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두 번째 생일 밤, 태오는 수진으로부터 프랑스의 역사철학자 찰스 어거스틴의 『지중해의 역사』를 선물 받았다. 그녀는 얼마 전 그리스로 여행을 다녀왔다. 커다란 나뭇잎으로 장식이 된 술집엔 고즈넉한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 술집의 이름은 ‘백 가지 슬픔의 문(The Gate of the Hundred Sorrows)’1)이었다. 태오가 느끼기엔 지나치게 감상적인 이름이었다. 술집의 내부는 넓고 어두웠다. 테이블과 의자는 모서리마다 빛났다. 언젠가 그는 수진에게 이 술집을 고집하는 이유를 물었다. 수진은 잠시 망설인 후, 이곳에만 오면 꼭 새 삶이 시작될 것만 같은 기대감이 든다고 말했다. 드물지만 그런 기대감을 주는 장소와 사람이 있다고. 태오는 그 속에 자신이 포함되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못했다. 이상하게 그랬다. 그녀에게 궁금한 건 ‘진짜’ 궁금해서 물을 수가 없었다. 일 년 전 수진이 결혼 소식을 전했을 때도 얼이 빠진 채 축하인사를 건넸을 뿐이다. 태오는 어퍼바라카 가든에서 내려다본 쓰리시티즈와 항구의 야경을, 비실리카 성당과 카라바조의 그림을 넘겼다. 흰 셔츠 차림의 웨이터가 조용한 비처럼 다가와 칵테일을 건넸다. 태오는 고맙다고 말하며 책을 덮었다. 수진은 작년보다 훨씬 야위어 있었다. 볼도 움푹 들어갔고, 팔뚝이며 배에 붙어 있던 군살도 모두 사라졌다. 분위기도 훨씬 차분해지고 세련돼졌다. 그들은 빗물을 마시는 작은 새들처럼 조금씩 칵테일을 홀짝거렸다.
   “여행은 어땠어?” 태오가 묻자, 수진은 고개를 흔들며 미소 비슷한 걸 지어보였다. 곧 은은한 조명에 뒤섞인 낯설고 인위적인 무언가가 수진의 얼굴에 스며들었다. 그때 술집의 문으로 두 남자가 들어왔다. 한 사람은 늙었고, 한 사람은 젊었다. 두 사람 다 짙은 색감의 코트에 머플러를 둘렀다. 그들은 태오가 앉은 테이블 옆에 자리를 잡았다. 조그맣고 어두운 구석자리였다. 태오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으려 의식했지만 하나같이 단정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에게 계속해서 눈길이 갔다. 딱딱한 공기는 미역 줄기 같은 머리칼을 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등장하며 풀어졌다. 그는 악보를 펼친 후 〈night time〉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태오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촛불 사이로 흐르는 음악을 감상했다.
   삼십 분쯤 흘렀을까. 수진이 태오의 손등을 톡톡 건드리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저기 저 사람들……”
   “응?”
   순간 그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상해.”
   “뭐가?”
   “남자가 우는 것 같아.”
   태오는 냅킨을 집는 척하며 옆에 앉은 사내를 봤다. 어두운 조명 때문에 두 남자의 모습은 검은 연기에 휩싸인 하나의 실루엣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일상을 나누며 술을 홀짝이는 평범한 장면에 지나지 않았다. 피아노 소리 때문에 대화의 내용은 들리지 않았다.
   “누가?”
   “나이 든 사람.” 태오는 다시 한번, 테이블 쪽을 바라봤다. 분명 방금 전까지 상대와 이야기를 주고받던 늙은 남자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가만히 있는데.”
   “아니야.”
   수진의 표정은 한껏 상기돼 있었다.
   “울잖아. 봐봐. 지금은 잦아들었지만 슬퍼하고 있잖아.”
   태오는 보지 않았다. 점차 사방이 어두워지고 피아노 연주가 멈췄다. 진공상태에 빠진 듯 침묵이 몇 초간 지속됐다. 그 순간, 한 남자의 흐느낌이 태오의 귓가를 칼처럼 파고들었다. 순간이었지만 듣는 순간 소름이 돋고 명치가 저릴 만큼 깊고, 구슬픈 소리였다.

*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말문을 연 건, 안이었다. 이명준은 이렇게 와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이명준은 오늘 저녁, 퇴근을 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다 넘어졌다. 넘어지며 발작을 일으켰다. 발작을 하며 오줌을 쌌다. 악 소리가 날 만큼 차가운 오줌이었다. 그를 발견한 건, 개발팀 엔지니어 안이었다. 안은 명문 사립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 공과대학에서 고형폐기물 연료화의 시스템 알고리즘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작년 이명준이 다니던 회사에 스카우트됐다. 안은 폐기물 종류에 따른 기계 부품의 체계와 구조를 분석하는 테크닉이 뛰어났다. 그러나 정확한 일솜씨에 비해 성격이 지나치게 과묵하고, 감정표현도 잘 하지 않아 누구도 쉽사리 친근감을 느낄 수 없는 사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명준은 그런 안에 대한 묘한 신뢰를 갖고 있었다.
   엎어진 채, 고개를 든 이명준은 자신을 발견한 상대가 안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구급차를 부를까요? 안이 말했고, 이명준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집으로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안의 부축을 받으며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젖은 바지가 살갗에 악착같이 달라붙었다. 불빛들이 사라졌다. 그는 어둠 속을 걸어 안의 인사에 고맙다고 답하며 차에 올랐다.

   아내와 헤어지고 삼 년간, 이명준은 일에 관련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친구들과도 자연스레 멀어졌고, 유일한 가족인 누나와도 연락을 끊었다. 쉬는 날엔 집안의 커튼을 모두 치고 DVD영화를 보며 술을 마셨다. 페르낭델이 주연한 <다섯 개의 다리를 가진 양>이나 해럴드 로이드의 <희극왕>같은 작품이었다. 언젠가 아내가 하필 코미디 영화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들은 결국 웃으면서 인생을 이야기하거든.” 그는 혼자에 익숙했다. 가끔 티브이 앞에 앉아 술을 홀짝이며 낄낄거리고 있으면 자신이 진짜 결혼이란 걸 했고, 누군가의 남편으로 살았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이대로라면 죽는 날까지 별 탈 없이 살 수 있으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에겐 정년이 보장되는 직장이 있었고, 대출금을 끼지 않은 아파트도 있었다. 오 년 전, 개발팀의 차장으로 승진하며 책임감은 늘었지만 업무의 강도는 훨씬 낮아졌다. 성욕도 줄었다. 가끔 누군가의 체온이 그리울 땐 있었지만 스스로를 망가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 불이 꺼진 거실의 풍경 앞에서 그는 극도의 절망감과 고독감을 느꼈다. 서른 평 남짓한 공간을 채우고 있던 가구가 절반 이상은 빠져나간 것 같았다. 대리석 바닥에 고인 어둠은 조금만 발을 내딛으면 온몸을 빨아 당길 깊고 무시무시한 구멍처럼 여겨졌다. 그는 불을 켠 뒤, 땀과 오줌에 축축해진 옷을 하나씩 벗어 쓰레기봉투에 담아 밀봉했다. 뜨거운 물로 온몸이 부들부들해질 때까지 샤워를 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 위스키를 한 잔 가득 따라 소파에 앉았다. 술을 한 모금 들이켰을 때 가방 속에 든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는 휴대 전화의 액정에 떠 있는 낯선 번호를 보며 문득 자신의 삶이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는 하나의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명준은 크게 심호흡을 한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는 상대가 이름을 밝힌 후에야 창가를 향해 돌아섰다. 안은 잠시 망설이더니 대뜸 괜찮으시다면 잠시 만나 뵐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명준은 당황했고, 최대한 예의를 갖춰 부탁을 거절했다. 동시에 ‘안이라면 한 번 만나 봐도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본래 진심은 친하지 않은 이에게 털어놓기 쉬운 법이니까. 그는 새로 다려 놓은 셔츠를 입고 그 위에 검은색 울 스웨터를 걸쳤다. 연한 회색 코듀로이 팬츠를 입고, 실로 짠 갈색 양말을 꺼내 신었다. 향수를 뿌리고 중요한 자리에만 꺼내 입는 검정 코트를 걸친 후 머플러를 둘렀다. 마지막으로 손목시계를 찬 후 습관처럼, 멈춘 시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술집의 내부는 한산했다. 손님이라곤 세 테이블이 전부였다. 그들은 남녀 커플이 앉아 있는 테이블 옆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술은 좀 하나?”
   “가끔 혼자서는 마십니다.”
   이명준은 안이 조용한 방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장면을 떠올렸다. 웨이터가 왔다. 그는 안의 의견을 받아 독일식 라거 두 잔을 주문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술, 말입니다.”
   술이 나오자 이명준은 코트를 벗어 옆 의자에 걸치고, 셔츠의 팔목을 걷어 올린 채 맥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안은 한 모금을 마신 후, 잔을 내려놓았다. 예상과 달리 안은 오늘 일에 대해선 일절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름대로의 속 깊은 배려일 거라고 이명준은 생각했다.
   “다른 술도 괜찮다면 내가 한 잔 제대로 사고 싶은데?” 이명준은 웨이터를 불러 가격은 상관없으니 괜찮은 브랜디 한 병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웨이터는 금색 띠가 둘러진 검은색 병과 크리스털 컵 두 개를 가지고 왔다.
   “발데스피노라는 브랜디입니다. 스페인 쉐리 명가에서 만든 최상급 브랜디이죠.”
   웨이터는 조끼 주머니에 들어 있는 오프너를 꺼내, 병의 코르크 마개를 조심스레 들어올렸다. 코르크가 열리자 깊게 응축된 과일 향과 초콜릿 냄새가 났다. 안은 웨이터가 따른 브랜디를 살짝 맛본 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맛이 좋네요. 이렇게 맛있는 술은 살면서 처음 마셔 봅니다.”
   술잔을 든 안의 손은 유약을 발라 갓 구워낸 조형물처럼 보였다. 이명준은 술을 마시며 옆자리에 앉은 젊은 남녀를 흘깃 바라봤다. 실내가 워낙 어두운 탓에 자세히 볼 순 없었지만 두 사람에겐 흔히 남녀 사이에 흐르는 묘한 성적 긴장감은 없어 보였다. 편한 자세로 연주를 듣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고민을 끌어안은 채 괴로워하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그런 상대의 마음을 일부러 못 본 척하고 있었다. 젊고, 경험이 없고, 두려운 것이리라.
   이명준은 자연스레 안을 향해 누군가를 만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안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하나 좋자고 다른 사람을 괴롭게 만들 순 없으니까요.”
   “괴롭게 만들다니?”
   이명준은 이유를 물었다.
   “예전 저를 십 년 가까이 지켜본 동기가 그러더군요. 네 몸을 끓이면 죽도 안 나오고 검은 물만 나올 거라고. 저는 아직도 그 표현이 저란 인간을 설명하는 가장 적확한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명준은 웃으며 한 모금을 삼켰다. 술에선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대신 불을 삼킨 것처럼 속이 타들어가듯 아팠다.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안은 안경을 올리며 움츠린 고개를 폈다.
   “……그 시계 말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화제의 전환에 이명준은 놀랐다.
   “시계가 고장이 난 걸 아시면서도 그냥 차고 다니시는 건가요? 아니면,”
   “아니면?”
   “개인적으로는 그 시계가 차장님의 독특한 취향의 일부이거나 혹은 고차원적인 자기 발현의 상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명준이 당황한 걸 눈치챈 듯 안은 살짝 난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를테면 예술가들의 타투나 성직자의 십자가 목걸이처럼요.”
   이명준은 손가락 끝을 하나로 모았다. 그만 이야기를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반대로 자신의 그림자를 닮은 상대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개인적인 의견이 존재한다는 건 어떤 무리들의 공통적인 의견도 존재한다는 뜻이겠지?”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안은 고개를 숙였다. 시곗바늘은 언제나처럼 오후 7시 38분에 멈춰 있었다. 잠시 긴 침묵이 흘렀다.
   “내가 몇 년 전 이혼했다는 이야기 역시 이미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겠지?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도 들었을 테고.”
   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지만 자네가 들은 이야기 중 절반 이상은 가짜네. 대부분 자극적으로 부풀려지고, 왜곡된 이야기지.”
   이명준은 자신이 어쩌다가 친분도 없는 부하 직원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안이라면 안심이 됐다.
   “물론 이혼 사유가 아내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기 때문인 건 사실이네. 그러나 소문처럼 그녀만의 잘못은 아니었어. 당연한 말이겠지만.”
   사랑해서 한 결혼은 아니었다. 이명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에게 결혼이란 그저 외로운 사람들끼리 불이 난 건물에서 도망쳐 나와 ‘가라앉기 직전’의 배에 함께 올라탄 것과 마찬가지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녀를 너무 오래 혼자 두었던 것 같아. 사실 몇 년을 같이 살아도 우리 두 사람은 조금도 친해질 수 없었어. 서로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선 적당히 연기를 하고 비밀을 만들어야 했네. 그래서 처음 그녀의 고백을 들었을 땐, 그녀 혼자 탈출구를 찾은 거 같아 부러운 마음마저 들더군.”
   그날은 그들의 결혼 삼 주년 기념일이었다. 이명준은 출근 전, 드레스룸에서 코트 안에 받쳐 입을 스웨터를 찾다가 서랍장의 뒤편에 놓인 은색 종이봉투를 발견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겼겠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손길이 갔다. 종이봉투를 열자 푸른색 사각 종이 박스가 있었다. 박스를 열자 원통형 케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스는 푸른색 가죽으로 만들어졌고, 원통의 중앙엔 ‘PIAGET’란 은색 영문자가 박혀 있었다. 캡은 천으로 만든 쿠션처럼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중앙엔 캡을 쉽게 열 수 있도록 푸른색 실로 만든 태슬 장식이 달려 있었다. 케이스는 언뜻 값비싼 유물함처럼 보였다. 그는 조심스레 태슬의 윗부분을 당겼다. 속에 든 건, 명품관 쇼윈도에서나 볼 법한 고급 손목시계였다. 체인은 실버 스틸케이스였고, 다이얼은 짙은 블루컬러였다. 케이스 백은 투명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 안쪽의 무브먼트가 훤히 보였다. 이명준은 오늘이 그들의 결혼 삼 주년임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조금씩 심장이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은 설렘이었다. 그는 드레스룸을 빠져나와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는 아내에게 오늘 저녁 외식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아내는 컵을 든 채 몸을 돌렸다. 이제 막 세수를 하고 나온 아내의 얼굴은 방금 본 시계의 유리알처럼 반짝거렸다. 이명준은 새삼 아내의 미모에 감탄하며 문득 자신이 아내의 얼굴을 이토록 오래 들여다본 적이 무척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날 밤, 그들은 이명준이 예약한 스페인 식당에서 해산물과 새끼돼지 요리를 먹고 싸구려 와인을 두 잔씩 마셨다. 아내는 굵은 실로 장식된 아이보리 트위드 재킷에 커피색 울 팬츠를 입고 얇은 진주 팔찌를 했다. 이명준은 내년 휴가 이야기를 꺼내며 혹시 그녀에게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이야기했지만 그는 듣지 못했다. 사실 그 순간에도 이명준의 온 신경은 오늘 아침에 본 시계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가 언제쯤 시계가 든 종이봉투를 꺼내 자신에게 건넬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그녀의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녀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시계를 꺼내기 직전의 전조 같았다. 결국 이명준은 손에 들고 있던 포크를 접시에 내려놓고, 올해 추석에 회사 거래처에서 등기로 부쳐온 오십 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 두 장을 그녀에게 봉투째로 건넸다. 그녀는 모서리가 닳은 봉투를 받아 안을 열어보지도 않고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은 미처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며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명준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가 남긴 와인을 마저 마시고, 신용카드로 계산을 한 후 식당을 나왔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그의 머릿속은 오늘 아침에 본 시계의 디테일과 움직임, 유리알의 반짝거리는 빛으로 가득 차올라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내가 샤워를 하는 동안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시계가 든 봉투를 찾았지만 이미 감쪽같이 사라진 후였다. 그는 샤워를 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레오 맥커리의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신 후 억지로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감자 눈꺼풀 안에서 무언가 반짝이며 흩날렸다. 아내는 샤워를 한 뒤 책방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몇 시간쯤 지났을까. 이명준은 서늘한 어둠 속에 눈을 떴다. 아내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채로 방구석의 한 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명준은 짜증 섞인 말투로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뒤, 그녀가 그러더군.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갑자기요?”
   “그런 셈이었지.”
   “……”
   “상대는 오랜 친구라고 하더군.”
   이명준은 모은 손가락을 앞뒤로 비볐다.
   “감정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 상대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네. 궁금했어. 어떤 사람인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뭔가 확실히 정리가 될 것 같았네. 아내는 사흘 정도 고민하더니 주소 하나를 내밀더군. 여기가 그 사람의 직장이고,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다고.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두렵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 사람은 다를 거라고.”

   이명준은 다음 날, 휴가를 내고 아내가 가르쳐 준 주소로 차를 몰았다. 상대의 직장은 서울 외곽에 자리한 대학병원이었다. 이명준은 아내가 말한 대로 약속된 시간에 로비의 카페로 갔다. 십 분 정도 흘렀을까. 한 사내가 카페의 입구로 들어왔다. 이명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대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아내의 이름을 대며 손을 내밀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들은 악수를 한 후 자리에 앉았다. 이명준은 실제 눈앞에 있는 상대가 자신이 상상한 인물과 완전히 달라 조금 놀랐다. 그는 떡 벌어진 어깨에 푸른색 라운드넥 하프 가운을 걸치고 두툼한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이명준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지성과 자기 확신으로 가득 찬 눈빛엔 이제 막 사냥을 끝낸 짐승 같은 이상한 에너지가 흘러넘쳤다. 은색 안경테를 추어올릴 때마다 몇 가닥의 이마 주름이 골처럼 패였다. 죄송하지만 시간을 많이 낼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삼십 분 뒤 중요한 수술이 잡혀 있어서요. 이명준은 커피잔을 매만지며 그녀와 언제부터 알게 된 사이인지 물었다. 이십 년쯤 됩니다. 그가 말하며 깍지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때, 이명준은 상대의 팔목에서 번쩍하는 무언가를 봤고 온몸의 피가 서서히 증발되는 것 같은 전율을 느꼈다.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한 줄기 불어와 그의 몸을 감쌌다. 그 바람은 천천히 그의 속을 파고들어와 그의 살을 얼리고 뼈마디를 얼렸다. 이명준은 쓰게 웃었다. 순식간에 그의 몸을 휩쓴 차가운 분노는 지독한 유감으로 변했다. 혹시 그 시계…… 제 아내가 선물한 시계인가요? 상대는 아무 말 없이 이명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기이한 침묵 속에 시계의 초침 소리가 비상식적일 만큼 크게 이명준의 귓가에 울렸다. 창밖의 햇살이 시계의 유리알에 반사돼 번쩍거렸다. 그 순간 어떤 힘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명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무의식을 소리로 실어나르기 시작했다. 상대는 잠자코 이명준의 이야기를 듣더니 팔짱을 낀 채, 헛웃음을 터뜨렸다. 물 한 모금을 삼킨 후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니까 지금…… 수진이와 이 시계를 바꾸자는 겁니까?

   “그날 이후, 우린 깨끗이 갈라섰네. 배가 완전히 가라앉기 직전 그녀는 맨몸으로 배 위에서 뛰어내린 거야. 그후 그녀는 홀로 바다를 헤엄쳐 먼 곳으로 떠났네. 반면 난 어디로도 가지 못했지.”
   이명준은 멈춘 손목시계를 가만히 바라봤다. 술잔을 멍하니 응시하던 안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어둠 속에 반짝였다.
   “난 그에게 악착같이 시계를 빼앗아 집으로 돌아왔네. 그리고 그 시계를 손수건으로 싸서 옷장의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지. 그 후, 일 년쯤 흘렀을까. 나는 어렵사리 용기를 내 옷장에 처박아 둔 시계를 꺼냈어. 사실은 시계를 버릴 생각이었네. 그런데 놀랍게도 시곗바늘은 이미 멈춰 있더군.”
   이명준을 빤히 바라보는 안의 눈빛엔 이상한 광채가 발했다.
   “다음 날, 퇴근을 하자마자 시계의 브랜드가 입점 된 백화점으로 갔네. 직원이 개런티 카드를 요구하기에 내가 없다고 말하자 그는 시계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모니터로 몇 가지를 확인하더니 이렇게 말하더군. 아무래도 이 상품은 저희 쪽 상품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내 두 귀를 의심했네. 저희 쪽 제품이 아니라면, 이게 짝퉁이라도 된단 말씀이십니까? 그 순간 나는 내가 발음한 ‘짝퉁’이란 단어가 너무 천박해서, 무엇보다 그 단어가 지금 자신을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에 화들짝 놀랐네. 직원은 대답 대신 묘한 미소를 짓더군. 아마 이런 적이 적지 않았다는 듯, 정중하고도 학습된 표정이었지.”
   주변엔 침묵이 내려앉았다. 옆 테이블의 여자가 흐느끼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그날, 시계와 아내를 바꾸자고 했을 때 상대는 꽤 오랜 시간 아무 말도 없더군. 얼마나 지났을까. 그가 천천히 손목시계를 풀더군. 그리고 내게 건네며 말했네. 다른 뜻은 없습니다. 다만 이 시계는 저보다는 당신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군요. 오늘 일은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나는 그 시계를 받아 주머니에 넣었네. 그 후, 이혼까지 딱 한 달의 시간이 걸렸어. 마지막 순간 아내가 고맙다며 울더군.”
   안의 얼굴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그 뒤틀림이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진 꽤 시간이 걸렸다. 이명준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 고개를 숙인 채 울음을 터뜨린 여자를 멈춘 시계를 바라보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

   그들이 바에서 나왔을 때, 거리는 빗물에 젖어 검게 번들거렸다.
   “아직도 어지러워?”
   “아니.”
   수진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말이야?”
   “응.”
   “방금 한 말, 진심이야?”
   “뭐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그 이야기 말이야.”
   태오는 대답 대신 수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얼굴은 지쳐 보였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피로해 보였다. 지붕 아래로 떨어지는 비는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수진이 택시에 오르기 전, 그들은 악수를 했다. 태오는 크고 단단한 손에 힘을 실어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녀가 입은 카키색 코트의 어깨 부분이 비에 젖어 검게 변해 있었다. 택시가 떠나고 태오는 수진이 선물한 책을 껴안은 채 무작정 걸었다. 눈 덮인 길은 걸을수록 단단해졌다. 태오는 저 멀리 한 대의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다. 멀리 꽝꽝 언 강가의 다리 위에선 축제가 한창이었다. 북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흥겹게 춤을 추며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정류장엔 한 남자가 길을 잃은 사람처럼 앉아 얼굴을 닦고 있었다. 택시는 잠시 후 신호등과 함께 멈췄고, 태오의 마음속 무언가도 빛과 함께 멈췄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태오는 한 번의 결혼과 이혼, 세 번의 이사를 거치며 수진이 선물한 책을 잃어버렸다. 동시에 그 책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영영 잊어버렸다. 그 때문에 태오는 그 책의 381페이지에 적힌 하나의 문장을 읽지 못했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 문장을 읽게 될 일은 없을 터였다.
   그 문장은 찰스 어거스틴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포로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했던 호주의 노퍽섬을 언급하며 쓴 문장 중의 하나이다. “어떤 사람들의 시계는 삶의 어떤 순간 그냥 멈춘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삶의 어떤 순간 갑자기 시계가 멈춰버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서민향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제 할 일을 하는 사람에게 신뢰가 간다. 그런 사람이 출근길에 길을 잃고, 계속 길을 잃다 먼길을 떠나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이 이야기는 언젠가 쓰게 될 먼 이야기의 서문이란 생각으로 썼다.

2019/11/26
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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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단편소설 「백가지 슬픔의 문」에서 제목을 가져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