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어나긴 했지만*
오늘이 누나의 사십구재(四十九齋)였어요. 글라라 아줌마도 오셨어요. 아줌마가 형한테도 말씀하셨는지 모르겠네요. 그간 병실에도 몇 번 와서 기도도 해주시고, 암에 좋다는 상황버섯 물도 달여 오시고 그랬어요. 저는 뭐, 누나의 투병생활도 오래 겪고 그래서 많이 힘든 건 아니었는데, 엄마는 아무래도 많이 버티기 힘들겠죠. 글라라 아줌마가 엄마 손을 계속 잡고 계셨어요. 아줌마는 제가 기억하던 그 모습 그대로시더라고요. 따뜻하고 정 많고, 뭐 그런. 형 집에 가면 항상 우리집에 없는 다정함 같은 게 느껴져서 좋았어요. 써놓고보니 너무 낯간지럽네. 괜히 형 앞에선 이런 징그럽고 간지러운 말을 늘어놔도 될 것 같네요. 맞다, 형이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승진까지 했다는 소식 들었어요. 글라라 아줌마한테서요. 걱정을 많이 했는데 잘 자라줘서 다행이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하셨어요. 축하해요. 정말 잘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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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를 받은 것은 공교롭게도 사원증을 반납하고 온 직후였다. 지난 오 년 동안 살이 15킬로그램이나 쪘으며,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학자금 대출금을 모두 상환했다. 책상에 놓아둔 전파 선인장이며, 손목 받침대 같은 사소한 것들을 챙겨넣었을 뿐인데 박스 하나가 꽉 찼다. 양손으로 한 번에 들기도 힘들 정도의 박스를 우편 송환실로 나르며, 나는 지난 오 년의 무게를 절감했다. 착불로, 박스를 부쳤다. 승진을 한 후, 곧바로 사직서를 냈다. 건강이 손쓸 도리 없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겨드랑이의 작은 발진에서 시작된 염증은 삼 년여의 시간 동안 온몸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항생제를 바꿔가며 치료를 시도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엄마가 암에 걸렸을 때 사놓은 대용량 비타민과 프로폴리스, 효모 추출 성분, 상황버섯과, 밀크시슬과 같은 면역에 좋다는 세상의 거의 모든 슈퍼 푸드들을 먹으며, 연일 이어지는 야근과 작업을 쳐냈다. 매일 매일 팽팽한 줄 위에 올라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하루를 버텼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게 끊어져버렸다.
그날 무열의 쪽지가 왔다. 아름 누나가 죽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미라 아줌마의 첫딸이 죽었다. 엄마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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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아줌마와 우리 엄마는 고등학교 때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미라 아줌마가 공무원과 소규모 건설업체 사장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을 때 엄마는 인생에 안정성만큼 중요한 가치는 없다며, 공무원 오를 선택할 것을 권했다. 허나 이십대의 미라 아줌마는 모험을 아는 여자였고, 공무원 오씨보다 키가 10센티미터는 크고 눈썹이 짙으며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진 건설업체의 사장 김을 선택해 이듬해 남편을 꼭 닮은 딸을 낳았다. 엄마는 자신의 인생철학에 딱 맞는 은행원 박과 결혼해 삼 년 뒤 여름, 나를 낳았다. 미자 아줌마도 지지 않고 이듬해 2월, 둘째 아들 무열을 낳아 평범하고 안온한 가정을 완성했다, 고 믿었다.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느라 소원했던 엄마와 미라 아줌마가 다시 가까워지게 된 것은 1999년 지방의 한 임대 아파트 단지였다. 미라 아줌마의 남편 김씨는 심혈관 질환으로 돌연사 했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존심이 강한 그가 벌려놓은 사업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남편의 죽음 이후, 고급 빌라에 살던 미라 아줌마의 가족이 서민형 임대 주택 단지로 흘러들게 되었다. 우리집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부친이 십여 년간 모아놓은 적금과 아파트를 저당 잡아 대출받은 돈을 (가장 안정적이고도 공격적인 투자처라 믿었던) 대기업 주식에 ‘몰빵’한 덕분에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었고, 구에서 가장 오래된 임대 아파트에 당도하게 되었다. 고급품에 대한 수요가 남달랐던 부친이 마구잡이로 사들였던 야마하 오디오 시스템과 이탈리아 산 이불장, 스웨덴산 원목 버티칼과 50인치 대우 텔레비전, 위성 티브이 수신기, 증권 거래용 PDA 단말기 같은 것들을 모두 버린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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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네 아저씨가 ‘심혈관 질환’으로 급사한 뒤, 엄마는 미라 아줌마를 전도하는데 성공했다. 둘은 아파트 단지 인근에 위치한 성당에서 각각 보험 설계사 글라라 씨와 다이어트 집 아녜스 씨로 통했다. 두 여성이 암 보험과 대두 단백질 추출 체중 관리 식품을 파는 동안, 두 가정의 식솔 셋이 함께 지내게 된 것은 합리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주로 아름 누나와 무열이 우리집에 왔다. 그나마 우리집이 방이 하나 더 많기도 했거니와 경제 발전기의 흔적인, 라이센스판 디즈니 전집이며 미국산 브루마블, 레고 세트 같은 놀잇거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름과 나, 무열은 마왕성이나 파라다이스 콘도 같은 것들을 짓고, 부수고, 다시 짓고 부수고를 반복했고, 그조차 지겨워지면 셋 중 가장 어렸던 무열을 인형처럼 꾸미고, 강아지처럼 부리며 함께 자랐다.
무열은 (빠른 년생이라는 이유로) 나와 같은 해에 정규 교육과정을 시작했으나 출생년이 늦다는 이유로 나에게 꼬박꼬박 형이라고 불렀으며, 더러는 존댓말까지 썼다. 초등학교 때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녔으나 한 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은 없었다. 방과후 수업에 열성적이었던 내가 바이올린이나 미술 같은 것을 배우고 올 때면 언제나 무열이 운동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성장 속도도 성적도 운동 실력도 고만고만했으나, 모든 분야에서 내가 조금씩 더 낫기는 했다. 그 시절 나는 무열을 언제나 나를 뒤따르는 존재로 여겼다. 언젠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지능검사에서 무열이 나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해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기억이 있다. 저 애보다 내가, 더 멍청하단 말이야? 내가 기억하기 전부터 우리는 자연스레 팔짱을 끼고 걸었다. 학교를 갈 때도, 복도에서 마주쳐 인사를 나눌 때에도, 집에 갈 때에도. 방과후에는 같은 보습학원을 다니고 서로의 학습지를 대신 풀어주었으며 같은 책을 읽으며, 처음이라고 부를 만한 거의 모든 것들을 함께 했다.
무열은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형이라는 호칭대신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더 이상 나의 어깨에 손을 두르거나 팔짱을 끼지 않았지만 둘이 함께 있을 때는 습관처럼 곧잘 존댓말을 썼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내 다리를 베고 눕거나, 손을 잡았다.
청소년이 된 무열은 방이 두 개뿐인 (그나마도 누렇게 바랜 플라스틱 파티션으로 구분된 것에 불과한) 집에 살았다. 그는 누나와 엄마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대신 내 방에 와 누워 있는 것을 더 선호했다. 우리는 삼십 년 된 아파트의 외풍을 견디기 위해 같은 침대에 누워 서로를 안고 자곤 했다. 서로의 가슴에 팔을 올려놓고 자던 어느 추운 겨울날 밤, 우리는 이차성징이 가져다준 변화(혹은 저주)를 서로를 통해 확인했다. 몇 번의 밤을 통해 나는 오로지 먹고 싸는데 그친다고 믿었던 나의 신체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바람이 불고 해가 뜨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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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에 따라 구입했다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세계문학 전집을 처음 꺼내 든 것은 무열이었다. 내 경우는 주로 과학 만화나 읽었던 반면 무열은 문자 그 자체를 좋아했다. 언제나 나보다 더 모자란 줄로만 알았던 무열이 내가 알지 못하는 작품과 내가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기 시작하는 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경쟁적으로, 지지 않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완전한 부재 상태가 되어버린 아름 누나의 자리에 플로베르와 에밀리 브론테, 괴테가 끼어들게 되었고, 그 시절 우리는 우리 둘이 건설한 고전과 문자의 시절이 계속 될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찰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나는 후에야 알게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한 우리는 서로의 본질을 가리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 단지는 구내 가장 오래된 임대 단지였으며, 모두가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우리 아파트 단지의 이름이 종종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멸칭의 세계는 넓고도 오묘하여 가난이나 장애, 질병, 여성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주로 사용되었고, 호모나 게이 같은 단어 역시 그 영역에 속해 있었다. 무열과 나는 이중, 삼중의 멸칭을 가질만한 조건을 갖춘 죄로 스스로를 완벽히 가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리고, 태초에 쓰레기통이 있었다.
매일 남학생들이 배출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를 감당하기 위해 각 학급에는 성인 남성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플라스틱 쓰레기통이 배치되어 있었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한 명씩 그 속에 들어가 젖은 쓰레기들과 가래침과 함께 버무려지고 굴려졌다. 그곳에서 나는 인간이 파김치가 되어가는 광경을 매일 목도했다. 매주, 매일, 매 시간 누군가는 바지가 벗겨졌고, 이가 부러졌고, 무릎 연골이 찢어졌고,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푼돈을 빼앗겼고, 실내화에 오물이 담겼으며, 가방과 함께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그리고 그 모든 다채로운 폭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됐을 때도 당연히, 있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진학한지 한 학기 만에 같은 학년의 누군가가 자살했다. 가해자는 멀쩡히 살아남아 외국으로 도피 유학을 갔고, 보란 듯이 미국 대학의 학위를 사와 부계의 가업을 물려받았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을 지켜줄만한 어떤 것들도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계의 일부로서, 언제든지 먹이가 될 수 있다는 강렬한 본능을 바탕으로 돌다리를 건너는 심정으로 그 시절을 버텼다. 그 시절 나는 자주 쓰레기통에 들어가 뒹구는 꿈을 꿨다. 그것은 악몽이 아니라 예민한 현실감각이었고, 또 언제든 펼쳐질 수 있는 근미래의 풍경이기도 했다.
무열이 먹잇감이 아닌 포식자의 길을 선택한 것은 공교롭게도 미라 아줌마의 파산과 같은 시기였다.
미자 아줌마의 다이어트 식품 사업은 처음 얼마 동안은 순조로웠다. 집이 망해도 살을 빼려는 사람은 언제든지 있었고, 경기가 나빠지자 오히려 보란 듯이 살찐 사람이 더 늘어나기 시작했으니까.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다이어트용 단백질 파우더 시연회를 열던 미라 아줌마는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파트 상가에 자신의 이름을 딴 작은 가게를 차리게 되었다. ‘미라 체형미’는 명실상부 동네 아줌마들의 아지트이자 곗돈이 오가는 금융거래의 장이었고, 한 가정의 희망이 깃들어 있는 공간이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폭풍처럼 불어닥치던 다이어트 식품의 열풍은, 다른 모든 열풍들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아버렸다. 유통기한이 지난 단백질 파우더들이 굳은 채 버려지기 시작했다. 미라 아줌마가 성당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유통기한이 임박한 분말을 인수해 김치냉장고와 냉동실에 골고루 부려놓았다. 살을 빼겠다며 때마다 밥 대신 분말을 물에 타먹었으나 이상하게도 엄마의 몸은 점점 불어만 갔다. 하루종일 밖을 돌며 보험 영업을 하는데도 그랬다. 그즈음부터 무열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수험생이 되어 부쩍 신경질을 부리는 아름 누나를 피해 주로 우리집에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던 그가 점점 밖으로 나돌았다. 더이상 나를 형이라 부르지 않았고, 아예 없는 취급을 하기 시작 했다. 언젠가는 아파트 뒤편 화단에서 담배를 피우다 나와 마주쳤는데 곁눈질을 쓱 하더니 침이나 뱉고 말기에 한참을 웃었다.
뭐가 웃기냐.
니가.
옷이나 손가락에서 담배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는 게 너무 청소년드라마 같잖아. 또 어느 날은 손바닥만 한 택트를 타고 돌아다니길래,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아는 형이 훔친 물건이라고 했다. 아는 형, 번호판이 없는 택트. 비행조차도 책에 나온 것처럼 정석적으로 하는 무열이 귀여웠다. 무열은 그후로도 미라 아줌마의 명의로 몰래 핸드폰을 개통해 사용하다 들통이 났으며, 미라 체형미의 계산대에서 돈을 훔치다 걸려 짧게 가출(을 빙자한 피신)을 단행했다.
그 무렵 무열은 종종 술을 잔뜩 먹은 채 새벽에 우리집에 기어들어와 내 잠을 깨운 뒤, 코를 골며 자는 일이 잦았다. 나는 술에 취해 뜨거워졌다 점점 더 차가워지는 무열의 몸을 안고 잤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뜨거웠다가 차가워지는 몸을 안고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가지는 않았다. 아름 누나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게 된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영리하고 재바른 구석이 있었던 누나였다. 엄마는 전화를 받고 미라 아줌마와 함께 얼싸안고 울었다. 축제가 벌어졌다. 그날 무열은 집을 나가 다시 들어오지 않았다. 미라 아줌마는 내버려두라고 했다.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다. 미라 아줌마는 이제는 창고가 되어버린 사무실에 쌓여만 가는 재고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단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다 기울어버린 사업체가 제대로 굴러갈리 없었고 결국 엄마가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을 해약해 미라 아줌마에게 아름 누나의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빌려주었다.
무열은 겨울방학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기록적으로 추운 겨울이었다. 수시로 무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차라리 핸드폰을 꺼놓기라도 하지. 나는 무열이 있을 만한 곳들을 며칠이고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습관처럼 아파트 단지 근처를 한참을 배회하다 아름 누나와 마주쳤다. 누나는 자신의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큰 백팩에 빨간 목도리를 메고 있었다. 근처 공부방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며 등록금을 벌고 있다고 했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무열에게 별 연락이 없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걔 좀 그만 찾아. 믿을 구석이 있으니 기어나간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춥잖아.
걔가 애니?
애지.
형 노릇 집어치워. 나 다 알고 있어.
누나 동생 있는 곳이나 알아보는 게 어때.
다 안다고.
뭘 그렇게 다 알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땐 그냥 널 바꾸는 게 편할 걸.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냐.
누나가 고개를 홱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가 빨간 목도리가 출렁거렸고, 그것이 마치 혈관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게 됐을 때 나는 무작정 무열의 자리로 갔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다만 거짓말처럼 책상에 엎드려 있는 무열이 보였다. 나는 무열의 뒷덜미를 잡고 밖으로 나갔다. 무열은 잠결에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무열을 데리고 무작정 학교에서 가장 외진 곳으로 향했다. 건물을 나와 운동장을 건너 서향의 소각장으로. 소각장 철문이 닫히기 무섭게 무열의 얼굴을 주먹으로 두 번 때렸다. 무열은 볼을 슥 만지더니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돌았냐.
너 그동안 어디 있었어.
그냥 여기저기.
전화는 왜 안 받아.
묵묵부답.
대답하라고. 씨발. 내 주먹이 무열의 턱을 스쳤다. 이제 무열은 묵묵히 맞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소각장의 쓰레기 더미 위에 함께 넘어져 드잡이를 했다. 말이 좋아 드잡이지 거의 내가 얻어터지는 정도에 그쳤으나 나 역시도 덩치가 작은 편은 아니라, 그럭저럭 반격은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뒤엉켜 싸웠다.
그날 소각장에서의 소동은 모두에게 생중계되고 있었다. 나는 학교 건물이 소각장의 담벼락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이유로 모두의 조롱거리가 됐다. 신체적으로나 교실의 계층(?)상으로도 어울릴 이유가 전혀 없던 우리가 저지른 일련의 사건들은 삽시간에 전교로 퍼져나갔다. 무열은 500미터 거리에 위치한 상업고등학교에서 폭력 사건에 연루돼 스무 살의 나이까지 고등학생으로 남게 된 여성과의 연애를 선택해, 소문을 더 큰 소문으로 덮는 데 성공했다. 학교에는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무열을 짝사랑해 발생한 일이라는 소문이 정설처럼 떠돌았다.
그리고 웃긴 일이 생겨버렸다. 학교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오락실에 간 나. 여고생이 나오는 격투 게임을 즐기다,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 내 뒤에 격투에 능할 것 같은 느낌의 다부진 여고생이 서 있었다.
만원만 줘볼래.
그 여자였다. 무열과 만난다는 그 여자. 여자는 키가 꽤 커서 오락실 의자에 앉은 나를 내다보고 있었고 배지터처럼 눈이 미간으로 올라붙어 정말, 만랩처럼 보였다.
없는데.
여자가 반쯤 그러쥔 주먹으로 내 뺨을 때렸다. 목이 꺾일 정도로 센 힘이었다.
너 걔 맞지. 그 호모 새끼.
언제 봤다고 반말인지.
또 한 대, 뺨이 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웃겼다. 별로 힘을 주지 않고도 너무 정확한 타격을 입히는군. 소문이 허명은 아니었다. 너무 웃겨서 반격의 의사조차 생기지 않고, 실은 반격조차 소용이 없어 보였고, 그래서 계속 웃으며 맞았다. 실컷 얻어터지다보니 깨달음에 도달했다. 맞다. 이 여자, 스무 살이니까 반말쯤은 해도 되지. 무열이가 저 여자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고 했나. 나는 그날 이후 내가 피하고 싶은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크게 웃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의 일화는 귀여운 애교에 불과했다. 오줌과 정액 범벅인 교과서를 책상 서랍에서 발견했을 때도, 누군가 내 실내화를 변기에 버려놨을 때도, 누군가 가슴팍에 침을 뱉고 갔을 때에도 나는 그저 웃었다. 뭐야 내 이름표에 거품이 묻어 있잖아.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지킬 방법이 웃음밖에 없다는 사실이 가장 웃겼다. 누구보다도 크게 웃다보면 그 시절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웃음은 생각보다 힘이 약했다.
*
마지막으로 무열과 함께했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늦여름이었고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과연 미라 아줌마의 말처럼 때가 된 건지, 아니면 오락실의 성인 여성과 사이가 틀어졌는지 무열이 제 발로 집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에게 먼저 문자를 보내온 것은 무열이었다.
우리집으로 올래요. 형.
형, 이라는 글자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오래된 무열의 방에서는 눅진한 냄새가 풍겼다. 방 안의 벽지에는 온통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그것은 망하기 전 우리집 바닥에 깔려 있던 양탄자처럼 기하학적인 무늬였다. 우리는 그 기하학적인 폐허 속에 함께 있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벽에 나란히 등을 기대고 앉았다. 혹시나 긴장한 기색이 들킬까 싶어 숨을 고르게 쉬기 위해 노력하며 무열을 슬쩍 바라보았다. 무열이 호흡 할 때마다 목젖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보였다. 그 역시 긴장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차가운 벽을 타고 서로의 심장소리가 전해지는 것처럼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입을 맞추었다. 헐거운 창틈으로 습한 공기가 새어들어왔다. 이따금 개 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 않고 계속 키스를 했다. 함께 옷을 벗었다. 습도가 높아 숨을 쉬기 힘들었다. 몸이 닿을 때마다 매트리스에서 끈적끈적한 물이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무열의 얼굴에서 떨어진 땀이 내 눈으로 떨어졌다.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우리는 동시에 몸을 움직였고, 사정했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짠맛이 입에 감돌았다. 우리의 몸 위에 온통 끈적끈적한 것들이 고여 있었다. 침과 가래와 다를 바 없는 끈끈한 체액들. 괜히 온몸에서 썩는 내가 진동하는 거 같았다. 우리 둘이 함께 커다란 쓰레기통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이런 방식으로 고여 있다 썩어 없어질 것인가.
그것으로 다 된 것인가.
쓰레기통에서 하나가 된 채로 그렇게? 그렇게.
형 울어요?
무열이 내게 물었다. 그가 나의 젖은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대책 없이 멍청하게 생긴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갑자기 무열이 내 몸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갰다. 내 온몸으로 무열의 무게가 그대로 전해졌다. 무열이 손을 뻗어 내 목을 감싸쥐었다. 나도 무열의 목에 손을 감았다. 손이 끈끈해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 같아 더 세게 목을 잡았다. 무열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의 목도 점점 더 조여 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무열의 얇고 긴 목이 끊어질지도 몰라. 그럼 모든 게 편해지겠지. 곧 무열의 눈이 쏟아질 것처럼 빨개졌다.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는데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침이 흐르는 그의 입이 마치 웃는 나의 얼굴 같았다. 잡았던 손을 놓았다. 우리는 한동안 나란히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고, 그길로 무열의 집을 떠났다.
그리고 해를 넘기지 못하고 자퇴했다.
*
학교를 떠나고 난 후 아주 많은 것들이 바뀌어버렸다. 세상은 그대로였는데 다른 무엇도 아닌 내가 완벽히 달라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나는 외줄에서 떨어진 것처럼 완벽히 균형을 잃었다. 길을 걷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고, 텔레비전에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웃음이 터져나왔다. 타인의 눈물에 둔해지고 나의 감정에 충실해졌다. 남이 한 말을 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시도 때도 없이 끓어 넘치는 감정 때문에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졌다. 집에 앉아 웃긴 시트콤이나 만화책만 봤다.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 것 같으면 단것을 먹었다. 십 년 동안 모아놨던 세뱃돈이 모두 과자값이 되었다. 몸이 불어 구석구석에 튼살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릎이 아팠다. 두 번에 걸친 자살 시도 끝에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다. 눈썹까지 덮는 커다란 후드가 달린 후드티에 마스크를 끼고 병원을 다녔다. 일주일에 두 번씩 상담 치료를 받았고, 매일 약을 복용했다. 돈이 많이 들었다. 어쩌면 큰돈이 아닐 수도 있으나, 그때의 우리 가족에게는 충분히 버거웠다. 나는 하루하루 쌓아올리고 또 무너졌다.
대입 검정고시를 합격하는 것은 쉬웠으나, 대학에 들어가는 건 또다른 문제였다. 재수학원도, 대학 등록금도 모두 돈 잔치였다. 무슨 힘이 있어서, 무슨 이유 때문에 그곳을 떠나게 된 것인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내가,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고 했다.
나 살아야겠어. 살려줘. 제발.
이곳이 아닌 곳으로. 더 먼 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그 시절 다른 무엇보다도 눈물이 쉬웠던 나였으니,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서울에 있는 기숙학원에 들어가며, 나는 얼려진 채로 유통기간이 한참 지나버린 단백질 파우더 네 통을 들고 갔다. 싸이월드와 네이트온을 탈퇴했고,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바뀐 번호는 부모님에게만 알렸다. 냉동실에서 오래 묵어 군내가 나는 단백질 파우더를 밥 대신 퍼먹으며 나는 나보다 나이가 두세 살 쯤 많은 재수생들과 함께 침묵 속에서 하루를 버텼다. 좀체 오르지 않는 성적 때문에 무릎이 꺾이는 기분이 들 때면 호기롭게 집을 떠났다가도 결국에는 다시 같은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 겨울의 무열에 대해 생각했다.
일 년에 거친 분투 끝에 나는 서울에 있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대학에 붙었다. 20킬로그램이 넘게 쪘던 몸무게도 얼추 빠졌으나 몸 구석구석에 나이테처럼 튼살이 남아버렸다.
대학에 합격한 뒤부턴 모든 것들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아버지의 부채를 엄마에게 몰아준 뒤, 아버지의 명의로 사들인 아파트가 기적적으로 우리 가족을 구원해주었다. 재개발이 정해졌고, 고급 브랜드의 시공사가 선정되었다. 미라 아줌마는 우리와 함께 살았던 임대 아파트 단지를 떠나 시 외곽으로 이사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둘은 착실히 늙어갔다. 단백질 파우더를 밥 대신 장복해도 엄마의 뱃살은 줄지 않고 더욱 두터워졌다.
*
공무원이랑 결혼했어야 했어.
엄마는 미라 아줌마의 일생에 질곡이 생길 때마다 염불처럼 그 말을 되뇌었다. 마치 자신의 선택은 언제나 옳기라도 했던 것처럼.
엄마는 암에 걸리기 전까지 보험회사 영업 사원으로 일했으며, 이십여 년의 시간 동안 두어 번 우수 사원으로 선정돼 동남아로 포상 휴가를 떠났다. 아빠는 다니던 은행에서 평사원으로 정년을 마친 후, 대학 후배가 차린 작은 무역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미라 아줌마는 다종 다양한 브랜드로 종목을 바꿔가며 네트워크 마케팅 사업을 벌였고, 종목이 바뀔 때마다 엄마에게 돈을 빌렸다. 무열이 전문대 자동차 정비과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자 아줌마와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걔가 자존심 하나는 끝내주는 애였는데.
엄마로서는 그런 동정의 방식으로 가장 가까웠던 존재의 배신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으나,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어떤 기억은 망각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나는 매일 앞으로 걸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듯 십대의 모든 것들과 멀어진 채, 완벽히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남들이 하는 대로 학교를 다녔고, 졸업을 한 후엔 고만고만한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었다. 하루를 살면 하루를 잊었다. 하루를 잊기 위해 매일 웃었다. 계속 웃을 수밖에 없는 병에 걸린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서 웃었다. 그때그때 내 인생에 필요한 것들을 취했고, 필요 없는 것들을 내다버렸다. 누군가 나를 쫓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쁘게 살다가 가끔은 누군가와 함께 옷을 벗고 누웠다. 십대가 내게 남긴 튼살 자국이 신경 쓰일 때면 그냥 불을 껐다. 아무도 그 자국을 볼 수 없게. 그리고 어느 순간 다시 불을 켤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다시 불이 켜졌을 땐 오로지,
나 자신만이 남아 있었다.
실은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나라는 감정의 쓰레기통을 껴안은 채로.
그렇게.
*
형이 자살 시도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엄마로부터였어요. 글라라 아줌마가 찾아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수소문을 해서 엄마를 찾아와서는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서 말씀하셨대요.
도저히 말할 데가 없어서, 너를 찾았다 미라야.
멀쩡히 대학도 붙어놓고, 뭐가 부족해서.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고 그런다니. 걔는.
좋은 대학도 가지 못했고, 형과는 완벽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저이지만,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하면, 자기중심적인, 착각이겠죠? 그때 형한테 연락을 해봐야겠다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실은 얼굴을 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내내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일들을 모으면, 아마도 제 인생이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누나를 봤던 날, 작년에 저는 서울에 있었어요. 부끄럽지만 그때 처음으로 서울에 가본 거였어요. 서울은 도시 전체가 시내 같은 곳이더라고요. 형이 왜 그렇게 일찍 그곳에 가버렸는지 알 것도 같았어요. 어딜 가나 사람이 많고 차가 막히고 숨 막히게 바빠서, 어디든 숨기가 좋은 곳이더라고요. 서울은. 그 시절의 우리에게도 그런 곳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너무나 사람이 많아서 그 누구도 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곳이요.
아무튼 한창 입덧중인 누나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우리의 맞은편에 남자 둘이 앉아 있었어요. 머리를 노랗게 탈색한 남자가 옆 자리 남자의 손을 붙잡고 있었어요. 그때 누나가 입을 틀어막으며 헛구역질을 시작했어요. 입덧인가 싶어서 누나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는데, 구역질을 멈춘 누나가 제게 조용히 말했어요.
역하다.
그게 제게 남은 누나의 마지막 말이에요.
누나의 장례식장에서 조카아이를 처음 봤어요. 먹고사느라 바빠서 서울에 올라갈 틈이 없었거든요.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많이 커버려서 남이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서 아장아장 잘 걷더라고요. 쿵 하고 넘어졌다가도 흰 종이가 씌워진 나무 상을 부여잡고 금세 일어서는데 성격만큼은 확실히 누나를 빼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웃겼어요. 아이 얼굴은 누나보다는 매형을 훨씬 더 닮았거든요. 도통 젖을 떼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했던 말을 들었는데 이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사십구재가 끝나고, 매형이 아이를 안고 가는데 어쩌면 이제 다시는 그 아이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도 그렇게 되겠죠.
가족이 뭘까 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차가워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형을 생각해도 그래요. 자꾸 마음이 차가워졌다, 또 뜨거워지곤 해요. 이런 말을 왜 형한테, 마지막으로 본 지 십 년도 넘은 사람에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마음입니다.
나에게 형은 무엇일까요. 한때는 형이 엄마 같기도, 아빠 같기도, 아니면 정말 친형 같기도 했어요. 언젠가 함께 살을 대고 누워 있을 때면 형이 내가 알지 못하는 나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긴 쪽지를 보내는 것은 누나가 죽었다는 말을 형에게 전하고 싶어서.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누나가 죽었어요. 저는 형을 생각하고 있어요.
쪽지를 받은 것은 공교롭게도 사원증을 반납하고 온 직후였다. 지난 오 년 동안 살이 15킬로그램이나 쪘으며,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학자금 대출금을 모두 상환했다. 책상에 놓아둔 전파 선인장이며, 손목 받침대 같은 사소한 것들을 챙겨넣었을 뿐인데 박스 하나가 꽉 찼다. 양손으로 한 번에 들기도 힘들 정도의 박스를 우편 송환실로 나르며, 나는 지난 오 년의 무게를 절감했다. 착불로, 박스를 부쳤다. 승진을 한 후, 곧바로 사직서를 냈다. 건강이 손쓸 도리 없이 나빠졌기 때문이었다. 겨드랑이의 작은 발진에서 시작된 염증은 삼 년여의 시간 동안 온몸 구석구석 퍼져나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항생제를 바꿔가며 치료를 시도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엄마가 암에 걸렸을 때 사놓은 대용량 비타민과 프로폴리스, 효모 추출 성분, 상황버섯과, 밀크시슬과 같은 면역에 좋다는 세상의 거의 모든 슈퍼 푸드들을 먹으며, 연일 이어지는 야근과 작업을 쳐냈다. 매일 매일 팽팽한 줄 위에 올라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하루를 버텼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게 끊어져버렸다.
그날 무열의 쪽지가 왔다. 아름 누나가 죽었다고 했다. 그러니까 미라 아줌마의 첫딸이 죽었다. 엄마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라 아줌마와 우리 엄마는 고등학교 때부터 가장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미라 아줌마가 공무원과 소규모 건설업체 사장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을 때 엄마는 인생에 안정성만큼 중요한 가치는 없다며, 공무원 오를 선택할 것을 권했다. 허나 이십대의 미라 아줌마는 모험을 아는 여자였고, 공무원 오씨보다 키가 10센티미터는 크고 눈썹이 짙으며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진 건설업체의 사장 김을 선택해 이듬해 남편을 꼭 닮은 딸을 낳았다. 엄마는 자신의 인생철학에 딱 맞는 은행원 박과 결혼해 삼 년 뒤 여름, 나를 낳았다. 미자 아줌마도 지지 않고 이듬해 2월, 둘째 아들 무열을 낳아 평범하고 안온한 가정을 완성했다, 고 믿었다.
육아와 가사에 시달리느라 소원했던 엄마와 미라 아줌마가 다시 가까워지게 된 것은 1999년 지방의 한 임대 아파트 단지였다. 미라 아줌마의 남편 김씨는 심혈관 질환으로 돌연사 했다고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으나 자존심이 강한 그가 벌려놓은 사업을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남편의 죽음 이후, 고급 빌라에 살던 미라 아줌마의 가족이 서민형 임대 주택 단지로 흘러들게 되었다. 우리집의 경우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금융업에 종사하는 부친이 십여 년간 모아놓은 적금과 아파트를 저당 잡아 대출받은 돈을 (가장 안정적이고도 공격적인 투자처라 믿었던) 대기업 주식에 ‘몰빵’한 덕분에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었고, 구에서 가장 오래된 임대 아파트에 당도하게 되었다. 고급품에 대한 수요가 남달랐던 부친이 마구잡이로 사들였던 야마하 오디오 시스템과 이탈리아 산 이불장, 스웨덴산 원목 버티칼과 50인치 대우 텔레비전, 위성 티브이 수신기, 증권 거래용 PDA 단말기 같은 것들을 모두 버린 채로.
미라네 아저씨가 ‘심혈관 질환’으로 급사한 뒤, 엄마는 미라 아줌마를 전도하는데 성공했다. 둘은 아파트 단지 인근에 위치한 성당에서 각각 보험 설계사 글라라 씨와 다이어트 집 아녜스 씨로 통했다. 두 여성이 암 보험과 대두 단백질 추출 체중 관리 식품을 파는 동안, 두 가정의 식솔 셋이 함께 지내게 된 것은 합리적이고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주로 아름 누나와 무열이 우리집에 왔다. 그나마 우리집이 방이 하나 더 많기도 했거니와 경제 발전기의 흔적인, 라이센스판 디즈니 전집이며 미국산 브루마블, 레고 세트 같은 놀잇거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름과 나, 무열은 마왕성이나 파라다이스 콘도 같은 것들을 짓고, 부수고, 다시 짓고 부수고를 반복했고, 그조차 지겨워지면 셋 중 가장 어렸던 무열을 인형처럼 꾸미고, 강아지처럼 부리며 함께 자랐다.
무열은 (빠른 년생이라는 이유로) 나와 같은 해에 정규 교육과정을 시작했으나 출생년이 늦다는 이유로 나에게 꼬박꼬박 형이라고 불렀으며, 더러는 존댓말까지 썼다. 초등학교 때 우리는 같은 학교에 다녔으나 한 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은 없었다. 방과후 수업에 열성적이었던 내가 바이올린이나 미술 같은 것을 배우고 올 때면 언제나 무열이 운동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성장 속도도 성적도 운동 실력도 고만고만했으나, 모든 분야에서 내가 조금씩 더 낫기는 했다. 그 시절 나는 무열을 언제나 나를 뒤따르는 존재로 여겼다. 언젠가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지능검사에서 무열이 나보다 높은 수치를 기록해 몹시 자존심이 상했던 기억이 있다. 저 애보다 내가, 더 멍청하단 말이야? 내가 기억하기 전부터 우리는 자연스레 팔짱을 끼고 걸었다. 학교를 갈 때도, 복도에서 마주쳐 인사를 나눌 때에도, 집에 갈 때에도. 방과후에는 같은 보습학원을 다니고 서로의 학습지를 대신 풀어주었으며 같은 책을 읽으며, 처음이라고 부를 만한 거의 모든 것들을 함께 했다.
무열은 중학교에 진학하고 나서야 비로소 형이라는 호칭대신 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는 더 이상 나의 어깨에 손을 두르거나 팔짱을 끼지 않았지만 둘이 함께 있을 때는 습관처럼 곧잘 존댓말을 썼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내 다리를 베고 눕거나, 손을 잡았다.
청소년이 된 무열은 방이 두 개뿐인 (그나마도 누렇게 바랜 플라스틱 파티션으로 구분된 것에 불과한) 집에 살았다. 그는 누나와 엄마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대신 내 방에 와 누워 있는 것을 더 선호했다. 우리는 삼십 년 된 아파트의 외풍을 견디기 위해 같은 침대에 누워 서로를 안고 자곤 했다. 서로의 가슴에 팔을 올려놓고 자던 어느 추운 겨울날 밤, 우리는 이차성징이 가져다준 변화(혹은 저주)를 서로를 통해 확인했다. 몇 번의 밤을 통해 나는 오로지 먹고 싸는데 그친다고 믿었던 나의 신체가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것은 바람이 불고 해가 뜨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유행에 따라 구입했다 애물단지가 되어버린 세계문학 전집을 처음 꺼내 든 것은 무열이었다. 내 경우는 주로 과학 만화나 읽었던 반면 무열은 문자 그 자체를 좋아했다. 언제나 나보다 더 모자란 줄로만 알았던 무열이 내가 알지 못하는 작품과 내가 하지 못했던 말들을 하기 시작하는 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경쟁적으로, 지지 않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들어가 완전한 부재 상태가 되어버린 아름 누나의 자리에 플로베르와 에밀리 브론테, 괴테가 끼어들게 되었고, 그 시절 우리는 우리 둘이 건설한 고전과 문자의 시절이 계속 될 줄로만 알았다.
그것이 찰나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나는 후에야 알게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한 우리는 서로의 본질을 가리는 것이 유일한 생존 방법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가 살았던 아파트 단지는 구내 가장 오래된 임대 단지였으며, 모두가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우리 아파트 단지의 이름이 종종 멸칭으로 사용되었다. 멸칭의 세계는 넓고도 오묘하여 가난이나 장애, 질병, 여성을 의미하는 단어들이 주로 사용되었고, 호모나 게이 같은 단어 역시 그 영역에 속해 있었다. 무열과 나는 이중, 삼중의 멸칭을 가질만한 조건을 갖춘 죄로 스스로를 완벽히 가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그리고, 태초에 쓰레기통이 있었다.
매일 남학생들이 배출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를 감당하기 위해 각 학급에는 성인 남성 하나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플라스틱 쓰레기통이 배치되어 있었다. 평균적으로 하루에 한 명씩 그 속에 들어가 젖은 쓰레기들과 가래침과 함께 버무려지고 굴려졌다. 그곳에서 나는 인간이 파김치가 되어가는 광경을 매일 목도했다. 매주, 매일, 매 시간 누군가는 바지가 벗겨졌고, 이가 부러졌고, 무릎 연골이 찢어졌고,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푼돈을 빼앗겼고, 실내화에 오물이 담겼으며, 가방과 함께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그리고 그 모든 다채로운 폭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됐을 때도 당연히, 있었다. 우리가 고등학교에 진학한지 한 학기 만에 같은 학년의 누군가가 자살했다. 가해자는 멀쩡히 살아남아 외국으로 도피 유학을 갔고, 보란 듯이 미국 대학의 학위를 사와 부계의 가업을 물려받았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을 지켜줄만한 어떤 것들도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계의 일부로서, 언제든지 먹이가 될 수 있다는 강렬한 본능을 바탕으로 돌다리를 건너는 심정으로 그 시절을 버텼다. 그 시절 나는 자주 쓰레기통에 들어가 뒹구는 꿈을 꿨다. 그것은 악몽이 아니라 예민한 현실감각이었고, 또 언제든 펼쳐질 수 있는 근미래의 풍경이기도 했다.
무열이 먹잇감이 아닌 포식자의 길을 선택한 것은 공교롭게도 미라 아줌마의 파산과 같은 시기였다.
미자 아줌마의 다이어트 식품 사업은 처음 얼마 동안은 순조로웠다. 집이 망해도 살을 빼려는 사람은 언제든지 있었고, 경기가 나빠지자 오히려 보란 듯이 살찐 사람이 더 늘어나기 시작했으니까. 아파트 단지를 돌아다니며 다이어트용 단백질 파우더 시연회를 열던 미라 아줌마는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파트 상가에 자신의 이름을 딴 작은 가게를 차리게 되었다. ‘미라 체형미’는 명실상부 동네 아줌마들의 아지트이자 곗돈이 오가는 금융거래의 장이었고, 한 가정의 희망이 깃들어 있는 공간이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폭풍처럼 불어닥치던 다이어트 식품의 열풍은, 다른 모든 열풍들처럼 순식간에 가라앉아버렸다. 유통기한이 지난 단백질 파우더들이 굳은 채 버려지기 시작했다. 미라 아줌마가 성당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유통기한이 임박한 분말을 인수해 김치냉장고와 냉동실에 골고루 부려놓았다. 살을 빼겠다며 때마다 밥 대신 분말을 물에 타먹었으나 이상하게도 엄마의 몸은 점점 불어만 갔다. 하루종일 밖을 돌며 보험 영업을 하는데도 그랬다. 그즈음부터 무열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수험생이 되어 부쩍 신경질을 부리는 아름 누나를 피해 주로 우리집에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흘려보냈던 그가 점점 밖으로 나돌았다. 더이상 나를 형이라 부르지 않았고, 아예 없는 취급을 하기 시작 했다. 언젠가는 아파트 뒤편 화단에서 담배를 피우다 나와 마주쳤는데 곁눈질을 쓱 하더니 침이나 뱉고 말기에 한참을 웃었다.
뭐가 웃기냐.
니가.
옷이나 손가락에서 담배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는 게 너무 청소년드라마 같잖아. 또 어느 날은 손바닥만 한 택트를 타고 돌아다니길래,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아는 형이 훔친 물건이라고 했다. 아는 형, 번호판이 없는 택트. 비행조차도 책에 나온 것처럼 정석적으로 하는 무열이 귀여웠다. 무열은 그후로도 미라 아줌마의 명의로 몰래 핸드폰을 개통해 사용하다 들통이 났으며, 미라 체형미의 계산대에서 돈을 훔치다 걸려 짧게 가출(을 빙자한 피신)을 단행했다.
그 무렵 무열은 종종 술을 잔뜩 먹은 채 새벽에 우리집에 기어들어와 내 잠을 깨운 뒤, 코를 골며 자는 일이 잦았다. 나는 술에 취해 뜨거워졌다 점점 더 차가워지는 무열의 몸을 안고 잤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뜨거웠다가 차가워지는 몸을 안고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가지는 않았다. 아름 누나가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게 된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영리하고 재바른 구석이 있었던 누나였다. 엄마는 전화를 받고 미라 아줌마와 함께 얼싸안고 울었다. 축제가 벌어졌다. 그날 무열은 집을 나가 다시 들어오지 않았다. 미라 아줌마는 내버려두라고 했다. 내버려두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다. 미라 아줌마는 이제는 창고가 되어버린 사무실에 쌓여만 가는 재고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단한 것 같았다. 그러나 다 기울어버린 사업체가 제대로 굴러갈리 없었고 결국 엄마가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을 해약해 미라 아줌마에게 아름 누나의 등록금과 기숙사비를 빌려주었다.
무열은 겨울방학 내내 돌아오지 않았다. 기록적으로 추운 겨울이었다. 수시로 무열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받지 않았다. 차라리 핸드폰을 꺼놓기라도 하지. 나는 무열이 있을 만한 곳들을 며칠이고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다. 습관처럼 아파트 단지 근처를 한참을 배회하다 아름 누나와 마주쳤다. 누나는 자신의 몸에 비해 지나치게 큰 백팩에 빨간 목도리를 메고 있었다. 근처 공부방에서 중학생들을 가르치며 등록금을 벌고 있다고 했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무열에게 별 연락이 없냐고 묻자 고개를 저었다.
걔 좀 그만 찾아. 믿을 구석이 있으니 기어나간 거겠지.
아무리 그래도. 춥잖아.
걔가 애니?
애지.
형 노릇 집어치워. 나 다 알고 있어.
누나 동생 있는 곳이나 알아보는 게 어때.
다 안다고.
뭘 그렇게 다 알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땐 그냥 널 바꾸는 게 편할 걸.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게 아냐.
누나가 고개를 홱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가 빨간 목도리가 출렁거렸고, 그것이 마치 혈관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게 됐을 때 나는 무작정 무열의 자리로 갔다.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다만 거짓말처럼 책상에 엎드려 있는 무열이 보였다. 나는 무열의 뒷덜미를 잡고 밖으로 나갔다. 무열은 잠결에 순순히 나를 따라왔다.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무열을 데리고 무작정 학교에서 가장 외진 곳으로 향했다. 건물을 나와 운동장을 건너 서향의 소각장으로. 소각장 철문이 닫히기 무섭게 무열의 얼굴을 주먹으로 두 번 때렸다. 무열은 볼을 슥 만지더니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돌았냐.
너 그동안 어디 있었어.
그냥 여기저기.
전화는 왜 안 받아.
묵묵부답.
대답하라고. 씨발. 내 주먹이 무열의 턱을 스쳤다. 이제 무열은 묵묵히 맞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소각장의 쓰레기 더미 위에 함께 넘어져 드잡이를 했다. 말이 좋아 드잡이지 거의 내가 얻어터지는 정도에 그쳤으나 나 역시도 덩치가 작은 편은 아니라, 그럭저럭 반격은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뒤엉켜 싸웠다.
그날 소각장에서의 소동은 모두에게 생중계되고 있었다. 나는 학교 건물이 소각장의 담벼락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이유로 모두의 조롱거리가 됐다. 신체적으로나 교실의 계층(?)상으로도 어울릴 이유가 전혀 없던 우리가 저지른 일련의 사건들은 삽시간에 전교로 퍼져나갔다. 무열은 500미터 거리에 위치한 상업고등학교에서 폭력 사건에 연루돼 스무 살의 나이까지 고등학생으로 남게 된 여성과의 연애를 선택해, 소문을 더 큰 소문으로 덮는 데 성공했다. 학교에는 이 모든 것들이 내가 무열을 짝사랑해 발생한 일이라는 소문이 정설처럼 떠돌았다.
그리고 웃긴 일이 생겨버렸다. 학교가 끝나고 여느 때처럼 오락실에 간 나. 여고생이 나오는 격투 게임을 즐기다, 고개를 돌려보니 정말 내 뒤에 격투에 능할 것 같은 느낌의 다부진 여고생이 서 있었다.
만원만 줘볼래.
그 여자였다. 무열과 만난다는 그 여자. 여자는 키가 꽤 커서 오락실 의자에 앉은 나를 내다보고 있었고 배지터처럼 눈이 미간으로 올라붙어 정말, 만랩처럼 보였다.
없는데.
여자가 반쯤 그러쥔 주먹으로 내 뺨을 때렸다. 목이 꺾일 정도로 센 힘이었다.
너 걔 맞지. 그 호모 새끼.
언제 봤다고 반말인지.
또 한 대, 뺨이 부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웃겼다. 별로 힘을 주지 않고도 너무 정확한 타격을 입히는군. 소문이 허명은 아니었다. 너무 웃겨서 반격의 의사조차 생기지 않고, 실은 반격조차 소용이 없어 보였고, 그래서 계속 웃으며 맞았다. 실컷 얻어터지다보니 깨달음에 도달했다. 맞다. 이 여자, 스무 살이니까 반말쯤은 해도 되지. 무열이가 저 여자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다고 했나. 나는 그날 이후 내가 피하고 싶은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크게 웃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날의 일화는 귀여운 애교에 불과했다. 오줌과 정액 범벅인 교과서를 책상 서랍에서 발견했을 때도, 누군가 내 실내화를 변기에 버려놨을 때도, 누군가 가슴팍에 침을 뱉고 갔을 때에도 나는 그저 웃었다. 뭐야 내 이름표에 거품이 묻어 있잖아.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지킬 방법이 웃음밖에 없다는 사실이 가장 웃겼다. 누구보다도 크게 웃다보면 그 시절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틸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웃음은 생각보다 힘이 약했다.
마지막으로 무열과 함께했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늦여름이었고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과연 미라 아줌마의 말처럼 때가 된 건지, 아니면 오락실의 성인 여성과 사이가 틀어졌는지 무열이 제 발로 집에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에게 먼저 문자를 보내온 것은 무열이었다.
우리집으로 올래요. 형.
형, 이라는 글자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오래된 무열의 방에서는 눅진한 냄새가 풍겼다. 방 안의 벽지에는 온통 곰팡이가 피어 있었고 그것은 망하기 전 우리집 바닥에 깔려 있던 양탄자처럼 기하학적인 무늬였다. 우리는 그 기하학적인 폐허 속에 함께 있었다. 축축하고 차가운 벽에 나란히 등을 기대고 앉았다. 혹시나 긴장한 기색이 들킬까 싶어 숨을 고르게 쉬기 위해 노력하며 무열을 슬쩍 바라보았다. 무열이 호흡 할 때마다 목젖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보였다. 그 역시 긴장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차가운 벽을 타고 서로의 심장소리가 전해지는 것처럼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입을 맞추었다. 헐거운 창틈으로 습한 공기가 새어들어왔다. 이따금 개 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 않고 계속 키스를 했다. 함께 옷을 벗었다. 습도가 높아 숨을 쉬기 힘들었다. 몸이 닿을 때마다 매트리스에서 끈적끈적한 물이 배어나오는 것 같았다. 무열의 얼굴에서 떨어진 땀이 내 눈으로 떨어졌다. 한쪽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우리는 동시에 몸을 움직였고, 사정했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짠맛이 입에 감돌았다. 우리의 몸 위에 온통 끈적끈적한 것들이 고여 있었다. 침과 가래와 다를 바 없는 끈끈한 체액들. 괜히 온몸에서 썩는 내가 진동하는 거 같았다. 우리 둘이 함께 커다란 쓰레기통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그런, 기분.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이런 방식으로 고여 있다 썩어 없어질 것인가.
그것으로 다 된 것인가.
쓰레기통에서 하나가 된 채로 그렇게? 그렇게.
형 울어요?
무열이 내게 물었다. 그가 나의 젖은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대책 없이 멍청하게 생긴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갑자기 무열이 내 몸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갰다. 내 온몸으로 무열의 무게가 그대로 전해졌다. 무열이 손을 뻗어 내 목을 감싸쥐었다. 나도 무열의 목에 손을 감았다. 손이 끈끈해 자꾸만 미끄러지는 것 같아 더 세게 목을 잡았다. 무열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의 목도 점점 더 조여 오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무열의 얇고 긴 목이 끊어질지도 몰라. 그럼 모든 게 편해지겠지. 곧 무열의 눈이 쏟아질 것처럼 빨개졌다. 얼굴은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는데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침이 흐르는 그의 입이 마치 웃는 나의 얼굴 같았다. 잡았던 손을 놓았다. 우리는 한동안 나란히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고, 그길로 무열의 집을 떠났다.
그리고 해를 넘기지 못하고 자퇴했다.
학교를 떠나고 난 후 아주 많은 것들이 바뀌어버렸다. 세상은 그대로였는데 다른 무엇도 아닌 내가 완벽히 달라졌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나는 외줄에서 떨어진 것처럼 완벽히 균형을 잃었다. 길을 걷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고, 텔레비전에서 슬픈 장면이 나오면 웃음이 터져나왔다. 타인의 눈물에 둔해지고 나의 감정에 충실해졌다. 남이 한 말을 듣지 못할 때가 많았다. 시도 때도 없이 끓어 넘치는 감정 때문에 밖에 나가기가 두려워졌다. 집에 앉아 웃긴 시트콤이나 만화책만 봤다.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 것 같으면 단것을 먹었다. 십 년 동안 모아놨던 세뱃돈이 모두 과자값이 되었다. 몸이 불어 구석구석에 튼살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릎이 아팠다. 두 번에 걸친 자살 시도 끝에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다. 눈썹까지 덮는 커다란 후드가 달린 후드티에 마스크를 끼고 병원을 다녔다. 일주일에 두 번씩 상담 치료를 받았고, 매일 약을 복용했다. 돈이 많이 들었다. 어쩌면 큰돈이 아닐 수도 있으나, 그때의 우리 가족에게는 충분히 버거웠다. 나는 하루하루 쌓아올리고 또 무너졌다.
대입 검정고시를 합격하는 것은 쉬웠으나, 대학에 들어가는 건 또다른 문제였다. 재수학원도, 대학 등록금도 모두 돈 잔치였다. 무슨 힘이 있어서, 무슨 이유 때문에 그곳을 떠나게 된 것인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내가,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고 했다.
나 살아야겠어. 살려줘. 제발.
이곳이 아닌 곳으로. 더 먼 곳으로 가야만 한다고.
그 시절 다른 무엇보다도 눈물이 쉬웠던 나였으니,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서울에 있는 기숙학원에 들어가며, 나는 얼려진 채로 유통기간이 한참 지나버린 단백질 파우더 네 통을 들고 갔다. 싸이월드와 네이트온을 탈퇴했고,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바뀐 번호는 부모님에게만 알렸다. 냉동실에서 오래 묵어 군내가 나는 단백질 파우더를 밥 대신 퍼먹으며 나는 나보다 나이가 두세 살 쯤 많은 재수생들과 함께 침묵 속에서 하루를 버텼다. 좀체 오르지 않는 성적 때문에 무릎이 꺾이는 기분이 들 때면 호기롭게 집을 떠났다가도 결국에는 다시 같은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 겨울의 무열에 대해 생각했다.
일 년에 거친 분투 끝에 나는 서울에 있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대학에 붙었다. 20킬로그램이 넘게 쪘던 몸무게도 얼추 빠졌으나 몸 구석구석에 나이테처럼 튼살이 남아버렸다.
대학에 합격한 뒤부턴 모든 것들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아버지의 부채를 엄마에게 몰아준 뒤, 아버지의 명의로 사들인 아파트가 기적적으로 우리 가족을 구원해주었다. 재개발이 정해졌고, 고급 브랜드의 시공사가 선정되었다. 미라 아줌마는 우리와 함께 살았던 임대 아파트 단지를 떠나 시 외곽으로 이사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둘은 착실히 늙어갔다. 단백질 파우더를 밥 대신 장복해도 엄마의 뱃살은 줄지 않고 더욱 두터워졌다.
공무원이랑 결혼했어야 했어.
엄마는 미라 아줌마의 일생에 질곡이 생길 때마다 염불처럼 그 말을 되뇌었다. 마치 자신의 선택은 언제나 옳기라도 했던 것처럼.
엄마는 암에 걸리기 전까지 보험회사 영업 사원으로 일했으며, 이십여 년의 시간 동안 두어 번 우수 사원으로 선정돼 동남아로 포상 휴가를 떠났다. 아빠는 다니던 은행에서 평사원으로 정년을 마친 후, 대학 후배가 차린 작은 무역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미라 아줌마는 다종 다양한 브랜드로 종목을 바꿔가며 네트워크 마케팅 사업을 벌였고, 종목이 바뀔 때마다 엄마에게 돈을 빌렸다. 무열이 전문대 자동차 정비과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자 아줌마와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오죽하면 그랬을까. 걔가 자존심 하나는 끝내주는 애였는데.
엄마로서는 그런 동정의 방식으로 가장 가까웠던 존재의 배신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으나, 내 경우는 조금 달랐다.
어떤 기억은 망각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다.
나는 매일 앞으로 걸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듯 십대의 모든 것들과 멀어진 채, 완벽히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남들이 하는 대로 학교를 다녔고, 졸업을 한 후엔 고만고만한 회사에 들어가 돈을 벌었다. 하루를 살면 하루를 잊었다. 하루를 잊기 위해 매일 웃었다. 계속 웃을 수밖에 없는 병에 걸린 것처럼, 안간힘을 다해서 웃었다. 그때그때 내 인생에 필요한 것들을 취했고, 필요 없는 것들을 내다버렸다. 누군가 나를 쫓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쁘게 살다가 가끔은 누군가와 함께 옷을 벗고 누웠다. 십대가 내게 남긴 튼살 자국이 신경 쓰일 때면 그냥 불을 껐다. 아무도 그 자국을 볼 수 없게. 그리고 어느 순간 다시 불을 켤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다시 불이 켜졌을 땐 오로지,
나 자신만이 남아 있었다.
실은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나라는 감정의 쓰레기통을 껴안은 채로.
그렇게.
형이 자살 시도를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엄마로부터였어요. 글라라 아줌마가 찾아왔다고 하시더라고요. 수소문을 해서 엄마를 찾아와서는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서 말씀하셨대요.
도저히 말할 데가 없어서, 너를 찾았다 미라야.
멀쩡히 대학도 붙어놓고, 뭐가 부족해서.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고 그런다니. 걔는.
좋은 대학도 가지 못했고, 형과는 완벽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저이지만, 그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하면, 자기중심적인, 착각이겠죠? 그때 형한테 연락을 해봐야겠다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실은 얼굴을 좀 보고 싶다는 생각도 내내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어요. 그러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던 일들을 모으면, 아마도 제 인생이 되겠지요.
마지막으로 누나를 봤던 날, 작년에 저는 서울에 있었어요. 부끄럽지만 그때 처음으로 서울에 가본 거였어요. 서울은 도시 전체가 시내 같은 곳이더라고요. 형이 왜 그렇게 일찍 그곳에 가버렸는지 알 것도 같았어요. 어딜 가나 사람이 많고 차가 막히고 숨 막히게 바빠서, 어디든 숨기가 좋은 곳이더라고요. 서울은. 그 시절의 우리에게도 그런 곳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요. 너무나 사람이 많아서 그 누구도 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곳이요.
아무튼 한창 입덧중인 누나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우리의 맞은편에 남자 둘이 앉아 있었어요. 머리를 노랗게 탈색한 남자가 옆 자리 남자의 손을 붙잡고 있었어요. 그때 누나가 입을 틀어막으며 헛구역질을 시작했어요. 입덧인가 싶어서 누나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는데, 구역질을 멈춘 누나가 제게 조용히 말했어요.
역하다.
그게 제게 남은 누나의 마지막 말이에요.
누나의 장례식장에서 조카아이를 처음 봤어요. 먹고사느라 바빠서 서울에 올라갈 틈이 없었거든요.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많이 커버려서 남이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서 아장아장 잘 걷더라고요. 쿵 하고 넘어졌다가도 흰 종이가 씌워진 나무 상을 부여잡고 금세 일어서는데 성격만큼은 확실히 누나를 빼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웃겼어요. 아이 얼굴은 누나보다는 매형을 훨씬 더 닮았거든요. 도통 젖을 떼지 않아서 걱정이라고 했던 말을 들었는데 이제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사십구재가 끝나고, 매형이 아이를 안고 가는데 어쩌면 이제 다시는 그 아이를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도 그렇게 되겠죠.
가족이 뭘까 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차가워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형을 생각해도 그래요. 자꾸 마음이 차가워졌다, 또 뜨거워지곤 해요. 이런 말을 왜 형한테, 마지막으로 본 지 십 년도 넘은 사람에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마음입니다.
나에게 형은 무엇일까요. 한때는 형이 엄마 같기도, 아빠 같기도, 아니면 정말 친형 같기도 했어요. 언젠가 함께 살을 대고 누워 있을 때면 형이 내가 알지 못하는 나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오늘 이렇게 긴 쪽지를 보내는 것은 누나가 죽었다는 말을 형에게 전하고 싶어서.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어요. 누나가 죽었어요. 저는 형을 생각하고 있어요.
* 소설의 제목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生れてはみたけれど〉에서 가져왔다.
※ 작가 요청에 의해 작품 내 일부 문장 및 단어를 수정하였음을 밝힙니다. (2021. 09. 13)
박상영
미국산 냉동 블루베리 애호가. 자정 무렵에 폭식을 하는 비만인.
2018/03/27
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