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교환
기억하는 사랑과 기록하는 욕망
소멸에 대한 말들
퍼포먼스의 기록에 관한 가장 논쟁적인 주장이라면 논란의 여지 없이 페기 펠란의 언급을 떠올릴 수 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퍼포먼스학자 페기 펠란은 퍼포먼스의 존재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최초의 원본, 그것의 유일무이한 실황 이후 후대에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 본인의 기억, 관객의 인상, 메모와 사진과 영상에 이르기까지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나마 다양한 수단이 있지만 종종 퍼포먼스 미술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진술의 확고한 권위를 지닌 작가의 기억과 생명이 다하고, 참여자의 진술이 엇갈리고, 우연히 찍힌 흐리고 빛바랜 사진만 몇 장 남아있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에 관해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Seven Easy Pieces>(2005)이다.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의 구작을 포함해서 현대의 고전이 된 1960-70년대의 퍼포먼스 일곱 점을 재연하는 라이브 퍼포먼스를 일주일 동안 매일 일곱 시간을 들여 보여줬다. 자신이 원작자인 작품의 재연과 달리, 다른 예술가의 작업을 재연하는 데는 원작자의 허가를 받는 일부터 남아있는 자료를 그러모아 작품의 본래 이미지와 의도를 추적하는 것까지 고고학자의 연구와 같은 끈기와 수고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본인의 작업인 <Lips of Thomas>(1975)는 자신의 다른 작업들의 요소를 재편집하고 러닝타임을 기존의 두 시간에서 일곱 시간으로 늘이며 거의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었다. 한번도 공식적으로 실행된 적 없는 브루스 나우먼의 지시문 작업 <Body Pressure>(1974)는 원작대로 벽을 미는 대신 유리를 밀어내며 관객이 어느 각도에서든 자신을 볼 수 있게 연출에 해석을 가미했고, 전시장에 설치된 경사로 아래 관객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위하며 정액을 생산하는 비토 아콘치의(1972)는 원작 그대로 공간을 조성하되 작가가 자위를 하면서 관객을 도청했다. 어느 작업이든 원작을 동일하게 반복하지는 않았다. 작가는 이러한 시도를 통해 그 세대의 몇몇 예술가들의 작업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고 말한다. 작가가 과거의 퍼포먼스를 수집한 자료를 통해 대상을 역사적으로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재연하고자 한 이유는, 그에게 퍼포먼스 미술이란 어떻게든 살아 있는(living) 것이기 때문이다. 즉, 퍼포먼스는 연행될(performed) 때만 의미가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3)
살아있는 채로 소장하는 방법
티노 세갈의 작업은 어떤 기록도 남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This is Propaganda>(2002)를 떠올려보라.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도 관련 이미지가 제공되지 않는다. 신문 기사에 실린 인터뷰 사진 한 장이 올라와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은 라이브 아트의 소장에 관해 주요 기관에 큰 화두를 던진다. 소장품에 관한 보리스 그로이스의 오래된 글을 다시 읽어보자. 그로이스는 예술적 아방가르드의 수집에 대한 관념을 논하며 이들에게 “죽은 ‘박물관’ 예술의 관습에 대한 투쟁은 삶과 죽음의 투쟁으로 이해된다. 수집의 논리는 죽음의 논리이자 죽은 논리로서, 모든 살아있는(living) 예술이 저항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가 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삶은 죽음의 문화적 논리에 직면하지 않는 한 대단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 문화적으로 중요한 모든 작품은 죽은 자와의 경쟁 속에서 탄생한다.”4) 이러한 소장의 논리에 따르면 수집을 의식하는 예술작품은 그것이 탄생한 각기 다른 외부 환경에 따라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가치를 표상하는 것보다 ‘소장 자체의 내부 기준’에 따라 그것을 수용하거나 반대하는 것으로 제작된다. 이들은 “소장품의 가치 기준을 추구한다.”5) 특히 예술적 혁신을 가치 기준으로 삼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경우 이미 소장된 예술작품과 무언가 달라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기존 소장품은 새로운 창작을 자극하고 미래 작업의 기준을 제공하는 시스템 내부의 지표로서, 이미 죽은 것이자 과거로서 인식된다. 그런데 작품의 형태가 물질적 사물이 아니라 인간 신체로 수행하는 라이브 퍼포먼스인 경우에는 수집에 관한 삶과 죽음의 논리가 어떻게 작동할까? 라이브 퍼포먼스가 존재론적으로 단일하게 고정될 수 없으며 계속해서 변화할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남아있다면, 작품이 소장되면 곧 죽음이라는 일반론을 퍼포먼스에 관해서는 유보하고 봐야 한다.
테이트 모던 퍼포먼스 담당 큐레이터 캐서린 우드는 티노 세갈의 작업이 퍼포먼스 소장에 있어 가장 어려운 대상이었다고 말한다.6) 작업의 가변성과 비물질성은 인지했다. 작업의 개념적 요구사항으로 인해 이를 사진과 영상 기록으로 포착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또한 서면 계약서를 작성할 수 없어 공증인과 미술관 직원 몇 명이 입회하여 구두 계약을 체결해야 했다. 그 대신 보존팀의 한 담당자가 제작 과정을 모두 참관하여 재연을 위한 제반 사항을 전수받았다.7) 그러나 특정한 퍼포머를 선발하기 위해 오디션을 치르고 퍼포머에게 세심한 디렉션을 하는 등의 역할을 작가 없이 미술관의 인력만으로 수행하며 작품을 다시 보여주는 것은 결국 불가능한 과제로 남았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구입할 당시에는 예상할 수 없던 문제다. 일련의 수집과 소장 경험에서 불거진 화두들을 논의하기 위해 세갈에게 작업을 전수받은 보존팀의 핍 로렌슨이 ‘콜렉팅 더 퍼포머티브’(2014-2016)와 같은 리서치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2006년에 구입한 티노 세갈의 작업은 앞으로 다시 보여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장품 전시에 일반적으로 배정되지 않는 별도의 제작비를 확보하는 어려움은 둘째 치고, 몇 년 후가 될지 모르면서도 다시 보여줄 때까지 작가와 계속 연락을 유지하고, 작업에 연루된 직원들이 새롭게 익힌 낯선 지식을 녹슬지 않게 간직하는 등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렇게 이 작업은 큐레이터와 미술관을 괴롭게 했다. 그러면서 미술관의 내부 논리, 라이브성, 영구성에 대한 미술관의 욕망을 가장 많이 고민하게 하는 비평적인 역할을 했다.
18세기 서구 시민 혁명기, 왕의 사적인 권력이 시민의 ‘소유권’으로 변환되면서부터 미술관은 문화적 유산으로 간주되는 사물(object)로서의 예술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미술관의 문화는 특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다양한 부서의 협업을 통해 예술작품을 영원히 수호하고 전시하기 위해 보존 방법을 조정하고 향상해나간다. 사물을 다루고, 배치하고, 보존하고, 지키고, 바라보고, 작품을 대하는 방식은 매우 제의적이다. 이러한 행동은 예술 작품의 관리에 관해 고도로 형식화된 규칙적인 패턴을 형성하며, 미술관의 고용인과 방문자들의 잠재적 포지션에 영향을 미친다. 미술관의 전통적인 역할은 작품을 잘 살피고 보존해서 소장품에 관한 변화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행위’(action)라는 유동적인 재료를 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미술관의 요구사항과 절차에 따라 일단 사물처럼 취급되더라도, 살아있는 행위에는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각국 근현대미술관에서 영구 소장품의 성질은 1960년대 이래로 크게 변화해왔다. 사진, 비디오, 필름, 설치 등 소위 말하는 새로운 포맷이 복잡한 보존 요구사항을 갖고 미술관에 진입했다. 지난 10여 년간 특히 라이브 아트를 수집한 주요 미술관과 컬렉션은 미술관의 초점과 작동 모드를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이제 작품 분류 카테고리에 새로운 영역이 생성되었다. 이는 매체뿐 아니라 공간 사용 방식을 지정하고, 전시보다 관객 참여 이벤트를 구성하도록 한다. 퍼포먼스 기록물로 인식되던 사진이나 영상이 작가나 기록한 사람의 작품으로 미술관에 수용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테이트 미술관은 일본 구타이 예술가인 쇼조 시마모토의 퍼포먼스 장면을 찍은 오츠지 키요시의 사진을 작품으로 수집했다. 같은 미술관에 작품으로 수용된 제레미 델러의 <The Battle of Orgreave Archive>(2001)는 작가의 <The Battle of Orgreave> 퍼포먼스에 관한 신문 기사나 메모 등의 자료를 판자 위에 붙인 작업으로, 작품과 아카이브의 경계를 더욱 본격적으로 흐려놓는다. 앞으로 수행할 작품의 스코어도 아니고, 이미 완료된 퍼포먼스의 기록에 그치지도 않는(다는) 이러한 문자 및 시각 텍스트는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고-있는가? 이처럼 라이브 아트의 수용은 수집(collecting)의 개념에 있어 광범위한 개념적 전환을 일으키고 미술관의 역할과 관람의 성질(spectatorship)을 변화시키고 있다.
오디오 산책과 비디오 산책
퍼포먼스는 다양한 텍스트와 기록 매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대표적으로 영상이라는 비물질적 매체는 영화관을 떠나 미술관과 공연장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에 수용되며 물질적 변환을 겪었다. 영상은 일찍부터 퍼포먼스 예술의 신체적 표현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제공했으며, 실험 영화 퍼포먼스는 영상의 의미론적 구조 바깥에서 그것의 복합적인 물리적 지지체를 분석하며 시각의 현대적 구조를 탐색하게 했다. 영상의 비물질성을 전제로, 영상에 다시 물질성을 부여하며 가상의 실제성을 실험하려는 시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졌다. 시각예술가들은 영화예술가들에 비해 영상의 디스플레이에 관심이 많았다. 프로젝션 기술이 완성 단계에 도달하기 전의 70-80년대에는 TV 모니터가 다양한 모습으로 설치되었다. 영상은 영화관에서 미술관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가운데 ‘매체에서 장소로’ 변형되었는데,8) 토니 아우슬러나 프리데릭 페촐드, 한국에서는 90년대의 육근병 작가의 작업에서 비디오는 파편화된 인간 신체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에 작업을 시작한 자넷 카디프와 조지 부어스 밀러 역시 <Jump>(1992)와 같은 초기 작업에서 비디오의 신체성에 주목했다. 발목 아래만 비춘 시각적 이미지는 그리 특별하지 않지만, 카디프와 밀러는 ‘비디오가 정말 신체라면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영상 속 인물이 점프했다 착지하는 발소리에 맞춰 천장으로부터 길게 드리운 줄에 매달린 모니터가 앞뒤로 흔들리게 했다. 다소 단순한 방식이지만 이렇게 영상이 모니터를 움직인다면 비디오는 더 이상 광학적 평면이 아니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전 시대의 조각적 제스처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비디오의 신체성을 빚는 것이다.
카디프와 밀러는 ‘Walks’ 시리즈를 통해 동시대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퍼포먼스 양쪽에서 기념비적인 포맷을 이른 시기에 선취했다. 이들의 유명한 ‘Audio Walk’ 시리즈의 첫 작업 <Forest Walk>(1991)에서 관객은 카세트 플레이어로 작가가 미리 녹음한 소리를 들으며 녹음 현장을 따라 홀로 산책하게 된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세요’ 하는 식의 경로 안내, 입체적인 사운드로 재생되는 풀벌레 소리, 상념을 일으키는 풍경이나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관객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실제 녹음 현장을 둘러보게 된다. 산책을 거듭할수록 텍스트의 구조는 다변화되었다. 1997년 뮌스터 조각 페스티벌에서 공개한 <Münster Walk>에서는 도시에 대한 역사적 리서치와 픽션적 설정으로서 연인과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간다. 한 도시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구축하는 데 있어 미술관의 오디오 가이드처럼 예술작품의 역사를 투명하게 서술하려는 대신에 허구적 설정을 가미하여 단선적 서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2004년까지 북미와 유럽 주요 도시의 대규모 미술 이벤트와 전시에서 스무 가지 이상의 버전을 발표한 두 사람은 반복적인 작업을 멈추고 영상에 대한 오랜 관심으로 돌아간다. 기록과 그것이 기록된 현장을 중첩하는 오디오 산책이 ‘비디오 산책’이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In Real Time>(1999)가 그 첫번째 작업이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캠코더로 미리 촬영해둔 영상을 관객이 바로 그 핸디캠을 들고 직접 관람하게 한다. 그것이 촬영된 현장에서 말이다. <Ghost Machine>(2005)에서는 베를린 헤벨 극장(Hebbel am Ufer)의 로비를 천천히 비추는 데서 시작해서 굽이진 계단을 내려가 백스테이지를 구석구석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극장 무대에 도달하는 산책 경로를 설계했다. 영상은 단지 지나간 시간의 공간을 비추는 데 그치지 않았다. 관객은 텅 빈 극장을 홀로 돌아보며 영상을 감상하지만, 영상에는 종종 사람들이 비치고 카메라를 바라보기도 한다. 헤드셋에서 ‘테이블 앞쪽에 서 있는 사람이 당신에게 인사를 건네네요.’ 같은 말이 흘러나오며 눈앞에 없는, 아니 모니터에 나오는 사람과의 가상의 인터랙션을 유도한다. 비디오 산책은 2012년 카셀 도쿠멘타 13의 <Alter Bahnhof Video Walk>(2012), 에딘버러 페스티벌의 <Night Walk for Edinburgh>(2019) 등으로 계속되었으며, 변화한 기술 환경에 맞게 캠코더 대신 태블릿 PC와 스마트폰을 모니터로 사용하고 있다. 영상과 함께 공간을 자세히 묘사하거나 경로를 안내하는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면서 관객은 기록된 공간을 실제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감상하게 된다. 작업에서 실시간의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관객의 신체이다. 관객의 신체와 장소의 관계 맺음을 매개로 기록된 영상과 실제 로케이션이 중첩되며, 기록은 단순한 기록에 그치지 않고 지금 여기에 가상의 실제성을 창출하게 된다.
쓰기의 주체에서 소리 사이의 몸으로
기계 장치를 통해 풍경을 시각 및 청각 텍스트와 매개하는 작업에서 개별 인간 신체에 요구하는 역할의 중요성은 메테 에드바르센의 작업에서와 비교하면 주변적으로 보인다. 안무가이자 편집자인 에드바르센은 저마다 고유한 인간 신체의 수행을 강조하여 매우 개인적이고 내밀하며, 그럼으로써 더욱 극적인 작업을 선보인다. 2020년 옵신 페스티벌을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Time has fallen asleep in the afternoon sunshine’(2010-)에서 퍼포머는 곧 ‘책’이다. 물리적인 사물이 주인공이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 신체를 지닌 퍼포머들이 제각기 고른 책 한 권을 전부 암기하여 스스로 그 한 권의 ‘책 자체’가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 대 일 형식의 관람에 참여한 관객에게 얼마간을 소리내어 들려준다. 사람이 ‘책이 된다’(becoming a book)는 개념은 책벌레의 감성을 자극하는데, 사실 그 아이디어 자체는 평범하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지만 누구든 실행하지 못할 뿐이다.
에드바르센의 레퍼런스 중에는 2008년 노르웨이 북부 스발바르 군도에 개관한 씨앗 저장소가 있다. 지구상의 현존하는 식물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그중에서도 식용 가능한 전 세계의 식물 씨앗을 깊은 산중에 저장하는 이곳의 발상은 “우리가 상상 가능한 미래와 미래 시간을 바라보는 시간적 규모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게 한다.9) 이런 작업은 논리를 따지는 분석가보다 의심하지 않는 증인과 친구를 요청한다. 여기서 수행되며 또한 잠재적으로 수행을 촉발하는 것은 개별 텍스트의 내용적 요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자를 소리로, 글을 말로 변환하여 전달함으로써 정보의 정확성은 줄어들고 만다. 그보다 이런 변환, 또는 인간이 책으로 변신하(겠다)는 퍼포먼스의 수행은 변신의 의지와 과정과 순간 자체를 감각하도록 한다.
에드바르센은 최근 작업에 지극히 사적인 순간을 들여온다. ‘Livre d’images sans images’(2023)은 딸 이벤과 함께 만든 것이다. 어린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읽기를 지도하는 습관에서 시작한 읽고 듣는 관계의 행위는 어느 날 드러난 ‘엄마와 무언가 함께 하고 싶다’는 딸의 소망과, 작가의 기억하고 머무는 힘을 입어 작업이 되었다. 작업은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연상되는 것을 말하는 끝없는 놀이처럼 아득하게 펼쳐진다. 공연은 전시장의 높은 천장, 막힌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의 이름을 말하는 데서 시작한다. 안무가와 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이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언어 게임은 듣는 사람을 곰곰이 빠져들게 한다. 에드바르센이 ‘머리와 손 사이’(between head and hand)라고 말하면 이벤이 잠시 뜸 들이다 ‘번역’(translation)이라 대꾸하고, 이벤이 ‘흑과 백 사이’(between black and white)라고 말하면 에드바르센이 ‘진실’(truth)이라고 답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 ‘지구와 달 사이’(between earth and moon)라고 말하면 이어지는 답변은…… 들은 것 중 기억해서 옮길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뻔한 것뿐이다.
안무가는 이 작업에서 다루는 것이 다양하게 매개된 음향과 그로 인해 펼쳐지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비하면 인용한 문학적 텍스트들은 도구적 수단에 가깝다고 말한다.10) 소리는 다양하게 매개된다. 실시간으로 마이크로 증폭되거나, 지난 기록을 레코드판으로 재생하는 방식을 통해 전해진다. 이 작업이 도달하는 곳, 닿고자 하는 곳은 음향에 대한 추상과 지식이 아니다. 음향의 매개적 역량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어떤 희미한 순간의 탄생이다. 단어를 떠올려 말로 뱉고, 읽은 것을 암송하고, 듣고, 연상하고, 기억한 것을 끼적이고, 쪽지를 건네 방금 기억에서 끄집어낸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가족이나 친구도 아니고, 아무 사이도 아닌 작가와 관객 사이에 아주 단순하고 은밀한 기쁨이 빚어진다.11)
퍼포먼스의 기록에 관한 가장 논쟁적인 주장이라면 논란의 여지 없이 페기 펠란의 언급을 떠올릴 수 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퍼포먼스학자 페기 펠란은 퍼포먼스의 존재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90년대 이후 확산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폐해와 미술 시장의 왜곡된 성장을 경계하려는 비판적인 태도가 담겨 있다. 이처럼 퍼포먼스를 일회적인 시간성으로 정의하려는 관점에는 기성 미술사의 오브제 중심주의에 도전하고 원본의 저장 가능성을 기반으로 하는 서구 중심적인 지식 체계에 저항하려는 동기가 있다. 그러나 펠란의 주장은 연구자와 예술가들에게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아카이브에 대한 그의 고전적인 관점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퍼포먼스의 기록 가능성을 거부하는 펠란의 주장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비판 중 하나는 퍼포먼스학자 레베카 슈나이더의 언급에서 찾을 수 있다. 슈나이더는 구술과 몸짓을 통한 기록 가능성을 부정하는 아카이브론에서 벗어나서 “퍼포먼스의 잔여, 다르게 남아있는 것에 위치했을 다른 방식의 앎, 다른 방식의 기억을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묻는다.2) 퍼포먼스의 다른 삶/생명에 대한 상상을 통해 우리는 라이브 아트로서 퍼포먼스가 존재론적으로 기록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이분법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논쟁에서 한 발 벗어나게 된다.퍼포먼스의 유일한 생명은 현재에 있다. 퍼포먼스는 저장되거나 기록되거나 문서화할 수 없으며, 재현이 재현되는 유통에 참여할 수도 없다. 일단 그렇게 되면, 그것은 퍼포먼스가 아닌 다른 것이 된다. 퍼포먼스는 재생산의 경제에 진입하려고 시도하는 만큼 자신의 존재론적 전제를 배신하고 약화하게 된다. 퍼포먼스의 존재는 소멸을 통해 그 자신이 된다.1)
최초의 원본, 그것의 유일무이한 실황 이후 후대에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작가 본인의 기억, 관객의 인상, 메모와 사진과 영상에 이르기까지 불확실하고 불완전하나마 다양한 수단이 있지만 종종 퍼포먼스 미술은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진술의 확고한 권위를 지닌 작가의 기억과 생명이 다하고, 참여자의 진술이 엇갈리고, 우연히 찍힌 흐리고 빛바랜 사진만 몇 장 남아있다면 우리는 그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이에 관해 가장 잘 알려진 사례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의 <Seven Easy Pieces>(2005)이다. 뉴욕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의 구작을 포함해서 현대의 고전이 된 1960-70년대의 퍼포먼스 일곱 점을 재연하는 라이브 퍼포먼스를 일주일 동안 매일 일곱 시간을 들여 보여줬다. 자신이 원작자인 작품의 재연과 달리, 다른 예술가의 작업을 재연하는 데는 원작자의 허가를 받는 일부터 남아있는 자료를 그러모아 작품의 본래 이미지와 의도를 추적하는 것까지 고고학자의 연구와 같은 끈기와 수고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본인의 작업인 <Lips of Thomas>(1975)는 자신의 다른 작업들의 요소를 재편집하고 러닝타임을 기존의 두 시간에서 일곱 시간으로 늘이며 거의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었다. 한번도 공식적으로 실행된 적 없는 브루스 나우먼의 지시문 작업 <Body Pressure>(1974)는 원작대로 벽을 미는 대신 유리를 밀어내며 관객이 어느 각도에서든 자신을 볼 수 있게 연출에 해석을 가미했고, 전시장에 설치된 경사로 아래 관객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위하며 정액을 생산하는 비토 아콘치의
살아있는 채로 소장하는 방법
티노 세갈의 작업은 어떤 기록도 남지 않도록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This is Propaganda>(2002)를 떠올려보라.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 홈페이지에 들어가도 관련 이미지가 제공되지 않는다. 신문 기사에 실린 인터뷰 사진 한 장이 올라와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은 라이브 아트의 소장에 관해 주요 기관에 큰 화두를 던진다. 소장품에 관한 보리스 그로이스의 오래된 글을 다시 읽어보자. 그로이스는 예술적 아방가르드의 수집에 대한 관념을 논하며 이들에게 “죽은 ‘박물관’ 예술의 관습에 대한 투쟁은 삶과 죽음의 투쟁으로 이해된다. 수집의 논리는 죽음의 논리이자 죽은 논리로서, 모든 살아있는(living) 예술이 저항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가 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삶은 죽음의 문화적 논리에 직면하지 않는 한 대단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 (…) 문화적으로 중요한 모든 작품은 죽은 자와의 경쟁 속에서 탄생한다.”4) 이러한 소장의 논리에 따르면 수집을 의식하는 예술작품은 그것이 탄생한 각기 다른 외부 환경에 따라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가치를 표상하는 것보다 ‘소장 자체의 내부 기준’에 따라 그것을 수용하거나 반대하는 것으로 제작된다. 이들은 “소장품의 가치 기준을 추구한다.”5) 특히 예술적 혁신을 가치 기준으로 삼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경우 이미 소장된 예술작품과 무언가 달라지기 위해 노력한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기존 소장품은 새로운 창작을 자극하고 미래 작업의 기준을 제공하는 시스템 내부의 지표로서, 이미 죽은 것이자 과거로서 인식된다. 그런데 작품의 형태가 물질적 사물이 아니라 인간 신체로 수행하는 라이브 퍼포먼스인 경우에는 수집에 관한 삶과 죽음의 논리가 어떻게 작동할까? 라이브 퍼포먼스가 존재론적으로 단일하게 고정될 수 없으며 계속해서 변화할 가능성을 지닌 것으로 남아있다면, 작품이 소장되면 곧 죽음이라는 일반론을 퍼포먼스에 관해서는 유보하고 봐야 한다.
테이트 모던 퍼포먼스 담당 큐레이터 캐서린 우드는 티노 세갈의 작업이 퍼포먼스 소장에 있어 가장 어려운 대상이었다고 말한다.6) 작업의 가변성과 비물질성은 인지했다. 작업의 개념적 요구사항으로 인해 이를 사진과 영상 기록으로 포착할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또한 서면 계약서를 작성할 수 없어 공증인과 미술관 직원 몇 명이 입회하여 구두 계약을 체결해야 했다. 그 대신 보존팀의 한 담당자가 제작 과정을 모두 참관하여 재연을 위한 제반 사항을 전수받았다.7) 그러나 특정한 퍼포머를 선발하기 위해 오디션을 치르고 퍼포머에게 세심한 디렉션을 하는 등의 역할을 작가 없이 미술관의 인력만으로 수행하며 작품을 다시 보여주는 것은 결국 불가능한 과제로 남았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구입할 당시에는 예상할 수 없던 문제다. 일련의 수집과 소장 경험에서 불거진 화두들을 논의하기 위해 세갈에게 작업을 전수받은 보존팀의 핍 로렌슨이 ‘콜렉팅 더 퍼포머티브’(2014-2016)와 같은 리서치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2006년에 구입한 티노 세갈의 작업은 앞으로 다시 보여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장품 전시에 일반적으로 배정되지 않는 별도의 제작비를 확보하는 어려움은 둘째 치고, 몇 년 후가 될지 모르면서도 다시 보여줄 때까지 작가와 계속 연락을 유지하고, 작업에 연루된 직원들이 새롭게 익힌 낯선 지식을 녹슬지 않게 간직하는 등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렇게 이 작업은 큐레이터와 미술관을 괴롭게 했다. 그러면서 미술관의 내부 논리, 라이브성, 영구성에 대한 미술관의 욕망을 가장 많이 고민하게 하는 비평적인 역할을 했다.
18세기 서구 시민 혁명기, 왕의 사적인 권력이 시민의 ‘소유권’으로 변환되면서부터 미술관은 문화적 유산으로 간주되는 사물(object)로서의 예술작품을 보존하고 전시하는 공간이 되었다. 미술관의 문화는 특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다양한 부서의 협업을 통해 예술작품을 영원히 수호하고 전시하기 위해 보존 방법을 조정하고 향상해나간다. 사물을 다루고, 배치하고, 보존하고, 지키고, 바라보고, 작품을 대하는 방식은 매우 제의적이다. 이러한 행동은 예술 작품의 관리에 관해 고도로 형식화된 규칙적인 패턴을 형성하며, 미술관의 고용인과 방문자들의 잠재적 포지션에 영향을 미친다. 미술관의 전통적인 역할은 작품을 잘 살피고 보존해서 소장품에 관한 변화를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행위’(action)라는 유동적인 재료를 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미술관의 요구사항과 절차에 따라 일단 사물처럼 취급되더라도, 살아있는 행위에는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각국 근현대미술관에서 영구 소장품의 성질은 1960년대 이래로 크게 변화해왔다. 사진, 비디오, 필름, 설치 등 소위 말하는 새로운 포맷이 복잡한 보존 요구사항을 갖고 미술관에 진입했다. 지난 10여 년간 특히 라이브 아트를 수집한 주요 미술관과 컬렉션은 미술관의 초점과 작동 모드를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이제 작품 분류 카테고리에 새로운 영역이 생성되었다. 이는 매체뿐 아니라 공간 사용 방식을 지정하고, 전시보다 관객 참여 이벤트를 구성하도록 한다. 퍼포먼스 기록물로 인식되던 사진이나 영상이 작가나 기록한 사람의 작품으로 미술관에 수용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테이트 미술관은 일본 구타이 예술가인 쇼조 시마모토의 퍼포먼스 장면을 찍은 오츠지 키요시의 사진을 작품으로 수집했다. 같은 미술관에 작품으로 수용된 제레미 델러의 <The Battle of Orgreave Archive>(2001)는 작가의 <The Battle of Orgreave> 퍼포먼스에 관한 신문 기사나 메모 등의 자료를 판자 위에 붙인 작업으로, 작품과 아카이브의 경계를 더욱 본격적으로 흐려놓는다. 앞으로 수행할 작품의 스코어도 아니고, 이미 완료된 퍼포먼스의 기록에 그치지도 않는(다는) 이러한 문자 및 시각 텍스트는 어떻게 예술작품이 되고-있는가? 이처럼 라이브 아트의 수용은 수집(collecting)의 개념에 있어 광범위한 개념적 전환을 일으키고 미술관의 역할과 관람의 성질(spectatorship)을 변화시키고 있다.
오디오 산책과 비디오 산책
퍼포먼스는 다양한 텍스트와 기록 매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대표적으로 영상이라는 비물질적 매체는 영화관을 떠나 미술관과 공연장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에 수용되며 물질적 변환을 겪었다. 영상은 일찍부터 퍼포먼스 예술의 신체적 표현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제공했으며, 실험 영화 퍼포먼스는 영상의 의미론적 구조 바깥에서 그것의 복합적인 물리적 지지체를 분석하며 시각의 현대적 구조를 탐색하게 했다. 영상의 비물질성을 전제로, 영상에 다시 물질성을 부여하며 가상의 실제성을 실험하려는 시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졌다. 시각예술가들은 영화예술가들에 비해 영상의 디스플레이에 관심이 많았다. 프로젝션 기술이 완성 단계에 도달하기 전의 70-80년대에는 TV 모니터가 다양한 모습으로 설치되었다. 영상은 영화관에서 미술관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가운데 ‘매체에서 장소로’ 변형되었는데,8) 토니 아우슬러나 프리데릭 페촐드, 한국에서는 90년대의 육근병 작가의 작업에서 비디오는 파편화된 인간 신체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80년대 중반에 작업을 시작한 자넷 카디프와 조지 부어스 밀러 역시 <Jump>(1992)와 같은 초기 작업에서 비디오의 신체성에 주목했다. 발목 아래만 비춘 시각적 이미지는 그리 특별하지 않지만, 카디프와 밀러는 ‘비디오가 정말 신체라면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영상 속 인물이 점프했다 착지하는 발소리에 맞춰 천장으로부터 길게 드리운 줄에 매달린 모니터가 앞뒤로 흔들리게 했다. 다소 단순한 방식이지만 이렇게 영상이 모니터를 움직인다면 비디오는 더 이상 광학적 평면이 아니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전 시대의 조각적 제스처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비디오의 신체성을 빚는 것이다.
카디프와 밀러는 ‘Walks’ 시리즈를 통해 동시대 시각예술과 공연예술 퍼포먼스 양쪽에서 기념비적인 포맷을 이른 시기에 선취했다. 이들의 유명한 ‘Audio Walk’ 시리즈의 첫 작업 <Forest Walk>(1991)에서 관객은 카세트 플레이어로 작가가 미리 녹음한 소리를 들으며 녹음 현장을 따라 홀로 산책하게 된다.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세요’ 하는 식의 경로 안내, 입체적인 사운드로 재생되는 풀벌레 소리, 상념을 일으키는 풍경이나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관객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실제 녹음 현장을 둘러보게 된다. 산책을 거듭할수록 텍스트의 구조는 다변화되었다. 1997년 뮌스터 조각 페스티벌에서 공개한 <Münster Walk>에서는 도시에 대한 역사적 리서치와 픽션적 설정으로서 연인과의 만남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간다. 한 도시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구축하는 데 있어 미술관의 오디오 가이드처럼 예술작품의 역사를 투명하게 서술하려는 대신에 허구적 설정을 가미하여 단선적 서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2004년까지 북미와 유럽 주요 도시의 대규모 미술 이벤트와 전시에서 스무 가지 이상의 버전을 발표한 두 사람은 반복적인 작업을 멈추고 영상에 대한 오랜 관심으로 돌아간다. 기록과 그것이 기록된 현장을 중첩하는 오디오 산책이 ‘비디오 산책’이 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In Real Time>(1999)가 그 첫번째 작업이었다. 방법은 간단하다. 캠코더로 미리 촬영해둔 영상을 관객이 바로 그 핸디캠을 들고 직접 관람하게 한다. 그것이 촬영된 현장에서 말이다. <Ghost Machine>(2005)에서는 베를린 헤벨 극장(Hebbel am Ufer)의 로비를 천천히 비추는 데서 시작해서 굽이진 계단을 내려가 백스테이지를 구석구석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극장 무대에 도달하는 산책 경로를 설계했다. 영상은 단지 지나간 시간의 공간을 비추는 데 그치지 않았다. 관객은 텅 빈 극장을 홀로 돌아보며 영상을 감상하지만, 영상에는 종종 사람들이 비치고 카메라를 바라보기도 한다. 헤드셋에서 ‘테이블 앞쪽에 서 있는 사람이 당신에게 인사를 건네네요.’ 같은 말이 흘러나오며 눈앞에 없는, 아니 모니터에 나오는 사람과의 가상의 인터랙션을 유도한다. 비디오 산책은 2012년 카셀 도쿠멘타 13의 <Alter Bahnhof Video Walk>(2012), 에딘버러 페스티벌의 <Night Walk for Edinburgh>(2019) 등으로 계속되었으며, 변화한 기술 환경에 맞게 캠코더 대신 태블릿 PC와 스마트폰을 모니터로 사용하고 있다. 영상과 함께 공간을 자세히 묘사하거나 경로를 안내하는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면서 관객은 기록된 공간을 실제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감상하게 된다. 작업에서 실시간의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관객의 신체이다. 관객의 신체와 장소의 관계 맺음을 매개로 기록된 영상과 실제 로케이션이 중첩되며, 기록은 단순한 기록에 그치지 않고 지금 여기에 가상의 실제성을 창출하게 된다.
쓰기의 주체에서 소리 사이의 몸으로
기계 장치를 통해 풍경을 시각 및 청각 텍스트와 매개하는 작업에서 개별 인간 신체에 요구하는 역할의 중요성은 메테 에드바르센의 작업에서와 비교하면 주변적으로 보인다. 안무가이자 편집자인 에드바르센은 저마다 고유한 인간 신체의 수행을 강조하여 매우 개인적이고 내밀하며, 그럼으로써 더욱 극적인 작업을 선보인다. 2020년 옵신 페스티벌을 통해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는 ‘Time has fallen asleep in the afternoon sunshine’(2010-)에서 퍼포머는 곧 ‘책’이다. 물리적인 사물이 주인공이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 신체를 지닌 퍼포머들이 제각기 고른 책 한 권을 전부 암기하여 스스로 그 한 권의 ‘책 자체’가 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일 대 일 형식의 관람에 참여한 관객에게 얼마간을 소리내어 들려준다. 사람이 ‘책이 된다’(becoming a book)는 개념은 책벌레의 감성을 자극하는데, 사실 그 아이디어 자체는 평범하다. 누구나 떠올릴 수 있지만 누구든 실행하지 못할 뿐이다.
에드바르센의 레퍼런스 중에는 2008년 노르웨이 북부 스발바르 군도에 개관한 씨앗 저장소가 있다. 지구상의 현존하는 식물 생태계를 보존하기 위해, 그중에서도 식용 가능한 전 세계의 식물 씨앗을 깊은 산중에 저장하는 이곳의 발상은 “우리가 상상 가능한 미래와 미래 시간을 바라보는 시간적 규모가 무엇인지” 궁금해지게 한다.9) 이런 작업은 논리를 따지는 분석가보다 의심하지 않는 증인과 친구를 요청한다. 여기서 수행되며 또한 잠재적으로 수행을 촉발하는 것은 개별 텍스트의 내용적 요소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자를 소리로, 글을 말로 변환하여 전달함으로써 정보의 정확성은 줄어들고 만다. 그보다 이런 변환, 또는 인간이 책으로 변신하(겠다)는 퍼포먼스의 수행은 변신의 의지와 과정과 순간 자체를 감각하도록 한다.
에드바르센은 최근 작업에 지극히 사적인 순간을 들여온다. ‘Livre d’images sans images’(2023)은 딸 이벤과 함께 만든 것이다. 어린 자녀에게 책을 읽어주거나 읽기를 지도하는 습관에서 시작한 읽고 듣는 관계의 행위는 어느 날 드러난 ‘엄마와 무언가 함께 하고 싶다’는 딸의 소망과, 작가의 기억하고 머무는 힘을 입어 작업이 되었다. 작업은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연상되는 것을 말하는 끝없는 놀이처럼 아득하게 펼쳐진다. 공연은 전시장의 높은 천장, 막힌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의 이름을 말하는 데서 시작한다. 안무가와 십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이벤 사이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언어 게임은 듣는 사람을 곰곰이 빠져들게 한다. 에드바르센이 ‘머리와 손 사이’(between head and hand)라고 말하면 이벤이 잠시 뜸 들이다 ‘번역’(translation)이라 대꾸하고, 이벤이 ‘흑과 백 사이’(between black and white)라고 말하면 에드바르센이 ‘진실’(truth)이라고 답하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누군가 ‘지구와 달 사이’(between earth and moon)라고 말하면 이어지는 답변은…… 들은 것 중 기억해서 옮길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뻔한 것뿐이다.
안무가는 이 작업에서 다루는 것이 다양하게 매개된 음향과 그로 인해 펼쳐지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비하면 인용한 문학적 텍스트들은 도구적 수단에 가깝다고 말한다.10) 소리는 다양하게 매개된다. 실시간으로 마이크로 증폭되거나, 지난 기록을 레코드판으로 재생하는 방식을 통해 전해진다. 이 작업이 도달하는 곳, 닿고자 하는 곳은 음향에 대한 추상과 지식이 아니다. 음향의 매개적 역량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어떤 희미한 순간의 탄생이다. 단어를 떠올려 말로 뱉고, 읽은 것을 암송하고, 듣고, 연상하고, 기억한 것을 끼적이고, 쪽지를 건네 방금 기억에서 끄집어낸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가족이나 친구도 아니고, 아무 사이도 아닌 작가와 관객 사이에 아주 단순하고 은밀한 기쁨이 빚어진다.11)
김정현
미술비평가. 비평과 창작이 서로 개입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2015년 「퍼포먼스의 감염 경로는?―퍼포먼스 예술의 동시대성을 찾아서」로 제1회 SeMA-하나 평론상을 수상했다. 비평집 『쏟아지는 외부 - 소진된 미술의 퍼포먼스』(미디어버스, 2024)를 출간했다.
2025/04/16
72호
- 1
- Peggy Phelan, Unmarked: The Politics of Performance, Routledge, 1993, p. 146.
- 2
- Rebecca Schneider, “Performance Remains,” Perform, Repeat, Record, Live Art in Story, edited by Amelia Jones and Adrian Heathfield, Intellect Books and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2, p. 139.
- 3
- Marina Abramović and Amelia Jones, “The Live Artist as Archaeologist,” Perform, Repeat, Record, Live Art in Story, edited by Amelia Jones and Adrian Heathfield, Intellect Books and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2, p. 554.
- 4
- Boris Groys, “Logic of the Collection,” Logic of the Collection, Sternberg Press, 2021, p. 31.
- 5
- Boris Groys, ibid., p. 29.
- 6
- Catherine Wood, “In Advance of the Broken Arm: Collecting Live Art and the Museum’s Changing Game,” Live Forever, Collecting Live Art, edited by Teresa Calonje, Koenig Books, 2014.
- 7
- Acatia Finbow, “Tino Sehgal born 1976 This is propaganda 2002/2006,” TATE, 2015. 바로가기
- 8
- Andrew V. Uroskie, Between the Black Box and the White Cub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4. pp. 1-15.
- 9
- Mette Edvardsen, ‘Time has fallen asleep in the afternoon sunshine’ in ‘Moving in November’, 2022.
- 10
- Mette Edvardsen, ‘Soup Talks: Livre d’images sans images’ in ‘Moving in November’ 2024.
- 11
- 이 글은 필자가 기존에 발표한 세 편의 글을 참조하여 재구성하고 확장하여 작성했다. 「실황 이후(After Live): 퍼포먼스 미술의 제작과 기록, 김홍석의 ‘위조란’을 중심으로」,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연구교류 ‘소실의 아카이브’, 2023, 바로가기; 「퍼포먼스와 미술관의 소장」, 경기도미술관 15주년 기념 심포지엄 『미술관 수집의 새로운 표준 불러오기』, 경기도미술관, 2022; 「퍼포먼스의 새로운 장소」 《아트인컬처》 2020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