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의 문



   내가 길을 잃었을 즈음 너는 청록색이 되어있다
   휴가철의 환기
   아무것도 모르는 말들을 가지고 있으면 납작하게 잘 마른 광물들이 움직인다
   그리고 나는
   떼어내기 시작한다
   들어오지 못한 색들을 지칭하려는 손가락이 움직인다
   말을 막은 손이 움직일 때마다 눈빛들은 옛날을 향해 움직였다
   수직의 그림들은 스스로 서 있는 것인가

   누군가 내게 파란빛을 주문하고
   나는 손을 움직인다
   떼어내라 떼어내라
   안간힘으로 이 장을 떼어내면 다음 장이 들어올 거야
   복원할 수 없는 모양을 지우고 다녔다
   생명은 아픈 건가요
   물을 때마다 네가 웃으면
   너는 복원할 수 없는 그림
   빛과 형태로 움직이다가 멈추고 마는

   멈추는 것들엔 다른 곳의 색들이 스며드느라
   작은 방울들이 다가오는 동안 너는 입을 벌린 채
   호수가 되어간다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를 수풀 속에 기다리는
   잿빛이 있군요. 일시에 풀려서 스며드는 모양들도요

   *
   어느 날 당신의 암흑이 서쪽에 외양간을 만들고 그네를 만들고
   밥그릇과 호미와 부엌의 삐걱이는 의자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에서 스며 나오는 빛들이 어느 밤에 길을 건너고 발등을 덮습니다
   당신의 의지가 움직이는 동안 잠들어 있는 당신의 그림자

   우는 소리 내는 법을 배우지 못해 나무 아래 그림자를 세었습니다.

   너는 일렁이지도 않았고 멈추지도 않았어
   콕 찌르면 검정은 반응하지 않았다
   검정은 그림자
   검정은 그러나
   그림자의 형체
   가라앉거나 내쉬지도 않는
   네가 가지를 들고 움직일 때마다
   네가 모르는 이름들이 따라오는 것도 몰랐지

   네가 알고 있던 스타벅스 앞길 위에서
   나는 고치를 만든다
   햇빛이 되기 위해
   겨울의 길목에 물기를 모으기 위해
   온도를 가진 눈가의 모음들이
   서서히 잦아드는 소리
   맹렬함의 퇴화로 붕괴하는 저녁의 회색
   너의 말을 따라잡기 위해 꿈속으로 간다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채찍을 휘두르지만 나는 그것의 주인이 아니다
   달리면서 생각한다
   이렇게 마구 등지고 가는 사람이 되어도 될까
   그곳을 향해 달려도 될까
   갈래길 앞에서
   너인지 아닌지 모를 사람이 등지고 가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공원



   그곳이 아닌 곳에서 그곳에 여러 번 다녀온 사람들이 서로를 지나칩니다. 검은 가방이 걸어가는 거리의 여백을 채웁니다. 살결들은 흔적을 지웁니다. 냄새가 사라지는 곳에 피어오르는 예감들이 정리되어 도로에 붙고 있습니다. 어떤 흔적도 가지지 않은 사람을 이상으로 품듯 사물들은 유리 안에서 점점 확고한 살결을 만들고 있습니다. 걸어가는 이들의 살결은 흔적 없는 흔적을 지우고 있습니다. 이쪽을 지우고 나면 저쪽이 더 감감해지는 저녁이 멀리 진행 중입니다. 마른 곳에 일어나는 기억을 황급히 불어 끕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두 번 곁에서 웃고 다른 어떤 날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기억들을 붙들고 문득 출근합니다. 사이사이 출근합니다. 배들이 정박한 곳엔 흰 이 같은 동물들이 앉았다 사라집니다. 다리 위엔 지나간 웃음과 눈빛 발을 헛디딘 자국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눈썹이 검은 소녀들이 앉아서 서로의 발목을 부딪칩니다. 유모차 안에 아이가 자리를 비우고 조부의 어깨 위로 올라갑니다. 어깨 위에는 오래된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 앉아 바라보다 이전의 이전의 이전을 찾아간 사람에 대해서 나무들은 숨기지 않습니다. 숨겨지지 않은 사실들을 배반하느라 발이 아픕니다. 그래도 건강을 유지합니다. 멧새들과 왜가리가 소스라쳐 날아오르는 이유에 대해 들고양이는 알아차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슬퍼 누군가 웁니다. 오로지 한 가지만을 위해 우는 것이 서러워 또 웁니다. 부러진 나뭇가지 사이를 흐르듯 지나치는, 습하고 어둔 곳으로 향하는 기다란 몸의 궁금증을 내내 풀 수 없는 영혼이 있습니다.

   무엇을 유지하듯 넘어집니다. 무엇을 지켜가듯 말라갑니다. 웅덩이마다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날씨들이 잠기어 서로를 낯설어합니다. 누군가 떨어트리고 간 단추 알과 슬픔이나 반역 빗나간 발음들이 서로를 베끼고 있습니다. 웅덩이 안에서 그것들은 반영과 빛나는 것에 대해 합의되지 않은 점도를 형성하며 색을 얻어갑니다. 해가 뜨더라도 이곳은

   빛과 바람, 가지와 풀들, 다리와 멈춘 것, 달리는 것과 입을 다문 것 그리고 탐사하듯 땅을 향해 머리를 늘어트린 이들 위로 모든 것이 사선을 이루며 향합니다. 다른 곳을 향한 마음이 반영(反映)을 이룹니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늪과 푸른 뱀과 길어진 가지와 깊은 눈들과 허물이 사라지는 길을 떠올립니다. 그곳에 없는 것들만이 그것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물이 멀어질수록 물을 업고 가는 사람처럼 마른 땅에 그늘을 덧칠하는 구름. 당신은 무엇을 지키고자 그곳을 떠나는 사람이 됩니까. 유채꽃이 땅을 덮고 버드나무가 잘려 나가고

   어느 날의 사실들을 밥처럼 오래 씹어서 목으로 넘기는 사람. 시간이 영원히 길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오래도록 씹고 넘겨야 하는 일을 다시 배우고 있습니까. 문을 열면 다시 열어야 할 문이 생기고 문을 닫으면 문 뒤에서 닫을 문을 짜는 사람이 됩니다. 벽마다 가능성은 잠잠하게 새겨지고 있습니다. 일생을 다해 벼르는 단단함

   그곳에 올라오지 못하는 언니가 있었어요. 정육각 타일이 놓인 곳은 안전한 곳으로 알려지고 우리 둘은 육각 위에 앉아 어린 동물을 돌보았습니다. 햇빛이 가르마를 넘기고 오후는 소리 없이 저물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같은 속도를 유지한 적이 없어서 우리들은 매일 다르게 무언가를 놓치는 중이었습니다. 머리칼 위로 사그라드는 것들
   버스정류장에 앉으면 놓친 것들을 떠올리게 되죠. 나는 언니가 셋인 것 같았다가 둘인 것 같았다가 나는 누군가를 찾아야 하거나 혹은 발견되어야 할 사람이 아닌가요
   소리가 크면 소리 속에 중요한 것을 감출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자주 비명을 지르는 사람이었다가 자주 비명을 삼키는 사람이 되었어요. 누구의 근심이 되지 않고 시선을 잃어가는 길고 구멍 난 것들이 이곳에서 한참을 비워지고 있습니다.

정나란

광주에서 태어났다. 무엇이든 쓰고 있다. 움직인다. 달린다.

2021/03/30
4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