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상영관의 위치 / 러닝 타임
상영관의 위치
작은 구멍을 들여다보면
도요토미와 도쿠가와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사카성 박물관에서의 일이다
세상 어딘가에는
먼 미래를 비추는 눈동자도 있을 것이다
그 안에 둘러앉아
네 덕분에 우리가 모였다고
용서하는 얼굴들이 보일 것이다
그런 눈동자를
나는 영화에서 보았다
아이맥스 안경을 벗으며
나는 세상 참 좋아졌다 했다
재가 되어 사라진 영웅들을 떠올리면
발밑으로 팝콘이 바스러졌다
좋아진 세상에서
유유히 내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
가끔 어깨를 부딪치고
당신 뭐야? 멱살잡이도 하지만
마음 밖에서는 그런 일이 잘 되지 않는다
이젠 가망이 없어
그런 대사 끝에 웃음이 터진 배우가 있다면
나의 오늘이 삭제될 장면이라면
오늘 전국은 불가마였고 협상은 결렬되었고 당의 내홍은 깊어졌으며 죽은 사람이 죽은 채로 발견되었고……
이미 알고 있는 사실만을 곱씹으며
나는 지팡이를 들고 마지막 주문을 외운다
하늘이 열리고 폭우가 쏟아진다
천둥번개 내리친다 사람들 허우적거린다
온 세상이 물에 잠긴다
내 마음속에서의 일이다
러닝 타임
영화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흐르는 눈물 위로 남자는 샤워기 물줄기를 뿌릴 것이다. 물소리가 볼륨을 높이며 울음소리를 밀어낼 것이다.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집요하게 클로즈업할 것이다. 집채만한 두 눈이 깜박이면
그곳은 겨울 바다일 것이다.
손가락만 한 그가 겨울 바다 앞에 서 있을 것이다. 날씨는 흐릴 것이고 그는 혼자일 것이다. 소리를 지를 것이다. 이름을 부를 것이다. 어라 일본어네? 일본 영화일 것이다.
남자가 순간 이동이라도 한 걸까요? 묻는 관객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런 어리석은 관객을 상상해볼 수는 있다. 상영관 곳곳에서 수군거리는 소리. 비웃는 소리. 영화의 문법일 뿐인걸요. 그렇게 보일 뿐인걸요.
그렇게 보일 뿐 그사이에는 생활이 있다.
그는 말끔한 얼굴로 우동 면발을 건져 먹었겠지. 유부초밥도 추가해 먹었겠지. 가끔 슬펐지만 항상 슬프지는 않았겠지.
그러나 슬프지 않은 시간은 영화적 낭비라서. 러닝 타임이 흘러갈 뿐이라서. 그는 계속 슬펐던 사람인 양 바다에 대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슬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철썩철썩 파도치는 소리. 쏴아아쏴아아 비 내리는 소리.
여기까지 보여줬을 때
빗소리가 사실 샤워볼 거품 헹구는 소리였던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히사이시 조가 흐르고. 거실에서 가족들이 한국어로 떠드는 소리. 티브이 채널 돌아가는 소리.
나는 몸의 물기를 닦는다.
무작정 바다로 떠날 수도 있지만 그건 일주일 치 생활비를 낭비하는 일이라서. 생활에서는 그런 낭비를 더 조심해야 해서. 멀리는 안 나가고. 그림이 되지 않고.
이런 일상도 영화가 되나요? 묻는 관객이 있을 수도 있다. 영화는 참으로 시간을 견디는 예술입니다. 대답하는 감독이 되어보는 수도 있다.
이처럼 없는 영화를 두고 영화처럼 상상해보는 생활이 있다. 머리를 말릴 때 드라이기의 더운 바람에 슬며시 눈을 감으면, 감거나 말거나 무심하게 그 자리인 삶이 있다.
오시경
낮에는 좋은 영화를 보고 밤에는 좋은 꿈을 꾼다
2019/10/29
2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