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례적인 한파였다. 수도관 동파로 세탁도, 샤워도 하지 못하고 생수를 구입해 세수를 했다. 양치를 하고 차를 내리는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집주인이었다. 이사 온 이후로 주인아줌마가 전화를 걸어온 것은 처음이었으므로 잠시 망설였다. 며칠 전에 수도세를 이체했는데 무슨 일일까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아줌마.”
   “주인아줌마 아니고 주인집 딸이에요.”
   주인집 딸? 주인집 딸이라면 2년 전 전세 계약할 때 만난 적이 있었다.
   “혹시 집을 비워주실 수 있나요?”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아니, 왜요?”
   “우리 엄마가 많이 아파요. 암에 걸려서……”
   주인집 딸은 우리가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 이미 아줌마가 암에 걸린 상태였다고 했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최근 암이 폐로 전이되었고 자신이 엄마를 간병하러 매주 원주에서 KTX를 타고 오고 있다고 했다. 점점 병환이 심해질 거고 코로나 걱정까지 더해져 남은 시간, 반지하인 우리 집에 들어와 엄마를 돌봐드리고 싶다고 했다. 나는 간병을 하는데 왜 꼭 반지하로 들어와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빠가 새아빠이기 때문에 방이 두 개뿐인 부모님 집에서 자신이 함께 생활하기가 힘들어서 그렇다고 했다. 화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화를 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동네에 집이 이 집뿐인가요?”
   “동네를 전부 뒤져봤는데 지금 제가 들어갈 만한 집이 없어서 그래요. 그리고 그 집은 오빠 집이었으니 동생인 제가 찾고 싶기도 하고요.”
   그녀는 마치 내가 이 집을 빼앗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2년 전 계약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은 우리 부부의 인생이 조금 나아지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서울에서 10년 동안 반지하 월셋집을 전전하던 우리에게 목돈이 생겼고 전셋집을 구하러 다니고 있었다. 5000만 원이라는 돈은 우리 부부에겐 큰돈이었지만 5000만 원으로 괜찮은 집을 구하는 것은 힘들었다. 부동산중개인이 우리에게 보여준 집들은 그동안 우리가 살았던 500에 40만 원짜리 월셋집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대부분 반지하였고 1층이라고 해도 여름이면 습기가 올라올 것이 뻔한 집들이었다. 그러던 중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기 엄마 친구가 하는 부동산에 싸고 괜찮은 집이 나왔거든. 5000도 아니고 3500에 나왔어. 내일 당장 와서 봐.”
   엄마는 경기도 성남시, 그 시에서도 작고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었다. 나는 3500만 원짜리 전셋집이 좋아봐야 얼마나 좋겠냐고 생각하면서도 엄마를 볼 겸 가기로 했다.
   집을 보여주기로 한 부동산 아줌마는 갑자기 일이 생겨 조금 늦겠다고 했으므로 나는 엄마와 그사이 다른 부동산으로 가서 집을 몇 개 더 보기로 했다. 경기도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개인이 우리에게 보여준 집은 모두 반지하였다. 반지하집은 대부분 눅눅했고 현관문이 가벼워 불안했으며 주인이 지척에 살았다. 돈을 조금이라도 대출받아 1층으로 옮겨야 할까 생각하는데 엄마가 말했다.
   “아직 실망하긴 이르지.”
   엄마는 엄마 친구가 한다는 부동산으로 나를 데려갔다. 문이 잠긴 작은 부동산 앞에서 엄마와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발을 동동 굴렀다. 10분이 지나자 집시처럼 자유로워 보이는 부동산 아줌마가 멀리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굵게 웨이브진 백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장식을 주렁주렁 단 목걸이를 원색의 원피스 위로 늘어뜨린 그녀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면서 우리를 안으로 들여 차를 내어준 다음, 다 마실 때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럼 가볼까?”
   엄마는 일부러 나에게 다른 집들을 보여준 모양이었다. 엄마가 찾은 집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디지털잠금장치를 풀고 집에 들어선 순간 입이 벌어졌다. 넓은 현관이 있었고 오른쪽으로 미닫이문이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방과 큰 방이 나란히 있었는데 큰 방 들어서기 전 작은 공간에 깔끔한 싱크대, 찬장 등이 잘 갖춰진 작은 부엌이 있었다. 여유 있는 사람들에겐 보잘것없는 집이었을지 모르나 나에겐 눈이 번쩍 뜨이는 집이었다.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바닥재였다. 지난 10년 동안 누런 장판 위에서 살았던 나는 목재바닥을 발로 문질러봤다. 엄마와 둘러보고 온 음침하고 초라한 집들 때문에 집이 더욱 멋져 보였다. 부동산 아줌마가 말했다.
   “이 집 아들이 여기서 살다가 장가갔어. 아들 때문에 리모델링을 한 거지 그냥 세놓으면 이렇게 안 해. 이 가격에 이 동네에 이런 집 없어. 이런 집은 7000에 내놔도 되는데.”
   이틀 뒤, 집을 계약하는 자리에는 네 명의 여자, 두 모녀가 모였다. 율무차와 믹스커피를 나눠 마시며 따듯한 말을 주고받았다. 부동산 아줌마와 엄마는 엄마가 이 동네에 이사 온 10년 전, 우연히 주민센터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다고 했다. 딸내미가 집을 찾고 있으니 좋은 집 있으면 연락 달라는 십년지기의 부탁에 더욱 신경을 써준 것이다. 부동산 아줌마는 세를 놓은 주인아줌마와도 오랜 친구라고 했다. 주인아줌마가 엄마 친구의 친구라니. 엄마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가진 돈으로 이런 집을 구할 순 없었을 것이다. 부동산 아줌마가 보증금의 10퍼센트만 계약금으로 걸고, 입주하는 날 잔금을 치르라고 했다. 나는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뽑아 오겠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산 건너편에 있는 은행으로 들어갔다. 나는 한참을 쩔쩔맸다. 주로 카드 결제를 하다보니 오랫동안 현금인출기로 돈을 인출한 적이 없어서 1회 출금한도가 낮아진 바람에 350만 원을 뽑으려면 시간이 걸렸다. 엄마가 왜 아직 안 오냐고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사정을 말하자 주인아줌마가 전화기를 넘겨받아 10퍼센트가 안 되어도 좋으니 100만 원만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140만 원을 뽑아 은행에서 나왔다. 그렇게 작은 소동을 벌이며 이룬 계약이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면서 주인아줌마가 친구 딸에게 하듯이 말했다.
   “전세보증금 안 올릴 거니까 8년이고 10년이고 살아.”
   10년 동안의 월세살이를 끝내고 전셋집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한쪽 발에 걸린 쇠사슬이 조금 느슨해진 기분이었다. 나는 이사를 한 뒤 며칠간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고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주인집은 2층이었는데 반지하집은 출구가 따로 나 있어서 서로 마주칠 일도 없었다. 어쩌다 길에서 마주치면 따듯한 눈인사를 나눴다.
   기억 속에 간직해둔 이런 멋진 그림은 전화 한 통으로 물감이 번져버렸다. 이럴 거면 왜 10년을 살라는 둥 희망적인 말을 했단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은 헛된 희망을 던져주는 사람이었다. 나는 전화기에 대고 볼멘소리를 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이 한파에, 게다가 전염병이 돌고 있는데 어디로 가라는 거예요?”
   임신 10주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배가 부를 때쯤 이사 갈 집을 알아봐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겁이 났다.
   “죄송해요. 아빠는 일 나가야 하고 낮에 엄마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해요. 오빠는 엄마가 이렇게 아픈데 한번 와보지도 않아요. 간병할 사람이 저밖에 없어요.”
   “아니, 무슨 오빠가 그래요? 우리 남동생도 결혼한 이후로 부모님께 더 소홀해요. 경제적 지원은 더 받아놓고 말이죠.”
   최근에 엄마가 쇄골이 골절되어 입원했을 때 간병은 나와 여동생의 몫이었다. 아니, 내 몫이었다. 여동생은 내가 엄마와 더 친하다는 이유로 내게 모조리 떠넘기려 했다. 그 순간 생각난 것은 갈치였다. 어릴 때 나는 유난히 갈치구이를 좋아했다. 하지만 늘 가장 큰 조각을 남동생에게 양보해야 했다.
   “게다가 난소암이거든요. 저 때문에 암에 걸린 거예요. 저 때문에……”
   마지막 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는 집을 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겠다고 말한 뒤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저녁에 남편이 집에 왔을 때 나는 녹음해둔 주인집 딸과의 통화를 들려줬다. 남편은 다 듣지도 않고 짜증을 내며 말했다.
   “다시 전화 오면 그냥 논리적으로 말해.”
   “논리적이라니?”
   “지금 묵시의 갱신으로 계약 기간이 2년간 연장된 상태야. 법적으로 이러저러하니 이러시지 말라고 해. 더이상 전화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하라고. 뭐 저렇게 다 들어주고 앉았냐. 당신이 다 들어주니까 저러는 거 아니야. 만만하게 보고.”
   남편은 연애할 때도 내게 이런 식의 말을 자주 했다. 내가 마음이 따듯하고 인정이 많은 것은 좋은 것인데 사람들은 그런 사람의 마음을 나쁘게 이용한다고 했다. 어쨌거나 법적으로 2년간 더 살 수 있다니 괜한 걱정을 한 셈이었다.
   “나가게 하려면 한 달 전에 말했어야 해. 누굴 바보로 아나. 혹시 암에 걸렸다는 것도 거짓말은 아니겠지?”
   그건 아닐 것이다. 아줌마는 계약하던 날에도 머리를 전부 가리는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탈모가 심했던 것이 항암치료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이튿날 남편은 출근하기 전에 아줌마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전투태세로 핸드폰을 집어든 남편의 험악한 표정은 통화를 하는 동안 조금씩 누그러졌다. 전화를 끊은 뒤 남편이 말했다.
   “딸이 상의 없이 전화한 거라고 신경 쓰지 말래.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갑자기 폐로 전이된 모양이야.”
   하지만 며칠 뒤 주인집 딸은 또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이번에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저 주인집 딸인데요, 이거 제 번호거든요, 저장해두세요.”
   그녀는 화난 목소리였다.
   “집 알아보셨어요?”
   당연하다는 투였다. 나는 달래듯이 말했다.
   “아줌마하고 통화했어요. 저희는 따님이 아니라 어머니하고 계약한 거잖아요. 정말 어린애처럼 왜 이러세요? 명령한다고 해서 들어드릴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녀는 울먹이며 말했다.
   “명령하는 게 아니라 부탁하는 거예요. 엄마 간병도 제대로 못하고 떠나보내면 한 맺힐 거 같아서 그래요. 집을 비워주실 수 없을까요?”
   나는 생각해보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은 뒤 인터넷에서 ‘묵시의 갱신’을 검색했다. 부동산 관련 블로그에서 다음과 같은 정보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른 묵시의 갱신
   제6조(계약의 갱신) 1항: 임대인이 임대차기간이 끝나기 6개월 전부터 1개월 전까지의 기간에 임차인에게 갱신거절의 통지를 하지 아니하거나 계약조건을 변경하지 아니하면 갱신하지 아니한다는 뜻의 통지를 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그 기간이 끝난 때에 전 임대차와 동일한 조건으로 다시 임대차한 것으로 본다. 임차인이 임대차기간이 끝나기 1개월 전까지 통지하지 아니한 경우에도 또한 같다.

   최근에 법이 개정되어 2020년 12월 10일 이후에 한 계약은 1개월이 ‘2개월’로 바뀌었지만 우리의 계약은 2019년 12월에 체결되었으니 우리가 나가길 바랐다면 2020년 11월에는 고지를 했어야 했다. 나는 지금 당장 제6조 1항을 캡처해서 보내줄까 하다가 마음을 가다듬었다. 죽어가는 엄마를 둔 사람에게 보내기엔 냉정한 글이었다.

   이튿날 주인집 딸이 또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나는 만만해 보이지 않도록 배에 힘을 주고 다소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주택임대차보호법에 의해 저에게는 이곳에서 2년 동안 더 살 수 있는 권리가 있어요. 더 이상 전화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긴장한 탓에 목소리가 떨려서 우스꽝스럽게 들렸고 내 목소리는 조금씩 기어들어갔다. 그녀는 답답하다는 듯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알아요. 법적으로 그렇다는 거 안다고요. 하지만 엄마가 죽어간다고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본인의 엄마가 죽어간다고!”
   나는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이번에도 저번과 같은 말을 하고 끊었다,
   “생…… 생각해볼게요.”
   수치심이 들었다. 내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어쨌든 그들은 우리에게 시세보다 싸게 집을 제공해주지 않았던가. 남편은 그건 이미 지나간 계약이라고 했지만 나는 그들의 따듯한 마음이 반영된 베풂이었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이런 내가 감상적이라고, 자본주의 시대에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했다. 남편은 주인이 돈이 급히 필요해서 집을 싸게 내놨을 것이라고 했다. 엄마도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 월세로 살았던 조선족 부부가 보증금을 전부 까먹고 서너 달 월세를 안 낸 상태로 야반도주를 했으므로 주인집은 젊은 한국인 부부와 월세가 아닌 전세계약을 하길 원했고 돈이 급해서 싸게 내놓은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내 식대로 생각하는 것이 나는 좋았다. 이 세상이 원칙대로만 흘러간다면 사는 것이 삭막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누군가에게 베풂을 받았을 때 보답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녀는 두 번이나 더 전화했다. 어린애처럼 조르기까지 했다.
   “한 번만 더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네?”
   집요한 그녀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미안한 마음이 사라졌다.
   “자꾸 이러시면 갑질하신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반지하 사는 세입자에게 이러세요. 저희만 세입잔가요? 1층도 세 들어 사는 거잖아요.”
   “갑질이라뇨. 제가 돈이 없어서 그래요. 1층은 5000만 원이거든요. 지층 3500만 원은 제가 어떻게든 끌어모아 돈을 해드릴 수 있는데 5000만 원은 구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기가 막혔다. 우리가 더 가난해서 선택되었단 말인가. 아무리 돈이 없다 해도, 낡은 건물이긴 해도 2층짜리 건물 한 채를 가진 주인집 딸이 나보다 돈이 없을까. 우리에겐 3500만 원짜리 전셋집이 전부였다. 그녀의 사정을 봐주려면 대출을 받아 이사를 해야 했다. 타인을 위해 베푸는 선의에는 한계가 있었다. 나는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앞으로는 전화해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렇게 매몰차게 대한 것이 후회되었다. 죽어가는 엄마를 지켜보는 사람에게 갑질 운운한 것도 부끄러웠다. 생각은 더욱 부끄러운 쪽으로 옮아갔다. 만약 주인아줌마가 돌아가신다면? 그럼 이사를 안 가고 이 집에서 10년간 살아도 되는 건가? 우리가 무리를 해서 집을 뺐는데 아줌마가 죽으면 괜한 수고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흠칫 놀랐다. 나는 한순간이나마 아줌마가 죽길 바란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도록 몰아간 주인집 딸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이제 그만 생각하자 마음먹고 찻잔을 가지고 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런데 모골이 송연했다. 지금 주인아줌마의 딸이 죽어가는 엄마를 돌보고 있다. 내 머리 위에서. 이런 생각 때문에 도무지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저녁 즈음, 주인집 딸로부터 문자가 왔다.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더이상 전화 안 하겠습니다.
   나도 답문을 보냈다.
   -저도 돈이 있으면 옮기고 싶네요. 돈이 없어서 죄송합니다.
   -저야말로 돈이 없어서 죄송해요.
   이런 말을 주고받다니. 역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안됐지만 할 수 없지.”
   남편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던지 쉬는 날 함께 동네 부동산을 둘러보자고 했다. 어차피 2년 뒤에는 나가야 할 테니 적당한 집이 있다면 조금 일찍 나갈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2년간 상황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여섯 군데나 둘러봤지만 마땅한 집이 없었다.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집은 곰팡내가 풍기는 반지하나 비좁은 옥탑방밖에 없었다. 주인아줌마를 위해, 혹은 그녀의 딸을 위해 그런 선택을 할 순 없었다.
   허름한 반지하 집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에게 말했다.
   “그 여자 자기 때문에 엄마가 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더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주인아줌마가 난소암이래.”
   “그거하고 무슨 상관인데?”
   “아무래도 출산하고 상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다음날 퇴근해 들어오던 남편이 말했다.
   “길에서 아저씨 만났는데 주인아줌마 암 걸린 거 유전이래. 아줌마 어머니도 난소암으로 돌아가셨다네. 검색해보니 난소암은 오히려 출산한 여성에게서 적게 발병하는 암이래.”
   남편은 한숨을 내쉰 뒤 이렇게 덧붙였다.
   “하여튼 여자들이란. 이해가 안 가.”
   “뭐가?”
   “너무 감정적이잖아. 근거가 없는데 죄책감을 느껴. 주인아줌마가 딸을 낳아서 난소암에 걸렸다는 건 아무 근거가 없어. 그냥 아줌마 딸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런데 여기서 남자, 여자가 왜 나와? 주인아줌마 딸이 여자라서 그렇다는 거야?”
   “아줌마 아들은 안 그러잖아. 어머니가 암에 걸린 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할걸. 당신도 이상해. 주인아줌마 딸이 한이 맺힌다 해도 그건 당신하고 아무 관계가 없어. 굳이 잘못이 있다면 어머니한테 평소 효도하지 못한 그 여자에게 있지. 그 여자와 그 여자 오빠가 했어야 하는 일에 대해 당신이 미안해하고 안절부절못할 거 없다고.”
   여자들이 감정적이라든가 감상적이라는 말은 근거가 없는 소리였다. 나는 살면서 감정적인 남자를 많이 봐왔다. 분노조절을 못해 행패를 부리거나 여자를 때리는 남자들. 그런 남자들이 이성적이란 말인가. 설사 여자들이 감정적이라고 해도 그게 왜 나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성적이기만 하면 세상이 더 살기 좋아질까. 아줌마 딸이 이성적이기만 해서 아줌마 아들처럼 어머니의 병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을 못 느끼면 아줌마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주인집 딸이 감상적이고 감정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상상력이 풍부하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머리를 식히러 집 밖으로 나갔다가 담배 냄새가 나는 곳을 올려다봤다. 주인아저씨가 2층 방에서 몸을 내밀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암이 폐로 전이된 아내가 있는 집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나도 모르게 남자는 원래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날씨가 풀리자 주인집 딸과의 일도 조금씩 흐릿해졌다. 새벽 1시, 편의점에 가려고 나섰다가 집 앞에서 주인집 딸과 마주쳤다. 2년 만에 봤고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눈매가 아줌마를 쏙 빼닮은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전화로는 그렇게 저돌적이던 그녀는 막상 나와 마주하자 눈도 잘 맞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 순간 주인아줌마가 2층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환기되면서 죄책감이 몰려왔다.
   “간병하다가 가시는 거예요? 아줌마는 좀 어떠세요?”
   “오늘은 많이 안 좋았어요. 원래 7시면 집에 가는데 오늘따라 더 힘들어하셔서…… 게다가 엄마와 새아빠가 다투는 바람에 분위기가 험악해서 새벽이지만 나왔어요. 택시 타면 돈이 많이 나올 테니 근처 모텔에서 자고 가야겠어요.”
   “차라리 저희 집에서 자고 가시는 게 어때요? 남편이 사흘간 지방 출장을 갔거든요. 아침 일찍 KTX 타고 가면 되잖아요.”
   나는 억지로 그녀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렇게라도 해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는 현관에서 머뭇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그럼 한밤중에 실례하겠어요. 집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으셨네요.”
   그녀는 안으로 들어와 집을 둘러봤다. 작은 방 문을 열며 여기서 자라고 하자 그녀가 방에 놓인 소파를 빤히 쳐다봤다.
   “집에 있던 거 그냥 쓰고 있어요. 멀쩡해서 버리기가 그렇더라고요.”
   그녀가 소파에 앉아 손으로 가죽을 만지며 말했다.
   “내가 오빠한테 사준 소파에요. 저…… 사실 이 집에서 살아보고 싶었어요.”
   이 다세대주택은 어릴 때 돌아가신 아빠가 남겨준 것이라고 했다. 오빠는 엄마에게 이 건물을 팔아 빚을 갚자고 했지만 엄마는 아빠가 남겨준 집에서 평생 살고 싶어 했다. 엄마는 십수 년간 식당일을 해서 빚을 모두 갚았다. 오빠는 엄마가 재혼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아빠가 남겨준 재산이 새아빠에게 조금이라도 넘어가는 것을 걱정한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새아빠와 엄마는 오래도록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다가 5년 전에서야 혼인신고를 했다.
   “법적으로 그렇다네요. 한쪽이 죽었을 때 그 사람 재산은 상당 부분 배우자에게 간대요. 저는 엄마가 새아빠하고 사귈 때는 싫었는데 엄마가 새아빠하고 정식으로 결혼하니까 오히려 좋았어요. 엄마는 남자들이 자신을 떠나는 걸 두려워했거든요.”
   오빠는 엄마가 자신의 아빠가 남겨준 집에 다른 남자를 들여 함께 사는 것에 대해 치욕스러워했다. 그녀가 검정고시에 합격했을 때 오빠는 대학에 들어갔고 그녀는 작은 회사에서 경리 일을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집안에 빚이 있어서 누군가는 일을 해야 오빠가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오빠가 독립을 하려 하자 엄마는 세입자를 내보내고 오빠에게 반지하 집을 내줬다. 딸이 반지하 집에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를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말이다. 엄마는 그녀에게 어서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가라고 했다. 어쨌든 새아빠는 성실하게 일하며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했는데 오빠는 자신의 여자를 빼앗기기라도 한 듯이 새아빠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빠하고 많이 다퉜어요. 가방끈이 짧아서 내 생각을 제대로 말하진 못했지만…… 아빠가 엄마 두고 빨리 떠났는데 그 빈자리를 새아빠가 채워줬다면 아빠가 남겨준 돈에 대한 지분이 새아빠한테도 있는 거잖아요. 새아빠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걸 오빠가 해줄 순 없는 거잖아요.”
   나는 “맞아요, 맞아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오빠는 결혼과 동시에 처가 근처에 신혼집을 얻으면서 엄마하고 더욱 소원해졌다.
   그녀는 현재 일식집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는 유명한 식당이라고 했다. 원래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주 6일 일했지만 엄마의 병환 때문에 주 2일 파트타임으로 일하기로 하고 새아빠가 일하러 나가는 매주 월요일, 목요일에 간병하러 올라오고 있다면서, 엄마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렇게라도 하고 싶다고 했다. 새아빠는 간병에 서툴러서 쉬는 날에도 엄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지만 중간에 이야기를 끊고 방에서 나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사 가지 못하는 것이, 돈이 없는 것이 미안해서 괴로웠다.

   15일인데 주인아줌마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매달 15일에 아줌마는 수도세 금액을 핸드폰 문자로 보내곤 했다. 혹시 아줌마가 돌아가신 건가 싶어서 가슴이 철렁했다. 목요일 저녁, 나는 다세대 주택 입구에서 주인집 딸을 기다렸다. 2층에서 내려오는 그녀를 보자 안도감이 들었다. 아직 아줌마는 살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아직 집 못 찾았죠? 시간 괜찮으면 같이 집 보러 갈래요? 싸게 나온 집이 있대요.”
   집시 아줌마에게 괜찮은 집이 있으면 알려달라고 미리 말해뒀던 터였다. 나는 남편 모르게 계속 집을 알아보고 다녔다. 나를 위해서였다. 내가 집을 옮길 순 없어도 주인집 딸이 들어갈 수 있는 집을 찾고 싶었다. 주인집 딸이 한이 맺힌다면 나는 평생 신경이 쓰일 것 같았다. 부동산 아줌마는 핸드폰 문자로 주소를 찍어줬는데 집이 비워져 있고 문이 열려 있으니 저녁 시간에 문 앞에 막아놓은 벽돌을 치우고 들어가서 집을 둘러보라고 했다. 옥탑방은 우리 집과 동일한 가격이었지만 가파른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곰팡내가 심하게 났고 여자 혼자 들어와 살기엔 위험해 보였다.
   집에서 나와 언덕에서 내려오는 길에 그녀가 잠시 쉬었다가 가자고 했다. 우리는 구멍가게에서 캔맥주와 주스를 사서 가게 앞에 놓인 둥근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와 마스크를 벗은 뒤 회색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음료를 마셨다.
   “그런데 왜 엄마가 자신 때문에 난소암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실수로 생겨서…… 나를 낳느라 무리가 갔을 거예요. 교통사고로 아빠 돌아가시고 장례 치르는 중에 임신한 걸 아셨대요.”
   나는 남편이 해준 말, 난소암은 아기를 낳은 여성에게서 적게 발병하는 암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그녀가 말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임신을 했어요. 학교도 제대로 안 가고 나쁜 친구들하고 어울렸어요. 엄마가 새아빠를 만나는 게 싫었거든요. 엄마가 오빠를 편애하는 것도 싫었고요. 같은 학교 다니던 오빠하고 만났는데 8주가 되도록 임신인 줄도 몰랐어요. 남자친구네 집에서 몰려와서 낙태를 하라고 했는데 내가 애를 낳겠다고 했어요. 막상 수술을 하려니 무서웠거든요. 그쪽 아버지가 우리 엄마한테 막말을 퍼부었어요. 딸 간수 잘 하라고요.”
   나는 배에 손을 올린 채로 말했다.
   “세상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엄마가 아들 간수나 잘 하라고, 낙태를 하건 말건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우리 딸은 잘못한 거 없다고 했어요. 그날 밤 엄마가 우는 소리를 들었어요. 내가 들을까봐 방문을 걸어잠그고 통곡을 하셨어요. 그때부터 엄마의 가슴 한구석에 암세포가 생겨났을 거예요.”
   그녀는 맥주 캔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내가 취했나. 별소리를 다하네요.”
   갑자기 내 눈에 눈물이 고였고, 흘러내렸다. 호르몬의 영향일까. 임신한 이후로 눈물이 늘었다. 나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저도 엄마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제정신이 아닐 거예요. 엄마하고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 엄마를 걱정하는 것은 항상 저였어요. 어쨌든 엄마에겐 첫 아이였으니 각별했을 거예요. 하지만 과할 때가 있었어요. 친할머니나 아빠에 대한 불평을 쏟아놓고 제가 공감해주길 바라셨어요. 때로는 저에게 분풀이도 했고요.”
   남편이 옆에 있었더라면 가슴에 생겨난 암세포가 난소로 전이되는 게 말이 되냐, 주인집 딸이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했겠지만 내 머릿속엔 아줌마의 가슴에 생겨난 암세포가 천천히 난소로 흘러가는 장면이 선명히 떠올랐다. 생명이 시작되는 장소로 암세포가 다가가는 모습이 떠오르자 눈에서 후드득 눈물이 떨어졌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어요.”
   그녀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더니 어서 내려가자고 했다.
   “이사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제가 엄마 병을 핑계로 반지하에 살아보고 싶었나 봐요. 마음속에서 그 집을 늘 내 것이라고 생각해왔거든요. 살아생전에 아빠가 그랬대요. 나중에 딸 낳으면 반지하는 우리 딸한테 줄 거야. 그때는 내가 생기기도 전이었는데. 아빠는 딸을 원했던 거예요. 그런데 대학은커녕 고등학교도 검정고시로 겨우 마쳤네요.”
   우리는 길고 긴 가파른 언덕을 천천히 걸어내려왔다. 나는 뱃속 아기 때문에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웠고 그녀는 어머니 간병에 지쳐서인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내려오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에는 많은 그림이 떠올랐다. 길이 나뉘는 골목에서 그녀는 마치 일식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하듯이 내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동안 실례했습니다!”
   마스크에 가려진 그녀의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하이 톤으로 말했으므로 마치 “이랏샤이마세.”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가 작게 덧붙였다.
   “고맙습니다. 잊지 않을게요.”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불안정했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결국엔 뒤돌아봤고 그녀의 몸이 골목을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김의경

소설을 쓰는 동안 엄마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장녀인 언니에 대해서도. 나는 언제나 한 발짝 떨어져서 그들을 지켜봤던 것 같다. 소설을 쓰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 발짝 떨어져서 보기.

2021/03/30
4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