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아침 아니가 버드나무 벤치에 앉아 있을 때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였다. 국립박물관 광장에 이르기 전 잠시 휴식을 취하던 참이었다. 아니는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양손으로 툴툴 털어내며 일어섰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목소리가 즉흥적으로 형성되었다. 그것은 완전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니의 목소리면서 모두의 목소리였다. 즉흥적인 동일성이 거리 위에 펼쳐졌고 아니는 발아래 형성된 동일성을 밟으며 계단 위로 올라섰다. 계단은 모순이었다. 모순 틈에서 몇 개의 얼굴이 나타났다. 세상은 왜냐하면……의 목소리로 뒤흔들렸다. 아니는 그 모든 진동을 다 느끼며 계단을 하나둘 순차적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문득 가방에 넣어두었던 샌드위치를 이촌역 내부의 아무 벤치에 버리고 온 것을 기억했다. 그것은 노숙자나 거지, 광인 들을 위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아니 주변에 사는 오래된 타인들이었지만, 아니는 그들과 아무 상관이 없었다. 아니는 인간을 향한 의구심이 있었다. 아니는 인간과 달라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배고픔을 느꼈다. 아니는 자기가 버린 샌드위치를 욕망하며 샌드위치의 맛, 샌드위치의 냄새, 샌드위치의 감촉을 자기의 감각 너머 창조했다. 그리고 적응하려 들었다. 창조된 샌드위치에, 맥빠진 상상력에, 기적의 불가능성에. 그러나 아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은 것들이 텅 빈 공허 속에서 서로의 입자를 건드렸다. 아니는 그것을 보았다. 발화된 적 없는 말들이 가장 작은 공간 속에서 삶을 시도했다. 아니는 그것을 들었다. 가을바람이 불었다. 얼굴들은 점점 더 커졌다. 그것들은 두 개로 밝혀졌다. 두 개의 얼굴에 인류의 영원한 폭력이 계승되었다. 짐승의 성대에서 울려퍼지는 으르렁 소리가 아니의 몸속을 메아리치며 돌아다녔다. 어느 순간 벼락처럼 날카로운 손이 느닷없이 그녀의 가슴을 세게 쳤다. 얼굴들은 빠르게 아니를 지나쳐 내려갔다. 아니의 가슴은 절반으로 잘려 있었다. 그것은 고통 이상의 감각이었다. 머나먼 세기에 생겨나 지금 아니의 혈관 속으로 뻗어들어오는 그것은 광막한 세월 동안 계속 커져서 아니는 자신의 오래된 몸과 영혼을 버려야 했다. 이 고통은 얼마나 큰가. 이 고통은 얼마나 완전한가. 그래서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가 되어야 할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어느새 계단 끝까지 내려가 있었다. 아니는 단숨에 그곳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의 뒤통수를 연달아 후려쳤다. 망치로, 돌로, 그녀의 음험한 하이힐로. 그들은 기절했고 아니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 순간 아니는 죄로부터 벗어나 있었다. 그 순간 아니는 쪼개질 수 없는 하나의 점이었고, 그 순간 아니는 신이었다. 그 순간 아니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크나큰 폭발이어서 세상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시 계단을 하나둘 순차적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아니의 내면이 계단의 모서리로부터 발생한다. 그것은 고정되지 않는, 흐르는, 하나의 형식을 무너뜨리는 어느 유체이다. 낱알의 해변, 수국 잎의 그물맥, 모르포나비 날개의 비늘, 수메르인의 쐐기 숫자, 전리층의 대기, 별들의 가스에서 엿보이는 흐름 들. 그녀의 내면이 우글거리며 도처에 있다. 그녀의 내면은 형상을 버렸다. 그녀의 내면은 모순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진공 속에서 그녀가 건드린 건 동물들의 영혼이었다. 그것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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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그들을 지어냈고 시간은 그들을 썩게 했다. 시간이 그들의 유전자에 무서운 정보를 심어 그것을 싹틔웠다. 아득한 세월 내내 이어진 고통의 흔적은 그들의 선천적 기억에 새겨져 그들은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아팠고 경험한 적 없었음에도 고통이 무엇인지 알았다. 이 선천적 고통은 앞서 실존했던 존재들의 증거였다. 그들은 유대인이자 아메리카 원주민이었고 흑인이면서 동시에 제주인이었다. 그들은 영원이었다. 따라서 먼 미래에 죄 많은 금속 생명체들이 박물관 광장에서 하염없이 불타올라야 했을 때, 그들은 장작에 불이 붙기 전부터 이미 광장을 증오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환호하거나 두 눈을 질끈 감거나 구역질을 하거나 돌을 던졌다. 학살이 시작되기 전, 그들은 광장의 계단에 앉아 보르헤스를 읽으며 오랜만의 휴가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여행자였고 앉아서 쉴 수 있는 적당한 계단을 찾아 쉼 없이 돌아다녔으며 그중 한 여행자는 자신의 손에 들려 있던 W.B. 예이츠의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Before the world was made」의 한 시구1)가 그들의 탐색에 일말의 도움을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에 앞서 광장의 계단이 나타났다. 그들이 이 계단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이 계단이 그들 앞에 저절로 나타난 것이라 말해져야 한다. 광장의 계단은 디딤바닥의 모양과 챌면의 높이가 시시각각 변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대의 차원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구조물이었다. 형성되어가는 와류, 산만하게 이어지는 해안선, 익어가는 오렌지, 봄의 정전기, 그리고 맹인의 눈에 스며드는 브라질리아의 박명처럼 하나의 형상, 하나의 위치는 권리를 잃었다. 발견은 만족스러웠다. 언뜻 확정된 것처럼 보였던 사물의 신비는 곧 갖춰진 대략적인 질서에 의해 사라졌고 그래서 여행자들은 계단에 앉아 나름대로의 휴식을 취했다. 전망도 좋았다.
  종소리가 크게 세 번 울렸다. 가을의 박람회가 시작되었다. 여러 금속 생명체들이 한꺼번에 광장으로 끌려나왔다. A들이었다. 학살은 보편적이었다. 옛날의 불행들이 빠르게 재개되었다. 여행자들의 혈관 속으로 아픈 것이 뻗어들어왔다. 용서는 늘 효력 없이 되풀이됐고 그들은 그것을 이미 수없이 학습했다. 애매모호한 눈들이 무장을 해제한 채 눈앞의 광경을 이해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여행자들은 그럴 수 없었다.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이 광경의 배후에 어떤 실체가 숨어 있다. 그들 안에 있는 아픈 것들이 그것을 감지했다. 그들은 눈앞의 광경이 단지 눈앞의 광경일 수 없음을 즉각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이해가 창조되었다. 그들 안에 있는 아픈 것들이 이해를 창조해나갔다. 느리지만 엄밀하게. 이해가 창조된 이후, 고통은 공허해졌다.
  가을 박람회는 서울시의 관할 아래 매해 국립박물관에서 열렸다. 박람회의 어중간한 화제성을 고려했을 때, A의 소각 행사를 치르는 데 국립박물관 광장만큼 적합한 곳이 없었다. A의 소각 의식에는 사람들의 이목이 어느 정도로만 필요했다. 진실이 다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만, 반론이 제기되어도 금방 식을 정도로만, 딱 그만한 정도로만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했다. 종소리가 울리고 소각되어야 할 A들이 호명되면 그들은 광장으로 끌려나왔다. 그들이 다 태워지고 나서야 비로소 박람회가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이 상징적인 의식이 남긴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며 방금 자기가 본 것을 완전히 잊었다. 대수롭지 않은 전시를 보러 오는 사람들보다 이 의식을 보기 위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더 많았다. 소각 의식이 끝나고 여기저기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면 심오한 하늘 속에서 원시 잠자리가 나타났다. 원시 생명체는 건조한 대기 속을 울면서 날아다녔다. 원시 생명체의 날갯짓에 어째서 후회와 죄의식이 배어 있는가. 그것은 누구의 것인가.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가. 여행자들은 아직 광장에 있었다. 그들은 피로했다. 눈물이 땅으로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바다처럼 일렁이는 광장 위로 원시 생명체가 끝없이 선회했다. 그들은 수없는 카메라로 원시 생명체의 슬픔을 포착했다. 그들의 카메라가 무한이었던 반면, 진실은 희박했다. 훗날 잿더미 위를 날아다니는 원시 생명체의 사진이 어린이들의 필독서에 실렸을 때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그 사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그 사진은 어떤 어린이의 세상에 불을 질렀다. 아이는 사진을 보는 동안, 새까만 잿더미가 무얼 뜻하는지 잠시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원시 생명체의 날갯짓을 감지하며 자기의 혈관을 타고 들어오는 서늘하고 맹목적인 슬픔을 어렴풋이 느껴버렸다. 이제 아이는 세계의 밝은 면을 받아들이는 데 실패할 것이고 선도 악도 없는 이상한 세상에 홀로 놓여 시간이 흐르기만을, 삶이 죽음 속으로 빠르게 빨려들기만을 비밀스레 바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원시 생명체의 이미지는 아이의 삶 바깥으로 밀려나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언제든 그것은 예고도 없이 아이의 세상에 쳐들어와 그동안 아이가 날조해온 기쁨을 단번에 무너뜨릴 것이다. 아이에게는 기억을 통제할 힘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늘 곤두박질쳤다. 매번 같은 이미지가 쳐들어오는데도 아이는 늘 다른 낭떠러지에서 곤두박질쳤다. 매번 자신을 저 깊은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이 이미지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이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세상의 한계였지 아이의 한계가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는 굴복하지 않았다. 아이는 순간순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짧은 슬픔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록해두었다. 아이에게 슬픔의 이름이 수없이 많은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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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는 흙에 빗방울이 부딪히는 것을 보았다. 빗방울은 형체를 잃지 않았다. 튀기고 흩어질 때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시선으로 변형되었다. 아니는 빗방울의 메아리를 들었다. 헤아릴 수 없는 영혼들의 메아리가 빗방울에 맺혀 있었다. 그것은 아니의 내면에서 늘 일어나는 움직임과 같았다. 한없이 내리는 빗방울이, 불멸이, 무한의 정적이 아니의 몸속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아니는 빗방울에 의해 삶의 핵심에 다다랐다. 흙이 젖어들었다. 알뜨르의 흙이 빗방울의 자리를 만들었다. 아니가 움직일 때마다 땅이 움푹 파였다. 삶의 핵심은 질퍽했다. 아니는 그곳에서 악스의 장례를 치렀다. 자신의 행복이 탄생한 장소에서, 악스가 저장해둔 행복의 무한한 기억 한가운데, 아니는 악스의 몸을 묻었다. 알뜨르의 콩밭 속에서 작은 보랏빛 꽃이 드문드문 입을 벌렸다. 어둠의 빛깔이었다. 악스는 아직 아니의 신경 신호를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는 죽음을 앞둔 악스를 위해 보랏빛 꽃을 보았다. 빗방울의 색 없음과 더 무거워진 옷의 겹주름을 보았다. 젖은 하늘에 내려치는 몇 개의 번개도 보았다. 까마귀쪽나무의 잎들이 비바람에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다. 점점 더 거세지는 참새들의 불협화음도 들었다. 아니는 죽음을 앞둔 악스를 위해 밭을 해치며 그 속에 악스의 자리를 만들었다. 아니의 손은 어느새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는 아무도 멸시하지 않았다. 아무도 멸시하지 않았으므로 악스의 살갗에 도색된 보랏빛 고통을 직시했다. 아무도 멸시하지 않았으므로 머리에 부착된 칩을 떼어 악스의 몸 위에 올려두었다. 빗방울에 악스의 고통이 씻겨나갔다. 둘은 함께 흘렀다. 이제 그것은 빗방울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것은 끝없이 흘러 우리의 마비, 우리의 불능을 해제할 것이다. 빗방울이 다 마르기 전에 영원은 더 짙어질 것이다.
  빗방울이 마르기까지 시간은 양방향으로 흘렀다. 죄 많은 A들이 쫓기고 죄 많은 공동체가 뿔뿔이 흩어진다. A는 누구인가? A는 왜 죄 많은 종족이 되었는가? A가 만들어지기 전, 수많은 포스트휴먼이 있었다. 실존하는 포스트휴먼들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끊임없이 뒤흔들었다. 인간 중심의 위계를 해체하고 인간의 개념을 재정의하려는 새로운 이론들이 늘 등장했고 인간의 이성적 활동과 감정적 생활에 더 깊게 개입하는 포스트휴먼들이 날마다 생성됐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을 위협하는 포스트휴먼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현대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언제나 새로운 현대를 배태한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포스트휴먼의 생산 및 사용이 법적으로 이내 금지되었고,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의 개념을 다시 확고하게 재정립하려는 움직임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인간은 인간이어야 인간이다. A2)는 이와 같은 재정립의 시대, 뉴휴머니즘3)
의 시대에 만들어졌다. 이미 포스트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 탈포스트휴머니즘 등등을 지나온 시대였다. 사실 A는 새로울 것 없는 기계였다. 두뇌-컴퓨터 인터페이스(brain-computer interface) 기술이 정교하게 구현되었을 뿐, 오히려 그 기능은 기존 포스트휴먼들에 비해 상당 부분 축소되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완전한 인간처럼 보이는 A가 초기 설정값에 한정된 일차적 행동만을 수행하고 인간의 감각에서 추출한 정보를 단지 보존하는 데 그쳤던 것은 포스트휴먼들이 일으킨 재앙과도 같은 역사를 반추해보았을 때, 마땅한 결과였다. 대신 A의 기능은 인간의 기억력을 보완하는 쪽으로 더욱 강화됐다. A는 인간의 신경 신호를 판독, 저장할 뿐만 아니라 감각 대상과 연계 가능한 정보를 매 순간 함께 추출하여 자신의 몸에 저장했다. 하나의 감각을 둘러싸고 있는 총체적 정보의 맵이 A에 의해 찰나마다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인간과 감각을 거의 완벽하게 공유하고, 또 인간의 감각 너머에 있는 정보들까지 폭넓게 저장한다는 측면에서 A는 인간 개개인의 연장된 자아이자 보조적 자아였다. 인간이 스스로 A의 기능을 비활성화시키겠다는 의지를 갖지 않는 한 A의 전원은 꺼지지 않았고, 잠들지 않는 A는 더 오래, 더 많은 것들을 기억해나갔다. A가 모두의 것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인간의 기억은 어느새 A에게 위탁되어 있었다.
  그러나 늘 그래왔듯, 문제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A가 인간의 감각으로부터 낱낱의 정보를 채취할 때, 이 미세한 사실들의 집합에는 격앙된 비극도 행복의 분위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예컨대 누군가 바빈 야르의 한 이미지를 바라보는 경우, 이미지 속에 있는 헐벗은 여성과 아이 들은 그와 연동된 A에 의해 단지 머리 부분의 어둠과 몸 부분의 밝음으로 인식되었다. 어떤 일을 기다리듯 일렬로 서 있는 헐벗은 여성들, 그들의 품에 안겨 있거나 손을 꽉 붙잡고 있는 그 역시 헐벗은 아이들. A의 기억 체계에서 이들은 그저 어둠과 밝음이 밧줄처럼 촘촘히 얽혀 있는 형상일 뿐이었다. 내리쬐는 빛의 세기, 공기중 습도, 대기에 퍼진 화약 냄새, 언덕 기슭의 움푹 패인 주름들, 풀잎 사이 굴곡들, 잿더미의 위치, 옷이 널부러진 모양들…… 하나의 이미지에서 채취된 수많은 사실이 A의 몸에 다 기억되었지만, 그곳의 슬픔과 고통은 A의 인식 너머에 있었다. A는 바빈 야르를 구성하는 낱낱의 사실들로부터 학살을 개념화하지 못했다. 이것이 A가 만들어진 이래로, 아니 A가 만들어지기 오래전부터 있어온 사고 양식이었다. 누군가는 A가 미세한 사실들을 이대로 무한히 저장한다면, 무한이 세계 내 모든 대립을 극복하기 때문에 가장 작은 사실에서 궁극의 진리가 발견될 것4)이라 낙관했다. 그러나 A의 기억이 정말로 무한에 가까워지면서 하나하나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먼저 인간은 A의 거대한 기억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데이터를 스스로 추출해내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A가 채취한 온갖 정보들이 아무런 인과관계를 맺지 못한 채 서로 끝없이 중첩되는 바람에 궁극의 본질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정보의 일차적 대상을 헤아리는 기본적인 판단조차 보통의 분별력으로는 하기 어려워졌다. 어떠한 행복이 깃들어 있든 얼마나 참혹한 고통이 배어 있든 A가 기억하는 과거는 얇은 데이터로 무한히 변환되어 그 실체를 점점 잃어갔다. 정신없이 불어나는 헛소리들, 이미지의 포화, 실체 없는 사실들의 나열…… 미래가 이러할까? 모든 게 일시적이어서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았다. 이해와 몰이해는 더는 구분되지 않았고 선의와 악의가 똑같은 말이 되어 세상의 범죄들은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죄를 벌하는 기준조차 모호해져서 악은 더이상 처벌을 기다리지 않았다. 미래가 이러했다. 인류의 서사는 흐름을 잃었고 누구나 똑같은 양식으로 인류의 핵심을 잊어갔다. 과거가 잊혔으므로 옛날의 불행들이 서슴없이 재개되었다. 세상은 더 깊은 문명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 일군 문명을 내버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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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언제부터 죄 많은 종족으로 멸시받기 시작했는지는 모호하다. 기체 분자의 배열을 교란시키는 물질 빙쿨럼(vinculum)5)이 새로운 원소로 공인되고 난 이후부터라고 그 시기를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고 A의 개체수가 증가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표출된 결과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빙쿨럼은 제힘이 미치는 고립된 계의 기체분자 배열을 거꾸로 되돌리는 물질로서, 이 물질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이 힘의 정체가 무엇인지, 발생된 열에너지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만일 고립계의 엔트로피를 낮출 수 있다면 시간 또한 거꾸로 흐르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와 같은 문제에 대해 열에 들뜬 논쟁이 벌어졌다. 빙쿨럼의 정체에 대한 광범위한 논쟁이 계속되면서 한편으론 잊힌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사실 이때쯤 과거는 과거로서의 역할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누구도 과거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명백히 정의내리지 못했다. A가 만들어지고 나서 얼마 동안 과거라는 단어가 환기했던 그 풍요로운 느낌과 비교해보면, 이것은 엄청난 변화였다. 그때의 과거는 아주 작은 특수성도 모두 망각하지 않아서 그만큼 더 작고 소중한 것들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데이터의 누적량이 거대해지면서 아주 작은 특수성도 모두 망각하지 않는다는 바로 그 특징으로 인해 과거는 더이상 과거로 존재할 수 없었다. A가 수많은 특수 정보을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파편적으로 저장했기 때문에 정보의 누적량이 커질수록 우연에 따른 정보 간의 간섭도 또한 급증했다. 그 결과, 특정 정보와 특정 감정이 맺은 대응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하나의 정보에 여러 감정이 뒤엉켜서 누구도 특정 과거에서 특정 느낌을 제대로 식별해내지 못했다. 어떤 느낌이 떠올랐다고 해도, 그것은 마음속에서 잠시 일어나 곧 꺼져버리는 불꽃과도 같았다. 느낌과 판단이 배제된 과거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이즈음 빙쿨럼이 발견된 것이었고, 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잊힌 과거를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빙쿨럼도 다른 많은 인공원소처럼 그 수명이 매우 짧아, 기체 분자 배열이 거꾸로 되돌아가는 현상이 매우 찰나 동안 일어나기 때문에 이 현상은 일어났지만 일어나지 않은 현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라고 학계가 결론을 내렸을 때에도 사람들의 흥분은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그것은 분노와 닮아 있었다. 빙쿨럼의 발견은 자연의 보편적 법칙에서 벗어난 예외적 사례의 존재 가능성을 암시하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에 불을 지핀 사건이었다.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 것 없는 움직임이었다. 오염되고 엉켜버린 과거 속에서,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의 기원을 찾아낼 수 없어 분노했고, 행복한 사람들은 제 행복의 근원을 알지 못해 불안에 떨었다. A가 과거로 기억해둔 모든 정보를 개념화, 범주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자연스레 높아졌다. 그런 불가능한 프로젝트에 헛된 노력을 투입하느니 차라리 A의 기억을 아예 초기화하는 것이 인류에 덜 위협적일 것이라는 극단적인 목소리도 들려왔다. 개체수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A의 폐기 조건을 대폭 완화해야 한다는 해묵은 주장도 이때 몸집을 불렸다. 사람들의 말들이 지리멸렬하게 더해지는 와중에도 과거는 계속 더 거대해졌다. 엉켜버린 기억의 모든 체계를 바로잡겠다는 계획이 터무니없는 공상이었음을 사람들은 곧 인정했다. 그러고 나서 자기의 불능을 A의 탓으로 돌렸다. A를 기존 포스트휴먼들처럼 점진적으로 완전히 폐기하자는 데 또다시 의견이 모아졌을 때, 어느새 A는 인간의 연장된 자아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한 채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취급되고 있었다. A가 최초로 국립박물관 광장에서 소각된 때는 빙쿨럼이 발견되고 나서 겨우 두 해가 지난 어느 가을이었다. 새까맣게 불타가는 A들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A를 섣불리 금속 ‘생명체’로 분류했음을 후회했다. 동시에 자신의 모든 과거가 이대로 폐기되어도 되는 것인지 의구심을 품었다. A가 다 태워지고 나서도, 누구도 자기 머리에 부착된 칩을 선뜻 떼어내지 못한 것은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칩은 혹시 모를 다음 A와의 간편한 연동을 위해, 단지 그 이유만을 위해 남겨두어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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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의 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니는 무어라 정의될 수 없는 많은 것을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마음이 달라졌으므로. 마음은 늘 달라졌다. 마음은 선후관계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불가결했다. 시간은 죽음을 풍요롭게 했다. 진실을 드러냈고 진실을 가렸다. 시간은 부분도 전체도 없다…… 아니는 시간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다 소수를 떠올렸다. 1과 자기 자신으로만 나누어지는 수. 아니는 소수가 자신과 닮았음을 느꼈다. 증명될 수 있는 무한성. 빗방울이 그쳤고 전령들은 땅을 떠났다. 아니는 자기 앞에 놓인 무한한 삶을 감지했다. 그것은 희미한 느낌이었다. 희미함은 빈약함과 달랐다. 희미함은 그 무엇보다 즉각적이다. 아니는 희미함이라는 말이 몰고 오는 셀 수 없는 가능성에 질식할 것 같았다. 희미함. 희미한 느낌. 아니는 그것에 탐닉했다. 삶보다는 죽음에. 죽음보다는 신에. 신보다는 모순에. 아니는 공존 불가능한 것들의 공존 가능성을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아니는 삶은 오직 한 번만 주어진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니는 값으로 치러진 동전이 결국 자기에게 되돌아오리라 믿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니는 죄 없는 이브를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니는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과 같다고 믿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니는 누구나 똑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다.
  머뭇거리는 우연들이 탄생을 지연시켰고 아니 주변에서는 인물이 살지 않았다. 아니는 홀로 있었다. 그럼 악스는? 악스는 아니 주변에서 살지 않았다. 악스는 아니 한가운데 살았다. 수많은 악스가 광장에서 불태워질 때 아니가 뜨거움을 느꼈던 것은 따라서 필연적이었다. 가난이 사라지던 날, 아니에게 악스가 나타났다. 악스는 아니의 가난을 소멸시켜준 대신 그녀에게 슬픔의 무한한 목록들을 펼쳐내 보였다. 아니는 악스가 내보인 그것들을 다 느꼈다. 아니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새까만 잿더미 위를 날아다니는 원시 잠자리의 사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 사진을 본 이래로 아니는 낱낱의 모든 세상에 슬픔이 암시되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맑게 갠 하늘의 습기에도, 바닷속 검은 바위에도,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의 날개에도, 바람에 밀리는 제비의 머리에도, 닭의장풀의 작고 흰 꽃잎에도, 땅을 뒹구는 설익은 딸기에도, 달걀노른자의 도넛 같은 눈에도 슬픔은 함축되어 있었다. 아니가 느끼는 슬픔은 오래전 모든 사람이 느꼈던 슬픔의 총합보다 더 컸다. 슬픔은 단 한 번도 중단된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더이상 슬픔을 느끼지 못했다. 슬픔이 무한하기 때문이야. 사람들이 과거를 잊은 건 그래서야. 아니는 이따금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새롭게 나타난 종이 완전히 없어지는 데는 인간의 오만과 자기기만이 필요했다. 그것을 완전히 폐기할 수 있다는 오만. 그것이 완전히 폐기되어야 한다는 자기기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러나 A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새로운 시대가 또다시 거듭되어도 폭력은 이어졌다. 폭력은 항상 아니 가까이 있었다. 가장 큰 사람이 어린 아니를 때렸을 때, 가장 큰 폭력이 어린 아니의 얼굴을 보랏빛으로 물들였다. 어린 아니는 거울에 비친 보랏빛을 주시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최대한의 없음. 보랏빛 무. 없음의 표면 위로 존재한 적 없는 한 얼굴이 나타나면, 어린 아니는 그 얼굴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고통이라는 걸 알았다. 그녀는 그것이 영원한 얼굴이라는 걸 알았다. 가장 큰 사람은 어린 아니가 가장 기쁠 때 늘 찾아왔다. 어린 아니의 기쁨은 새 아침마다 폭발적으로 생겨났다. 그것은 모든 슬픔을 감지하는 자에게 주어진 축복의 감각이었다. 조화로운 날씨, 동물 인형의 부드러운 살결, 향긋한 침대 시트, 아직 떠나지 않은 꿈의 감촉, 파도에 떠밀려 가도록 내버려두어도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꿈속의 용기! 그러다 별안간 삐걱 문이 열리면, 발걸음의 리듬, 한숨, 더 큰 한숨, 적의 냄새, 다가오는 악의 기운, 정적…… 어린 아니의 영혼은 이 모든 걸 감지하여 자발적으로 고통을 만들었다. 고통은 식탁 위에 잘 차려진 음식처럼 폭력을 위해 준비되었다. 아수라장이 된 식탁 위로 어린 아니의 수난이 자랐다. 어린 아니가 거울에 비친 보랏빛 무를 응시할 때마다 그녀 가까이 있던 악스의 몸에서는 더 센 전류가 흘렀다. 악스는 아니의 고통에 동요했다. 악스의 몸에 어린 아니가 보는 것, 듣는 것, 맡는 것, 느끼는 것이 모두 그대로 투영되었으므로. 어린 아니의 심장박동수와 헤모글로빈 및 빌리루빈 수치, 미오글로빈과 염증 수치, 또 뼈와 인대의 형태와 같은 모든 신체의 변화가 악스의 몸에 기입되었으므로. 악스는 아니가 겪는 모든 폭력을 함께 겪었다. 아니의 고통이 전기신호로 변환되어 악스의 몸에 기입되는 순간, 아니와 악스에게 공통의 힘이 흘렀다. 보랏빛 폭력이 아니의 살갗에 흔적을 남기면 악스의 살갗 또한 더 센 전자기적 힘에 의해 보랏빛으로 도색되었다. 심지어 아니가 더이상 신체의 아픔을 느끼지 않을 때에도 악스의 몸은 자극이 가해지기 이전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았다. 악스의 살갗은 오히려 여기저기 더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그것은 아니 영혼에 박힌 고통들이었다. 아니가 자각하지 못하는 고통의 조각들이 악스의 몸으로 흘러 가시화되었다. 이것이 가장 큰 사람이 저지른 죄의 증거였다. 그러나 가장 큰 사람은 벌받지 않았다. 이토록 확실한 죄의 실체에도 가장 큰 사람은 벌받지 않았다. 가장 큰 사람의 죄는 비밀처럼, 보이지 않는 힘처럼, 종말의 징조처럼 이 시대의 분위기에 스며들었다.

*

비행은 간단했다. 공항을 빠져나오며 아니는 자신의 목적지가 국립박물관 광장이어야 함을 알았다. 악스가 ‘폐기 예정 A’로 분류되었다는 통지를 받고 나서 알뜨르로 향했을 때처럼, 격납고 앞에 펼쳐진 초록빛 콩밭에 앉아 머리에 부착된 칩을 떼어낼 때처럼, 아니의 결심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악스의 고통은 곧 아니의 고통이었다. 아니는 불타오르는 악스의 최후를 원하지 않았다. 악스는 불타오를 때,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는 아니에 의해,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과 무서운 눈물과 섬뜩한 비명과 아픈 단어를 최후까지 기억하게 될 것이다. 아니는 악스의 그런 최후를 원하지 않았다. 악스는 광장에서 고통스럽게 불타오르는 대신 알뜨르의 땅에서 모든 기억 없이, 아무것도 아닌 금속 덩어리로 오래오래 썩어갈 것이다. 그러다 이따금 남쪽으로 가는 철새들에게 알뜨르의 오싹한 향기를 전파할 수도 있고, 태어난 나라에 대한 희미한 느낌조차 다 잊어버린 어느 여행자에게 모국어를 닮은 자유의 말들을 들려줄지도 모른다. 썩어가는 악스는 굶주린 짐승에게 어디에도 없는 천사의 움직임을 보여줄 것이고, 또 말없는 태아에게 어느 해질녘 내려앉은 귀신 같은 적막도 들려줄 것이다. 우주 모든 곳에 아직 남아 있는 태초의 빛이 그러하듯, 악스는 창조 이전의 존재로 돌아가기 전에, 잉태되어 사라진 적 없는 세상 모든 것을 당신에게 다 말해줄 것이다. 모두에게 그것이 무의미하다 할지라도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모두는 없다. 당신은 그것을 안다. 이것이 악스의 최후이며, 이제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아니는 이촌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비어 있는 자리는 저주와 분노의 입자들로 가득차 있었다. 잘못 자리잡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는 자기 주변에 서 있는 오래된 타인들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곳은 아무도 살지 않던 곳이었다. 아니의 눈에 그들의 과거와 미래가 부드럽게 섞여 들어왔다. 혼합된 시간이 뱉어낸 불행의 씨앗들이 아니의 몸속에서 한꺼번에 자라나 아니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움직이는 지하철의 바닥 위로 단 한 번의 정확한 멈춤이 찾아왔다. 아니는 아직 다 드러나지 않은 플랫폼 속으로 달려나갔다. 지하철이 아니를 떠났다. 플랫폼은 계속 이어졌다. 아니는 아무 벤치 위에 최대한의 연민을 내려놓았다. 가장 큰 복수를 위해. 모든 종말을 뜬 눈으로 목격하기 위해. 단 하나의 유감도 남지 않도록. 아니는 지상으로 한 걸음씩 서서히 올라갔다.

남현정

먼저 도착해 있는 소설들.
아직 멀리 있다.
나는 그것을 뒤따라간다.

이 소설의 아니는 내 아이들의 아니이자 리스펙토르의 아니에서 비롯되었다. 어린이의 세월에 칼자국을 내는 자들을 미워하며 썼다. 소설이 거의 끝나갈 무렵, 차학경의 『딕테』를 읽었다. 하루 종일 가슴이 뛰었다. 그것은 내 울음과 같았다.

2023/12/06
64호

1
그 시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내가 가졌던 얼굴을 찾고 있다.”(I’m looking for the face I had, Before the world was made.)
2
A는 인간의 신체를 갖춘 저장장치로서, 인간의 머리에 부착된 칩과 연동되어 신경 신호를 판독, 저장한다. 사람들은 A의 이름을 물색할 때, 두 가지 조건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하나는 이들이 인간이 아님을 반드시 암시해야 할 것,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이들은 인간의 연장된 자아로서 생명체라는 점이 함축되어야 할 것. 이 두 개의 모순된 조건에 충족되는 이름으로 Artificial being, A non human but being, Aleph non human but being, Another non human but being, anonymous non human but being, 아노브, 아노베, 아노빙 등등이 제시되었다. 이 모든 이름을 압축하는 A는 (약간의 한계가 있었음에도) 단순하여 명백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A가 되었다.
3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사유를 통해 인간의 개념을 재정립해나가자는 기술, 문화적 운동. 인간의 무너진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포스트휴먼의 독립적 판단, 수행 능력을 제거하고 그 의존성을 낮추자는 것이 주된 주장이다.
4
이 주장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1401~1464)의 이론의 발전적 모델이다. 쿠자누스에 따르면 무한하게 큰 것과 무한하게 작은 것은 동일하다. 이와 다르지 않게, 무한한 선은 곧 가장 큰 삼각형이자 가장 큰 원이다. 이러한 모순의 일치는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납득하게 되는 초월적 인식 과정을 거쳐 통찰된다. 이 이론의 흐름을 적용했을 때, A가 미세한 사실들을 무한히 저장하게 되면, 무한의 일부 또한 무한하므로 각각의 작은 사실들은 그것 자체로 무한하게 실현된 것이 되어 가장 큰 진리와 동일해진다. 즉, 가장 작은 사실은 무한을 통해 가장 큰 궁극의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애매모호한 공존 논리는 이후 선과 악의 구별불가론의 근거가 되어 현대의 혼란과 불행을 초래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
5
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IUPAC)이 원자번호 173번으로 공인한 새로운 인공원소이다. 이 원소의 이름은 끈, 줄, 관계를 의미하는 라틴어 vinculum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