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호각 / 크로키
호각
새소리는 어디서 왔을까
새도 숲도 없는 이곳에 새소리가 들려왔다면
내 안에서 네 안에서 그도 아니면
신이 있다면 새소리로 왔을까
늪 같은 잠속에서 사람들을 건져내고
아침이면 문가로 달아나는
반복되는 장난
은빛 깃털만이 신의 화답으로 놓인다면 그도 신이라 부를까
내가 새소리를 듣는다면
잠결에도 아기 이마를 짚는 손과
손을 얹을 때 자라는 조그만 그늘에도
내려앉는
포개지는 글자들
새소리는 어디서 왔을까 새소리는 어디서 왔을까
새소리는 새의 것일까
아침이면 사라지는
신발 한 쌍을 되찾기 위해
몸을 수그리는 사람
옷을 느리게 갈아입는 사람
벌목된 꿈을 일으켜 돌아갈 집을 짓는 사람
이곳에서 새소리를 듣고 있다면
크로키
반쯤은 젖어
혹독하게 구는 계절과 그럼에도 흰 눈은 기뻐지는 마음
예보가 틀려서 화나는 마음 예보가 맞아도 어쩐지 화가 나는 마음
사랑하는 당신이 사랑하는 당신을 기쁘게 하고 그럼에도 사랑하는 기쁨이 당신을 배반할 때
흰 눈이 흰 눈을 놓치고
보이지 않아
플래시를 터뜨릴 때 시린 불빛 속에 당신을 가두려 할 때 그럼에도 흰 눈이 그리는 곡선
우리 집에 와 밥해줄게
뜻밖처럼 일어선 눈사람과 반쯤 젖어서 눈길은 엉엉
남지은
가을을 함께한 아이들 덕분에 썼습니다. 지영, 유민, 예나, 하민, 나윤, 찬희, 소율, 그리고 창고에 들어온 새.
2018/11/27
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