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에 말라비틀어진 지렁이를 본다
  나왔던 곳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한
  콘크리트 위에서 살이 찢긴 지렁이를
  나왔던 곳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로군
  콘크리트에 살이 찢기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우리는 지렁이가 아니고
  우리에게는 불행히도 사지가 있고
  직립해서 아픈 허리도 있고
  그리하여 나는 햇볕에 말라비틀어진 지렁이를 이렇게 지나치며
  그에 관한 메모도 하고 있는 것이다
  햇볕
  햇볕의 영향력 아래 놓인 채
  이 얼마나 평화로운가
  라고 한 여자가 유아차를 끌고 가며
  오랜만에 산본에서 찾아온 엄마에게 방금 말했고
  평화라, 하고 말하는 순간 열린 구름 사이로 터지는 햇볕이
  광선처럼 내 얼굴을 찌른다
  이 얼마나 평화로운가
  바싹 마른 지렁이에게서는 물컹한 냄새 한 점 나지 않고
  반월도서관 옆 아무도 없는 벤치 옆 빈 책장
  빌려 가서 읽으라는 빛바랜 책이 한가득 꽂혀 있던 책장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가 누워 잠들어 있다
  꼬리를 늘어뜨린 채
  간혹 손과 눈을 움찔거리며
  이 얼마나 평화로운가
  (책 다 치운 사람에게 박수 백 번)
  나는 고양이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
  고양이의 평화를 내버려둔 채 조용히 자리를 뜬다
  지금 저 고양이는 나보다 살이 쪘고
  나보다 근심의 무게가 가볍고
  지금 나는 저 고양이만도 못한가
  나는 저 지렁이만도
  햇볕은 다시 구름 뒤로 숨고
  나는 산을 오른다
  배낭을 맨 노인이 벗은 양말과 슬리퍼 주섬주섬 챙기더니
  나를 따라 산을 오른다
  햇볕
  초가을
  이례적인 늦더위
  마지막 남은 매미들의 찌릿한 울음소리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노인이 튼 라디오 찬송가 소리

황유원

시를 쓴다. 시를 쓸 때 나의 존재함을 거의 유일하게 실감하는데, 그때는 자아가 거의 사라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라짐이 나의 존재함에 가장 가깝다. 나는 사라질 때 가장 많이 존재한다. 그런 것 같다. 나는 쓴다.
시집 『초자연적 3D 프린팅』 『세상의 모든 최대화』 등이 있다.

「햇볕」은 동네를 산책하다가 실시간으로 쓴 시다. ‘쓴 시’라고는 했지만, 사실 단순하고 정확한 기록에 가깝다. 어찌 보면 심심한 메모인데, 심심해서 좋다. 안 꾸며서 좋다.

2023/11/15
6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