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들어와서 침대에 누우려 하는데 거기엔 이미 내가 젖어있었어. 두 사람은 내 위로 올라와 섹스를 시작했지. 이봐요들 우리 엄마가 말쑥한 유리병인 탓에 저는 그만 쏟아지면서 태어났거든요? 내가 말했어. 나는 경사진 천장에 세로로 난 이중창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 친구는 막 개봉된 흰 상자처럼 정신없이 빛 더미를 토해내고 있었어. 창문이 창문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더러운 행위를 하는 동안 두 사람은 그 짓을 착실히 해나갔어. 그 짓에 대하여 나는 참여 의사를 밝혔는데, 솔직히 애걸복걸했는데 그들은 나를 알은체 하지도 않았고 나는 두 사람의 움직임에 맞추어 조용히 박동하기만 했어. 느슨하게 짜인 내 몸 안에 가짜 혈관이라도 있는 것처럼. 가짜 혈관의 박동은 주기적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기를 가진 아름다운 음악이 되었고, 그것은 이윽고 진짜 슬픔으로 바뀌었어.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침대의 깃털 아래로 익사하고 말았지.
   제트는 그것을 지난 새벽 겪었던 일이라고 주장했고, 홀가는 그것이 제트의 죽음에 대한 기억인지 태어남에 대한 기억인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제트는 지난 새벽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되새겼다. 그래서 연인이기도 여동생이기도 한 사람의 손을 더욱 꽉 잡고 힘차게 걷기만 했다. 나무의 그림자가 성긴 그물처럼 늘어진 공원을 가로지르면서 말이다. 저 멀리, 자갈로 쌓아올린 가벽 근처에서 붉은 얼굴의 연인이 캐치볼을 하고 있었다. 연인은 서투른 솜씨 때문에 멀리서도 서로의 몸에 하나둘 상처를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공을 허공에 던지고 허공에서 공을 데려오는 그 일을 얼마간 계속해나갔다. 가까이서 본 연인들은 가축상의 손주들로, 지난 학기 제트의 독일어 수업을 수강했던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이 자신들보다 오래된 연인이라는 사실을, 나아가 그들이 자신들보다 먼저 아이를 갖게 될 거라는 사실을, 두 선생님은 그때까지도 몰랐다.
   누군가와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네요, 선생님.
   단발을 묶은 아이가 제트에게 말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이게 훨씬 좋을 거예요, 선생님.
   단발을 푸른 아이가 제트에게 야구공을 건네주었다. 제트의 손이 자신의 손에서 글러브로 선뜻 넘어갔기 때문에 홀가의 안에서 일순 불쾌함이 일었다. 아이들은 이 사람 손에 끼었다 저 사람 손에 끼었다 한 더러운 글러브 구멍을 제트에게 보여주었다. 글러브 안은 어린아이들의 열기로 가득했으며, 만일 허공에게서 글러브를 벗겨낸다면, 무신경하게 헤집어진 풍경이 드러날 거라고 제트는 생각했다. 제트의 작은 손이 흠집 난 풍경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 순간 제트는 아이들의 이름, 미치 혹은 치라라를 똑똑히 기억해낼 수 있었다. 제트의 생각에 그들은 연인이 아니라 자매였다. 하지만 어떤 아이가 언니였을까? 다시 보니 그들은 남매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떤 아이가 누나였을까? 제트는 끝내 기억해내지 못했다.
   우리는 캐치볼을 해나갈 수밖에 없어요, 선생님.
   부드러운 곡선이 날아오고 있거든요, 선생님.
   다음날로부터요, 선생님.
   제트는 미치 치라라가 자신의 공에 맞지 않도록 주의깊게 투구했다. 사려 깊은 플레이가 지속되는 동안, 제트는 서서히 서러워지고 있었다.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있던가? 자신이 미치 치라라만할 때 말이다. 이처럼 성마른 투구를 누군가 너그럽게 받아준 일이 있었던가? 미치 치라라는 일말의 세심함 없이, 제트의 몸 전체가 거대한 과녁이라도 되는 것처럼 공을 마구 던지고 있었다. 박살내는 것은 아이들의 특권이었으며 그들이 던지는 공에 맞아 박살나지 않는 것 또한 제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캐치볼이 끝날 때까지 그들은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를 제외하고는 어떤 작은 뼈조차 박살내지 않았다. 다시 홀가의 손으로 돌아온 제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약간 글썽였고, 그로부터 일 년 뒤, 제트는 한 남성과 결혼했다. 홀가가 이유를 물었을 때, 제트는 이렇게 답했다.
   그 남자의 앙상한 조립식 주택에 갔었어. 아귀가 맞지 않아 열 때마다 낮은 신음을 내는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작은 마당에 풀어놓은 개 두 마리가 있었어. 이빨이 누렇게 바랜 개들. 서로 할퀴고 물어뜯어서 지치고 야위어있는 개들. 자신의 짖음만을 믿음으로 삼는 개들 말이야. 내가 들어가자마자 그 개들이 나를 향해 짖기 시작했어.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 개들을 향해 짖기 시작했지. 그러자 그 개들이 나처럼 짖기 시작했어. 내가 그 자리에 얼어붙어서 겁을 집어먹고 있는데, 온화한 얼굴의 엄마 아빠가 현관을 열고 나왔어. 그러니까 그 남자의 엄마 아빠가 말이야, 개들을 개집 안으로 돌려보냈지. 그러자 그 플라스틱 개집이 모든 소음을 다 가져가버린 것처럼 조용해졌어. 그날, 그들 엄마 아빠가 나에게 따뜻한 생수를 가져다주고 극진히 대접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결혼을 거절할 수가 없었어. 나 역시 그들을 마음 바쳐 사랑하게 되었거든. 그래, 나는 그저 그 남자의 엄마 아빠를 빼앗아오고 싶었을 뿐이야.


   홀가는 건강한 손톱을 가진 봉고 운전수로, 음주 단속으로 파면당하기 전까지는 고교 스쿨버스 기사로 있었다. 홀가가 몇 번의 음주 운전을 하게 된 까닭은 그녀가 알코올이 아니라 운전에 중독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홀가는 뛰어난 운전수였다. 한산한 도로를 따라 달리다가, 운이 좋으면 창문 너머의 풍경이 차 안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했는데, 실외가 안으로 들어와 실내를 박탈당하는 그 순간을 몹시 즐겼다. 그러나 학교에서 쫓겨난 뒤, 홀가는 다시는 운전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제트에게 자신이 몰던 날렵한 왜건을 선물했다. 그 이후 홀가는 자신의 운전석을 제트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에 매일 밤 끔찍한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완전히 망령된 상상이었는데, 제트는 평생 운전대를 잡아본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홀가가 존재하지도 않는 운전수에 대한 시기심으로 괴로워하는 동안 그녀의 왜건은 제트가 사는 집의 낮은 담장 곁에 다정하게 유기되어 있었다.
   홀가는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트 몰래 봉고를 운전하기 시작했다. 청소년 도박꾼들을 휴양림으로 데려오고 다시 안전하게 읍내로 데려다주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홀가는 그 일을 단순한 노동으로 여기기 위해 노력했지만,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 일에 강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일을 시작한 이후에도 홀가와 제트는 종종 만나서 서로의 몸을 성실히 만지거나 몇 시간 동안 대화를 내처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황홀한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제트는 임신하기에 필요 이상으로 몰두하고 있었다. 아이를 갖지 못하면 새로운 엄마 아빠가 그녀를 그 누추한 집에서 몰아낼 것이라고 여겼으니까, 그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두 자매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제트는 홀가에게 한 가지 부탁을 전했다. 친아들 자로가 소년원에서 곧 출소하게 될 것인데, 천지간에 혼자 남게 될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잠시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터미널에서 노란색 레인코트를 입은 자로가 걸어나왔다. 자로는 봉고에 오르기 직전에 레인코트를 벗어 물기를 털어냈다. 자로는 아주 두꺼운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이 짐의 전부였다. 그것은 몹시 오래전에 시작된 자로의 일기로, 초반부의 사건들은 본인이 쓴 것임에도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다. 초반부의 화자는 틈만 나면 자신의 어머니를 욕보이고 헐뜯다가 결국에는 집을 박차고 나가버렸는데, 자로는 누구보다도 자신의 어머니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로는 때때로 생각을 했다. 자신보다 늙고 고약한, 어느 행려 환자가 쓰던 일기장을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이다.
   홀가와 자로는 휴양림으로 들어가기 전에 읍내의 한 골목에 있는 어둑한 식당에 들렀는데, 의자에 앉자마자 자로는 오래된 범죄를 고백하듯 홀가에게 속삭여왔다.
   말씀드릴게요.
   무엇을 말이니?
   저희 엄마가 임신을 할 수 없는 이유 말이에요.
   자로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테이블 위에 우묵한 유리컵을 내려두었다.
   잠에 들었을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생이 누워있었어요. 제가 전날 밤 잠들었던 침대 위에 말이에요. 저보다 길고 윤기 나는 머리칼에, 키가 한 뼘은 더 큰 계집애였어요. 그 아이가 침대 밖으로 맑은 술처럼 쏟아져 내리듯 빠져나와서 저에게 천천히 다가오는데, 곧 그 아이가 걷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죠. 발목이 없었으니까요. 아이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어요. 제 몸을 그대로 통과해서 지나갈 것처럼요. 눈을 떴을 때 아이는 제 손을 잡고 있었어요. 그리고 맞잡은 손을 자기의 얼굴로 가져갔어요. 그 아이의 볼을 만져봤을 때, 놀랍게도 정말 따뜻하고 부드러웠어요. 제 것보다 훨씬요. 단지 그것 때문이었어요.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볼 때문에…… 저는 그 아이가 태어나지 못하게 막고 싶었어요. 그 아이는 저를 통과하여, 창틀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죠. 그래서 저는 그 아이의 등을 살며시 밀어보았어요. 그리고 그건…… 화분보다 훨씬 가벼웠어요.
   자로는 홀가에게 얼굴을 가져다 대 보였다.
   그러니…… 이제 제 뺨을 갈기셔도 좋아요.
   홀가에게는 자로를 때릴 이유가 달리 없었다. 그러나 홀가는 자로가 자신을 도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갑자기 더러운 방 안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불쾌해졌다. 그러자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자신이 자로를 때려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작 그 순간에, 자로가 태도를 바꾸어 맞는 것을 거부한다면? 자신이 순식간에 늙고 병들어 테이블 위의 빈 유리잔조차 집어들 수 없는 형편에 놓인다면? 그때를 위해 지금 이 아이의 뺨을 때려두는 것은 어떨까? 홀가는 테이블 위로 두 손을 공손하게 올렸다. 하지만 곧 종업원이 식사를 내와 홀가는 두 손을 도로 내렸다.
   일단 식사를 하자꾸나.
   저는 어디로 가게 되나요?
   자로가 물었다.
   휴양림으로 가게 될 거란다. 그곳에 묵으면서, 거기서 일을 해야겠지. 너희 어머니가 네 동생을 포기할 때까지 말이다.
   자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에게는 이미 동생이 없는 걸요, 이모.


   붉은색 레플리카 축구복을 입은 여자아이 행렬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하나같이 깡마르고 키가 큰 여자아이들은 한 명씩 질서정연하게 봉고에 올랐는데, 그 순서는 등번호와 무관했다. 그 여자아이들은 도박꾼들로, 일주일에 한 번, 휴양림의 201호에서 자신들의 치아만큼 작고 단단한 유리 패를 가지고 놀았다. 하지만 그 여자아이들은 축구부이기도 무용부이기도 연극부이기도 했다. 동시에 말이다. 그 여자아이들은 지금처럼 축구복을 입고 있을 때도, 부드러운 원단의 크림색 무용복을 입고 있을 때도 있었다. 어쩌면 그 여자아이들은 축구부이기도 무용부이기도 한 청소년 도박꾼들에 대한 연극을 준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제는 넘어지면서 머리통을 박살냈어요.
   뭐라고 했니?
   바닥에 둥근 공의 자세만 희미하게 남았어요.
   뭐라고?
   우리는 대사를 연습하고 있어요, 선생님.
   여자아이들은 비슷한 문장을 조금씩 변형해가면서, 몇 초씩의 간격을 두고 조심스럽게 발화하고 있었다. 하나의 조사에서 다른 조사로, 하나의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이행하면서 말이다. 홀가가 대사에 귀 기울이고자 했을 때, 그 대사는 이미 크메르어로 번역되어 있었고 홀가는 성조 없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는 발음을 되새기면서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그 깡마른 곰 같은 아이들이 입을 꾹 다물어버려 어떤 녀석이 배우인지 분별해낼 수 없었다. 혹은 한 명의 배우가 혼자서 웅얼웅얼 대화하는 것 같기도 했다. 웅얼거림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동안 홀가는 완만하게 굽이진 산길로 진입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이 떨어져 있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통과하자 둥근 형태의 널찍한 지대가 나왔다. 중앙에 분수대 없는 작은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 왼편에는 백색계 화강암으로 지어진 오래된 건물 한 채가 세워져 있었는데, 그것은 원래 쌍둥이 건물 중 하나였다. 두 건물은 1998년 산사태로 인해 한 건물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정원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지만, 현재로서 남은 건 숙박 시설로 기능하는 하나의 건물뿐이었다. 무너진 건물은 유리를 벽돌처럼 쌓아올려 지어졌었는데 빛의 반사가 가장 활발한 시간에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 빛줄기로써 건물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건물은 이제 평면 액자 안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현관으로 들어서면 협소한 로비가 나왔다. 이전에는 Y군의 아름다운 향토 장식물이 전시되던 넓은 공간이었으나, 숙박시설로 개조하면서 공간을 분리한 듯 보였다. 사무실을 지나쳐 오른쪽으로 꺾으면 폭 좁은 계단이 있었고, 그 위 계단참과 수직으로 연결된 흰 벽에는 영영 떼어내질 것 같지 않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유리를 벽돌처럼 쌓아올린 건물의 사진으로, 건물 안팎으로 산란하는 빛이 철제 프레임 바깥으로 빠져나오지 못해 오직 건물의 몸체만을 하얗게 조명하고 있었다. 그 사진을 등지고 계단을 올라가면 여자아이들이 묵는 201호가 나왔다.
   도박꾼 여자아이들은 작고 단단한 유리 패를 자신의 소매 안에 감추고 나서, 종종 그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해 영영 몸 안에 패를 유기하기도 했다. 패가 하나씩 사라지는 동안 자로는 벽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액자 없는 벽처럼, 혹은 벽과 같은 액자처럼 가만히 서 있다가, 여자아이들이 몸싸움을 하면 자신의 몸으로 막아 저지했다. 어떤 여자아이들이든, 자로의 작고 앙상한 몸을 몇 번 후려치고 나면 분이 풀려 자리로 되돌아갔다. 모든 게임이 끝나고 홀가가 그 여자아이들을 읍내에 데려다주러 가면, 제트는 방 안에 홀로 남아 싸움의 증거로서 남은 검고 긴 머리카락들을 처리했다.
   어느 날, 자로는 여자아이들이 떠난 201호 한편에서 두터운 이불 무더기를, 그리고 바깥으로 삐져나온 창백한 발을 보았다. 자로가 심호흡을 하고, 누군가를 질식시키기에는 너무나 가벼운 솜이불을 서서히 걷어내었을 때, 평온한 얼굴로 살아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자로는 홀가가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조치는 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의 소매에서 유리 패 하나를 꺼내 손에 쥐고 따뜻한 에너지를 한참 동안 감각했다. 그리고 홀가가 도착했을 때, 홀가는 그 아이를 보자마자 알아챌 수 있었다. 그 아이는 가축상의 손주 미치 혹은 치라라였다. 정확히는 그 둘 중 한 명이었지만, 그 둘 중 누구였는지 홀가는 끝끝내 기억해내지 못했다. 홀가가 찬물을 적신 명주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주자 아이는 서서히 깨어났다.
   세상에, 미치 치라라야.
   저는 그 둘 중 한 명이에요, 선생님.
   나는 이제 선생님이 아니란다.
   그러면 당신을 뭐라고 불러야 하죠?
   누나나 언니라고 부르렴. 둘 중 어떤 것으로 부를지는 내가 정해줄 수 없을 것 같구나.
   저도 마찬가지인걸요.
   그들은 폭 좁은 계단을 내려가 사무실로 갔다. 홀가는 우묵한 그릇에 따뜻한 생수를 받아 미치 치라라에게 건네주었다. 미치 치라라의 팔과 목덜미에는 작고 큰 흉터들이 남아있었다.
   아직도 캐치볼을 하니?
   홀가가 묻자, 미치 치라라는 고개를 저으며, 멧돼지로부터 생긴 흉터라고 말했다. 그 멧돼지는 가축상인 미치 치라라의 할머니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유일한 개체로, 미치 치라라는 멧돼지와 멧돼지의 그림자에게 〈어머니의 조각물 없는 정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것은 미치 치라라가 어린 시절 유기한 화분의 이름이기도 했다. 그 화분이 무럭무럭 성장해서 자신의 몸으로 그 화분을 버릴 수 없게 되기 전에, 미치 치라라는 화분을 내다버렸던 것이다. 멧돼지 ‘어머니의 조각물 없는 정원’은 검은 밤에만 활동했는데, 미치 치라라의 방에는 조명도 촛불도 없으니까 ‘어머니의 조각물 없는 정원’을 뒤따라가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른 아침 돌아온 멧돼지의 원통형 주둥이에 묻어있는 병든 풀 무더기를 확인할 수는 있었다고, 미치 치라라는 진술했다.
   이후로 미치 치라라는 매번 홀가의 봉고에 탔다. 홀가는 미치 치라라를 다른 여자아이들로부터 구분해내어 인사를 건네거나 말을 시킬 수 있었지만, 미치 치라라가 이전부터 늘 봉고에 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미치 치라라와 자로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도박이 끝나도 미치 치라라는 자로와 함께 201호에 남아 얼마간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그들이 재미를 볼 동안 홀가는 여자아이들을 읍내에 데려다주고 왔고, 그 아이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계단참에 조용히 앉아서 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미치 치라라와 자로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홀가는 계단참에 앉아 얕은 잠에 빠져들려 하고 있었다. 미치 치라라와 자로는 홀가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고, 이미 모든 정리를 마쳤다고 말했다. 홀가는 그 두 아이가 좁은 계단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간 것을 확인한 뒤, 201호의 나무문을 열어 방을 둘러보았다. 전문가의 솜씨라고 해도 될 만큼 방은 정말로 깨끗했는데, 창가 쪽에 불투명한 액체가 고여 있었다. 초가 녹아 파라핀 웅덩이가 만들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가까이에서 보니 그것은 모서리가 뭉툭해진 흰 노트 한 권이었다.
   무대 위에 아이 앉아있다.
   그 아이의 얼굴은 그림자를 반영하지 않는 밤의 강물처럼 검다.
   그 아이는 창밖으로 죽은 의사가 여전히 가운을 입고 산책하는 것을 본다. 그 아이가 태어날 때 받아주기로 했던 의사였다. 아이가 의사에게 소리치지 않아서, 의사가 농인이라는 사실을 아이는 영영 알지 못한다. 실외는 빈 창문을 박살내면서 들어오고 아이는 좀처럼 태어나지 않고 차라리 빈 창문을 가볍게 통과해 들어오는 것들을 주워 기르는 일에 몰두한다. 아이는 마룻바닥에서 희고 두꺼운 책을 줍고 나서 『테라스』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테라스』가 책을 모두 읽고 고개를 들었을 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있다. 책 속에서 죽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창밖에서 걸음마를 떼고 있다. 내년 여름에 젖어버린 셔츠를 말리며, 계절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테라스』는 좀처럼 태어나지 않는다.
   홀가는 페이지를 넘겼다.
   책 속의 죽은 사람들이 죄다 도로 태어나 창밖의 정원에서 아장아장 걸음마를 뗄 때까지. 『테라스』는 무릎에 한 권의 가벼운 책을 얹어놓은 채 잠에 들지도 쓰러지지도 않은 채 앉아있다. 그러고 아주 긴 시간을 보낸다. 오래전에 완독한 책의 잉크가 투명한 새처럼 날아가, 모든 페이지가 하얗게 비어버릴 때까지도 말이다. 여전히 무대 위에는 태아와 창문,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선명한 『테라스』의 독후감이 있다. 『테라스』는 창문 바깥으로 오른 손목을 축 늘어뜨리고 있다.
   홀가는 페이지를 넘겼다.
   저 멀리 울창한 숲의 그림자가 불어나고 있다. 울렁거리는 형체 속에서 검은 짐승의 그림자가 떼어져 나와 창가로 어른어른 다가오고 있다. 검은 짐승이 『테라스』의 손 가까이 다가와 냄새를 맡았을 때, 홀가는 얼른 이전 페이지로 되돌아갔다. 『테라스』는 다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축 늘어진 태아의 손을 들어 창 안으로 넣어주고 싶었지만 홀가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었다. 그래서 뒤 페이지를 모두 찢어 불태워 그 이야기를 깨끗한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홀가가 노트를 협탁 안에 넣어두고 테라스로 나갔을 때, 건물로부터 미치 치라라와 자로가 손을 잡고 걸어나가고 있었다. 홀가 또한 그들의 속도에 맞추어 난간 가까이 걸어가면서 유리로 이루어진 건물에 대해 생각했다. 속으로 그것의 위치가 어디쯤이었을지 가늠해보기도 했다. 건물과 동시간대에 존재했다면 저 아이들은 건물 밖을 지나고 있을 거야. 혹은 건물 안을 지나고 있을 거야. 혹은 이 건물과 저 건물 사이를 잇는 방식으로 횡단을 하고 있을 거야. 건물이 정말로 있었다면 말이야.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홀가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가 『테라스』를 태어나지 못하게 할까?
    아이들은 잠시 뒤돌아보고, 한참 동안 무언가를 바라보는 듯싶었지만, 홀가에게 등 돌렸다. 테라스에서는 이제는 없는 투명한 직방체 건물과 그 안에서 키스하는 아이들이 내려다보였다. 『테라스』는 여자아이들이 준비하는 연극을 위한 희곡일 거야. 홀가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여자아이들 중 누가 『테라스』의 역할을 할까? 이따금 대화 같은 혼잣말을 나누는 그 아이들 중에서 말이야. 홀가가 층계를 한 칸 한 칸 밟으며 현관으로 내려갔을 때 미치 치라라가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저는 언젠가 자로와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홀가는 마치 상상도 못한 일이라는 듯이, 그러나 오랫동안 어떤 말을 하기 위해 별러온 아버지처럼 엄숙하게 말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렴. 너는 그저 자로의 부모를 훔쳐오고 싶은 것뿐일지도 모른단다.
   오, 언니. 그 새끼는 고아예요. 고아의 부모를 훔칠 수는 없어요.
   그 애에게는 엄마가 있어.
   없어요.
   있어.
   없어요.
   얘야, 그 애의 엄마는 내 동생이란다.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어머니가 사라져 있었어. 바로 이 식탁 의자에 몸이 질질 흐르는 흰 물결만 걸쳐져 있었어. 이봐요들 여기에서 흰 물결의 몸이 질질 흐르고 있어요. 제발 저것 좀 보거나 입거나 치거나 먹거나 해 보세요. 나는 소리를 질렀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어. 어머니는 물론이고 다른 가족들도 전부 말이야. 하는 수 없이 나는 흰 물결의 목을 틀어쥐고 흔들기 시작했어. 설마 어머니는 이와 같이 가벼운 것으로부터 살해당한 걸까? 아니면 어머니가 다른 가족들을 데리고 떠난 걸까? 아니면 다른 가족들이 어머니를 끌어낸 걸까? 아니면 이것조차 하나의 태몽인 걸까?
   제트는 엉엉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홀가는 제트에게 와인을 몇 모금 먹인 뒤, 침실로 데려갔다. 그러다 홀가는 문득 궁금해졌다. 자로도 이러한 의문을 가져본 적 있을까? 사라진 어머니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제트가 홀가의 품에 깊숙이 안겼을 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하고 생각했다. 홀가는 제트의 배를 베고 누웠는데, 그것은 너무나 빈약해서, 어쩌면 그 안에는 한 겹의 두터운 불면만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홀가는 생각했다. 잠 없는 얄팍한 몸을 안고, 홀가는 제트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 홀가가 속삭였다.
   네가 임신을 했으면 좋겠어.
   제트는 푹 잤다. 제트가 잠깐 눈을 떴을 때 아직 새벽이었고, 제트는 무엇에 홀린 듯이 입을 떼었다.
   난생처음 일어난 것만 같아.
   홀가는 제트의 둥근 이마를 쓸어내렸다. 데운 물속에서 금방 건져 올린 젖병처럼 안전한 따뜻함을 감각하며. 홀가는 생각했다. 제트가 지금 가지는 감각은, 아이를 원하는 여자들이 으레 갖기도 하는 미신적 예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 순간 상당한 광량의 빛이 집 안의 어두운 목제 가구들을 훑고 지나갔다. 누군가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잊고 있던 미래가 잠시 환하게 떠오를 때와 같이.
   왜 천둥이 치지 않는 걸까? 넌 들었어?
   잠깐 졸았어.
   이윽고 제트는 다시 잠들었고, 홀가는 우산을 챙겨 현관 밖으로 나갔다. 플라스틱 개집이 혹독하게 비를 두들겨 맞고 있었다. 그 개들, 서로의 짖음만을 믿음으로 삼는 개들은 집 안에 잠들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홀가가 온 이후로 그들은 단 한 번도 짖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 그 안에 버릇없는 개들이 들어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확인할 수는 없었다. 낮은 담장에 기대어, 자로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순간, 옆집에서 부드럽게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소리가 사라지면서 남자가 드러났다. 남자는 사슴 머리가 패턴으로 박음질된 카디건을 어깨에 걸친 채였다. 홀가와 남자는 서로 눈인사를 하고 각자의 마당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개들이 짖어서 미안합니다.
   홀가가 말했다.
   당신이 미안할 필요는 없지요.
   남자는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담배를 모두 태운 뒤, 투명하고 팽팽한 장우산을 한 번 털어내고 들어갔다. 홀가도 담배를 모두 태운 뒤, 그 남자를 따라서 우산을 한 번 털어내고 들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침실 서랍으로 가 열쇠를 찾아냈다. 제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홀가는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제트의 푸른 털양말을 잠시 바라보다가 등 돌려 그 집을 빠져나왔다. 담장 옆에 세워진 청회색 왜건을 한번 쓸어본 뒤 열쇠를 꽂아넣었다. 정원에 있는 것은 이제 보이지 않는 개들뿐이었다. 홀가는 열쇠를 돌려 문을 열었다. 어쩌면 그 개집 안에는 텅 빈 검음이 서로를 향해 짖고 있을지도 몰랐다. 검음이 정말로 그곳에 있다면 말이다.

   헤드라이트와 경광등 불빛이 어지럽게 자아내는 잡음. 그 가운데서 홀가는 자로에게 전화를 걸었다. 홀가는 두 번째 음주 단속에 걸린 참이었다. 자로는 끝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리 기사가 운전하는 왜건을 타고 휴양림으로 향하는 길에, 표지판 네온이 자아내는 미약한 불빛들이 홀가의 뺨을 살짝 건드리며 지나갔다. 자신의 등 뒤로 넘어가 삭제되는 풍경들을 보면서,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자로의 뺨을 갈겨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홀가는 생각했다. 그 순간, 홀가는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자신의 봉고와 텅 비어있는 운전석을 목격했고, 어젯밤 꾸었던 악몽을 떠올렸다. 그러나 자신은 어제 잠들지도, 잠에서 깨어나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휴양림에 도착했을 때, 봉고는 숙소 앞에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건물의 좁은 계단으로 진입하자마자 홀가는 문틈 사이로부터 들려오는 웅얼거림을 들었다. 성조 없는 발음은 계단을 밟을 때마다 일정한 박자를 가지게 되었고, 이윽고 단조로운 음률을 가진 노래처럼 들리게 되었다. 계단을 한 칸 한 칸 밟아 올라가며, 홀가는 그곳에서 두 아이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리란 사실을 예상할 수 있었다. 홀가는 되돌아 사무실로 내려가거나 계단참에 앉아 입 닥친 채 앉아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홀가는 자신이 아이들에게 제공해주고 있었던 그 더럽고 누추한 공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껏 얼마나 그들을 사려깊게 대해 주었는지를, 그들을 박살내지 않고 자신을 박살내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순간을 희생했는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나서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부주의하게 문을 열어야만 하는 순간이라고 말이다.
   직사각의 원목 위로 잎이 넓은 식물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홀가는 양각으로 새겨진 식물 문양을 손등으로 한번 쓸어내린 뒤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자 더운 노래가 심호흡처럼 터져 나왔다. 홀가는 그 멜로디를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지만 곧 완벽히 허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홀가가 완벽한 허밍을 멈추자 노래도 멈추었다. 방은 굴러다니는 패와 술병으로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방의 가운데 이중 유리로 된 잔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찰랑거리는 어떤 것도 담겨있지 않았으나 계속해서 빛을 반사했고, 홀가는 바닥에서 뒹구는 스카치를 주워 두 잔에 모두 따랐다. 두 유리잔은 몸의 반절까지 차오르는 액체를 능숙하게 받아냈다. 이전에도 몇 차례고 그것을 담아 본 적 있는 것처럼 말이다. 스카치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홀가는 협탁에서 흰 노트를 꺼냈다. 홀가가 찢어놓은 페이지 이후로 이야기는 다시금 진행되고 있었다.


   정원에서부터 여름이 길게 말라가는 동안 희고 두꺼운 책은 모서리부터 조용히 녹아내려 『테라스』의 무릎을 적신다. 『테라스』는 녹아내리는 책의 웅덩이에 왜 자신의 얼굴이 비치지 않는지 의아하다.
   그런데 이 아이는 어떤 아이인가?
   홀가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 이미 아이의 얼굴은 사라지고 없다.
   그 아이의 이름은 『테라스』.
   『테라스』 의 시작되지 않은 여생에 대해서 홀가는 정신없이 썼다.
   어느 날 『테라스』는 창밖의 정원에서 십 년 전 그녀보다 먼저 태어난 동생이 혼자 체스를 두는 것을 목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은 체스판을 거칠게 뒤집어 엎어버렸는데 자신이 검은 말의 차례인지 흰 말의 차례인지 헷갈렸던 것이다. 그 순간 『테라스』는 동생이 태어나기 전 얼마나 온화한 사람이었는지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 온화함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동생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먼저 태어난 동생의 성마른 모습에 『테라스』는 얼마간 슬픔에 잠겨있었다고 홀가는 기록했다.
   마침내 한 페이지를 다 채우고 넘겼을 때,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흰 페이지가 나왔다. 페이지 위에는 아무런 부스러기도 없었는데도 홀가는 그 페이지를 손등으로 한번 쓸어냈다. 그곳에 투명한 새들이라도 앉아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는 한가운데에 누군가의 이니셜을 꾹 꾹 꾹 눌러적기 시작했다. 평행하는 선분 두 개를 먼저 그렸고 두 선분의 각각 반대편 끝점을 잇는 하나의 선분을 나중에 그려 넣었다. 홀가는 손가락으로 그 이니셜을 쓸어보았다. 너무 꾹 꾹 꾹 눌러썼기 때문에 그 필압의 증거로서 이니셜 모양의 자국이 깊게 패 있었고 홀가는 그것을 얼마간 손으로 쓸고 만져보았다. 자국을 손으로 쓸고 만져보는 동안 만지는 사람의 체온과 책의 온도가 서서히 비슷해졌고 홀가는 그 페이지가 온전히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홀가는 누군가 문을 두들겨 이 긴 여름방학을 끝장내주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 홀가에게 있어 여름방학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오히려 여름방학에게 있어 홀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홀가는 테라스로 이어지는 창을 활짝 열어두고 유리잔을 몇 번 더 채우고 비웠다. 마지막 잔을 채우는데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문을 밀고 들어오기 전에 홀가가 먼저 다가가 열었다. 텅 빈 계단 아래로 계단참, 계단참 위로 철제 프레임, 철제 프레임 안으로 핏기 가신 사진. 문이 도로 닫혔다. 그러자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고, 홀가는 그것이 창밖으로부터 들려오는 빗소리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홀가가 큰 창 가까이 다가선 순간, 제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스피커에서는 지지직대는 소리가 계속해서 송출되고 있었는데, 홀가는 그것이 고속도로에서 마주했던,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던 인공 불빛의 잡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저 멀리, 풀숲의 그림자로부터 바싹 마른 두 명의 아이 그림자가 떨어져 나와 홀가 또한 난간 가까이로 슬슬 걸어갔다. 만일 그 투명한 건물이 존재했다면 그 아이들은 그곳을 향하고 있었을 거라고, 이윽고 벽을 통과해서, 끝내는 건물 안에 쏙 하고 들어갔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아이들이 나란히 앉을 때까지도 홀가는 그 아이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저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인가? 지독한 어둠 때문에 홀가는 두 아이의 경계조차 확정지을 수 없었는데, 어쩌면 지독한 어둠 때문이 아니라, 두 아이가 서로에게 엉겨들어 정말로 경계를 허물고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거의 떨어지기 직전까지 난간에 허리를 기대었을 때, 홀가는 그 아이들이 고속도로에서 마주했던 텅 빈 운전석의 얼굴과 몹시 닮아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사실은 그보다 오래전에, 자신이 가늠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래전에 이미 그 얼굴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난간에서 중심을 잃어 휘청이는 바람에 그 오래된 장면들은 바닥에 쏟아지듯 사라져버렸고, 그것을 다시금 기억해낼 수 있는 기회를 홀가는 영영 빼앗겨버린 채 넘어지고 말았다.

남의현

막내(없음)에게 내 건강한 얼굴을 한 장 주었다 걔는 이제 그걸 핸드폰 뒷면에 붙이고 다닌다 중간 애(없음)는 베이스를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우리들 사이의 유대가 조금 더 깊어졌으면 하고 바란다

2020/08/25
3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