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뭐든 아주 간절했던 스물 멋진 연애는 없었지만 어설프고 혹독한 낭만이 있었지 자취방 보증금을 잃어버렸다는 동기생이 내 단칸방으로 기어들어왔고 한 달이 지나 그에게 방을 내주고 시가 술술 나올 것 같은 고즈넉한 방으로 이사했어
   지극히 낭만적인 선배들은 후배들의 용돈을 모아 술을 마셨고 치기 아닌 치열을 원샷으로 가르쳤지 독설가 선배가 술자리마다 주량이 필력이라는 주정 아닌 주장을 했고 이전보다 말수와 주량이 늘어갔지 시를 가까이할수록 시가 어려워졌던 나는 어떤 독설이라도 무조건 믿고 싶었어 늦은 밤 술자리가 끝나면 나는 나보다 더 비틀거렸던 골목에게 길을 내주고 주저앉곤 했지
   서른 즈음인 선배가 내 자취방을 찾아와 술상을 차려놓고 한두 잔 비우는데 그는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네 시는 사랑이 없어, 말했지 어리둥절했고 먹먹했고 부끄러웠어 멋진 연애라도 해야 할까요, 묻지 않았어 시가, 사랑이, 사랑이 있는 시가 뭔지 모르겠고 막막했고 죄책감이 생겼어 시를, 사랑을 모호한 낭만으로 치환했던 게 막연히 간절했던 게 최악 아닌 죄악 같았지





   단풍



   어스름 몰아내며 첫차가 들어왔다
   산바람 불더니 마을 어귀에 피가 돌았다
   버스를 타고 어깨를 툭툭 치면서
   까르르 웃어젖히는 여고생들처럼

   갖가지 색깔 옷 입었다 벗었다 부산했던 여자
   모처럼 마을을 떠나는 마음에 피가 돌았다
   여자는 남자를 툭툭 털어냈다
   희끗희끗한 남자 어깨에 떨어진 비듬처럼

   어스름 몰아오며 막차가 들어왔다
   종일 산바람 불더니 마을 어귀에 피가 고였다
   얼굴 불콰해진 남자들이 버스에서 툭툭 내렸다
   잠시 차창에 기댔다 저절로 흩날리는 잎사귀처럼

윤석정

시간 여행자가 있다면 그의 삶은 어떨까. 이미 온몸으로 살아냈거나 앞으로 살아내야 할 시간을 만날 수 있지만 어쩌면 그는 천형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여행이 그렇듯 여행을 마치고서야 뒤늦게 차오르는 마음이 있다. 이 마음과 만나는 일 또한 천형이다.


2018/06/26
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