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랑 싸우기만 하잖아.
  널 괴롭히고 도망가면 날 뒤쫓지만
  집에 가면 넌 내 생각 안 하지 나는 맨날 하는데?
  애쓰지 않고 걔랑 친해지는 방법을 생각하느라
  재미없는 영화를 틀어놓고 음악을 듣고 숙제를 하면서
  밥도 먹고, 그리고 여자애들 진짜 싫어.

  걔는 아침마다 자기 가방을 들고 따라오게 한다.
  여자애들 물건은 무거워서 항상 들어줘야 하지만.
  널 교실 안으로 던져버리면 이상하고 웃긴 소리로 내 팔뚝을 팡팡 때리지.
  걔들은 내가 어떻게 놀릴지 정확히 안다.
  이 시간에 복도로 드는 빛은 모두 교실을 통과한 것들이다.
  두 개의 창문을 뚫고서야 바닥에 미끄러지는 소성체의 소리.
  00년대 복도의 테라초 패턴은 사실 다 같고 죄다 뿌리가 자란다.
  여기는 항상 무작위의 기점이다.

  소녀들이 서로 가르쳐주는 건 애쓰지 않는 법이라는 걸.
  걔가 나한테 가르쳐주지 않아서,
  나는 티를 내고 말았는지 우리는 결국 친구가 못 된다.
  우리는 서로 천재처럼 보이려고, 소년과 소녀로 타고난 걸 영원히 지키려고.
  나를 예뻐하는 언니들도 나에겐 비밀 얘기도 안 하고 손도 안 잡아준다.
  내가 최초로 목격한 사랑은 영화와 음악에 있고
  여자애가 남자애를 사랑할 수 있는 걸 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애들 가방은 무거워서 항상 어딘가에 버려져 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그걸 주워다 사물함에 넣었다.
  운동장에 있으면 교실이 잘 안 보인다. 거기선 내가 보이려나?

허주영

2019년 《시인수첩》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올해 시집 『다들 모였다고 하지만 내가 없잖아』를 냈다. 덕분에 다들 모여 있는 데에는 절대 오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갔다. 요즘엔 하고 싶은 게 많다. 시간이 없는 게 가장 큰 걱정이다. 시 한 편을 굉장히 오래 쓰는 편인데 요즘엔 그 시간도 점점 길어진다.

2024/01/03
6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