신자유주의적 행동 전략과 혼동되는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스스로에 대한 혁신의 주체, 예술가로서의 주체는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가장 업그레이드된 버전이다.


6. 잠시 멈춤

지금까지 새로움이 처한 문화적 교착 상태에 관한 논의들을 간략히 소개했지만, 이러한 이론적 스케치를 새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분명 누군가는 동시대 이론이 도리어 새로움의 불가능성을 증명하고 해명하는 일의 새로움에 지나치게 의존해온 것은 아닌지 의문을 표할 것이다. 이러한 불만 섞인 의문의 정당성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새로움의 종언을 사유하는 동시대 이론의 비판적 역량 역시 ‘인식의 새로움’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느새 시효를 다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미학적 자본주의 하에서 이론이 처한 난관의 이중성은 새로움의 긍정이나 부정이라는 양자택일의 시각만으로 이 문제를 타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동시대 이론에 요구되는 과제는 긍정과 부정이라는 당위적 관점으로 새로움에 접근하지 않는 것, 미학적 새로움에 부과되었던 수많은 이념적 부담들을 우선 덜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애초 이 글의 목적은 문학의 경제 안에서의 새로움을 이론적으로 다시 탐구하는 것이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 시도는 차후를 기약해야 할 것 같다. 다만 이후 지속될 작업의 예비 단계로서 몇 가지 질문과 과제를 제시하며 잠시 멈추기로 하자.
  1) 기호로서의 새로움과 문화경제적 원리로서의 새로움의 차이: 새로움의 불가능성을 촉진하는 동시대적 현실이 새로움이라는 기호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새로움을 창출하는 경제적 원리에 관한 것인지는 다소 불분명해 보인다.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새로움의 인플레이션 현상, 즉 새로움의 자본주의화는 기호로서의 새로움이 스펙터클화 되는 양상들만을 유독 과장해서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동시대의 문화적 현실이 그 어느 때보다 자본 앞에서 취약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문화적 기호-화폐로서의 새로움이 시효를 다했음을 인정하는 것과 문화적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기제가 시장에 의해 완전히 잠식당했다고 결론내리는 문제는 별개의 사안일 수 있다. 전자의 상황에 비추어 후자를 단언할 때, 자본과 시장의 힘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문화의 영역에서 현재 활발하게 발생하고 있는 차이들의 실질적 가치를 간과할 우려가 있다. 관건은 이데올로기적 기호로서의 새로움과 새로움의 문화경제학적 원리를 분별하는 가운데, 유의미한 새로움의 사건을 판별해보려는 실천적 노력이다.
  2) 문학이라는 매체의 특수성: 문학이 지닌 매체적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문학의 경제와 시장의 경제를 구별하는 데 있어서 새로움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규명해볼 수 있다. 문화의 전영역이 급속히 자본의 포섭 대상이 되어가는 추세 속에서 어쩌면 문학은 상대적으로 그에 가장 적합하지 않는 장르적 영역으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이 특별히 반자본주의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언어의 복제 가능성에 기반해 있다는 매체적 특성상 수집이나 자산 등의 소유 형식으로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용가치의 부재 속에서 오히려 교환가치의 극대화를 도모할 수 있는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문학 텍스트의 소유 및 축적 불가능성은 그 특수한 사용의 방식을 부각시키는 독특한 요소 가운데 하나이다. 책이라는 형식을 통해 구현되는 문학이라는 매체의 시장적 교환가치(가격)는 비교적 동등하지만, 사용가치는 대상들마다 상이하며, 그것을 현실에서 사용·체험하는 독자들에 따라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
  3) 문학적 사용가치에 대한 재접근: 문학의 사용가치에 대한 재접근은 문학적 경험에 결부된 새로움이 어떤 계기로 발생하는지를 초점화 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문학을 사용한다는 말은 다소 어색하고 낯설게 들릴 수 있지만, 당연히 그것은 문학을 특정한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문학적 사용은 ‘작가-작품-독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독특하면서도 역동적인 언어적 교환 행위를, 그리고 그러한 교환 원리가 현실 언어의 경제라는 광의의 체제와 구별되는 지점을 느슨하게 지시한다. 문학의 경제라는 체제에서 새로운 작품의 생산은 단지 물리적 공급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작품의 생산은 새로운 해석이라는 문학적 사용과 수요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학의 새로움은 문학적 사용이 활성화될 때 현실의 언어적 경제와 문학의 경제 사이에서 발생하는 충돌, 갈등, 변형, 중첩, 교차의 사건을 지시하며, 두 체제의 상호텍스트적 변화 가능성을 가리킨다. 여기서 관건은 문학의 특별한 사용 가치를 해명하는 경제적 원리 속에서, 자본의 논리에 온전히 환원되지 않는 영역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문학의 새로움은 상품의 미학적 새로움과 구별되는 가치로서 재구상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강동호

문학평론가,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2009년부터 비평을 시작했으며 현재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지나간 시간들의 광장―문학의 동시대성과 비평의 정치』가 있다.

작년 초 「문학의 경제학―문학적 ‘배움’과 ‘세대’에 관한 이론적 검토」라는 이름의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300매(원고지 200자 기준) 정도 되는 짧지 않은 글인데, 개인적으로는 ‘경제’라는 키워드로 문학의 본질, 기능, 자율성 등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이번 글은 「문학의 경제학」에 이어지는 후속작으로 문학적 새로움을 경제적 현상으로 규명하기 위한 이론적 시도에 해당합니다. 지금 공개되는 글은 일종의 긴 서론 형식으로 끝이 나지만, 조만간 다른 지면에서 아직 쓰이지 않은 뒷부분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2025/04/16
72호

1
테어도르 아도르노, 『미학 이론』, 홍승용 옮김, 문학과지성사, 1997, 61쪽.
2
앙투안 콩파뇽, 『모더니티의 다섯 개 역설』, 이재룡 옮김, 현대문학, 2008, 10쪽.
3
물론 아방가르드를 새로움과 연결하는 시각에 관한 이견도 적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페터 뷔르거는 아방가르드와 새로움을 연결시키는 많은 논의들이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실질적 지향점(제도적 새로움 자체의 철폐)을 놓치고 있다고 비판한다. “예술적 표현수단의 변화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것의 카테고리는 유용할 것이다. 그러나 (…)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은 전통적인 표현체계와의 단절뿐만 아니라 예술제도 일반의 지양을 목표로 삼았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새로운 것의 카테고리는 더욱더 적합하지 못하다.” 페터 뷔르거, 『아방가르드의 이론』, 최성만 옮김, 지만지, 2013, 158~159쪽.
4
보리스 그로이스, 『새로움에 대하여』, 김남시 옮김, 현실문화, 2017, 10쪽.
5
문화의 경제, 그중에서도 문학의 경제에 관한 이론적 접근은 필자의 다음 글에서 시도된 바 있다. 강동호, 「문학의 경제학―문학적 ‘배움’과 ‘세대’에 관한 이론적 검토」,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봄호(세대-배움).
6
Nicolas Bourriaud, Relational Aesthetics, trans. Simon Pleasance and Fronza Woods, les Presses du Réel, 2002, p. 11.
7
Peter Osborne, The Postconceptual Condition, Verso Books, 2018, p. 44.
8
사이먼 레이놀즈, 『레트로 마니아』, 최성민 옮김, 작업실유령, 2017, 387쪽.
9
앞의 책, 390쪽.
10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임경규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2, 42쪽.
11
앞의 책, 61쪽.
12
Joseph Schumpeter, Theorie der wirtschaftlichen Entwicklung, Duncker & Humblot, 1911, pp. 133~142.
13
Vilém Flusser, “on the Term ‘Design’”, Artforum, March 1992, p. 20.
14
ibid.
15
월터 아이작슨, 『스티브 잡스』, 안진환 옮김, 민음사, 2015, 543쪽.
16
Luc Boltanski and Arnaud Esquerre, Enrichment : A Critique of Commodities, trans. Catherine Porter, Polity Press, 2020, p. 196.
17
ibid., p. 215.
18
이 표현은 다음 저서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Gernot Böhme, Ästhetischer Kapitalismus, Suhrkamp, 2016.
19
Luc Boltanski and Arnaud Esquerre, Enrichment : A Critique of Commodities, p. 33.
20
Giorgio Agamben, Creation and Anarchy: The Work of Art and the Religion of Capitalism, trans. Adam Kotsko,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9, p. 91.
21
ibid., p. 86.
22
제임슨은 후기 자본주의의 무한한 재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어떠한 정동의 경제에 기반하고 있는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이런 ‘악무한’이 나타나며, 유일한 정치 형식으로서 이것은 니체적 사회진화론과 형이상학적 영구혁명의 의도된 희열로 채워진다. 나는 이러한 희열이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불가능한 상황에서의 일종의 보상의 구성체(compensation formation)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정치의 부재 속에서 놓치게 되는 것은 정확히 (글로벌 차원에서의) 경제 자체의 차원, 즉 시스템, 사기업, 그리고 이윤 동기의 층위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자본주의 문화 논리』, 604~605쪽. 인용된 대목은 원텍스트를 참조하여 필자가 약간 수정했다. Fredric Jameson, Postmodernism, Or, the Cultural Logic of Late Capitalism, Duke University Press, 1992, p. 330.
23
ibid., p. 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