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스노우볼
내가 자유롭기는 한데, 이 자유는 병원 도서관에 앉아 바니시 칠이 벗겨진 책상 위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수 있는 두어 시간의 자유뿐이다.
나는 운다. 열심히 운다. 그러다보니 공공장소에서 우는 자들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실무적인 문제에 부딪친다. 콧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환자복 주머니는 텅 비어 있다.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집게처럼 누르고 눈물 마개용으로 아무렇게나 뽑아온 병원 사보를 급히 펼쳤다. 이 판국에 글자가 눈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다.
그런데 어디서 들어본 이름 때문에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무신론자가 신에게 보내는 편지’ 모순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에세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숱하게 들어온 최현무라는 이름과 지면에 박힌 이름을 연결하는 선을 제대로 긋지 못했다. 내가 그 선을 그은 것은 이름의 주인을 만난 다음이었다.
사고는 내가 자처한 것이었다.
10년 동안 연 가게를 드디어 정리했다. 쉼 없이 달려온 터라 쉼 없이 놀기 위해, 다시 말해 시간 낭비 없이 놀기 위해 이런저런 강습을 등록했다. 어린 시절부터 손에 넣고 싶던 놀이공원 1년 자유 입장권을 끊었고 클래식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인문 아카데미 두 곳의 강좌를 등록하고 마운틴바이크를 샀다. 두려웠으니까. 자유가 두려웠으니까.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 불행했던 지난 몇 년을 복기하느라 정신이 나갈 게 뻔했다. 일로 도망쳤던 작년처럼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자전거를 타면서 쓰지 않던 근육을 무리하게 사용한 나머지 인대가 끊어졌다. 병원에 갔더니 디스크 협착도 의심된다는 진단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두 달간 꼼짝없이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다. 시술 후 아무것도 하지 말라, 무조건 가만히 있으라는 게 의사의 권고였다.
처음에는 부주의한 자신에게 화가 났고, 나중에는 못돼먹은 신에게 화가 났다. 나는 쉴 때조차 열심히 살았다. 그 결과 멍청하게 누워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보호자로 온 엄마는 찢어진 근육이나 휘어진 뼈보다 ‘임자 없는’ 처지에 더 가슴 아파했고 그 또한 견딜 수 없었다.
시술한 지 이틀 만에 엄마를 내쫓고 6인실로 입장했다. 504호실의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 혹은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 수다스런 데레사 수녀님과 과묵한 아녜스 수녀님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빵 사이에서 찌그러지고 있는 햄도 나보다는 압박감을 덜 받았을 것이다. 첫날을 제외하고 나는 줄곧 대화가 오고가는 핑퐁 테이블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첫날에는 커튼을 치고 마음껏 끙끙거릴 수 있었는데, 양쪽의 할머니―이때까지 나는 두 분이 전직 수녀인 줄 몰랐다―들이 다음날부터 본색을 드러냈다.
“답답한데 커튼 좀 걷어줄 수 있어요?”
나는 뒤숭숭한 꿈 자락에서 막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아카데미에 전화해 수강료를 환불해달라고 했는데,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해서 거세게 항의하는 매우 현실적인 꿈이었다. 신랄한 기분이 가시기도 전이어서 나한테 부탁하는 소리인 줄도 몰랐다. “다리만 다친 게 아닌 갑네. 젊은 사람이 귀도 안 좋나?”
오른쪽 침대에서 은근한 비난이 들려왔다. 졸음이 끈끈한 껌처럼 떨어지지 않는 와중에도 이 병실에서 ‘젊은 사람’ 이라면 40대인 나밖에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순간 꿈속에서의 공격적이던 말투 그대로 ‘커튼을 걷든 말든 내 맘이죠!’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성의 밸브를 찾아 분노를 잠그고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그 자리는 햇빛이 잘 안 들죠? 바람도 안 통하고 답답하겠어요. 자리를 바꿔줄까요?”
“저보다 더 많이 다치셨잖아요. 푹 쉬셔야 해요.”
“현무한테서는 연락 왔어요?”
“내버려 둬요. 우리보다 더 놀란 것 같은데.”
나는 대중목욕탕을 혐오한다. 찜질방도 싫다. 때를 밀고 땀을 빼는 원초적 행위를 하기 위해 모르는 사람들과 옷 벗고 한 공간에 있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누군가와 방을 나눠 쓴 적 없는 외동으로 자라서 그런지 여행을 갈 때에도, 워크숍에 참석할 때도 되도록 혼자 방을 쓰곤 했다. 지금도 당장 1인실로 옮기고 싶지만 1인실로 가기에는 내 부상이 너무 경미한 것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아침 식사가 배식 되었다. 식판 트레이를 밀고 온 영양사가 커튼을 젖히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지금 막 깨어난 척 부스럭거리며 일어나야 했다. 밍밍한 반찬을 억지로 떠 넣으려고 하는데 오른쪽 할머니가,
“이거 받아요. 덜어 드시고 옆에 좀 넘겨주세요.”
라며 매실장아찌가 들어있는 반찬 통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시큼한 냄새를 맡으니 침이 고였다. 하지만 자극에 따른 반응에 불과한 것으로 전혀 먹고 싶지 않다. 젓가락 닿은 자리가 분명한 찬을 통째로 내미는 것이 황망하여 재빨리 반찬통을 옆으로 넘겼다. 그러자 왼쪽 할머니는 “병원 밥은 영 싱거워서……”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았다. 식사를 마치자 이번에는 왼쪽에서,
“이것도 받아요. 자매님도 하나 먹고 옆에도 주시고.”
라는 말과 함께 감귤 두 개가 넘어왔다. 이로써 504호에서의 내 지정학적 위치는 분명해졌다. 나는 두 할머니 사이에 낀 일종의 복도 비슷한 것이 된 것이다. 두 분의 침대가 나란히 붙어있으면 여북이나 좋겠나. 그러나 이 할머니들은 각자 좌와 우에 차지한 벽들에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를 늘어놓았고 그게 꽤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가운데에 낀 내 공간 역시 할머니들의 공동 구역이나 다름없다.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두 분이 수녀님이고 운전 중에 고라니를 피하다가 사고를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털어놓는 품새나 못 말리는 붙임성만 보자면 여느 수더분한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지만, 수녀라는 특별한 신분을 알고 나니 그 수더분함이야말로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고요한 성직자의 이미지와 내 좌우에 누워있는 할머니들은 도무지 연결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수다스럽고 활기차고 먹성도 아주 좋았다. 그리고 약간 드센 편이었는데 나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간호사 한 명이 내게 링거를 잘못 끼우는 실수를 했을 때 매섭게 항의를 하고 상황을 바로잡아준 것도 수녀님들이었으니까.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내 몸은 점점 굳고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여긴 수녀님들은 즉시 응급 벨을 누르고 간호사들을 불렀다. 만약 제때 수녀님이 발견해 거칠게 항의해주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 사건 이후부터 나는 수녀님들이 아무리 수다를 떨어도,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놓고 드라마에 빠져도, 부정적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수녀 방학이지 뭐.”
테레사 수녀님의 말에 아녜스 수녀님은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환자복을 입은 탓도 있지만 이런 특징 때문에 본인들 입으로 말해주지 않았다면 수녀라는 사실을 영영 몰랐을 것이다.
첫날 이후 나는 커튼을 치지 않았다. 라디오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할머니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생각지도 않은 장점이 있다. 내부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몰두할 새가 없어진 것이다. 할머니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내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좋은 게 별로 없다. 반면 이들의 이야기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호스피스 활동을 오래 한 이 수녀님들은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보살펴주는 일에 능숙했다.
데레사 수녀님이 504호의 대장이었다. 나이도 처지도 다른 여섯 명이 병실에 있으면 반드시 대장 노릇을 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지켜야 할 규율을 정하고, 분위기를 무겁지 않게 만들고, 사소한 다툼이 있으면 좋은 말로 풀어버리게 하는 것도 데레사 수녀님의 몫이었는데 덕분에 우리 병실은 나쁘지 않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맞은편에 놓인 세 개의 침상에는 환자들이 자주 바뀌었다. 사생활이란 울타리를 거침없이 넘어오는 중년 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따금 무례할 정도로 질문 공세를 퍼부어도 수녀님들은 별 거부감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 보니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그들의 인생을 짜 맞출 수 있었다.
수녀님들은 강원도의 산골짝에서 거동도 못 한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했다. 수녀원을 보수하고, 텃밭을 가꾸고, 노인들을 씻기고 돌봐드린 후 기도를 드렸다. 두 분 모두 목소리도 아름답고 노래를 좋아해서 ‘이중창으로 만들어진 기도’를 아무리 해도 싫증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현무가 왔다.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수녀원 문 앞에 포대기에 감싼 채 버려져 있었다. 꽁꽁 언 볼에 눈물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핏덩이였다.
누가 산골에 아이를 버렸을까. 쪽지 하나, 단서 하나 남겨진 것 없으니 아기의 운명은 보육원으로 가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수녀님들도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려도 너무 어린 아기다 보니 품에 끼고 돌보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떨어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계속 ‘처음’을 보다 보니까…… 뒤집기, 옹알이, 첫 이빨, 첫 걸음마…… 이런 순간을 보다 보니까 도저히 보육원에 못 보내겠더라고요.”
두 분 다 세속의 성씨가 최씨여서 아이는 최씨가 되었다. 한글 이름은 데레사 수녀님이 짓고 세례명은 아녜스 수녀님이 골랐다. 수녀님들은 바티칸에 가려고 평생 조금씩 모아오던 통장을 헐어 분유와 기저귀를 사고 인터넷을 뒤져 육아 상식을 쌓았다. 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생전 나오지 않던 읍내에도 자주 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주사를 맞히러 갈 때였어요. 깨끗이 씻기고 외출복을 입혔더니 우리 현무가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며 간호사 선생님들이 아기 예쁘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하시는 거야.”
“우리는 예쁘다는 칭찬을 잔뜩 들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한마디도―”
“주사 놓고 땡인 거야. 그게 어찌나 서운하던지!”
앞 침대의 아주머니가 배를 잡고 웃자 수녀 엄마들도 따라 깔깔 웃었다.
‘글자를 빨리 깨쳤다, 그 흔한 수족구 한 번 걸리지 않았다, 속이 깊고 빈말을 안 한다, 목소리가 듣기 좋다, 암기력이 남다르다,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잘한다, 예의가 바르고 믿음직스럽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자랑을 들어주다 지친 내가 말을 끊고 되물었다.
“키우면서 힘든 적은 없으셨어요?”
시간이 좀 더 지나서야, 우리가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신부 같은 사이가 되고 나서야, 병원에 오기 전 나의 고통스러운 상태에 대해 털어놓고 나서야 나는 그 대답을 들었다. 내가 수녀님들에게 고백한 일은 그렇다 쳐도 수녀님들 쪽에서 힘든 과거를 털어놓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들에게는 성당 바깥에서 들어줄 귀가 필요했던 것일까?
“과묵한 여자아이의 사춘기는 정말 무서워요.”
십 대에 들어서자 현무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은 연달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난 왜 부모가 없어? 왜 엄마만 둘인데 둘 다 수녀야? 친엄마가 날 버릴 때 하느님은 뭐 했어?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그들은 일찌감치 모범답안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막상 두려운 순간이 닥치자 말문이 막혔다. 얼른 입을 떼지 못하는 두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던 아이는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됐어. 신경 안 써.” 조숙한 아이는 두 번 다시 부모에 대해 묻지 않았고 틀어박혀 공부만 했다. 두 사람은 속이 타들어가면서도 묵주 알을 굴리며 현무를 위한 기도를 할 뿐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죠.”
왕따라고 했다. 하마터면 성폭행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성적이 뛰어나니 시기 질투가 따를 수밖에 없다. 현무가 여러 번 상담을 받았다는 것, 자해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도 모두 일이 벌어진 다음에서야 알게 되었다. 수녀님들은 가슴을 치며 자책했고 함께 한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큰 말다툼을 했다.
가출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아이는 지저분한 몰골로 돌아왔다. 굶었는지 얼굴 살이 내렸고 급히 차려낸 밥상에서는 세 그릇을 비웠다. 그리고는 씻지도 않고 두꺼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내리 잤다. 사라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대답을 듣기가 두려운 모습이었다.
현무가 오기까지 그들은 스노우볼 같은 세상 속을 살아왔다. 언제나 눈보라가 내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다. 작디작은 세상에서 노동을 하고 기도를 하고 외롭지만 단정하게 살았다. 유년 시절의 상처를 간직한 그들이기에 스노우볼 안의 평화는 평생 갈구해온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젖먹이가 나타나 모포를 뒤집듯 모든 것을 바꾸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두려움에 가득 찬 엄마가 되어 자식이 주는 핍박을 감내하고 있었다. 신에게 향하던 사랑을 어느새 아이에게 몽땅 쏟아부은 지 오래였다. 저 아이는 우리에게 온 예수인가, 시험에 들게 하려는 사탄인가, 두 사람은 입밖으로 내지 않았을 뿐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런 말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가 없죠.”
“신부님에게도 원장 수녀님에게도 애 키우는 고충을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이해받지 못하는 건 둘째 치고 아이를 보육원으로 보낼까 봐 겁이 나서 말할 수 없었어요.”
현무는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방에 틀어박혀 등교를 거부했다.
하필이면 이때 발령이 났다. 돌보던 마지막 노인이 돌아가시자 수녀회에서는 두 사람을 각각 다른 지역으로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다.
현무까지 합쳐 셋은 이미 가족이었다. 이 상황이 언제까지나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명백했다. 다만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는 수녀회를 나와 버렸어요.”
그들은 상태가 온전치 않은 현무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수녀가 되기로 선택한 것만큼이나 어려운 결정이었다. 환갑에 가까워지는 나이까지 오로지 수녀로만 살아온 그들이 환속한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검은 베일이 벗겨지는 일은 갑각류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만큼이나 무서운 일이다. 그럼에도 모성애가 순종심을 이겼다. 이것만 보아도 그들은 이미 수녀로서 자격상실인 것이다.
“이제는 수녀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생각은 달라요. 우리는 수녀회에 소속되지 않았을 뿐 소명을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달라진 것은 없으니까. 여전히 기도하고 노동하고 노래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 데레사와 정말 많이 이야기했어요.”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거처를 옮겼을 뿐이죠. 잘된 일이죠. 이러쿵저러쿵 떠도는 소문을 피해 산속 폐가로 들어가 사는 동안 우리는 더 강해졌어요. 처음에는 비가 새는 집이었지만 3년쯤 갈고 닦고 수리를 했더니 살만한 집에 됐어요. 천천히 노동하는 것은 우리가 평생 해온 일이죠.”
웅크려 있던 아이의 상태는 서서히 나아졌다. 사람을 끊어내고 숲에 고립되자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았다. 방에서 전혀 나오지 않다가 조금씩 산책을 다니기 시작했고, 침묵도 전처럼 공격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1년쯤 지나자 아이는 계곡과 산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고 혈색도 좋아졌다. 마침내 검정고시 문제집을 사달라고 했을 때 수녀님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얼음 같은 시간이었지만 결국 세 사람은 얼음을 깨뜨리지 않고 그 시기를 지나온 것이다.
현무는 늦은 공부를 하기 위해 수녀님들의 품을 떠났다.
처음 보는 의사가 기척 없이 들어왔다. 수수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에 안경을 쓴 그녀가 들어오자 수녀님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여자는 전문가다운 태도로 병실과 차트를 둘러보고 안부를 물었다.
“좀 어때요?”
떼꾼한 눈에는 피로가 가득했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다 괜찮다. 얘야. 우린 푹 쉬고 있단다.”
저 여자가 현무구나. 최현무 율리안나. 수녀님들이 굳이 이 병원에 입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자는 간호사와 말을 주고받은 후 병실에서 나갔다. 여자가 사라짐과 동시에 네 개의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오래전 주사를 놔준 무뚝뚝한 의사가 했어야 할 말을 들려줬다.
“예쁘네요. 정말 똑똑해 보이구요.”
내 칭찬에 수녀 엄마들의 눈과 입에는 웃느라 주름이 잡혔다. 어떤 여자들은 영원히 할머니가 되지 않는 것인가. 흰머리가 가득해도 여전히 소녀 같은 두 분은 웃으면 쌍둥이처럼 똑같은 얼굴이 되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며 같은 노동, 같은 고통 속에 한 아이를 키워냈기 때문에 얼굴 주름마저 같은 모양으로 접혀버린 것일까.
부활절 아침에 현무가 다시 병실에 나타났다. 손에는 조그마한 달걀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달걀은 색색깔 셀로판지에 포장돼 있었다.
나는 병원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현무는 목례를 했다. 그러자 눈물 마개가 되어 준 그녀의 문장이 떠올랐다. 종교가 아니라 기도가 먼저 발명되었을 거라고, 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인간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글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내 입에서 질문이 새어 나왔다.
“최현무 씨는 신을 믿어요?”
그녀는 진실을 말할 것인지 적당한 대답으로 눙칠 것인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저는 과학자예요.”
즉답을 피하면서 그녀는 에둘러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수녀님들은 알고 있을까? 환속을 하면서까지 지켜낸 아이의 마음속에서 이미 신이 사라졌다는 진실을. 수녀님들은 베일을 잃었고 현무는 젖먹이 때부터 가슴에 벽돌처럼 박혀있던 신을 빼냈다.
“하지만 신성함은 믿고 있죠.”
현무는 흰 벽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모든 인간은 자기의 환상에 사로잡혀 산다. 예전의 내 환상은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선택한 소수의 사람과 작은 공간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내 작업실과 가게는 방탄유리로 덮인 안전한 곳이라 말이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 보니 평생에 걸쳐 조금씩 만든 감옥이 내 가게였다. 나는 공들여 감옥을 꾸미고 그 안에 유폐되어 10년을 보냈다.
수녀님들의 환상은 자신들의 뼈가 붙고 있으며 현무가 여전히 신의 은총 속에 머물고 있다는 믿음이다. 기만적인 믿음 안에서 그들은 안전했다. ‘환상이 진실보다 소중하다.’라고 현무는 썼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데레사 수녀님이 달걀을 건네준다. 이곳을 나가는 순간 내게도 새로운 환상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작은 스노우볼같은 달걀 껍질을 깨면서 아직 붙지 않은 뼈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운다. 열심히 운다. 그러다보니 공공장소에서 우는 자들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실무적인 문제에 부딪친다. 콧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환자복 주머니는 텅 비어 있다.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집게처럼 누르고 눈물 마개용으로 아무렇게나 뽑아온 병원 사보를 급히 펼쳤다. 이 판국에 글자가 눈에 제대로 들어올 리 없다.
그런데 어디서 들어본 이름 때문에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무신론자가 신에게 보내는 편지’ 모순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에세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숱하게 들어온 최현무라는 이름과 지면에 박힌 이름을 연결하는 선을 제대로 긋지 못했다. 내가 그 선을 그은 것은 이름의 주인을 만난 다음이었다.
사고는 내가 자처한 것이었다.
10년 동안 연 가게를 드디어 정리했다. 쉼 없이 달려온 터라 쉼 없이 놀기 위해, 다시 말해 시간 낭비 없이 놀기 위해 이런저런 강습을 등록했다. 어린 시절부터 손에 넣고 싶던 놀이공원 1년 자유 입장권을 끊었고 클래식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인문 아카데미 두 곳의 강좌를 등록하고 마운틴바이크를 샀다. 두려웠으니까. 자유가 두려웠으니까. 생각할 시간이 많아지면 불행했던 지난 몇 년을 복기하느라 정신이 나갈 게 뻔했다. 일로 도망쳤던 작년처럼 몰두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자전거를 타면서 쓰지 않던 근육을 무리하게 사용한 나머지 인대가 끊어졌다. 병원에 갔더니 디스크 협착도 의심된다는 진단이 나왔다. 결론적으로 두 달간 꼼짝없이 병원에 누워있어야 했다. 시술 후 아무것도 하지 말라, 무조건 가만히 있으라는 게 의사의 권고였다.
처음에는 부주의한 자신에게 화가 났고, 나중에는 못돼먹은 신에게 화가 났다. 나는 쉴 때조차 열심히 살았다. 그 결과 멍청하게 누워있어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보호자로 온 엄마는 찢어진 근육이나 휘어진 뼈보다 ‘임자 없는’ 처지에 더 가슴 아파했고 그 또한 견딜 수 없었다.
시술한 지 이틀 만에 엄마를 내쫓고 6인실로 입장했다. 504호실의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 혹은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 수다스런 데레사 수녀님과 과묵한 아녜스 수녀님 사이에 끼어버린 것이다. 빵 사이에서 찌그러지고 있는 햄도 나보다는 압박감을 덜 받았을 것이다. 첫날을 제외하고 나는 줄곧 대화가 오고가는 핑퐁 테이블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첫날에는 커튼을 치고 마음껏 끙끙거릴 수 있었는데, 양쪽의 할머니―이때까지 나는 두 분이 전직 수녀인 줄 몰랐다―들이 다음날부터 본색을 드러냈다.
“답답한데 커튼 좀 걷어줄 수 있어요?”
나는 뒤숭숭한 꿈 자락에서 막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아카데미에 전화해 수강료를 환불해달라고 했는데,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해서 거세게 항의하는 매우 현실적인 꿈이었다. 신랄한 기분이 가시기도 전이어서 나한테 부탁하는 소리인 줄도 몰랐다. “다리만 다친 게 아닌 갑네. 젊은 사람이 귀도 안 좋나?”
오른쪽 침대에서 은근한 비난이 들려왔다. 졸음이 끈끈한 껌처럼 떨어지지 않는 와중에도 이 병실에서 ‘젊은 사람’ 이라면 40대인 나밖에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순간 꿈속에서의 공격적이던 말투 그대로 ‘커튼을 걷든 말든 내 맘이죠!’라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성의 밸브를 찾아 분노를 잠그고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그 자리는 햇빛이 잘 안 들죠? 바람도 안 통하고 답답하겠어요. 자리를 바꿔줄까요?”
“저보다 더 많이 다치셨잖아요. 푹 쉬셔야 해요.”
“현무한테서는 연락 왔어요?”
“내버려 둬요. 우리보다 더 놀란 것 같은데.”
나는 대중목욕탕을 혐오한다. 찜질방도 싫다. 때를 밀고 땀을 빼는 원초적 행위를 하기 위해 모르는 사람들과 옷 벗고 한 공간에 있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누군가와 방을 나눠 쓴 적 없는 외동으로 자라서 그런지 여행을 갈 때에도, 워크숍에 참석할 때도 되도록 혼자 방을 쓰곤 했다. 지금도 당장 1인실로 옮기고 싶지만 1인실로 가기에는 내 부상이 너무 경미한 것 아닐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쳤을 때 아침 식사가 배식 되었다. 식판 트레이를 밀고 온 영양사가 커튼을 젖히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지금 막 깨어난 척 부스럭거리며 일어나야 했다. 밍밍한 반찬을 억지로 떠 넣으려고 하는데 오른쪽 할머니가,
“이거 받아요. 덜어 드시고 옆에 좀 넘겨주세요.”
라며 매실장아찌가 들어있는 반찬 통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시큼한 냄새를 맡으니 침이 고였다. 하지만 자극에 따른 반응에 불과한 것으로 전혀 먹고 싶지 않다. 젓가락 닿은 자리가 분명한 찬을 통째로 내미는 것이 황망하여 재빨리 반찬통을 옆으로 넘겼다. 그러자 왼쪽 할머니는 “병원 밥은 영 싱거워서……”하면서 자연스럽게 받았다. 식사를 마치자 이번에는 왼쪽에서,
“이것도 받아요. 자매님도 하나 먹고 옆에도 주시고.”
라는 말과 함께 감귤 두 개가 넘어왔다. 이로써 504호에서의 내 지정학적 위치는 분명해졌다. 나는 두 할머니 사이에 낀 일종의 복도 비슷한 것이 된 것이다. 두 분의 침대가 나란히 붙어있으면 여북이나 좋겠나. 그러나 이 할머니들은 각자 좌와 우에 차지한 벽들에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를 늘어놓았고 그게 꽤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가운데에 낀 내 공간 역시 할머니들의 공동 구역이나 다름없다.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두 분이 수녀님이고 운전 중에 고라니를 피하다가 사고를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털어놓는 품새나 못 말리는 붙임성만 보자면 여느 수더분한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지만, 수녀라는 특별한 신분을 알고 나니 그 수더분함이야말로 수수께끼처럼 보인다. 고요한 성직자의 이미지와 내 좌우에 누워있는 할머니들은 도무지 연결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수다스럽고 활기차고 먹성도 아주 좋았다. 그리고 약간 드센 편이었는데 나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간호사 한 명이 내게 링거를 잘못 끼우는 실수를 했을 때 매섭게 항의를 하고 상황을 바로잡아준 것도 수녀님들이었으니까. 뭔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내 몸은 점점 굳고 있었다. 말이 나오지 않는데 뭔가 이상하다고 여긴 수녀님들은 즉시 응급 벨을 누르고 간호사들을 불렀다. 만약 제때 수녀님이 발견해 거칠게 항의해주지 않았다면 무슨 일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 사건 이후부터 나는 수녀님들이 아무리 수다를 떨어도,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놓고 드라마에 빠져도, 부정적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수녀 방학이지 뭐.”
테레사 수녀님의 말에 아녜스 수녀님은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환자복을 입은 탓도 있지만 이런 특징 때문에 본인들 입으로 말해주지 않았다면 수녀라는 사실을 영영 몰랐을 것이다.
첫날 이후 나는 커튼을 치지 않았다. 라디오처럼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할머니들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생각지도 않은 장점이 있다. 내부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몰두할 새가 없어진 것이다. 할머니들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내 자신의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거기에는 좋은 게 별로 없다. 반면 이들의 이야기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호스피스 활동을 오래 한 이 수녀님들은 남의 마음을 편안하게 보살펴주는 일에 능숙했다.
데레사 수녀님이 504호의 대장이었다. 나이도 처지도 다른 여섯 명이 병실에 있으면 반드시 대장 노릇을 하는 사람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지켜야 할 규율을 정하고, 분위기를 무겁지 않게 만들고, 사소한 다툼이 있으면 좋은 말로 풀어버리게 하는 것도 데레사 수녀님의 몫이었는데 덕분에 우리 병실은 나쁘지 않은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맞은편에 놓인 세 개의 침상에는 환자들이 자주 바뀌었다. 사생활이란 울타리를 거침없이 넘어오는 중년 여성들이 많았는데 이따금 무례할 정도로 질문 공세를 퍼부어도 수녀님들은 별 거부감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 보니 알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그들의 인생을 짜 맞출 수 있었다.
수녀님들은 강원도의 산골짝에서 거동도 못 한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인들을 돌보는 봉사활동을 했다. 수녀원을 보수하고, 텃밭을 가꾸고, 노인들을 씻기고 돌봐드린 후 기도를 드렸다. 두 분 모두 목소리도 아름답고 노래를 좋아해서 ‘이중창으로 만들어진 기도’를 아무리 해도 싫증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 현무가 왔다. 그냥 온 것이 아니라 수녀원 문 앞에 포대기에 감싼 채 버려져 있었다. 꽁꽁 언 볼에 눈물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핏덩이였다.
누가 산골에 아이를 버렸을까. 쪽지 하나, 단서 하나 남겨진 것 없으니 아기의 운명은 보육원으로 가는 것이 당연해 보였다. 수녀님들도 처음에는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려도 너무 어린 아기다 보니 품에 끼고 돌보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떨어질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계속 ‘처음’을 보다 보니까…… 뒤집기, 옹알이, 첫 이빨, 첫 걸음마…… 이런 순간을 보다 보니까 도저히 보육원에 못 보내겠더라고요.”
두 분 다 세속의 성씨가 최씨여서 아이는 최씨가 되었다. 한글 이름은 데레사 수녀님이 짓고 세례명은 아녜스 수녀님이 골랐다. 수녀님들은 바티칸에 가려고 평생 조금씩 모아오던 통장을 헐어 분유와 기저귀를 사고 인터넷을 뒤져 육아 상식을 쌓았다. 예방접종을 하기 위해 생전 나오지 않던 읍내에도 자주 걸음을 옮겼다.
“첫 번째 주사를 맞히러 갈 때였어요. 깨끗이 씻기고 외출복을 입혔더니 우리 현무가 너무 예쁘더라고요.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며 간호사 선생님들이 아기 예쁘다는 말을 한 번도 안 하시는 거야.”
“우리는 예쁘다는 칭찬을 잔뜩 들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한마디도―”
“주사 놓고 땡인 거야. 그게 어찌나 서운하던지!”
앞 침대의 아주머니가 배를 잡고 웃자 수녀 엄마들도 따라 깔깔 웃었다.
‘글자를 빨리 깨쳤다, 그 흔한 수족구 한 번 걸리지 않았다, 속이 깊고 빈말을 안 한다, 목소리가 듣기 좋다, 암기력이 남다르다, 손으로 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잘한다, 예의가 바르고 믿음직스럽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자랑을 들어주다 지친 내가 말을 끊고 되물었다.
“키우면서 힘든 적은 없으셨어요?”
시간이 좀 더 지나서야, 우리가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신부 같은 사이가 되고 나서야, 병원에 오기 전 나의 고통스러운 상태에 대해 털어놓고 나서야 나는 그 대답을 들었다. 내가 수녀님들에게 고백한 일은 그렇다 쳐도 수녀님들 쪽에서 힘든 과거를 털어놓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그들에게는 성당 바깥에서 들어줄 귀가 필요했던 것일까?
“과묵한 여자아이의 사춘기는 정말 무서워요.”
십 대에 들어서자 현무는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은 연달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난 왜 부모가 없어? 왜 엄마만 둘인데 둘 다 수녀야? 친엄마가 날 버릴 때 하느님은 뭐 했어?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그들은 일찌감치 모범답안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막상 두려운 순간이 닥치자 말문이 막혔다. 얼른 입을 떼지 못하는 두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던 아이는 등을 돌린 채 말했다. “됐어. 신경 안 써.” 조숙한 아이는 두 번 다시 부모에 대해 묻지 않았고 틀어박혀 공부만 했다. 두 사람은 속이 타들어가면서도 묵주 알을 굴리며 현무를 위한 기도를 할 뿐이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죠.”
왕따라고 했다. 하마터면 성폭행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예쁘장한 얼굴에 성적이 뛰어나니 시기 질투가 따를 수밖에 없다. 현무가 여러 번 상담을 받았다는 것, 자해를 하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도 모두 일이 벌어진 다음에서야 알게 되었다. 수녀님들은 가슴을 치며 자책했고 함께 한 지 20년 만에 처음으로 큰 말다툼을 했다.
가출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아이는 지저분한 몰골로 돌아왔다. 굶었는지 얼굴 살이 내렸고 급히 차려낸 밥상에서는 세 그릇을 비웠다. 그리고는 씻지도 않고 두꺼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내리 잤다. 사라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한편으로 대답을 듣기가 두려운 모습이었다.
현무가 오기까지 그들은 스노우볼 같은 세상 속을 살아왔다. 언제나 눈보라가 내리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는다. 작디작은 세상에서 노동을 하고 기도를 하고 외롭지만 단정하게 살았다. 유년 시절의 상처를 간직한 그들이기에 스노우볼 안의 평화는 평생 갈구해온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젖먹이가 나타나 모포를 뒤집듯 모든 것을 바꾸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들은 두려움에 가득 찬 엄마가 되어 자식이 주는 핍박을 감내하고 있었다. 신에게 향하던 사랑을 어느새 아이에게 몽땅 쏟아부은 지 오래였다. 저 아이는 우리에게 온 예수인가, 시험에 들게 하려는 사탄인가, 두 사람은 입밖으로 내지 않았을 뿐 똑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런 말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가 없죠.”
“신부님에게도 원장 수녀님에게도 애 키우는 고충을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요. 이해받지 못하는 건 둘째 치고 아이를 보육원으로 보낼까 봐 겁이 나서 말할 수 없었어요.”
현무는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방에 틀어박혀 등교를 거부했다.
하필이면 이때 발령이 났다. 돌보던 마지막 노인이 돌아가시자 수녀회에서는 두 사람을 각각 다른 지역으로 떠나라고 명령한 것이다.
현무까지 합쳐 셋은 이미 가족이었다. 이 상황이 언제까지나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명백했다. 다만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뿐이다.
“우리는, 우리는 수녀회를 나와 버렸어요.”
그들은 상태가 온전치 않은 현무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수녀가 되기로 선택한 것만큼이나 어려운 결정이었다. 환갑에 가까워지는 나이까지 오로지 수녀로만 살아온 그들이 환속한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검은 베일이 벗겨지는 일은 갑각류의 껍질을 벗겨내는 것만큼이나 무서운 일이다. 그럼에도 모성애가 순종심을 이겼다. 이것만 보아도 그들은 이미 수녀로서 자격상실인 것이다.
“이제는 수녀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생각은 달라요. 우리는 수녀회에 소속되지 않았을 뿐 소명을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달라진 것은 없으니까. 여전히 기도하고 노동하고 노래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이 부분에 대해 데레사와 정말 많이 이야기했어요.”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거처를 옮겼을 뿐이죠. 잘된 일이죠. 이러쿵저러쿵 떠도는 소문을 피해 산속 폐가로 들어가 사는 동안 우리는 더 강해졌어요. 처음에는 비가 새는 집이었지만 3년쯤 갈고 닦고 수리를 했더니 살만한 집에 됐어요. 천천히 노동하는 것은 우리가 평생 해온 일이죠.”
웅크려 있던 아이의 상태는 서서히 나아졌다. 사람을 끊어내고 숲에 고립되자 마음이 편안해진 것 같았다. 방에서 전혀 나오지 않다가 조금씩 산책을 다니기 시작했고, 침묵도 전처럼 공격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1년쯤 지나자 아이는 계곡과 산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고 혈색도 좋아졌다. 마침내 검정고시 문제집을 사달라고 했을 때 수녀님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얼음 같은 시간이었지만 결국 세 사람은 얼음을 깨뜨리지 않고 그 시기를 지나온 것이다.
현무는 늦은 공부를 하기 위해 수녀님들의 품을 떠났다.
처음 보는 의사가 기척 없이 들어왔다. 수수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에 안경을 쓴 그녀가 들어오자 수녀님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여자는 전문가다운 태도로 병실과 차트를 둘러보고 안부를 물었다.
“좀 어때요?”
떼꾼한 눈에는 피로가 가득했지만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다 괜찮다. 얘야. 우린 푹 쉬고 있단다.”
저 여자가 현무구나. 최현무 율리안나. 수녀님들이 굳이 이 병원에 입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여자는 간호사와 말을 주고받은 후 병실에서 나갔다. 여자가 사라짐과 동시에 네 개의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오래전 주사를 놔준 무뚝뚝한 의사가 했어야 할 말을 들려줬다.
“예쁘네요. 정말 똑똑해 보이구요.”
내 칭찬에 수녀 엄마들의 눈과 입에는 웃느라 주름이 잡혔다. 어떤 여자들은 영원히 할머니가 되지 않는 것인가. 흰머리가 가득해도 여전히 소녀 같은 두 분은 웃으면 쌍둥이처럼 똑같은 얼굴이 되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며 같은 노동, 같은 고통 속에 한 아이를 키워냈기 때문에 얼굴 주름마저 같은 모양으로 접혀버린 것일까.
부활절 아침에 현무가 다시 병실에 나타났다. 손에는 조그마한 달걀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달걀은 색색깔 셀로판지에 포장돼 있었다.
나는 병원 도서관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현무는 목례를 했다. 그러자 눈물 마개가 되어 준 그녀의 문장이 떠올랐다. 종교가 아니라 기도가 먼저 발명되었을 거라고, 신이 없는 세상에서도 인간에게는 기도가 필요하다는 글이었다. 부지불식간에 내 입에서 질문이 새어 나왔다.
“최현무 씨는 신을 믿어요?”
그녀는 진실을 말할 것인지 적당한 대답으로 눙칠 것인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저는 과학자예요.”
즉답을 피하면서 그녀는 에둘러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수녀님들은 알고 있을까? 환속을 하면서까지 지켜낸 아이의 마음속에서 이미 신이 사라졌다는 진실을. 수녀님들은 베일을 잃었고 현무는 젖먹이 때부터 가슴에 벽돌처럼 박혀있던 신을 빼냈다.
“하지만 신성함은 믿고 있죠.”
현무는 흰 벽으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모든 인간은 자기의 환상에 사로잡혀 산다. 예전의 내 환상은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선택한 소수의 사람과 작은 공간에서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내 작업실과 가게는 방탄유리로 덮인 안전한 곳이라 말이다. 하지만 밖으로 나와 보니 평생에 걸쳐 조금씩 만든 감옥이 내 가게였다. 나는 공들여 감옥을 꾸미고 그 안에 유폐되어 10년을 보냈다.
수녀님들의 환상은 자신들의 뼈가 붙고 있으며 현무가 여전히 신의 은총 속에 머물고 있다는 믿음이다. 기만적인 믿음 안에서 그들은 안전했다. ‘환상이 진실보다 소중하다.’라고 현무는 썼다.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데레사 수녀님이 달걀을 건네준다. 이곳을 나가는 순간 내게도 새로운 환상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작은 스노우볼같은 달걀 껍질을 깨면서 아직 붙지 않은 뼈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김성중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 되었듯이, 신을 향한 수녀님들의 사랑이 한 명의 아이에게 향하게 되는 이야기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쓰다 보니 조금 더 넓은 그릇에 옮겨 담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요즘 자꾸 넓은 그릇으로 옮겨 담고 싶은 이야기들만 늘어나고 있는데, 게으르기는 또 한없이 게을러 반성하는 나날입니다……
2018/09/25
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