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스모그를 뚫고
금요일은 지영과 상혁의 결혼 1주년 기념일이었다. 아침에 두 사람은 커피와 삶은 달걀 또는 삶은 고구마를 한 개씩 먹고 각자 회사로 출근했다. 차를 이용해 출퇴근하는 지영은 상혁보다는 조금 여유가 있어 집안의 전기 콘센트나 냉난방기, 공기청정기 예약 시간을 조정한 뒤 몇 분 늦게 나왔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상혁은 집에서 먼저 나왔다.
지은 지 오래된 시민아파트의 노면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는 늘 새똥 천지였다. 지영은 물휴지를 꺼내 새똥이 묻은 앞 유리를 박박 문지른 뒤 시동 버튼을 눌렀다. 아파트를 벗어나 도로로 나가자마자 바로 속력을 낼 참이었다. 신호가 바뀌고 좌회전해 버스 정류장 앞을 지날 때 지영은 오른쪽 도롯가에 서 있는 상혁을 봤다. 상혁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같이 파란색 지선버스 정류장에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함께 식탁에 앉아 있을 때와 달리 상혁은 조금 후줄근해 보였다. 하지만 초콜릿 색깔 울 코트를 입은 사람은 분명 상혁이었다.
근무가 끝난 저녁, 상혁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코트를 식탁 의자에 걸어놓은 채 냉장고를 열고 소주병을 꺼냈다. 지영은 회사 사람들과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고 커피숍에 들렀다가 열 시 이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나 아침에 자기 봤잖아!” 지영이 화장솜에 액체 리무버를 묻혀 눈 화장을 지우며 말했다. “그래?” 상혁은 들릴 듯 말 듯 짧게 대답했다. 지영은 한쪽 어깨 너머로 흘러내리는 샤워가운을 잡아 올리며 상혁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우리 금요일에 어디 갈까? 난 매운 곱창 같은 거 먹고 싶은데. 결혼기념일에 곱창은 좀 그런가. 자기는 뭐 먹고 싶어? 우리 아직 신도시 타워 레스토랑에 못 가봤잖아. 이번엔 꼭 가보자. 응?” 상혁은 대답 없이 소주만 마셨다.
지영은 H만의 끝에 붙은 해양 신도시의 높은 층수 아파트 한 채를 소유하는 게 꿈이었다. 전망 좋고,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신도시의 고급 아파트에 산다는 건 생각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상혁도 그렇게 살기를 원했다. 경축일마다 불꽃놀이도 볼 수 있고 랜드마크인 노블타워에는 유명 쉐프들이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들도 입점해 있었다. 해양 신도시에서의 세련된 삶은 가까운 시일 내에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둘 다 직장이 있어 수입도 안정된 편이었고, 실현되지 못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영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노블타워 쪽을 찾았다. 꼭대기 부분의 폭이 날카롭게 좁아지는 원추형의 노블타워가 오늘밤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요즘 들어 심해진 스모그 때문이었다. 지영은 베란다로 나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헬스용 자전거 손잡이에 걸어놓은 수건 빨래 몇 장을 거실로 던졌다. 운동은커녕 아령은 문 받침대로, 실내자전거는 빨래걸이로, 발 마사지기는 물건 받침대로 사용한 지 오래였다. 수건을 다 개킨 뒤 거울을 식탁 위에 올리고 얼굴 화장을 마저 지웠다. 두꺼운 눈 화장을 지운 지영의 얼굴은 특유의 카리스마가 사라지고 조금은 순하고 여려 보였다. 그때 러닝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인 상혁이 소파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지영은 순간 식탁 위에 놓인 상혁의 노트북 가방과 텀블러를 물끄러미 보았다. 평소와 다른 점은 별로 없어 보였는데 왠지 상혁의 행동이 신경 쓰였다.
화장실로 들어간 지영은 빨래함에 넣어둔 상혁의 속옷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트렁크 스타일보다는 몸에 붙는 드로즈 스타일을 고집해 항문이 닿는 부위에 약간의 착색이 있곤 했는데 오늘은 그것마저도 깨끗했다. 지영은 샤워가운을 벗고 과산화나트륨 용액에 손을 비벼 물로 헹구고 면봉을 이용해 콧속과 귓속을 꼼꼼하게 소독했다. 미세먼지 때문에 하루도 소독과 샤워를 거를 수 없었다. 제대로 씻지 않으면 머리카락과 손톱 밑, 심지어 부엌 수납장 접시 안에까지 먼지가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지영은 아침에 알람이 울려 눈을 뜨는 순간이면 늘 초미세먼지 농도부터 확인했다. 또 외국의 어느 공과대학에서 만들었다는 지진 경보기 앱을 휴대폰에 받아놓고 지진이 났는지, 안 났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앱의 화면 맨 아래 평온하게 흘러가는 초록색 라인이 너의 지역은 안전하다는 신호였다. 지영은 샤워를 끝내고 눈에 인공 눈물을 넣은 뒤 지진 앱을 닫았다.
“우리 공무원, 오늘 많이 힘들었던 거야?” 지영은 상혁의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귓불에 입을 맞췄다. 피어싱을 했던 자국이 귓불에 아직 남아 있어 두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상혁은 싫다는 듯, 귀찮다는 듯 지영의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다 무심하게 한쪽 손을 지영의 어깨에 두르고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난 사실 닭발 같은 게 먹고 싶기도 해. 화끈한 음식 먹으면서 결혼기념일 보내는 것도 좋잖아.” 상혁은 ‘맨유’의 축구 경기를 볼 뿐, 별다른 의사 표시가 없었다. 지영은 상혁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티브이로 시선을 돌렸다. 상혁의 소주잔이 점점 더 빠르게 비어가는 것 말고, 아직은 모든 것이 괜찮았다. “난 먼저 잘게. 자기도 빨리 들어와.” 지영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지영과 상혁은 우연히 만났다. 상혁은 원래 유럽 주방용품 수출 판매회사 직원이었다. 그전에는 요식업체에서도 근무했지만 성공적으로 직업을 바꿨다. 공무원시험은 일 년 정도 준비했고 이제 공무원 2년 차였다. 지영은 이쪽 지역의 지명도 있는 전자 회사의 경영지원부에서 일했고, 협찬 일로 상혁과 몇 번 얼굴을 본 사이였다. 상혁은 늘 자신만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주장하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영을 만났고 바로 결혼했다. 지영도 가족이 단출해서 복잡할 게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은 H만 신도시 옆 구 주택단지 지구 내에 낡은 아파트를 얻었다. 모든 결혼 비용은 지영이 냈고 상징적으로 커플링만 상혁이 했다. 두 사람은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품이었다. 지영이 상혁에게 가진 유일한 불만은 아직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었고, 상혁이 지영에게 가진 유일한 불만은 자신의 얘기를 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상혁은 요즘 왠지 자기 자신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래전에 태어난, 낡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자주 들었다.
자다가 눈을 떴을 때 지영은 문틈 아래로 흐르는 주홍색 거실 불빛을 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에 걸터앉은 상혁을 봤다. 손을 뻗어 상혁의 엉덩이에 팔을 두르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깨물었다. 무게중심을 왼쪽 어깨에 주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침대에 묶인 것처럼 팔다리를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사람은 상혁이 아니었고 다른 남자였다.
온몸이 으스러질 듯 아팠다. 지영은 왼쪽 손목에 있던 머리끈으로 머리칼을 올려 묶고 거실로 나갔다. 겨우 숨을 내쉬며 잠옷 소매를 여미는 순간 식탁 위에 놓인 약 ‘공진단’이 보였다. 집에 하나씩 두면 응급 상황에 쓸 수 있다며, 지영의 엄마가 갖다 놓은 것이었다. 지영은 종이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며 벽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출근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만 거듭 생각했다. 그러다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휴대폰 연락처를 눌러 조금 전에 침대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박 부장의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혀끝이 저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비상약 통을 열고 ‘알보칠’을 찾았다. 면봉에 약을 묻혀 혀에 대는 순간 온몸을 비트는 저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지영은 입을 크게 벌려 혀 깊숙한 안쪽과 혀의 뒷면까지 뒤집어보았다. 푸르고 어두운 혀의 뒷면은 생각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지영이 박 부장을 만난 건 지영의 삶에 있어 커다란 패착이고 실수였다.
상혁은 가방을 엑스 자로 맨 뒤 구청을 나섰다. 업무용 차량을 운전해 해당 검역 중인 농장으로 가는 지방도로 위를 달리면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왼편의 서쪽 해안에 있는 신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소 로타바이러스가 퍼진 농장지대와는 전혀 다른 깔끔하고 세련된 외양을 보자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지방도로는 한산했다. 농장 진입로가 보이자 상혁은 왼쪽 방향등을 켠 채 잠깐 서 있었다. 차량 한두 대가 지나가고 좌회전을 한 뒤 약간 움푹한 흙길로 접어들면서 바퀴가 헛도는 기분이 들었다. 출장 차량을 사륜구동으로 구입하지 않은 건 구청의 실수였다. 좁은 비포장도로 오른편에 오래전에 소년원 건물로 쓰다가 버려둔 흰색 폐건물이 낮게 짜부라져 보였다. 그곳은 보기만 해도 왠지 불쾌했다.
상혁이 농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 기분 나쁜 그 파란색 다마스 밴이 보였다. 자동차에서 내려 밴으로 다가갔을 때 김 사장은 운전석에 앉아 휴대폰으로 걸그룹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왔네. 난 아까 왔는데. 애들 내리라고 할게.” 김 사장은 여전히 반말이었고, 물개처럼 엉켜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던 용역들이 하나둘 밴에서 나와 아래위가 붙은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들은 모두 김 사장의 패밀리였다. 상혁은 운전석에서 내린 김 사장에게 업무일지를 내밀며 말했다. “바이러스가 지나갔다고는 하지만 아직 상황을 잘 알 수 없으니 더 꼼꼼하게 체크해주세요.”
그들은 자동차 뒤쪽 트렁크에서 긴 장화를 꺼내 신고 얼굴에 마스크를 걸었다. 상혁은 신발을 망치지 않을까 하체에 힘을 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용역들이 농장으로 갈 준비를 끝내기를 기다렸다. H시 내의 농림축산검역본부의 협조 요청으로 한 달 전부터 관내 공무원들마저 방역 업무를 맡게 되었다. 바이러스가 나날이 넓게 퍼져 검역본부 인력만으로는 지역 내 가축 방역 관리에 한계가 있었다. 구청에는 남자 직원보다는 여자 직원이 훨씬 많았지만 이 일은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 교대로 했다. 옷과 구두가 쉽게 더러워지는 이 일이 상혁은 미치게 싫었다. 그래서 책상 밑 어두운 구석에 ‘다이소’에서 구입한 먼지털이용 솔과, 구두약을 담은 작은 상자를 숨겨두었다. 더러워진 구두를 신으면 더러운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그늘 늘 구두 상태에 집착했다.
우연히 읽은 인터넷 기사가 상혁을 자극했다. 경기도 어느 지역의 방역 공무원이 용역을 고용해 일을 대신시키고 임금을 갈취했다는 기사였다. 상혁은 그 기사를 볼 때만 해도 그 공무원들처럼 자신이 용역을 고용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기만 한다면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쪽으로 이미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상혁은 계속해서 관련된 기사들을 캡처하거나 읽어보고 있었고, 전화 한 통만으로 이내 김 사장과 그의 패밀리를 만나게 됐다. 이 일은 명백히 불법이었다. “그럼, 저는 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상혁이 농장으로 출발하는 다마스 밴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차로 돌아와 백미러에 얼굴을 비춘 순간,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 닫으며 약간은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좁은 산 비탈길 너머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웃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이번 주면 다 끝나게 되어 있었다.
지영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파헬벨의 '캐논' 아다지오를 들으며 노블타워 레스토랑 직원과 전화가 연결되길 기다렸다. “예약을 해놓고 오시지 않으면 추후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직원의 말투는 자동응답기처럼 모든 음절의 간격이 똑같았다. 지영은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하나 생각하다가 사무실 내선 전화가 연결돼 급히 전화를 끊었다. “네, 사회공헌팀장 한지영입니다.” “지영이니? 나야 선주.” “어 선주, 오랜만이야.” “잠깐만 기다려봐, 누구 좀 바꿔줄게.” 누구인지 묻고 말고 할 틈도 없이 바로 전화기가 넘어갔다. “오랜만이네.” 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수화기를 전화기 위에 올려놓아버렸고 잠깐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박 부장이었다. 어젯밤의 악몽이 현실이 된 것이다. 데스크에 당분간 전화를 연결하지 말아 달라고 하고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손을 부들부들 떨며 변기 뚜껑을 올렸다. 순식간에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온몸이 터질 듯 아팠다. 정말 박 부장이었다. 몇 년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지영을 땅속에 파묻으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날 배신하면 묻어버린다.”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지영의 귀에 또 들려왔다. 지영은 변기 위에 앉아 얼굴을 감싼 채 가만히 있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거울을 봤다. 마스카라는 퍼져 눈자위는 시커멓고 얼굴이 흐트러져 보였다. 지영은 휴지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은 뒤 평소와 달리 고개를 푹 숙인 채 복도를 걸어 겨우 사무실로 돌아갔다.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 용역들이 점심으로 먹을 초밥을 사 들고 농장 앞까지 갔을 때 상혁은 지영의 전화를 받았다. 힘이 없고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오늘도 현장이야? 자기 내일 우리 타워에 가기로 한 거 기억하지? 벌써 결혼 1주년이라니, 안 믿어진다.” 밝은 목소리가 아니어서 상혁은 전화기를 바꿔 들고 다시 물었다. “지영 씨, 어디 아파?” 그때 농장 쪽에서 용역 중 한 명이 초밥을 받기 위해 상혁에게 다가왔다. 근육질인 팔 전체가 초록색 문신으로 덮인 사람이었다. 상혁은 바로 전화를 끊고 용역에게 물었다. “농장 안은 어때요?” “어떻기는요. 죽을 맛이죠. 와서 보든가.” 초록색 문신이 움직이기만 해도 역겨운 냄새가 났다. 용역은 초밥을 양손에 들고 언덕을 넘어가야 했다. 소들이 설사를 하고 죽어 나가는 곳에서 초밥을 먹다니! 상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혁이 바라는 건 이번 주가 빨리 지나가는 것이었고 저런 허접한 용역들은 절대 다시 만나지 않는 것이었다.
오늘밤엔 상혁의 자리에 지영이 앉아 소주를 마셨다. 오늘따라 대기가 깨끗해 신도시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말이지 드물게 맑은 밤하늘이었는데, 창문을 열고, 천장을 부수고, 화장실 변기를 타고 박 부장이 들어올 것만 같았다. 박 부장은 지영이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에서 만났다. 처음엔 그저 친절한 상사였다가 나중엔 연인이 됐고 나중엔 악연이 됐다. 인상 좋고 마음씨 좋던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성마르고 괴팍한 성격으로 변했고 외모도 점점 수척해졌다. 지영은 왜 그에게 지배당했는지 그때의 자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낮에 들은 그 끔찍한 목소리가 왜 다시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밤 아홉 시가 되어도 상혁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혁은 아침 회의에서 농장 상황을 묻는 상사의 질문에 허둥대며 대답을 잘하지 못했다. 일이 벌어지고 있는 농장에는 가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실 현장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주말이 고비라니까 최 주임이 고생 좀 해. 바이러스가 더 퍼지면 끝장이야.” 바이러스는 상승하는 더운 기운을 타고 H시에 확실하게 내려앉았다. 아침부터 기온이 뜨거웠고 혀가 타는 기분이 들었다. 상혁은 어젯밤에도 자정이 넘어 퇴근했고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다시 현장 근무였다. “오늘은 아침부터 덥네. 약속한 대로 초과근무 수당 줘야 해. 그리고 점심은 초밥 말고 우나기 벤또로 부탁할게. 매일 같은 걸 먹기는 싫더라구.” 애초에 소나 돼지를 보살피려고 공무원이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혁은 일을 그르쳐 용역을 쓴 게 발각되고 흠집이 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아직 2년 차에 불과한데 벌써부터 얼룩진 경력을 달고 싶지는 않았다.
지영은 퇴근 후 마트에 들렀다. 냉기가 가득한 상품 진열대를 한 바퀴 돌아 오가닉 코너의 샐러드 팩과 오렌지, 와인과 치즈, 김치를 산 뒤 휴대폰에 저장해놓은 메모를 보며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계산대에서 계산할 순서를 기다리는 사이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지만 평소 습관대로 받지 않았다. 지영은 계산대를 통과해 생수병이 가득 쌓여있는 복도 측면에 붙은 짐 운반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 2층 주차장까지 단번에 내려갈 수 있는 장치였다. 지영은 트렁크를 열고 세탁소에 보낼 세탁물과 운동화와 청소도구들을 뒤로 밀치고 장바구니를 올린 뒤 차 문을 닫았다. “전화를 안 받네.” 몸을 돌리는 순간 지영은 두 무릎이 꺾여버려, 차체를 한 손으로 짚은 채 상대를 건너다봤다. “여기서 뭐 하세요?” 피했다고,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박 부장은 멀쩡한 얼굴로 지영의 앞에 서 있었다. 큰 키는 아니어도 다부지고 안정감 있는 체격이었는데 몹시 수척해 보였고, 전체적으로 탁하고 어두운 갈색 느낌이 강한 인상으로 변한 것 같았다. “몸이 약간 불었네.” 박 부장이 지영의 몸을 빠르게 스캔했다. 지영은 순간 이제 더는 피하지 않겠다고 아랫배에 힘을 모았다. “나에 대해 또 뭘 알아냈는지 말해봐요.” 박 부장은 대답 대신 가볍게 웃었다.
조명 탓인지도 몰라. 지영은 고요하고 어두운 주차장 이곳저곳을 쳐다봤다. 주차장은 이상하게도 보통 때보다 한산했다. 지영은 불빛이 있는 주차 정산소 쪽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고, 이태리제 중저가 양복 안으로 엄청난 근육을 숨기고 있을 게 뻔한 박 부장은 겐조 향수 냄새를 풍기며 지영의 뒤를 재빠르게 따라왔다. “너하고 가보고 싶은 데가 있어서 왔어.” 약간 사이를 두고 뒤에서 따라오던 그는 뒤에서 단숨에 지영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박 부장은 지영의 목을 뒤에서 한 손으로 감은 뒤 순식간에 달랑 어깨에 들쳐업고 몇 걸음 돌아가 이미 열려 있는 자신의 차 트렁크 안에 지영을 밀어넣어 버렸다. 불행하게도 주차 정산소를 지나 지상으로 나갈 때 트렁크 문틈에 낀 지영의 재킷 자락은 검은 색깔인 탓에 직원의 눈에 띠지 않았다. 지영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뒷머리가 띵한 채 들려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를 들었다. 역겹고 진한 겐조 향수 냄새가 모든 의욕을 앗아갔고, 도망쳤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만들어버렸다. “그래 죽여라. 결혼기념일에 죽겠군!” 지영은 이를 악물며 조금 웃었고 이전에도 누워본 적 있는 트렁크에 다시 눕는 것이 왠지 마음 편했다.
상혁은 용역들에 둘러싸인 채 마티즈를 뒤로 두고 서 있었다. 대기는 갑자기 스모그에 휩싸여 저쪽에 세워둔 상혁의 자동차 윤곽마저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했다. “돈을 다 드렸는데, 약속한 금액 다 지불했는데 이제 와서 뭔 소리예요.” 상혁은 김 사장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 사장은 갑자기 용역 중 한 명에게 손짓을 했고 한 명이 차로 걸어갔다. 상혁은 불안에 떨며 한마디 더 했다. “이런 식으로 하시면 다음번에는 같이 일 못 합니다.” 돌아온 용역의 손에는 손잡이가 짧고 끝이 날카로운 과도 칼이 들려 있었다. “야 이 개새끼야, 우리가 너 대신 병든 소 약 쳐주고, 뒤진 것들 옮기고 했는데 그게 쉬운 줄 알아? 내가 구청에 전화 한 통 하면 넌 끝장이야. 야, 차 문 열어, 이 새끼 죽여 버리게. 아니 저기 현장으로 데리고 가서 송아지 새끼들 위로 던져버릴까. 야, 어떻게 생각하냐 니들?” 용역들이 움직일 때마다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찔렀고 질척거리는 장화 소리가 요란했다. 주변은 불투명한 채 한층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때 동시에 땅이 요동치듯 용역들과 상혁의 휴대폰에 재난 문자가 도착했다. 스모그 위험 경보였다. “저기 교도소 자리 보여? 저기 가서 뒤질래, 돈 더 낼래? 지갑에 있는 거 다 꺼내. 카드 비번 적고.”
김 사장이 상혁을 위협하는 동안 다른 용역들은 옷을 갈아입은 뒤 벗은 옷을 커다란 비닐에 담았다. 그들은 이런 장면이 모두 다 일의 연장인 듯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상혁은 고개를 돌려 소년원 쪽을 보았다. 방치된 건물의 용도나 저런 상태로 방치된 원인, 상세한 구조 등을 찾아보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었다. “왜 저기 가고 싶냐? 내가 저기 출신야. 돈 내기 싫으면 저기 묶어둘 테니까 그렇게 알아. 니놈이 하기 싫은 일 우리가 해주는 거 감사하지 않냐? 니들 같은 공무원들이 뭘 알겠니.” 상혁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김 사장님, 저한테 이렇게 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제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상혁은 용역들에게 어깨를 잡혔고 김 사장이 상혁의 배 위에 올라앉았다. “야, 내 가방에서 그거 가져와.” 상혁은 울고 싶었다. 김 사장은 상혁의 입을 벌리고 튜브에 든 치약 같은 걸 짜 넣었다. 순간 상혁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저항했고 그 순간에도 뒤축이 까지고 망가질 구두 걱정을 했다. 입속에 들어온 끈적한 것은 역겨운 핑크색의 틀니 고정용 본드 '픽소덴트(fixodent)'였다. “너 사람 무시하면 땅속에 묻어버린다. 입 벌려, 벌리라구!”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김 사장은 상혁을 내버려 둔 채 차에 탔고, 입속에 든 것을 뱉어내느라 상혁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시동을 건 마티즈가 스모그에 휩싸인 잿빛 숲을 벗어나 도로 쪽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뱉어내도 입안에 든 끈적한 것들은 입속을 맴돌 뿐 쉽게 뱉어내지지 않았다. 신발은 진흙 천지였고 온몸이 땀에 젖어 후줄근했다. 일곱시까지 신도시 레스토랑으로 가려면 속도를 내서 달려야 했다. 어쨌든 상혁은 시동을 걸었다. 자동차 바퀴가 패인 바닥에 박히지 않기만 바랐다. 상혁은 마시다 둔 지 오래된 물병을 열었다. 밍밍하다 못해 썩는 냄새가 났다. 물을 입속에 머금은 채 진득한 것들을 떼어내려고 열심히 혀를 놀렸다. 레스토랑 화장실에 가 구두를 닦고 지영에게 선물을 주고 스테이크를 먹고 집으로 돌아가면 하루가 끝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결혼기념일을 사람들은 그렇게 보낸다. 자동차 뒷자리에 놓아둔 꽃과 선물은 안전했다.
출발한 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상혁은 지방도로 위였고, 20킬로도 속도를 낼 수 없을 만큼 시야가 어두웠다. 재난 문자는 계속해서 울려댔고 스모그 지수는 사상 최대치였다. 상혁은 아파트 근처까지도 가지 못하고 도로 옆에서 한 블록 떨어진 대로변에 차를 세웠다. 거기서부터 신도시까지 직선거리로 30분이면 충분히 걸어갔다. 상혁은 몸을 뭉개버릴 듯 휘감아 오는 스모그 너머로 반짝이는 주홍색 자동차 불빛을 보았다. 하지만 자동차들은 대로에 그대로 서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모두 차를 버리고 걷기 시작했고 앞이 보이지 않아 우왕좌왕했고, 곧 서로 몸을 부딪쳤다. 휴대폰의 손전등 기능만이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상혁은 저만치 보이는 신도시로 가는 구름다리의 위치를 가늠해보았다. 다리만 지나면 바로 신도시 선착장 입구였다.
상혁은 다리 난간에 몸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몹시 배가 고팠다. 길 건너편 선착장에 서 있는 배의 불빛이 보였다. 불빛도 스모그 빛깔이었다. 선착장의 배도 희미하고 그 너머의 높다란 타워도 중간이 잘린 것처럼 보였다. 더는 먼지 천지인 바깥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안에 들어가 따뜻한 김이 나는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싶었다. 갑자기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다리 위를 지나갔다. 숨을 커다랗게 쉬고 눈앞을 똑바로 보려고 했다. 그때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스모그로 인해 오늘 유람선 운항은 중단합니다. 승객 여러분은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모두들 편안한 귀갓길 되시길 바랍니다.” 상혁의 손에는 지영에게 줄 꽃과 선물이 든 종이가방이 여전히 들려있었다. 상혁은 입안에 손을 넣은 채 끈적한 틀니 고정 접착제가 남아있는지 입속을 확인했다. 이상하게도 입안이 따뜻했다.
갑자기 자동차가 다리 위에 멈추고 힘없이 트렁크 문이 열렸다. 몇 초간 시간이 흘렀다. 지영은 스모그에 휩싸인 암울한 도시를 옆으로 누운 채 보고 있었다. 겨우 몸을 움직여 트렁크에서 기어나왔고 문을 닫은 뒤 박 부장을 돌아보았다. 박 부장은 지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노블타워 꼭대기가 아주 조금만, 허공에 뜬 채 시야에 들어왔다. 이 도시에서는 사실 어디에서나 저 타워가 보였다. 상혁이 늦을 리는 없었다. 지영은 시야를 가리는 상황에서도 가방 속에 손을 넣어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손지영 손님, 오늘 예약한 거 맞으시죠? 오늘 오시나요? 지금 스모그 때문에 예약 캔슬하시는 분이 많아서요. 확인차 전화 드립니다.” 지영은 그때 사방에서 거세지는 자동차 클랙슨 소리를 들었다. “그럼요, 저 지금 가고 있어요.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가고 있어요. 거의 다 온 거 같아요. 그런데 배는 운항하겠죠?” 순간 전화가 딱 끊어졌다.
지영은 다리를 건너 선착장으로 갈 생각이었다. 다리 위는 온통 스모그투성이였지만 지영은 그것을 뚫고 상혁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스모그만 걷힌다면, 오늘밤만 무사히 지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중얼거리며 지영은 바로 눈앞도 보이지 않는 다리 위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이 모든 것이 다 보인다는 듯, 지영을 치고 지나 다리 위를 가로질렀다.
지은 지 오래된 시민아파트의 노면 주차장에 세워둔 승용차는 늘 새똥 천지였다. 지영은 물휴지를 꺼내 새똥이 묻은 앞 유리를 박박 문지른 뒤 시동 버튼을 눌렀다. 아파트를 벗어나 도로로 나가자마자 바로 속력을 낼 참이었다. 신호가 바뀌고 좌회전해 버스 정류장 앞을 지날 때 지영은 오른쪽 도롯가에 서 있는 상혁을 봤다. 상혁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같이 파란색 지선버스 정류장에 서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함께 식탁에 앉아 있을 때와 달리 상혁은 조금 후줄근해 보였다. 하지만 초콜릿 색깔 울 코트를 입은 사람은 분명 상혁이었다.
근무가 끝난 저녁, 상혁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코트를 식탁 의자에 걸어놓은 채 냉장고를 열고 소주병을 꺼냈다. 지영은 회사 사람들과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고 커피숍에 들렀다가 열 시 이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나 아침에 자기 봤잖아!” 지영이 화장솜에 액체 리무버를 묻혀 눈 화장을 지우며 말했다. “그래?” 상혁은 들릴 듯 말 듯 짧게 대답했다. 지영은 한쪽 어깨 너머로 흘러내리는 샤워가운을 잡아 올리며 상혁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우리 금요일에 어디 갈까? 난 매운 곱창 같은 거 먹고 싶은데. 결혼기념일에 곱창은 좀 그런가. 자기는 뭐 먹고 싶어? 우리 아직 신도시 타워 레스토랑에 못 가봤잖아. 이번엔 꼭 가보자. 응?” 상혁은 대답 없이 소주만 마셨다.
지영은 H만의 끝에 붙은 해양 신도시의 높은 층수 아파트 한 채를 소유하는 게 꿈이었다. 전망 좋고,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신도시의 고급 아파트에 산다는 건 생각만 해도 만족스러웠다. 상혁도 그렇게 살기를 원했다. 경축일마다 불꽃놀이도 볼 수 있고 랜드마크인 노블타워에는 유명 쉐프들이 운영하는 고급 레스토랑들도 입점해 있었다. 해양 신도시에서의 세련된 삶은 가까운 시일 내에 실현될 것처럼 보였다. 둘 다 직장이 있어 수입도 안정된 편이었고, 실현되지 못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영은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노블타워 쪽을 찾았다. 꼭대기 부분의 폭이 날카롭게 좁아지는 원추형의 노블타워가 오늘밤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요즘 들어 심해진 스모그 때문이었다. 지영은 베란다로 나가 블라인드를 내리고 헬스용 자전거 손잡이에 걸어놓은 수건 빨래 몇 장을 거실로 던졌다. 운동은커녕 아령은 문 받침대로, 실내자전거는 빨래걸이로, 발 마사지기는 물건 받침대로 사용한 지 오래였다. 수건을 다 개킨 뒤 거울을 식탁 위에 올리고 얼굴 화장을 마저 지웠다. 두꺼운 눈 화장을 지운 지영의 얼굴은 특유의 카리스마가 사라지고 조금은 순하고 여려 보였다. 그때 러닝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인 상혁이 소파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지영은 순간 식탁 위에 놓인 상혁의 노트북 가방과 텀블러를 물끄러미 보았다. 평소와 다른 점은 별로 없어 보였는데 왠지 상혁의 행동이 신경 쓰였다.
화장실로 들어간 지영은 빨래함에 넣어둔 상혁의 속옷을 손가락으로 들어올렸다. 트렁크 스타일보다는 몸에 붙는 드로즈 스타일을 고집해 항문이 닿는 부위에 약간의 착색이 있곤 했는데 오늘은 그것마저도 깨끗했다. 지영은 샤워가운을 벗고 과산화나트륨 용액에 손을 비벼 물로 헹구고 면봉을 이용해 콧속과 귓속을 꼼꼼하게 소독했다. 미세먼지 때문에 하루도 소독과 샤워를 거를 수 없었다. 제대로 씻지 않으면 머리카락과 손톱 밑, 심지어 부엌 수납장 접시 안에까지 먼지가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지영은 아침에 알람이 울려 눈을 뜨는 순간이면 늘 초미세먼지 농도부터 확인했다. 또 외국의 어느 공과대학에서 만들었다는 지진 경보기 앱을 휴대폰에 받아놓고 지진이 났는지, 안 났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앱의 화면 맨 아래 평온하게 흘러가는 초록색 라인이 너의 지역은 안전하다는 신호였다. 지영은 샤워를 끝내고 눈에 인공 눈물을 넣은 뒤 지진 앱을 닫았다.
“우리 공무원, 오늘 많이 힘들었던 거야?” 지영은 상혁의 옆으로 다가가 앉으며 귓불에 입을 맞췄다. 피어싱을 했던 자국이 귓불에 아직 남아 있어 두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상혁은 싫다는 듯, 귀찮다는 듯 지영의 반대편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다 무심하게 한쪽 손을 지영의 어깨에 두르고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난 사실 닭발 같은 게 먹고 싶기도 해. 화끈한 음식 먹으면서 결혼기념일 보내는 것도 좋잖아.” 상혁은 ‘맨유’의 축구 경기를 볼 뿐, 별다른 의사 표시가 없었다. 지영은 상혁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티브이로 시선을 돌렸다. 상혁의 소주잔이 점점 더 빠르게 비어가는 것 말고, 아직은 모든 것이 괜찮았다. “난 먼저 잘게. 자기도 빨리 들어와.” 지영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지영과 상혁은 우연히 만났다. 상혁은 원래 유럽 주방용품 수출 판매회사 직원이었다. 그전에는 요식업체에서도 근무했지만 성공적으로 직업을 바꿨다. 공무원시험은 일 년 정도 준비했고 이제 공무원 2년 차였다. 지영은 이쪽 지역의 지명도 있는 전자 회사의 경영지원부에서 일했고, 협찬 일로 상혁과 몇 번 얼굴을 본 사이였다. 상혁은 늘 자신만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주장하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영을 만났고 바로 결혼했다. 지영도 가족이 단출해서 복잡할 게 별로 없었다. 두 사람은 H만 신도시 옆 구 주택단지 지구 내에 낡은 아파트를 얻었다. 모든 결혼 비용은 지영이 냈고 상징적으로 커플링만 상혁이 했다. 두 사람은 말수가 적고 조용한 성품이었다. 지영이 상혁에게 가진 유일한 불만은 아직 담배를 피운다는 것이었고, 상혁이 지영에게 가진 유일한 불만은 자신의 얘기를 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상혁은 요즘 왠지 자기 자신이 몹시 불만스러웠다. 많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래전에 태어난, 낡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자주 들었다.
자다가 눈을 떴을 때 지영은 문틈 아래로 흐르는 주홍색 거실 불빛을 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지나 다시 눈을 떴을 때 침대에 걸터앉은 상혁을 봤다. 손을 뻗어 상혁의 엉덩이에 팔을 두르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혀를 깨물었다. 무게중심을 왼쪽 어깨에 주고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전혀 움직여지지 않았다. 침대에 묶인 것처럼 팔다리를 전혀 움직일 수 없었고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침대 끝에 걸터앉은 사람은 상혁이 아니었고 다른 남자였다.
온몸이 으스러질 듯 아팠다. 지영은 왼쪽 손목에 있던 머리끈으로 머리칼을 올려 묶고 거실로 나갔다. 겨우 숨을 내쉬며 잠옷 소매를 여미는 순간 식탁 위에 놓인 약 ‘공진단’이 보였다. 집에 하나씩 두면 응급 상황에 쓸 수 있다며, 지영의 엄마가 갖다 놓은 것이었다. 지영은 종이 포장지를 만지작거리며 벽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출근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만 거듭 생각했다. 그러다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휴대폰 연락처를 눌러 조금 전에 침대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박 부장의 전화번호를 확인했다. 혀끝이 저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화장실에 들어가 비상약 통을 열고 ‘알보칠’을 찾았다. 면봉에 약을 묻혀 혀에 대는 순간 온몸을 비트는 저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지영은 입을 크게 벌려 혀 깊숙한 안쪽과 혀의 뒷면까지 뒤집어보았다. 푸르고 어두운 혀의 뒷면은 생각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지영이 박 부장을 만난 건 지영의 삶에 있어 커다란 패착이고 실수였다.
상혁은 가방을 엑스 자로 맨 뒤 구청을 나섰다. 업무용 차량을 운전해 해당 검역 중인 농장으로 가는 지방도로 위를 달리면서 샌드위치를 먹었다. 왼편의 서쪽 해안에 있는 신도시의 스카이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소 로타바이러스가 퍼진 농장지대와는 전혀 다른 깔끔하고 세련된 외양을 보자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지방도로는 한산했다. 농장 진입로가 보이자 상혁은 왼쪽 방향등을 켠 채 잠깐 서 있었다. 차량 한두 대가 지나가고 좌회전을 한 뒤 약간 움푹한 흙길로 접어들면서 바퀴가 헛도는 기분이 들었다. 출장 차량을 사륜구동으로 구입하지 않은 건 구청의 실수였다. 좁은 비포장도로 오른편에 오래전에 소년원 건물로 쓰다가 버려둔 흰색 폐건물이 낮게 짜부라져 보였다. 그곳은 보기만 해도 왠지 불쾌했다.
상혁이 농장 입구에 도착했을 때 기분 나쁜 그 파란색 다마스 밴이 보였다. 자동차에서 내려 밴으로 다가갔을 때 김 사장은 운전석에 앉아 휴대폰으로 걸그룹 동영상을 보고 있었다. “왔네. 난 아까 왔는데. 애들 내리라고 할게.” 김 사장은 여전히 반말이었고, 물개처럼 엉켜 뒷좌석에 널브러져 있던 용역들이 하나둘 밴에서 나와 아래위가 붙은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들은 모두 김 사장의 패밀리였다. 상혁은 운전석에서 내린 김 사장에게 업무일지를 내밀며 말했다. “바이러스가 지나갔다고는 하지만 아직 상황을 잘 알 수 없으니 더 꼼꼼하게 체크해주세요.”
그들은 자동차 뒤쪽 트렁크에서 긴 장화를 꺼내 신고 얼굴에 마스크를 걸었다. 상혁은 신발을 망치지 않을까 하체에 힘을 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용역들이 농장으로 갈 준비를 끝내기를 기다렸다. H시 내의 농림축산검역본부의 협조 요청으로 한 달 전부터 관내 공무원들마저 방역 업무를 맡게 되었다. 바이러스가 나날이 넓게 퍼져 검역본부 인력만으로는 지역 내 가축 방역 관리에 한계가 있었다. 구청에는 남자 직원보다는 여자 직원이 훨씬 많았지만 이 일은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 교대로 했다. 옷과 구두가 쉽게 더러워지는 이 일이 상혁은 미치게 싫었다. 그래서 책상 밑 어두운 구석에 ‘다이소’에서 구입한 먼지털이용 솔과, 구두약을 담은 작은 상자를 숨겨두었다. 더러워진 구두를 신으면 더러운 사람이 되는 것 같아 그늘 늘 구두 상태에 집착했다.
우연히 읽은 인터넷 기사가 상혁을 자극했다. 경기도 어느 지역의 방역 공무원이 용역을 고용해 일을 대신시키고 임금을 갈취했다는 기사였다. 상혁은 그 기사를 볼 때만 해도 그 공무원들처럼 자신이 용역을 고용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에는 임금을 제대로 지급하기만 한다면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다는 쪽으로 이미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상혁은 계속해서 관련된 기사들을 캡처하거나 읽어보고 있었고, 전화 한 통만으로 이내 김 사장과 그의 패밀리를 만나게 됐다. 이 일은 명백히 불법이었다. “그럼, 저는 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상혁이 농장으로 출발하는 다마스 밴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차로 돌아와 백미러에 얼굴을 비춘 순간, 입술을 동그랗게 벌렸다 닫으며 약간은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좁은 산 비탈길 너머는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곳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웃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이번 주면 다 끝나게 되어 있었다.
지영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파헬벨의 '캐논' 아다지오를 들으며 노블타워 레스토랑 직원과 전화가 연결되길 기다렸다. “예약을 해놓고 오시지 않으면 추후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직원의 말투는 자동응답기처럼 모든 음절의 간격이 똑같았다. 지영은 무슨 옷을 입고 가야 하나 생각하다가 사무실 내선 전화가 연결돼 급히 전화를 끊었다. “네, 사회공헌팀장 한지영입니다.” “지영이니? 나야 선주.” “어 선주, 오랜만이야.” “잠깐만 기다려봐, 누구 좀 바꿔줄게.” 누구인지 묻고 말고 할 틈도 없이 바로 전화기가 넘어갔다. “오랜만이네.” 지영은 자기도 모르게 수화기를 전화기 위에 올려놓아버렸고 잠깐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박 부장이었다. 어젯밤의 악몽이 현실이 된 것이다. 데스크에 당분간 전화를 연결하지 말아 달라고 하고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손을 부들부들 떨며 변기 뚜껑을 올렸다. 순식간에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온몸이 터질 듯 아팠다. 정말 박 부장이었다. 몇 년 만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지영을 땅속에 파묻으려고 했던 사람이었다. “날 배신하면 묻어버린다.”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지영의 귀에 또 들려왔다. 지영은 변기 위에 앉아 얼굴을 감싼 채 가만히 있었다.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거울을 봤다. 마스카라는 퍼져 눈자위는 시커멓고 얼굴이 흐트러져 보였다. 지영은 휴지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은 뒤 평소와 달리 고개를 푹 숙인 채 복도를 걸어 겨우 사무실로 돌아갔다.
차를 타고 시내로 나가 용역들이 점심으로 먹을 초밥을 사 들고 농장 앞까지 갔을 때 상혁은 지영의 전화를 받았다. 힘이 없고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오늘도 현장이야? 자기 내일 우리 타워에 가기로 한 거 기억하지? 벌써 결혼 1주년이라니, 안 믿어진다.” 밝은 목소리가 아니어서 상혁은 전화기를 바꿔 들고 다시 물었다. “지영 씨, 어디 아파?” 그때 농장 쪽에서 용역 중 한 명이 초밥을 받기 위해 상혁에게 다가왔다. 근육질인 팔 전체가 초록색 문신으로 덮인 사람이었다. 상혁은 바로 전화를 끊고 용역에게 물었다. “농장 안은 어때요?” “어떻기는요. 죽을 맛이죠. 와서 보든가.” 초록색 문신이 움직이기만 해도 역겨운 냄새가 났다. 용역은 초밥을 양손에 들고 언덕을 넘어가야 했다. 소들이 설사를 하고 죽어 나가는 곳에서 초밥을 먹다니! 상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혁이 바라는 건 이번 주가 빨리 지나가는 것이었고 저런 허접한 용역들은 절대 다시 만나지 않는 것이었다.
오늘밤엔 상혁의 자리에 지영이 앉아 소주를 마셨다. 오늘따라 대기가 깨끗해 신도시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말이지 드물게 맑은 밤하늘이었는데, 창문을 열고, 천장을 부수고, 화장실 변기를 타고 박 부장이 들어올 것만 같았다. 박 부장은 지영이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간 첫 직장에서 만났다. 처음엔 그저 친절한 상사였다가 나중엔 연인이 됐고 나중엔 악연이 됐다. 인상 좋고 마음씨 좋던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성마르고 괴팍한 성격으로 변했고 외모도 점점 수척해졌다. 지영은 왜 그에게 지배당했는지 그때의 자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낮에 들은 그 끔찍한 목소리가 왜 다시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밤 아홉 시가 되어도 상혁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혁은 아침 회의에서 농장 상황을 묻는 상사의 질문에 허둥대며 대답을 잘하지 못했다. 일이 벌어지고 있는 농장에는 가지도 않았기 때문에 사실 현장을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주말이 고비라니까 최 주임이 고생 좀 해. 바이러스가 더 퍼지면 끝장이야.” 바이러스는 상승하는 더운 기운을 타고 H시에 확실하게 내려앉았다. 아침부터 기온이 뜨거웠고 혀가 타는 기분이 들었다. 상혁은 어젯밤에도 자정이 넘어 퇴근했고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다시 현장 근무였다. “오늘은 아침부터 덥네. 약속한 대로 초과근무 수당 줘야 해. 그리고 점심은 초밥 말고 우나기 벤또로 부탁할게. 매일 같은 걸 먹기는 싫더라구.” 애초에 소나 돼지를 보살피려고 공무원이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혁은 일을 그르쳐 용역을 쓴 게 발각되고 흠집이 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아직 2년 차에 불과한데 벌써부터 얼룩진 경력을 달고 싶지는 않았다.
지영은 퇴근 후 마트에 들렀다. 냉기가 가득한 상품 진열대를 한 바퀴 돌아 오가닉 코너의 샐러드 팩과 오렌지, 와인과 치즈, 김치를 산 뒤 휴대폰에 저장해놓은 메모를 보며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계산대에서 계산할 순서를 기다리는 사이 모르는 전화번호로 전화가 걸려왔지만 평소 습관대로 받지 않았다. 지영은 계산대를 통과해 생수병이 가득 쌓여있는 복도 측면에 붙은 짐 운반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지하 2층 주차장까지 단번에 내려갈 수 있는 장치였다. 지영은 트렁크를 열고 세탁소에 보낼 세탁물과 운동화와 청소도구들을 뒤로 밀치고 장바구니를 올린 뒤 차 문을 닫았다. “전화를 안 받네.” 몸을 돌리는 순간 지영은 두 무릎이 꺾여버려, 차체를 한 손으로 짚은 채 상대를 건너다봤다. “여기서 뭐 하세요?” 피했다고,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박 부장은 멀쩡한 얼굴로 지영의 앞에 서 있었다. 큰 키는 아니어도 다부지고 안정감 있는 체격이었는데 몹시 수척해 보였고, 전체적으로 탁하고 어두운 갈색 느낌이 강한 인상으로 변한 것 같았다. “몸이 약간 불었네.” 박 부장이 지영의 몸을 빠르게 스캔했다. 지영은 순간 이제 더는 피하지 않겠다고 아랫배에 힘을 모았다. “나에 대해 또 뭘 알아냈는지 말해봐요.” 박 부장은 대답 대신 가볍게 웃었다.
조명 탓인지도 몰라. 지영은 고요하고 어두운 주차장 이곳저곳을 쳐다봤다. 주차장은 이상하게도 보통 때보다 한산했다. 지영은 불빛이 있는 주차 정산소 쪽으로 빠르게 걷기 시작했고, 이태리제 중저가 양복 안으로 엄청난 근육을 숨기고 있을 게 뻔한 박 부장은 겐조 향수 냄새를 풍기며 지영의 뒤를 재빠르게 따라왔다. “너하고 가보고 싶은 데가 있어서 왔어.” 약간 사이를 두고 뒤에서 따라오던 그는 뒤에서 단숨에 지영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박 부장은 지영의 목을 뒤에서 한 손으로 감은 뒤 순식간에 달랑 어깨에 들쳐업고 몇 걸음 돌아가 이미 열려 있는 자신의 차 트렁크 안에 지영을 밀어넣어 버렸다. 불행하게도 주차 정산소를 지나 지상으로 나갈 때 트렁크 문틈에 낀 지영의 재킷 자락은 검은 색깔인 탓에 직원의 눈에 띠지 않았다. 지영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고 뒷머리가 띵한 채 들려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를 들었다. 역겹고 진한 겐조 향수 냄새가 모든 의욕을 앗아갔고, 도망쳤지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만들어버렸다. “그래 죽여라. 결혼기념일에 죽겠군!” 지영은 이를 악물며 조금 웃었고 이전에도 누워본 적 있는 트렁크에 다시 눕는 것이 왠지 마음 편했다.
상혁은 용역들에 둘러싸인 채 마티즈를 뒤로 두고 서 있었다. 대기는 갑자기 스모그에 휩싸여 저쪽에 세워둔 상혁의 자동차 윤곽마저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했다. “돈을 다 드렸는데, 약속한 금액 다 지불했는데 이제 와서 뭔 소리예요.” 상혁은 김 사장을 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김 사장은 갑자기 용역 중 한 명에게 손짓을 했고 한 명이 차로 걸어갔다. 상혁은 불안에 떨며 한마디 더 했다. “이런 식으로 하시면 다음번에는 같이 일 못 합니다.” 돌아온 용역의 손에는 손잡이가 짧고 끝이 날카로운 과도 칼이 들려 있었다. “야 이 개새끼야, 우리가 너 대신 병든 소 약 쳐주고, 뒤진 것들 옮기고 했는데 그게 쉬운 줄 알아? 내가 구청에 전화 한 통 하면 넌 끝장이야. 야, 차 문 열어, 이 새끼 죽여 버리게. 아니 저기 현장으로 데리고 가서 송아지 새끼들 위로 던져버릴까. 야, 어떻게 생각하냐 니들?” 용역들이 움직일 때마다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찔렀고 질척거리는 장화 소리가 요란했다. 주변은 불투명한 채 한층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때 동시에 땅이 요동치듯 용역들과 상혁의 휴대폰에 재난 문자가 도착했다. 스모그 위험 경보였다. “저기 교도소 자리 보여? 저기 가서 뒤질래, 돈 더 낼래? 지갑에 있는 거 다 꺼내. 카드 비번 적고.”
김 사장이 상혁을 위협하는 동안 다른 용역들은 옷을 갈아입은 뒤 벗은 옷을 커다란 비닐에 담았다. 그들은 이런 장면이 모두 다 일의 연장인 듯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상혁은 고개를 돌려 소년원 쪽을 보았다. 방치된 건물의 용도나 저런 상태로 방치된 원인, 상세한 구조 등을 찾아보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었다. “왜 저기 가고 싶냐? 내가 저기 출신야. 돈 내기 싫으면 저기 묶어둘 테니까 그렇게 알아. 니놈이 하기 싫은 일 우리가 해주는 거 감사하지 않냐? 니들 같은 공무원들이 뭘 알겠니.” 상혁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김 사장님, 저한테 이렇게 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제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상혁은 용역들에게 어깨를 잡혔고 김 사장이 상혁의 배 위에 올라앉았다. “야, 내 가방에서 그거 가져와.” 상혁은 울고 싶었다. 김 사장은 상혁의 입을 벌리고 튜브에 든 치약 같은 걸 짜 넣었다. 순간 상혁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저항했고 그 순간에도 뒤축이 까지고 망가질 구두 걱정을 했다. 입속에 들어온 끈적한 것은 역겨운 핑크색의 틀니 고정용 본드 '픽소덴트(fixodent)'였다. “너 사람 무시하면 땅속에 묻어버린다. 입 벌려, 벌리라구!”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김 사장은 상혁을 내버려 둔 채 차에 탔고, 입속에 든 것을 뱉어내느라 상혁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시동을 건 마티즈가 스모그에 휩싸인 잿빛 숲을 벗어나 도로 쪽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뱉어내도 입안에 든 끈적한 것들은 입속을 맴돌 뿐 쉽게 뱉어내지지 않았다. 신발은 진흙 천지였고 온몸이 땀에 젖어 후줄근했다. 일곱시까지 신도시 레스토랑으로 가려면 속도를 내서 달려야 했다. 어쨌든 상혁은 시동을 걸었다. 자동차 바퀴가 패인 바닥에 박히지 않기만 바랐다. 상혁은 마시다 둔 지 오래된 물병을 열었다. 밍밍하다 못해 썩는 냄새가 났다. 물을 입속에 머금은 채 진득한 것들을 떼어내려고 열심히 혀를 놀렸다. 레스토랑 화장실에 가 구두를 닦고 지영에게 선물을 주고 스테이크를 먹고 집으로 돌아가면 하루가 끝나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결혼기념일을 사람들은 그렇게 보낸다. 자동차 뒷자리에 놓아둔 꽃과 선물은 안전했다.
출발한 지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상혁은 지방도로 위였고, 20킬로도 속도를 낼 수 없을 만큼 시야가 어두웠다. 재난 문자는 계속해서 울려댔고 스모그 지수는 사상 최대치였다. 상혁은 아파트 근처까지도 가지 못하고 도로 옆에서 한 블록 떨어진 대로변에 차를 세웠다. 거기서부터 신도시까지 직선거리로 30분이면 충분히 걸어갔다. 상혁은 몸을 뭉개버릴 듯 휘감아 오는 스모그 너머로 반짝이는 주홍색 자동차 불빛을 보았다. 하지만 자동차들은 대로에 그대로 서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모두 차를 버리고 걷기 시작했고 앞이 보이지 않아 우왕좌왕했고, 곧 서로 몸을 부딪쳤다. 휴대폰의 손전등 기능만이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상혁은 저만치 보이는 신도시로 가는 구름다리의 위치를 가늠해보았다. 다리만 지나면 바로 신도시 선착장 입구였다.
상혁은 다리 난간에 몸을 기대고 주저앉았다. 몹시 배가 고팠다. 길 건너편 선착장에 서 있는 배의 불빛이 보였다. 불빛도 스모그 빛깔이었다. 선착장의 배도 희미하고 그 너머의 높다란 타워도 중간이 잘린 것처럼 보였다. 더는 먼지 천지인 바깥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안에 들어가 따뜻한 김이 나는 음식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싶었다. 갑자기 한 무리의 중국인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다리 위를 지나갔다. 숨을 커다랗게 쉬고 눈앞을 똑바로 보려고 했다. 그때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스모그로 인해 오늘 유람선 운항은 중단합니다. 승객 여러분은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 모두들 편안한 귀갓길 되시길 바랍니다.” 상혁의 손에는 지영에게 줄 꽃과 선물이 든 종이가방이 여전히 들려있었다. 상혁은 입안에 손을 넣은 채 끈적한 틀니 고정 접착제가 남아있는지 입속을 확인했다. 이상하게도 입안이 따뜻했다.
갑자기 자동차가 다리 위에 멈추고 힘없이 트렁크 문이 열렸다. 몇 초간 시간이 흘렀다. 지영은 스모그에 휩싸인 암울한 도시를 옆으로 누운 채 보고 있었다. 겨우 몸을 움직여 트렁크에서 기어나왔고 문을 닫은 뒤 박 부장을 돌아보았다. 박 부장은 지영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떠났다. 노블타워 꼭대기가 아주 조금만, 허공에 뜬 채 시야에 들어왔다. 이 도시에서는 사실 어디에서나 저 타워가 보였다. 상혁이 늦을 리는 없었다. 지영은 시야를 가리는 상황에서도 가방 속에 손을 넣어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손지영 손님, 오늘 예약한 거 맞으시죠? 오늘 오시나요? 지금 스모그 때문에 예약 캔슬하시는 분이 많아서요. 확인차 전화 드립니다.” 지영은 그때 사방에서 거세지는 자동차 클랙슨 소리를 들었다. “그럼요, 저 지금 가고 있어요.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가고 있어요. 거의 다 온 거 같아요. 그런데 배는 운항하겠죠?” 순간 전화가 딱 끊어졌다.
지영은 다리를 건너 선착장으로 갈 생각이었다. 다리 위는 온통 스모그투성이였지만 지영은 그것을 뚫고 상혁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스모그만 걷힌다면, 오늘밤만 무사히 지난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중얼거리며 지영은 바로 눈앞도 보이지 않는 다리 위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 커다란 개 한 마리가 이 모든 것이 다 보인다는 듯, 지영을 치고 지나 다리 위를 가로질렀다.
강영숙
웹진에 소설 발표는 2년 만이다. 스스로를 벌주는 언어를 생각하다가 이 소설을 쓰게 됐다.
2019/12/31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