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위의 어둠을 몰아낸다
수민이 신사역에 가려면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야 했다. 잠실역에서 2호선으로 한 번, 교대역에서 3호선으로 한 번. 게다가 수민의 아파트에서 8호선 지하철역까지는 마을버스로 10분가량이 걸렸다. 세 번이나 환승하는 것이 몹시 피로하게 느껴진 수민은 얼마 전부터 30분 일찍 집을 나서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고 있었다. 열차로 이동하는 시간보다 걷거나 플랫폼에 멍하니 서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매일 아침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탄 커피를 가득 채워 집을 나설 때면 잊었던 출퇴근의 감각을 되찾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결혼 후 다니던 출판사를 관두고 프리랜서 편집자로 일해온 수민은, 얼마 전부터 새로운 일을 배우고 있었다. 프리랜서의 불안정성, 재취업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내걸었지만, 주위의 누구도 수민의 말을 믿지 않았다. 수민의 부모, 친구, 그리고 수찬까지도 수민의 도전을 이혼의 괴로움에서 비롯된 일종의 일탈로 여기는 듯했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때때로 현관 앞에 살얼음이 낀 굴전이나 갓김치 따위가 놓여 있곤 했다. 대학 동기 하나는 대뜸 전화를 걸어 몽골로 출사 여행을 가자고도 했다. 수민의 소식을 건너 전해 들은 사람들은 수민이 방에 틀어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폐인처럼 지낼 것이라고 짐작하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수민의 집이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하고 수민 역시 평소와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까운 이들은 그것도 정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내면을 직시하고 슬픔을 드러내는 것. 건강한 치유의 길은 그러한 태도에서 시작된다고도 했다. 그들 덕분에 수민은 요 근래 슬픔의 상투성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의 추측과 우려는 모두 사실이 아니었지만, 내버려두었다. 서른아홉 해를 살아오면서 수민은 어떤 일들은 내버려두면 저절로 해결된다는 것을 배웠다. 많은 실패들이 조바심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배웠다. 수민은 그것을 깨닫는 데에 적지 않은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다.
학원은 닭갈빗집과 토익 학원 사이에 있었다. 신사동 뒷골목은 지난밤 유흥의 자취를 지우고 점심 장사를 준비하는 식당과 카페들, 그리고 어학원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간간이 인기척이 났지만 대체로는 한산했다. 간밤의 취기와 치기를 떠올리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사람처럼, 이 골목의 아침은 늘 멋쩍은 구석이 있다고 수민은 생각했다. 물건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무시로 지나다녔다. 얼어붙은 토사물을 쪼아대는 비둘기를 피해 건물 입구로 들어서자 순간 오한이 일었다. 습기 탓에 건물 안이 외려 바깥보다도 춥게 느껴졌다. 건물 입구에 경비실이 있었지만 수민이 실제로 경비원을 본 일은 없었다. 학원은 이 오래된 건물의 3층에 있었다. 원장이 20여 년 전 개원한 이래 줄곧 이 자리를 지켰다고 했다. 위쪽에 작은 나무 간판이 달린 학원 철문은 늘 굳게 닫혀 있어, 이곳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는 휴원이나 폐업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민도 예외는 아니어서 완강해 보이는 철문 앞에서 한동안 망설이다 문손잡이를 잡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학원 문은 겉보기와는 달리 한순간도 잠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수민은 이제 알았다.
스위치를 올리자 어둠에 잠긴 내부가 일시에 밝아졌다. 밤사이 갇혀 있던 먼지 냄새가 훅 끼쳤다. 입구의 원장실을 지나면 이론 수업을 진행하는 작은 홀이 나왔다. 반원 모양으로 놓인 열 개 남짓한 접이식 의자 맞은편엔 작업대와 칠판이, 그 옆으론 외장을 떼어 낸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음악과도, 악기와도 거리가 멀었던 수민은 이곳에서 난생처음 그랜드 피아노를 만져 볼 수 있었다. 처음 만져 본 악기는 생각보다 차갑고 부드러웠다.
홀을 지나자 긴 통로를 따라 여덟 칸의 조율 연습실이 네 개씩 마주보고 있었다. 수민은 그중 가장 끝 방으로 들어갔다. 앞판이 없는 업라이트 피아노 위에 놓인 노란색 소형 선풍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날이 추워서인지 때아닌 물건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수민은 보온병이 든 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패딩 잠바 주머니에 장갑을 욱여넣고는 잠바를 벗어 스툴 위에 개어놓았다. 지금은 춥지만 연습을 시작하면 금세 열이 오를 것이었다. 수민은 2주 전부터 이론 수업과 함께 가장 기초적인 동음 조율 실습을 병행하고 있었다. 하나의 건반을 지탱하는 세 개의 철선을 같은 장력으로 맞추어 동일한 소리가 나도록 조정하는 일. 단순한 설명과 달리 귀와 손끝의 감각으로 적절한 타이밍을 찾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너무 많은 손을 거쳐 구멍이 헐거워진 튜닝 핀은 튜닝 해머로 아무리 조여도 금방 풀어지기 일쑤였다. 음은 현이 팽팽할수록 높아지고 느슨할수록 낮아지는데, 반복해서 듣다보니 소리가 낮아지는 중인지 높아지고 있는 것인지도 분간이 되질 않았다. 어느 날엔가는 원장이 불쑥 방으로 들어와 수민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수민씨,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면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울림은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잘 들립니다. 멀리 있어야 잘 들린다는 말이 마음에 남았던 수민은 어제 수찬에게도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 몇 마디 묻고는 입을 다물어버린 수찬 때문에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늘어놓게 된 것이었다. 맨날 원고만 봤더니 소리도 보려고 하더라. 수민이 소리에 집중하다보면 금방 목 뒤가 축축해진다고 말을 잇자, 수찬이 대뜸 입을 열었다.
애쓴다.
꺼진 휴대폰 액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민은 사전 어플을 켰다. 애쓰다. 마음과 힘을 다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힘쓰다. 아무래도 수찬은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수민은 요즘 어느 것에도 애를 쓴 적이 없었다. 수민이 온 마음을 다해 이루려고 노력한 것은 다름 아닌 수찬과의 관계였다. 도리어 너무 애를 써서 잘되지 않았다.
수민은 원장실로 향했다. 공구가 모두 원장실 캐비닛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로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이 학원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수민은 생각했다. 기역 자로 이어붙인 오래된 철제 책상 두 개와 구식 라디오, 접대용 레자 소파와 낮은 탁자, 그 뒤편에 놓인 캐비닛이 원장실에 있는 모든 것이었다. 집기들이 하나같이 낡고 손때가 묻어, 수민은 원장실에 올 때마다 남의 집 안방에 함부로 들어온 듯 겸연쩍어졌다. 캐비닛 안, 켜켜이 쌓인 수십 개의 파우치 중에 수민의 것도 있었다. 수강생들은 집에 연습할 피아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로 무거운 조율 공구를 학원에 두고 다녔다. 그러다 밖에서도 쓸모가 생기게 되면 제 것을 집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조율 실습을 시작하면서 수민도 조율 도구가 구비된 파우치를 30만 원에 구입했다. 그 안에는 튜닝 해머와 크기와 모양이 다른 뮤트 러버 여러 개, 펜치와 특수 드라이버, 건반 높이를 재는 수평자까지 실제 조율에서 쓰일 법한 공구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수민은 아직 그것 중 두어 가지 정도만을 사용했기에 자신의 이름표가 달린 두툼한 파우치를 꺼낼 때면 조금은 쑥스러운 기분이 들곤 했다.
원장은 이론 수업이 있는 오전 11시와 저녁 7시 외에도 자율 실습을 하는 수강생들을 위해 상시 문을 열어놓았다. 대체로 이론 수업 즈음에는 출근했지만, 무언가 물어보려고 하면 사라지고 없기도 했고 어느 틈엔가 나타나 라디오를 듣거나 양치질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 불쑥 연습실로 들어와 조율된 건반을 눌러보며 진도를 체크했다. 수강생들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연습하고 돌아갔다. 수민은 처음, 자신이 원하는, 혹은 필요한 연습량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지 못했기에 다른 수강생들의 눈치를 살폈다. 학원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요즘, 수민은 가장 먼저 학원 문을 여는 수강생이 되었다. 수민이 모든 건반의 동음 조율을 한차례 마칠 즈음이면 원장이 출근하자마자 히터를 트는 소리, 누군가 피아노 위에 파우치를 내려놓는 소리,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피아노 음이 차례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 시간의 이론 수업이 끝나면 수강생들은 자신이 맡아두었던 연습실로 돌아가 개인 실습을 이어갔다. 원장이 시간 단축을 숙제로 내주었기에 수민이 타이머를 켜 둔 채 튜닝 해머를 다루기 가장 효율적인 자세를 찾고 있노라면, 어느새 주위의 피아노 소리가 사라지고 멀찍이 원장실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면 수민은 해머를 내려놓고 짐을 챙겼다. 학원에 원장과 수민, 둘만 남았다는 신호이기 때문이었다. 수민은 더 연습할 여력도 있었고 원장이 싫은 것도 아니었지만, 라디오 소리가 끝없는 인기척처럼 느껴져 마음이 불편하고 조바심이 났다. 그럼에도 점진적으로 밀려들고 사그라지는 소란이 나쁘지는 않다고, 수민은 늘 생각했다.
오늘 눈 올 것 같지 않아요?
이론 수업을 듣는 수강생의 연령대는 중학생에서부터 50대가량의 중년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었다. 이유도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은퇴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누군가는 독일로의 조기 유학을 목표로 이곳에 왔다고 했다. 수민 같은 경우도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직업 안정성에 대한 기대감. 그래서인지 원장은 조율사의 직업적 전망을 늘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특히나 정년이 없다는 것, 그래서 환갑이 넘은 자신도 여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곤 했다. 대부분의 수강생은 수민과 마찬가지로 원장의 말을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카멜색 코트를 입은 남자도 수민과 비슷했다. 서른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는 주로 수민의 연습실 맞은편에서 실습했다. 평균율을 연습하는 것으로 보아, 수민보다 진도가 훨씬 빠른 것 같았다. 연습실은 문 상단에 유리창이 달려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기에, 남자는 수민의 방에 찾아와 자세를 교정해 주거나 이론 시간에 가볍게 훑고 지나간 머플러 페달 조정 방법에 대해 재차 설명해주었다. 피아노의 구조에 익숙지 않은 수민은 그의 친절이 고마우면서도 그가 자신이 아는 조율사를 예로 들며 그들의 녹록지 않은 현실에 관해 이야기할 땐 불현듯 수찬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의 나이와 태도가 수민이 처음 수찬을 만났을 그 시절과 비슷한 탓이었다. 동시에 수민은 저렇게 악기에 대해 잘 아는데 어째서 아직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했는지, 혹시나 조율 기능사 자격시험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것은 아닌지 순수한 궁금증과 염려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수민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눈이 올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수민은 단단한 쌀알이 물과 열기를 머금고 부드럽게 부풀어오르듯 가슴 한구석이 울렁이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기쁨이나 설렘과는 다른, 기대감도 그리움도 아닌 무언가였다. 이론 수업이 끝나고 난 뒤 조율 실습 때 수민이 현을 끊어버린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그 기분에 대해 생각하느라 집중력이 흐트러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튜닝 핀을 아무리 조여도 음이 맞춰지지 않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즈음, 끝없이 늘어나는 철선의 유연함이 그저 놀랍게만 여겨진 그 기이한 낙관의 순간에, 현은 굉음을 내며 보란 듯이 끊어져버렸다. 그다지 고음부도 아니었다. 수민은 자신이 현을 끊어버렸다는 사실보다 예상치 못한 큰 소리에 더욱 놀랐다. 장력이 90kg에 이르는 현이 한계에 이르러 찢어지는 소리에는, 조는 아이의 등짝을 후려갈기는 듯한 단호한 폭력성이 깃들어 있었다. 수민이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깜박이고 있을 때, 소리를 들은 원장이 재빠르게 연습실로 달려왔다. 아이고, 저런! 원장이 한탄했다. 축하합니다, 하고 외치는 맞은편 연습실 남자의 능청스러운 목소리도 연달아 들려왔다. 원장과 눈이 마주친 수민은 그제야 미안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현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다뤄야 한다고, 그럼에도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하는 일이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던 원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 김에 현 감기 연습이나 하자며 평온한 얼굴로 돌아간 원장이 새 철선을 가지러 간 사이, 손에서 해머를 놓칠까 봐 겁이 난 수민은 피아노 위에 공구를 올려 두었다. 유리창 너머로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수민은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귓가의 소란이 잠잠해져 갔다.
수민은 당분간 수찬에 대해 좋았던 순간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불행과 갈등을 억지로 끄집어내, 자신을 분노에 싸인 인물이나 실패한 개인으로 치환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과 같은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수민은 지난여름을 떠올렸다. 지난여름, 수민은 수찬과 차를 몰고 핫도그를 먹으러 양평에 갔었다. 핫도그 하나에 두 시간을 소비할 가치가 있을까? 수민의 물음에 수찬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잊을 수 없는 맛이라던데. 수민이 틈을 두지 않고 말을 받았다. 고작 핫도그 하나가? 수민은 맛이 있든 없든 노고를 잊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일 것 같아,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팔당대교에 이르자 시야가 넓게 트였다. 녹음이 짙었다. 그에 반해 강물은 잔잔하고 여름이어도 색이 연해 아름다웠다.
길게 이어진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십여 분을 기다려 가까스로 주차에 성공한 수민과 수찬은 안내 표지판을 확인했다. 주차장 한쪽에는 주말농장에서 기른 상추와 들쑥날쑥 자란 오이 따위를 팔았다. 한 봉지에 2천 원. 수민은 주인 없이 팻말과 돈통만 덩그러니 놓인 판매대에 눈길을 주었다가 앞서가는 수찬을 큰 보폭으로 따라잡았다. 개를 데리고 나온 가족과 연인들,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나온 한 무리의 청년들, 수찬과 수민 모두 한 방향으로 걸었다.
핫도그 가게는 겉보기에도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닐 천막 곳곳이 찢겨 바람에 펄럭였다. 지지대로 쓰인 쇠파이프가 사선으로 누워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너덜거리는 비닐 천막을 헤치고 들어가 핫도그를 20개씩 포장해 가는 사람도 있었다. 뙤약볕 아래, 귀밑머리에 땀이 맺힌 어린아이들이 줄 선 사람들 주위를 갈지자로 뛰어다녔다. 모래 먼지가 날렸다. 플라스틱 부채로 햇빛을 가리거나 동행의 얼굴에 바람을 쐐 주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다. 능숙한 판매원 덕분에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연잎이 들어가 핫도그 색이 어둡다는 안내 문구를 읽고 있던 수민의 등을 수찬이 툭툭 쳤다.
뒤돌아봐.
수민이 뒤를 돌자, 그곳에 커다란 느티나무와 강이 있었다. 완만한 산세 너머로 종을 알 수 없는 새 무리가 빠르게 날아갔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의 유래를, 수민은 차 안에서 검색해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육안으로는 분간이 되지 않는 두 개의 물이 만나는 자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수민과 수찬은 나란히 핫도그를 들고 사람들을 따라 좁은 갈대밭 사이를 걸었다. 예상대로 핫도그의 맛은 수민이 그간 먹었던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맘에 들어?
수민은 입가에 설탕 가루를 묻힌 채 웃어 보이는 수찬 너머, 가게 앞 너른 마당에 앉아 핫도그를 먹는 사람들을 보았다. 연인들이 작은 바위 하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사이좋게 핫도그를 베어 물었다. 두 볼이 맞닿을 듯 가까웠다. 다 먹은 막대를 잘근잘근 씹거나 쓰레기통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물티슈로 아이의 입 주변을 닦는 부모들이 있었다. 수민은 사방이 같은 핫도그를 입에 문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들도 그들 중 하나라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낯선 감정은 이내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수민은 그 가벼운 소속감이 싫지 않았다.
하늘엔 먹구름이 두텁게 내려앉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수민은 지하철역 근처 편집숍 앞에 멈춰 섰다. 쇼윈도에 방한 부츠 몇 가지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중 어그 부츠도 있었다. 유행이 지나 몇 년간 자취를 감추더니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수민은 어린아이처럼 쇼윈도 앞을 서성였다. 눈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어그 부츠가 갖고 싶어졌다. 그러다 몇 가지 사지 말아야 할 이유를 꼽아본 뒤 역사로 발을 돌렸다. 양털과 스웨이드는 물에 약해 눈이 올 때는 도리어 신을 수 없었다. 젖으면 얼룩이 지거나 털이 내려앉아 복구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곧 마흔이 되는데, 양털 부츠 같은 것을 신어도 되는지 확신이 들지도 않았다. 수민은 요즘 자주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곤 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으면 보기 좋을 것들을 따져 보았지만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간단히 저녁을 차려 먹고 무심히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안개처럼 뿌연 배경을 뚫고 유리창에 달라붙는 눈송이가 수민의 눈에 들어왔다. 베란다로 나가 문을 열었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린 지 꽤 시간이 지났는지 바닥에는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패딩 잠바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눈 위를 엉거주춤 걷는 것이 보였다. 수민은 베란다 문을 닫았다. 설거지를 하고 뉴스를 보았다. 외주 원고의 마감 기한을 확인하고 이메일도 체크했다. 조율일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편집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어쩌면 할 수 있는 한 두 직업을 병행해야 할지도 몰랐다. 수민에게는 갚아야 할 은행 이자와 대출금이 많았다. 기능사 자격증을 언제쯤 딸 수 있을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수민은 악기에 대해서도, 구조물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조율은 인문학적 식견이나 예술적 감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경험과 기술적 사고, 운동 능력이 필요했다. 모두 수민이 해보지 않은 일들이었다. 피아노가 시계와 비슷한, 정교하게 세공된 기계에 가깝다는 사실을, 수민은 일을 배우면서 알았다. 수민은 자신의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불확실성을 떠올렸다. 불확실한 것이 너무 많아, 도리어 웃음이 났다. 어그 살걸.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수민은 다시 베란다로 나갔다. 밤이 깊어지자 아파트 단지에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 있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눈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수민은 잠옷 위에 패딩 잠바를 걸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파트 정문에서 동 출입구를 따라 길게 늘어선 주민들이 삽으로 눈을 밀어내고 있었다. 눈은 치우는 족족 빠르게 쌓여갔지만, 짜증을 내거나 삽을 내려놓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은 쌓인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었다. 오리 모양 틀로 눈 오리를 찍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눈을 치우다가도 눈사람이나 눈 오리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수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눈송이가 붉게 빛났다. 나뭇가지 위에 쌓였던 눈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꺼번에 후드득 떨어졌다. 눈 폭탄을 맞은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강아지처럼 몸을 털어댔다. 요란한 행동이 무색하게 모자와 어깨 위로 재빨리 눈이 내려앉았다. 수민은 봄이면 저 나뭇가지에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핀다는 사실을 알았다. 꽃이 너무 무거워 가지가 길게 아래로 늘어지면, 스치기만 해도 라일락 향기가 몸에 배었다. 그런 계절을, 수민은 수찬과 함께 다섯 번이나 보냈다. 수찬과 수민은 성을 떼고 부르면 이름이 비슷해 남매인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이목구비가 희미하고 길쭉한 생김새가 닮기도 했다. 수민에게는 그것이 혈육처럼 영원하리라는 징표로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기대도 전망도 사라지고 없었다. 수민은 오늘 아침, 밥알처럼 부풀었던 마음의 정체가 다름 아닌 슬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으로도, 원망이나 무기력으로도 이어지지 않는 독립적이고도 순수한 감정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수민의 내면에 고요히 머물다가, 오늘처럼 문득 인기척을 낼지도 모르겠다고 수민은 생각했다. 부산스레 움직이는 사람들을 눈으로 훑은 수민은 경비실에 들러 여분의 눈삽을 들고나왔다. 그리고 주위의 어둠을 몰아내듯,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학원은 닭갈빗집과 토익 학원 사이에 있었다. 신사동 뒷골목은 지난밤 유흥의 자취를 지우고 점심 장사를 준비하는 식당과 카페들, 그리고 어학원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간간이 인기척이 났지만 대체로는 한산했다. 간밤의 취기와 치기를 떠올리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사람처럼, 이 골목의 아침은 늘 멋쩍은 구석이 있다고 수민은 생각했다. 물건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무시로 지나다녔다. 얼어붙은 토사물을 쪼아대는 비둘기를 피해 건물 입구로 들어서자 순간 오한이 일었다. 습기 탓에 건물 안이 외려 바깥보다도 춥게 느껴졌다. 건물 입구에 경비실이 있었지만 수민이 실제로 경비원을 본 일은 없었다. 학원은 이 오래된 건물의 3층에 있었다. 원장이 20여 년 전 개원한 이래 줄곧 이 자리를 지켰다고 했다. 위쪽에 작은 나무 간판이 달린 학원 철문은 늘 굳게 닫혀 있어, 이곳에 처음 온 사람들에게는 휴원이나 폐업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수민도 예외는 아니어서 완강해 보이는 철문 앞에서 한동안 망설이다 문손잡이를 잡았던 기억이 있었다. 그러나 학원 문은 겉보기와는 달리 한순간도 잠긴 적이 없다는 사실을, 수민은 이제 알았다.
스위치를 올리자 어둠에 잠긴 내부가 일시에 밝아졌다. 밤사이 갇혀 있던 먼지 냄새가 훅 끼쳤다. 입구의 원장실을 지나면 이론 수업을 진행하는 작은 홀이 나왔다. 반원 모양으로 놓인 열 개 남짓한 접이식 의자 맞은편엔 작업대와 칠판이, 그 옆으론 외장을 떼어 낸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음악과도, 악기와도 거리가 멀었던 수민은 이곳에서 난생처음 그랜드 피아노를 만져 볼 수 있었다. 처음 만져 본 악기는 생각보다 차갑고 부드러웠다.
홀을 지나자 긴 통로를 따라 여덟 칸의 조율 연습실이 네 개씩 마주보고 있었다. 수민은 그중 가장 끝 방으로 들어갔다. 앞판이 없는 업라이트 피아노 위에 놓인 노란색 소형 선풍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날이 추워서인지 때아닌 물건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수민은 보온병이 든 천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은 뒤, 패딩 잠바 주머니에 장갑을 욱여넣고는 잠바를 벗어 스툴 위에 개어놓았다. 지금은 춥지만 연습을 시작하면 금세 열이 오를 것이었다. 수민은 2주 전부터 이론 수업과 함께 가장 기초적인 동음 조율 실습을 병행하고 있었다. 하나의 건반을 지탱하는 세 개의 철선을 같은 장력으로 맞추어 동일한 소리가 나도록 조정하는 일. 단순한 설명과 달리 귀와 손끝의 감각으로 적절한 타이밍을 찾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너무 많은 손을 거쳐 구멍이 헐거워진 튜닝 핀은 튜닝 해머로 아무리 조여도 금방 풀어지기 일쑤였다. 음은 현이 팽팽할수록 높아지고 느슨할수록 낮아지는데, 반복해서 듣다보니 소리가 낮아지는 중인지 높아지고 있는 것인지도 분간이 되질 않았다. 어느 날엔가는 원장이 불쑥 방으로 들어와 수민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수민씨,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면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울림은 멀찍이 떨어져 있어야 잘 들립니다. 멀리 있어야 잘 들린다는 말이 마음에 남았던 수민은 어제 수찬에게도 그 이야기를 들려주었었다.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 몇 마디 묻고는 입을 다물어버린 수찬 때문에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늘어놓게 된 것이었다. 맨날 원고만 봤더니 소리도 보려고 하더라. 수민이 소리에 집중하다보면 금방 목 뒤가 축축해진다고 말을 잇자, 수찬이 대뜸 입을 열었다.
애쓴다.
꺼진 휴대폰 액정을 가만히 바라보던 수민은 사전 어플을 켰다. 애쓰다. 마음과 힘을 다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힘쓰다. 아무래도 수찬은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수민은 요즘 어느 것에도 애를 쓴 적이 없었다. 수민이 온 마음을 다해 이루려고 노력한 것은 다름 아닌 수찬과의 관계였다. 도리어 너무 애를 써서 잘되지 않았다.
수민은 원장실로 향했다. 공구가 모두 원장실 캐비닛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로 잠금장치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은 이 학원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수민은 생각했다. 기역 자로 이어붙인 오래된 철제 책상 두 개와 구식 라디오, 접대용 레자 소파와 낮은 탁자, 그 뒤편에 놓인 캐비닛이 원장실에 있는 모든 것이었다. 집기들이 하나같이 낡고 손때가 묻어, 수민은 원장실에 올 때마다 남의 집 안방에 함부로 들어온 듯 겸연쩍어졌다. 캐비닛 안, 켜켜이 쌓인 수십 개의 파우치 중에 수민의 것도 있었다. 수강생들은 집에 연습할 피아노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로 무거운 조율 공구를 학원에 두고 다녔다. 그러다 밖에서도 쓸모가 생기게 되면 제 것을 집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조율 실습을 시작하면서 수민도 조율 도구가 구비된 파우치를 30만 원에 구입했다. 그 안에는 튜닝 해머와 크기와 모양이 다른 뮤트 러버 여러 개, 펜치와 특수 드라이버, 건반 높이를 재는 수평자까지 실제 조율에서 쓰일 법한 공구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수민은 아직 그것 중 두어 가지 정도만을 사용했기에 자신의 이름표가 달린 두툼한 파우치를 꺼낼 때면 조금은 쑥스러운 기분이 들곤 했다.
원장은 이론 수업이 있는 오전 11시와 저녁 7시 외에도 자율 실습을 하는 수강생들을 위해 상시 문을 열어놓았다. 대체로 이론 수업 즈음에는 출근했지만, 무언가 물어보려고 하면 사라지고 없기도 했고 어느 틈엔가 나타나 라디오를 듣거나 양치질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다 불쑥 연습실로 들어와 조율된 건반을 눌러보며 진도를 체크했다. 수강생들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만큼 연습하고 돌아갔다. 수민은 처음, 자신이 원하는, 혹은 필요한 연습량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지 못했기에 다른 수강생들의 눈치를 살폈다. 학원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요즘, 수민은 가장 먼저 학원 문을 여는 수강생이 되었다. 수민이 모든 건반의 동음 조율을 한차례 마칠 즈음이면 원장이 출근하자마자 히터를 트는 소리, 누군가 피아노 위에 파우치를 내려놓는 소리, 규칙적이고 반복적으로 두드리는 피아노 음이 차례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두 시간의 이론 수업이 끝나면 수강생들은 자신이 맡아두었던 연습실로 돌아가 개인 실습을 이어갔다. 원장이 시간 단축을 숙제로 내주었기에 수민이 타이머를 켜 둔 채 튜닝 해머를 다루기 가장 효율적인 자세를 찾고 있노라면, 어느새 주위의 피아노 소리가 사라지고 멀찍이 원장실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면 수민은 해머를 내려놓고 짐을 챙겼다. 학원에 원장과 수민, 둘만 남았다는 신호이기 때문이었다. 수민은 더 연습할 여력도 있었고 원장이 싫은 것도 아니었지만, 라디오 소리가 끝없는 인기척처럼 느껴져 마음이 불편하고 조바심이 났다. 그럼에도 점진적으로 밀려들고 사그라지는 소란이 나쁘지는 않다고, 수민은 늘 생각했다.
오늘 눈 올 것 같지 않아요?
이론 수업을 듣는 수강생의 연령대는 중학생에서부터 50대가량의 중년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었다. 이유도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은퇴 이후를 대비하기 위해, 누군가는 독일로의 조기 유학을 목표로 이곳에 왔다고 했다. 수민 같은 경우도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직업 안정성에 대한 기대감. 그래서인지 원장은 조율사의 직업적 전망을 늘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특히나 정년이 없다는 것, 그래서 환갑이 넘은 자신도 여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곤 했다. 대부분의 수강생은 수민과 마찬가지로 원장의 말을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카멜색 코트를 입은 남자도 수민과 비슷했다. 서른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남자는 주로 수민의 연습실 맞은편에서 실습했다. 평균율을 연습하는 것으로 보아, 수민보다 진도가 훨씬 빠른 것 같았다. 연습실은 문 상단에 유리창이 달려 있어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기에, 남자는 수민의 방에 찾아와 자세를 교정해 주거나 이론 시간에 가볍게 훑고 지나간 머플러 페달 조정 방법에 대해 재차 설명해주었다. 피아노의 구조에 익숙지 않은 수민은 그의 친절이 고마우면서도 그가 자신이 아는 조율사를 예로 들며 그들의 녹록지 않은 현실에 관해 이야기할 땐 불현듯 수찬의 얼굴이 겹쳐 보이기도 했다. 그의 나이와 태도가 수민이 처음 수찬을 만났을 그 시절과 비슷한 탓이었다. 동시에 수민은 저렇게 악기에 대해 잘 아는데 어째서 아직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했는지, 혹시나 조율 기능사 자격시험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것은 아닌지 순수한 궁금증과 염려가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두 가지 모두, 수민에게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눈이 올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수민은 단단한 쌀알이 물과 열기를 머금고 부드럽게 부풀어오르듯 가슴 한구석이 울렁이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기쁨이나 설렘과는 다른, 기대감도 그리움도 아닌 무언가였다. 이론 수업이 끝나고 난 뒤 조율 실습 때 수민이 현을 끊어버린 것은 설명하기 어려운 그 기분에 대해 생각하느라 집중력이 흐트러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튜닝 핀을 아무리 조여도 음이 맞춰지지 않는 것이 의아하게 느껴질 즈음, 끝없이 늘어나는 철선의 유연함이 그저 놀랍게만 여겨진 그 기이한 낙관의 순간에, 현은 굉음을 내며 보란 듯이 끊어져버렸다. 그다지 고음부도 아니었다. 수민은 자신이 현을 끊어버렸다는 사실보다 예상치 못한 큰 소리에 더욱 놀랐다. 장력이 90kg에 이르는 현이 한계에 이르러 찢어지는 소리에는, 조는 아이의 등짝을 후려갈기는 듯한 단호한 폭력성이 깃들어 있었다. 수민이 막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눈을 깜박이고 있을 때, 소리를 들은 원장이 재빠르게 연습실로 달려왔다. 아이고, 저런! 원장이 한탄했다. 축하합니다, 하고 외치는 맞은편 연습실 남자의 능청스러운 목소리도 연달아 들려왔다. 원장과 눈이 마주친 수민은 그제야 미안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현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다뤄야 한다고, 그럼에도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하는 일이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고 여러 차례 주의를 주었던 원장의 말이 떠올랐다. 그 김에 현 감기 연습이나 하자며 평온한 얼굴로 돌아간 원장이 새 철선을 가지러 간 사이, 손에서 해머를 놓칠까 봐 겁이 난 수민은 피아노 위에 공구를 올려 두었다. 유리창 너머로 장난스럽게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수민은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귓가의 소란이 잠잠해져 갔다.
수민은 당분간 수찬에 대해 좋았던 순간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불행과 갈등을 억지로 끄집어내, 자신을 분노에 싸인 인물이나 실패한 개인으로 치환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과 같은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수민은 지난여름을 떠올렸다. 지난여름, 수민은 수찬과 차를 몰고 핫도그를 먹으러 양평에 갔었다. 핫도그 하나에 두 시간을 소비할 가치가 있을까? 수민의 물음에 수찬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잊을 수 없는 맛이라던데. 수민이 틈을 두지 않고 말을 받았다. 고작 핫도그 하나가? 수민은 맛이 있든 없든 노고를 잊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일 것 같아,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가 팔당대교에 이르자 시야가 넓게 트였다. 녹음이 짙었다. 그에 반해 강물은 잔잔하고 여름이어도 색이 연해 아름다웠다.
길게 이어진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십여 분을 기다려 가까스로 주차에 성공한 수민과 수찬은 안내 표지판을 확인했다. 주차장 한쪽에는 주말농장에서 기른 상추와 들쑥날쑥 자란 오이 따위를 팔았다. 한 봉지에 2천 원. 수민은 주인 없이 팻말과 돈통만 덩그러니 놓인 판매대에 눈길을 주었다가 앞서가는 수찬을 큰 보폭으로 따라잡았다. 개를 데리고 나온 가족과 연인들,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고 나온 한 무리의 청년들, 수찬과 수민 모두 한 방향으로 걸었다.
핫도그 가게는 겉보기에도 조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닐 천막 곳곳이 찢겨 바람에 펄럭였다. 지지대로 쓰인 쇠파이프가 사선으로 누워 있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너덜거리는 비닐 천막을 헤치고 들어가 핫도그를 20개씩 포장해 가는 사람도 있었다. 뙤약볕 아래, 귀밑머리에 땀이 맺힌 어린아이들이 줄 선 사람들 주위를 갈지자로 뛰어다녔다. 모래 먼지가 날렸다. 플라스틱 부채로 햇빛을 가리거나 동행의 얼굴에 바람을 쐐 주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았다. 능숙한 판매원 덕분에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연잎이 들어가 핫도그 색이 어둡다는 안내 문구를 읽고 있던 수민의 등을 수찬이 툭툭 쳤다.
뒤돌아봐.
수민이 뒤를 돌자, 그곳에 커다란 느티나무와 강이 있었다. 완만한 산세 너머로 종을 알 수 없는 새 무리가 빠르게 날아갔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의 유래를, 수민은 차 안에서 검색해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육안으로는 분간이 되지 않는 두 개의 물이 만나는 자리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수민과 수찬은 나란히 핫도그를 들고 사람들을 따라 좁은 갈대밭 사이를 걸었다. 예상대로 핫도그의 맛은 수민이 그간 먹었던 것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맘에 들어?
수민은 입가에 설탕 가루를 묻힌 채 웃어 보이는 수찬 너머, 가게 앞 너른 마당에 앉아 핫도그를 먹는 사람들을 보았다. 연인들이 작은 바위 하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사이좋게 핫도그를 베어 물었다. 두 볼이 맞닿을 듯 가까웠다. 다 먹은 막대를 잘근잘근 씹거나 쓰레기통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물티슈로 아이의 입 주변을 닦는 부모들이 있었다. 수민은 사방이 같은 핫도그를 입에 문 사람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이, 그리고 자신들도 그들 중 하나라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낯선 감정은 이내 안도감으로 바뀌었다. 수민은 그 가벼운 소속감이 싫지 않았다.
하늘엔 먹구름이 두텁게 내려앉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수민은 지하철역 근처 편집숍 앞에 멈춰 섰다. 쇼윈도에 방한 부츠 몇 가지가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중 어그 부츠도 있었다. 유행이 지나 몇 년간 자취를 감추더니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수민은 어린아이처럼 쇼윈도 앞을 서성였다. 눈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어그 부츠가 갖고 싶어졌다. 그러다 몇 가지 사지 말아야 할 이유를 꼽아본 뒤 역사로 발을 돌렸다. 양털과 스웨이드는 물에 약해 눈이 올 때는 도리어 신을 수 없었다. 젖으면 얼룩이 지거나 털이 내려앉아 복구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곧 마흔이 되는데, 양털 부츠 같은 것을 신어도 되는지 확신이 들지도 않았다. 수민은 요즘 자주 자신의 나이를 의식하곤 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않으면 보기 좋을 것들을 따져 보았지만 쉽게 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간단히 저녁을 차려 먹고 무심히 바깥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안개처럼 뿌연 배경을 뚫고 유리창에 달라붙는 눈송이가 수민의 눈에 들어왔다. 베란다로 나가 문을 열었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린 지 꽤 시간이 지났는지 바닥에는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패딩 잠바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눈 위를 엉거주춤 걷는 것이 보였다. 수민은 베란다 문을 닫았다. 설거지를 하고 뉴스를 보았다. 외주 원고의 마감 기한을 확인하고 이메일도 체크했다. 조율일로 자리를 잡을 때까지 편집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다. 어쩌면 할 수 있는 한 두 직업을 병행해야 할지도 몰랐다. 수민에게는 갚아야 할 은행 이자와 대출금이 많았다. 기능사 자격증을 언제쯤 딸 수 있을는지도 알 수 없었다. 수민은 악기에 대해서도, 구조물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조율은 인문학적 식견이나 예술적 감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경험과 기술적 사고, 운동 능력이 필요했다. 모두 수민이 해보지 않은 일들이었다. 피아노가 시계와 비슷한, 정교하게 세공된 기계에 가깝다는 사실을, 수민은 일을 배우면서 알았다. 수민은 자신의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불확실성을 떠올렸다. 불확실한 것이 너무 많아, 도리어 웃음이 났다. 어그 살걸.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수민은 다시 베란다로 나갔다. 밤이 깊어지자 아파트 단지에는 사람들이 더 많아져 있었다. 어린아이 주먹만 한 눈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수민은 잠옷 위에 패딩 잠바를 걸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파트 정문에서 동 출입구를 따라 길게 늘어선 주민들이 삽으로 눈을 밀어내고 있었다. 눈은 치우는 족족 빠르게 쌓여갔지만, 짜증을 내거나 삽을 내려놓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들은 쌓인 눈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었다. 오리 모양 틀로 눈 오리를 찍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눈을 치우다가도 눈사람이나 눈 오리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수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눈송이가 붉게 빛났다. 나뭇가지 위에 쌓였던 눈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한꺼번에 후드득 떨어졌다. 눈 폭탄을 맞은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강아지처럼 몸을 털어댔다. 요란한 행동이 무색하게 모자와 어깨 위로 재빨리 눈이 내려앉았다. 수민은 봄이면 저 나뭇가지에 라일락이 흐드러지게 핀다는 사실을 알았다. 꽃이 너무 무거워 가지가 길게 아래로 늘어지면, 스치기만 해도 라일락 향기가 몸에 배었다. 그런 계절을, 수민은 수찬과 함께 다섯 번이나 보냈다. 수찬과 수민은 성을 떼고 부르면 이름이 비슷해 남매인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이목구비가 희미하고 길쭉한 생김새가 닮기도 했다. 수민에게는 그것이 혈육처럼 영원하리라는 징표로 느껴지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기대도 전망도 사라지고 없었다. 수민은 오늘 아침, 밥알처럼 부풀었던 마음의 정체가 다름 아닌 슬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고통으로도, 원망이나 무기력으로도 이어지지 않는 독립적이고도 순수한 감정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수민의 내면에 고요히 머물다가, 오늘처럼 문득 인기척을 낼지도 모르겠다고 수민은 생각했다. 부산스레 움직이는 사람들을 눈으로 훑은 수민은 경비실에 들러 여분의 눈삽을 들고나왔다. 그리고 주위의 어둠을 몰아내듯,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김유진
폭설이 내린 날 아침, 쌓인 눈을 보면서 시작한 소설입니다. 어느 겨울, 혼자로 돌아간 한 인물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적어보았습니다.
2021/01/26
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