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막극



   1
   별나라 꿈나라 달나라 구름은 나의 산책로 나의 지팡이는 얼굴의 오분의 사가 녹아내린 달. 비켜요 자전거는 일인용이에요 손이 떠오르고 펼쳐지고 날아오르고 차례대로 박살나는 알전구. 심취한 마술사는 관객들이 집으로 돌아간 것도 모르죠 그는 고독한 인물인가요

   2
   눈꺼풀 극장의 슬라이드 쇼; 먼지가 어둠이 조리개가 목성이 운석이 진흙이 하느님이 하느님과 카센터가 정비사가 치정과 작별과 애증이…… 빈손으로 극장을 나섭니다 한낮입니다 툭 건드리면 흘러내릴 것 같은 어깨입니다 팝콘처럼 튀어오르려는 어금니. 견디는 얼굴들. 붉게 달아오르고요. 별 한 개 반짜리 영화였어. 나는 평점도 남기지 않을 거야. 읊조리면서 헤어지는 두 사람이

   3
   그러나
   아무래도 영화는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현관을 열고 들어서면서 초파리떼를 휘휘 내쫓으면서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면서 방충망 너머로 흘러가는 담배 연기를 바라보면서 당신은 소박했던 아침 식사를 떠올립니다. 이를테면 두유와 계란프라이와 돌아가는 페달과 출근길과

   4-#1
   나는 횡단보도에 서 있죠 발목을 감싸는 로즈메리. 뛰어다니는 토끼들. 빨강 보라 초록 초록 노랑 파랑 페달이 돌아갑니다. 점멸등으로부터 헤어나오기가 쉽지는 않고요 어쩌면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입니다. 이곳의 모자이크 장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우아하다고 들었죠 글쎄요. 좋습니다. 저는 죄를 지었습니다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 고백할 뿐입니다. 나의 죄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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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한번 시작된 영화는 멈출 수 없습니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1)처럼 생략이 가능한 십오 초입니다 사방을 떠올릴수록 거대해지는 자유입니다 달나라 꿈나라 별나라 그러니까 나는 딛고 설 곳을 버렸습니다

   6
   발밑으로 하루의 전개도가 펼쳐집니다. 나는 포르말린 연못을 뛰어다니는 소금쟁이 같습니다. #2 #3 #4…… 영원히 지속되는 해시태그입니다. 새벽이 오전이 오후가 밤이 흘러갑니다. 나는 단지 내게 혐의가 있죠. 생략과 압축을 선택과 이를테면 발목에서 자라난 얼굴을. 그들이 원을 그리며 강강술래 강강술래 노래하는 창밖을. 기록하는 순간 탄생하는 죄를. 나는 횡단보도에 서 있었다. 저는 이 문장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차라리 돌담 아래를 축사를 해변을 빌딩숲을… 꿈나라 달나라를





   감상 시절



   수리공은 풀린 나사를 조여 놓고 떠났다. 오전의 흔들림은 없던 일이라는 듯 책상은 말끔해졌다. 놀이터에 겨울 햇볕이 내려앉는다. 끓는 물처럼 서 있었다. 너를 큰 소리로 불렀다. 끓지 않는 물처럼 서 있었다. 나는 일 초 전 혼자 태어난 입김이었다. 표정들을 끌어안는 표정이었다. 너에게는 이름이 있었나. 나는 너를 외쳤나. 코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이것 봐, 이곳을 파고 또 파면 우물을 만들 수 있대. 흙이 잔뜩 묻은 손바닥을 펼치며 네가 말한다. 나는 네가 있던 놀이터를 덮는다. 정글짐이 정글짐을 모래가 모래를 한낮이 한낮을 밀어낸다. 수리공은 나사를 조이고 있다. 세발자전거 페달이 돌아간다. 길 위로 선인장이 자라난다. 나는 바게트 씹는 아이를 바라본다. 그는 아무래도 등장이 반갑지 않은 눈치다. 책상은 말끔해질 것이다. 나는 무너지고 있다.

박지일

구름이라고 쓰면 구름 아닌 것들이 자꾸만 구름의 자리로 찾아온다.

2020/05/26
30호

1
심보선, 『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사,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