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현은 쓰러져 있는 고라니를 내려다보았다. 허공을 노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던 고라니는 가현이 다가가자 앞다리를 허우적거리다 이내 축 늘어졌다. 구식 덫에 걸린 왼쪽 뒷다리의 상처가 꽤 깊어 보였다. 타박상을 입은 머리에는 피가 엉겨 붙어 있었는데 다행히 치명상은 아닌 듯했다. 이런 식으로 살아 있는 고라니를 마주하게 될지는 몰랐는데. 후배 연구원 동재가 가까운 야생 동물 보호 센터에 지원 요청을 하는 동안 가현은 고라니가 더 흥분하지 않도록 얼굴을 덮어주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 갈래로 나뉜 길이 커다란 전나무를 중심으로 모이고 있었다. 그중 마을로 향하는 길은 비교적 평평하고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남을 만큼 넓었다. 그에 비해 숲으로 이어진 두 길은 폭이 좁고 경사가 서서히 급해지고 있었다. 고라니는 어느 길로 내려왔을까. 전나무 아래에는 사료와 말린 과일 따위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고라니를 제보한 대학생이 겨우내 야생 동물들을 위해 먹이를 놓아두는 장소 중 한 곳이라고 했다.
   “고라니를 마을로 옮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제가 사람들을 불러올게요.”
   대학생이 먹색 구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현에게 물었다. 어느새 비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있었다.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와 숲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이 그들을 자꾸 움츠러들게 했다. 10분 정도만 걸어가면 마을이었다. 그러나 마취도 하지 않은 고라니를 그곳까지 데리고 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었다.
   “고라니가 흥분하면 위험할 수 있으니까 여기서 기다리는 게 나을 거 같아요.”
   동재가 차에서 우비를 가져왔다. 세 사람은 가는 빗방울을 맞으며 고라니 옆을 지켰다.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 있던 대학생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전 더 많은 사람이 올 줄 알았어요.”
   가현과 동재가 마을에 도착했을 때 대학생은 조금 의아한 얼굴로 두 분이세요? 하고 물었다. 고라니를 찾기 위해 대규모의 수색팀이라도 올 줄 안 눈치였다.
   “오늘은 우선 제보해 주신 정보를 바탕으로 출몰 지점 부근만 조사할 계획이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오셨다는 거네요.”
   “뭐, 어쨌든 이렇게 발견했네요.”
   지난 20년간, 고라니는 그 개체 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2년 전, 지리산 기슭에서 죽은 채 발견된 뒤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국내에서는 야생 절멸한 것으로 추정되었었다. 그런데 가현의 눈앞에 살아 있는 고라니가 나타난 것이었다. 고라니라니. 가현은 어릴 적 들었던 고라니의 울음소리를 떠올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참여한 생태 캠프에서였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텐트 밖에서 악에 받친 비명이 들려왔다. 살인마나 괴물이 누군가를 공격한 게 아닐까. 가현은 머리끝까지 침낭을 뒤집어썼고 아침이 밝을 때까지 악몽에 시달렸다. 후에 그것이 짝을 찾는 고라니의 울음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날 밤 느꼈던 공포와 무력감은 꽤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그러나 이제 그 괴상한 소리는 어느 곳에서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센터에서 보호 중인 세 마리의 고라니도 더는 울지 않았다.
   이 고라니는 다시 울 수 있을까. 땅바닥에 널브러진 고라니는 울음 대신 가쁜 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가현은 고라니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먼 하늘에서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이 조금 더 컴컴해진 듯했고 흩뿌리던 빗줄기는 서서히 진눈깨비의 형태로 변해가고 있었다.

   구조대는 신고한 시각으로부터 삼십 분쯤 지나서야 도착했다. 그사이 소문이 퍼졌는지 수송 차량 근처에는 마을 사람 여럿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마취된 채 차에 태워지는 고라니를 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죽은 거야?”
   “아직 살아 있는 거 같은데? 그런데 왜 저렇게 다쳤대?”
   “누가 내리친 거 같은데?”
   “왕눈이 자네 짓 아냐? 지난가을에 고라니가 텃밭 다 망쳐놨다고 짜증내며 다녔잖아.”
   “아, 왜 나를 걸고넘어져? 고라니 한 마리 다친 거 갖고 왜 이리 난리들이래? 고라니는 원래 유해 동물이었어. 옛날에는 잡아가면 포상금도 주고 그랬는데. 안 그래?”
   가만 보니 마을 사람들은 이미 고라니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가현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때, 불퉁한 얼굴로 주위를 맴돌던 대학생이 왕눈이라고 불린 노인에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할아버지, 지금은 멸종 위기 동물이에요. 함부로 죽이거나 다치게 하면 안 돼요.”
   “아니, 그때는 잡아 죽여도 된다 하더니, 이제 와서는 또 안 된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은 고라니인데?”
   “멸종 뜻 모르세요? 이 세상에서 고라니라는 종이 완전히 사라지는 거라고요.”
   “그게 그렇게 큰 문제야? 밭일하다보면 걔네가 얼마나 성가신데. 쫓아내는 것도 일이었어. 키퍼 액 덕분에 좀 편해졌지.”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기 거북했던 가현이 결국 끼어들었다.
   “네. 큰 문제예요, 어르신. 그리고 멸종 위기 동물을 함부로 해치면 처벌받아요.”
   이방인의 참견이 불편했는지 목소리를 높이던 왕눈이는 꿍얼거리며 물러섰다. 고라니가 사라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흔히 키퍼 액으로 불리던 퇴치제였다. 주변에 가볍게 뿌리기만 하면 고라니와 멧돼지를 퇴치할 수 있다며 광고한 퇴치제는 그 강력한 효과 덕분에 논밭 주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문제는 이 퇴치제가 고라니의 생식 기능에 이상을 불러왔다는 것이었다. 수컷들은 무정자증을 앓았고 암컷들은 난임이 되었다. 고라니들은 약품에 중독 증세를 보였고 증상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퍼져나갔다. 뒤늦게 전문가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며 해당 제품 사용은 금지되었지만 뛰어난 효과를 포기하지 못한 이들은 알음알음 약품을 구해다 쓰거나 그 대체품을 이용하기도 했다. 결국 퇴치제가 유행한 지 20년 만에 고라니는 우리 곁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듯 굴고 있었다.
   수송 차량에 고라니를 실어보낸 뒤 긴장이 풀린 가현이 잠시 멍하니 서 있는데 대학생이 다가왔다.
   “좀 씻으실래요?”
   가현은 그제야 제 행색을 살폈다. 손과 점퍼 소매, 우비 앞자락에 고라니의 피가 묻어 있었다. 가현과 동재는 대학생을 따라 초록 대문이 달린 집 안으로 들어갔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가현의 모습은 마치 재난 영화에서 빠져나온 사람 같았다. 비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에 창백한 안색, 피 묻은 손과 옷자락. 가현은 핏자국을 매만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재난을 겪고 있는지도 모르지. 조금씩 뒤틀리고 무너져가는 세상을 목격하면서. 종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공포를 느끼던 때가 있었다. 두려움에 익숙해진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오니 대학생이 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생의 이름은 ‘백선’이라고 했다. 가현은 선에게 아까 들은 이야기에 대해 물었다.
   “고라니가 이전에도 마을에 종종 나타났었나 봐요?”
   “저도 몰랐어요. 전 겨울에만 머물러서요.”
   초록 대문 집은 선의 할머니가 사는 집이었다. 도시에 사는 선은 겨울철이면 이 산골 마을에서 머물다 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야생 동물들을 위해 곡물이나 말린 과일, 사료 따위를 챙겨준다고 했다. 주로 작은 새나 미처 겨울잠에 들지 못한 다람쥐, 길고양이 등이 먹이를 찾아 내려왔고, 고라니는 올해 처음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대문을 나선 가현은 차에서 장비를 살피고 있는 동재에게로 향하려 했다. 그때, 근처에서 기웃거리고 있던 왕눈이가 가현을 불러세웠다.
   “거, 내가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런 짓까진 안 해.”
   고라니를 해하면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왕눈이는 크고 돌출된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가현의 눈치를 살폈다. 가현의 시선이 바지춤에서 초조한 듯 까닥이는 그의 손끝에 잠시 머물렀다.
   “고라니가 어르신 밭을 파헤쳐 놨다고 했죠? 혹시 직접 보셨나요?”
   “그건 아니고, 밭이 엉망이 된 꼴을 보고 고라니 짓이겠구나, 싶었지. 젊었을 땐 지금보다 훨씬 큰 밭을 갖고 있었거든. 그땐 그런 거 많이 봤어. 그래서 딱 알았지.”
   “여러 마리가 오간 흔적 같지는 않았고요?”
   “글쎄. 그것까진 모르겠고. 그런데 고라니가 그리 귀한 동물인가? 옛날엔 길 가다 치어 죽여도 뭐라 안 할 만큼 흔했는데……”
   “이제는 보기 힘드니까요. 혹시 고라니에 대해 더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알려 주세요.”
   가현은 왕눈이의 말을 자르고 명함을 꺼내 건넸다. 왕눈이는 멸종 위기 종 구조 관리라는 글자가 적힌 명함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선이 대문 밖으로 나오다 왕눈이를 발견하고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왜요? 또 동물들한테 먹이 줬다고 뭐라 하러 오셨어요?”
   “야생 동물 길들여서 얻다 쓰려고. 자꾸 먹을 걸 주니까 지금 이 사달이 난 거 아냐?”
   “길들이려 그런 거 아니고요. 먹을 게 없어 굶을까 봐 그런 거예요.”
   “팔자도 좋네. 그놈들보다 우리가 먼저 굶어죽게 생겼구만.”
   “그래서 고라니를 잡으려 하신 거예요?”
   “무슨 소리야. 나 아니라니까.”
   “할아버지 예전에도 두더지 잡는다고 약 뿌리고 덫 놓으셨잖아요.”
   “그건 그거고.”
   왕눈이는 흘끗 가현의 눈치를 보더니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다급히 덧붙였다.
   “우리 마을에 밀렵꾼이 있잖아. 그치가 여기저기 덫을 놓지 않아?”
   “그게 누군데요?”
   가현이 묻자 왕눈이는 옛 우물터 근처에 자리한 붉은 벽돌집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그리고 도망치듯 서둘러 사라졌다.
   “진짜 짜증나죠? 저 할아버지, 제가 갖다 놓은 먹이 그릇을 자꾸 치워 버려요. 재수 없어.”
   선은 멀어져가는 왕눈이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가현은 재수 없는 노인이라는 선의 말에 공감했지만 굳이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아 말을 돌렸다.
   “옛 우물터는 어느 길로 가면 된다고요?”
   동재를 먼저 숲으로 보내놓고 자신은 밀렵꾼이라는 사람을 만나 볼 생각이었다. 밀렵은 엄연한 불법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의 잘못을 따지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정말 사냥을 즐기는 자라면 고라니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고라니의 수명이 10년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적어도 10년 내 이 부근에서 생식 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또 다른 고라니가 아직 살아 있을 확률도 배제할 수 없었다. 선이 함께 가주겠다고 했지만 조금 성가신 기분이 들어 부드럽게 사양했다. 그리고 마을 외곽으로 빠지는 길을 따라 부지런히 발길을 옮겼다.
   
   밀렵꾼이라고 불린 남자는 하우스에 볏짚을 까는 중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트랙터에서 내린 그는 부담스러울 만큼 정중한 태도로 가현이 찾아온 까닭을 물었다. 나이는 왕눈이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어릴 듯했고 동글동글한 얼굴과 처진 눈이 순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고라니에 대해 묻자, 순간 가현을 바라보는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이고, 밀렵이라니요. 한 2년 전쯤인가, 우연히 꿩 한 마리 잡아먹은 거 가지고 그러는 거죠. 그것도 일부러 잡은 게 아니고 쥐를 잡으려고 덫을 좀 놓았는데 희한하게 거기 꿩이 잡혀가지고…… 어차피 곧 죽을 거 같아 먹은 겁니다.”
   “다른 동물을 잡으러 다니신 적은 없고요?”
   “뭐, 토끼 같은 게 잡힌 적도 있긴 한데…… 아니 근데 정말 우연히 잡힌 거예요. 난 걔네를 잡을 생각이 없었어요.”
   “근처에 야생 동물이 많이 돌아다니나 봐요. 그렇게 쉽게 잡히는 걸 보면요.”
   “아무래도 산기슭이니까요.”
   “그런데 꿩도 쥐덫으로 잘 잡히나요?”
   “허허, 그러니까 말이에요. 그게 잡히더라고요.”
   밀렵꾼은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한 듯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가현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본론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최근에는 동물을 잡으신 적이 없다는 말씀이죠? 숲에서 고라니를 본 적도 없으시고요?”
   “네. 난 몰라요. 그리고 고라니는 고기도 맛이 없어요. 그런 쓸모없는 놈을 굳이 잡아 뭐하겠습니까? 나뿐만 아니라 여기 사람들, 바빠서 고라니 같은 거 쫓아다닐 시간이 없을 겁니다. 아, 선생님이 한가하다는 건 아니고요. 물론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시는 거 알죠. 그러니까 고라니를 찾는 건 선생님 일, 오늘 안에 이 볏짚을 까는 건 제 일. 그런 말입니다. 아시겠죠? 그럼 전 바빠서 이만.”
   밀렵꾼은 다시 트랙터에 올랐다. 가현이 그만 돌아가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가현은 아직 묻고 싶은 것이 남아 있었다.
   “다들 그렇게 바쁜데 덫은 대체 누가 놓았을까요? 바쁜 사람들이 왜 잡지도 않을 고라니의 머리는 내리치고 간 걸까요?”
   “글쎄요. 뭐, 고라니에 원수라도 진 사람인가 보죠.”
   밀렵꾼은 이제 성가시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가현은 이곳에 오기 전 선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사람, 다리에 철심이 박혀 있어요. 예전에 숲에서 뱀을 잡으려다 바위에서 굴러 크게 다쳤대요. 그런데도 꾸준히 숲을 휘젓고 다닌다니까요. 제 버릇은 못 버리겠나 봐요.’
   곧 트랙터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가현은 쫓기듯 하우스 밖으로 나왔다. 이런 식의 무관심과 냉대는 익숙했다. 그러나 종종 터진 둑 아래 홀로 물을 퍼내고 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지난 몇 십 년 사이, 수많은 동물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멸종 위기 동물의 대명사 격이었던 북극곰은 이미 야생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아시아 치타, 자바 코뿔소, 보르네오 코끼리 등도 절멸 혹은 자생지 절멸 판정을 받았고, 곤충과 조류, 양서류 등까지 합치면 멸종되거나 보호 시설에서 가까스로 종을 이어가는 동물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에 사라진 종을 복원시키기 위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런데 사라진 것들을 다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할까. 재작년 겨울에는 마지막 수컷 푸른 바다거북이 죽었다. 이제 지구상에 남은 푸른 바다거북은 나이 든 암컷 두 마리뿐이다. 그동안 수차례 인공수정을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수컷 바다거북이 죽기 전 채취해 둔 정자로 시도를 이어갈 계획이었지만 성공 가능성은 높지 않아보였다. 사라질 걸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잠시 그쳤던 진눈깨비가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아직 한낮이었는데도 세상에 밤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어둑한 하늘 아래, 작은 마을의 시간은 평화로이 흘러가고 있었다. 고라니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수송 차량이 마을을 빠져나가자마자 자신이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더는 자신과 관련 없는 일이라는 듯이. 그들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남은 하루를 보낼 것이다.
   정말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나.
   가현은 걸음을 멈추고 쪼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땅을 파내기 시작했다. 지유는 아이를 잃은 뒤 가슴에 구멍이 생긴 것 같다고 했다. 아득하게 검고 깊은 구멍이. 아이는 여섯 살이 되던 해 어린이집 화재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지유는 아이를 둘러싼 하나의 세계가 소멸했는데도 일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섬뜩해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세계의 한쪽이 완전히 떨어져나갔는데. 그렇게 사라진 세계는 결코 복원될 수 없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멀쩡히 거리를 돌아다니고, 웃고, 떠들고 있는 거지. 언니는 어때?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느껴?’
   아이는 가현에게 첫 조카였다. 가현은 6년간 아이를 가까이 지켜보았다. 인큐베이터 안에 누워 있던 모습부터 처음 ‘이모’라는 말을 하던 모습,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놀이터를 누비던 모습까지. 아이를 데리고 처음 놀이공원에 갔던 날, 나란히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던 기억이 아직 선명했다. 새콤한 레몬 아이스크림의 맛, 아이의 머리카락을 흩트리던 풋풋한 바람의 냄새, 멀리서 들려오던 퍼레이드의 음악 소리도 가현의 몸 어딘가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오직 아이만 이곳에 없었다. 가현이 마지막으로 본 아이는 차갑고 뻣뻣했다. 그 뒤로 한동안 꺼져가는 생명을 마주할 때마다 그 모습이 떠올랐다. 방금까지 이곳에 있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다는 게, 그리하여 세상 어딘가에 검고 깊은 구멍이 생겨났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 않아 숨이 막혀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실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다.
   분명 커다란 변화가 생겼는데도 세상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듯 굴러갔다. 소멸한 세계의 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지고 있을까. 사라진 바다거북의 세계는 무엇을 의미할까. 질척해진 땅에 손가락 한 마디 깊이의 구덩이가 생겼다. 가현은 그것을 남겨둔 채 다시 숲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불과 몇 발자국 걸어왔을 뿐인데 구덩이는 보이지 않았다.

   고라니가 쓰러져 있던 전나무 아래에 도착한 가현은 먼저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동재에게 연락했다. 전화를 받은 동재가 지금까지의 조사 경과를 알려왔다.
   “땅이 젖어서 족적은 확인하기 힘들고요. 대신 수정봉 쪽으로 향하는 길에서 변을 찾았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목격 지점에 센서를 설치하는 건……, 의미가 있을까요? 날씨 때문에 드론을 띄우기도 어려울 거 같고…… 어쩌죠? 좀더 깊이 들어가 볼까요?”
   진눈깨비는 어느덧 눈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늘고 차가운 눈발이 가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현은 숲 안쪽으로 이어진 좁은 길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기적으로 시행하는 생태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최근 이 지역에서 고라니의 흔적이 발견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고라니를 만났다. 다른 녀석들도 이렇게 감쪽같이 숨어 있는 걸까.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발달하고 있었지만, 이 넓은 산에서 특정 동물을 단번에 찾아내는 기술은 아직 없었다. 특별 조사팀을 꾸려 수색 계획을 세워야 할 듯했다. 그렇지만 막상 살아 있는 고라니를 보고 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수정봉 쪽에 물가는 없나? 고라니들이 물을 좋아하니까 그쪽에 센서나 더 설치해두고 가도 좋을 것 같은데.”
   그때 가현의 등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근처에 계곡이 있긴 한데 여기서 걸어가긴 좀 힘드실 거예요.”
   놀란 가현이 뒤를 돌아보자 선이 서 있었다.
   “깜짝이야.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놀라셨다면 죄송해요.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다시 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날씨에 계곡까지 걸어가는 건 힘들 거예요. 차를 타고 가면 좋을 텐데, 그 길을 지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선이 보여준 지도 앱을 확인하니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계곡 근방까지 차를 타고 접근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문제는 그 길이 한 종교 단체의 사유지라는 점이었다. 가현은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산 중턱에 자리한 건물을 보았던 것을 떠올렸다. 아직은 콘크리트 건물 하나뿐이었지만 최근 개발 제한 완화 논의가 오가며 근처 부지를 사들이고 있다고 했다. 리조트 등 휴양 시설이 딸린 대규모 종교 타운을 세우고 지역 거점으로 삼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가현은 동재를 불러 일단 선이 말한 길로 가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함께 따라나서겠다는 선을 거절하지 못했다. 세 사람은 다시 마을로 돌아와 차를 몰고 종교 시설 부지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계곡으로 이어진 길 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쳐 있어 더이상 접근할 수가 없었다. 셋은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나? 이거 그냥 치우고 슬쩍 갔다 오면 안 되겠죠?”
   동재가 발끝으로 바리케이드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때, 3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와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많아 보이는 여자가 출입 금지 구역 안쪽에서 나타났다. 그제야 길 위쪽 나무들 사이에 가려져 있던 작은 초소가 가현의 눈에 띄었다. 남자는 무스탕을, 여자는 모자에 풍성한 털이 달린 롱패딩을 걸치고 있었는데 두 사람 모두 장총을 들고 있었다. 가현 일행이 찾아온 목적을 들은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고라니 때문에 왔다고요? 그 사슴처럼 생긴 동물? 그런 건 이 근처에서 본 적 없는데요.”
   “그래도 잠시만 둘러봐도 될까요? 오늘 마을 근처에서 한 마리가 발견되어서요.”
   “우리 땅에서 발견된 건 아니잖아요? 지시 없이 길을 열어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럼 그 지시를 내린 분을 좀 만나 볼 수 있을까요?”
   “겨우 그런 일 때문에 교주님을 뵙는다고요? 그분이 그렇게 한가한 분인지 알아요?”
   “겨우 그런 일이라니요. 이 세상에서 고라니라는 종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는데요.”
   남자는 동재의 반박에 코웃음을 치더니 가르치는 듯한 말투로 타이르려 했다.
   “그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에요. 한때 지구상에 존재하다 지금은 사라진 동물이 얼마나 많아요? 공룡도 다 죽었잖아요. 그렇지만 보세요. 그것들이 없다고 이 세상이 완전히 끝났습니까? 아니잖아요. 지구는 그대로 있잖아요. 그냥 그 위에 사는 생명체들이 환경에 맞춰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뿐이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약한 것들은 도태되고 살아남을 것들이 살아남기 마련이에요. 이야말로 자연의 섭리이자 신의 섭리 아니겠습니까?”
   “신의 섭리 같은 건 잘 모르겠고요. 우린 고라니만 찾으면 됩니다.”
   “그 고라니도 결국 약한 놈이기 때문에 밀려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강해져야 합니다. 새 진리를 받아들이고 새 시대에 적응해야 해요. 강해지면 두려울 게 없죠.”
   동재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듯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가현은 남자의 손에 들린 총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말을 할 때 손동작을 섞는 버릇이 있었고, 그 때문에 들고 있는 총이 살짝 기울어져 총구가 가현의 머리 위를 향했다. 가현은 그 깊고 좁은 검은 구멍이 매우 거슬렸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여자가 선을 향해 물었다.
   “숲에 자주 오죠? 몇 번 본 적 있어요. 분명 마을에는 젊은 사람이 없는 거로 아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역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었나 봐요?”
   “전 그냥 마을 사람인데요.”
   “그래요? 진짜 저 마을에 산다고요? 왜요?”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앞으로 길어야 10년 보거든요. 마을에 남은 시간 말이에요. 발전도 없이 몇십 년 전 모습 그대로잖아요. 자연스럽게 소멸되겠죠. 뭐, 젊은 사람이 들어오면 그 시간이 늦춰질 수야 있겠지만, 그게 의미가 있나? 왜 굳이 가라앉는 배를 다시 띄우려 하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들은 결국 사라질 텐데? 그게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고 우리가 믿는 진리예요. 그래서 우리는 여기를 변화시킬 거예요. 그러니까 내 말은 쓸데없이 숲이나 헤매고 다니지 말란 소리예요. 당신 같은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워서 그래요.”
   여자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가현은 기울어진 총구가 자꾸 거슬렸다.
   “그 총은 진짜인가요?”
   “공기총이에요. 이런 산속에서는 언제든 위험한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남자의 말을 들은 동재가 중얼거렸다.
   “강해지면 두려울 게 없다더니, 그쪽도 아직 덜 강한가 봅니다.”
   “어쨌든 이 길은 지나갈 수 없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남자와 여자는 더는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는 듯 단호하게 등을 돌려 그들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가현의 일행은 아무 소득 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했다. 동재가 난감하다는 듯 혀를 찼다.
   “저 사람들 입장에서는 고라니가 발견된 게 반갑지 않겠죠. 땅을 샀으니 건물을 올려야 하는데 멸종 위기 종이 나타났다 하면 골치 아파질 테니까요. 고라니 이야기를 괜히 한 걸까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마을 사람들도 그랬잖아.”
   차에 오른 가현은 시트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반나절 동안 여러 사람을 만나며 지쳐 버리고 말았다. 잠시라도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었지만, 선은 방금 전 들은 이야기에 대해 계속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까 같은 말을 들으면 진짜 짜증나거든요. 근데 사실 고라니가 없어진다고 해도 당장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그럴 땐 뭐라고 답을 하면 좋을까요? 이 세상에 고라니가 꼭 있어야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가현은 선을 상대하는 게 부담스러웠다. 선과 마주하고 있으면 무언가를 증명해 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
   계곡을 찾아 이동하기 전, 동재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선은 자신이 고라니의 존재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해 주었다. 밤중에 숲을 찾았다가 고라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사라져가는 동물의 소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집에 돌아와 할머니로부터 소리의 정체에 대해 듣고서야 비로소 어릴 적 보았던 고라니의 모습을 떠올렸다는 것이었다.
   “원래 밤에도 자주 숲에 와요?”
   “가끔요. 밤에는 낮에 듣지 못했던 소리가 들리거든요. 지금은 겨울이라 조용한 편인데, 여름에는 더 많은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여긴 겨울에만 머문다고 하지 않았어요?”
   “도시로 나가기 전에 이 마을에서 살았었어요.”
   “동물을 정말 좋아하나 봐요? 매일 먹을 걸 챙겨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가현의 질문에 선은 잠시 숲 안쪽을 응시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릴 때 생태계 피라미드나 먹이사슬 같은 걸 배우잖아요. 모든 건 연결되어 있다고요. 그중 어느 하나라도 사라지면 결국엔 전부 사라져 버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되게 무서웠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제가 지금 이러고 있는 게 의미가 있을까요?”
   “의미가 있죠.”
   “그래요? 그런데 전 울음소리를 듣기 전까지 여기 고라니가 살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요? 만약에요. 정말로 고라니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더이상 고라니가 없다는 사실을 제가 느낄 수는 있을까요? 갑자기 그게 궁금해지는 거예요.”
   고개를 돌려 고라니가 쓰러져 있던 전나무 쪽을 바라보는 선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가현은 피 흘리는 고라니 옆에 서 있던 선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 고라니를 지켜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서늘한 눈빛이 품은 질문에 가현은 작게 몸서리를 치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때, 동재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고 두 사람의 대화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지금, 선은 다시 같은 질문을 가현에게 던지고 있었다. 어쩌면 저들의 말이 틀리지 않는지도 몰랐다. 사라진 것들이 남기고 간 자리는 다른 것으로 채워지고 마는지도. 그렇게 완성된 세계는 비록 이전과 다른 형태가 되겠지만, 꼭 같은 모습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또다른 고라니를 찾으려는 걸까. 쓰러진 고라니의 모습이 가현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한쪽으로 기울던 몸뚱어리, 허우적대던 몸짓, 불안이 깃든 눈.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난 이해가 안 가.’
   휴직 기간이 끝나고 직장으로 복귀하게 된 지유는 출근길에 유치원 앞을 지나가던 중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보고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고 했다. ‘그 모습이 너무 평화로워 보이는 거야. 그래서 무서웠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갑자기 검은 구멍이 나타나 금방이라도 그 아이들을 모두 삼켜버릴 것만 같아서. 그렇게 앉아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서 괜찮냐고 묻더라.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말했어. 아이가 있던 세상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 안쓰럽다는 듯 내 등을 토닥여줬어. 그 순간 알았지. 아,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모르고 있구나. 이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쉽게 위로를 건넬 수 있구나. 그렇게 나는 또 나 혼자 구멍을 마주하고 말았어.’
   가현은 지유가 보았던 그 구멍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마 동생은 앞으로도 그 구멍을 느끼겠죠. 그건 사라진 아이의 자리이고, 아이는 돌아올 수 없으니까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 구멍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가현의 질문을 끝으로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가현 역시 자신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어 말없이 창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진회색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 금방이라도 그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을 것 같았다. 구름 뒤에 감춰져 있던 해마저도 서쪽으로 기울어 주변은 더욱 어두워졌고, 한층 굵어진 눈발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헐벗은 숲 사이로 퇴락해 가는 작은 마을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간도 사람도 고여 있는 저 마을도 언젠가 소멸하겠지. 그 자리에는 다른 무언가가 들어설 것이고, 그렇게 마을의 존재는 잊힐 것이다. 저들은 자신이 이 마을과 함께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죽음은 반복되고, 세상의 어느 곳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가현은 사라지는 것들에 점점 익숙해지는 자신이 징그럽게 느껴졌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열린 틈 사이로 차가운 눈송이가 쳐들어왔다. 웅웅대는 바람 소리 가운데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정말 숲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인지, 가현은 혼란스러웠다.

   다시 마을로 돌아온 가현과 동재는 곧장 길을 떠날 채비를 했다. 선이 저녁을 먹고 갈 것을 권했으나 가현은 서둘러 마을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기억 깊숙이 묻어두었던 사라진 것들의 이미지가 선명해지고 있었다.
   도시로 향하는 길에 그들은 고라니를 데려간 야생 동물 보호 센터에 들르기로 했다. 한 시간 전쯤 무사히 치료를 끝낸 뒤 안정을 취하는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직접 상태를 보는 것이 좋을 듯했다. 보호 센터에 가까워질수록 가현은 초조해졌다. 고라니를 빨리 보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동재가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빌리 홀리데이의 <글루미 선데이>가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지나치게 우울한 그 노래는 가현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했다. 채널을 돌리자 일기예보가 이어졌다. 오늘밤 산간 지방 곳곳에 폭설이 내릴 예정이라고 했다. 예보를 들은 동재가 속도를 높였고, 그들은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고라니는 독방에 격리되어 있었다. 불안 증세를 보여 안정제와 영양제를 놓아주었다고 했다. 약에 취한 고라니는 눈을 감은 채 바닥에 누워 있었다. 타박상을 입은 머리와 덫에 걸렸던 왼쪽 다리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가현은 고라니의 상태를 자세히 보기 위해 창살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고라니가 슬며시 눈을 뜨더니 가현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창살을 사이에 둔 채, 가현과 고라니는 서로를 마주보았다.
   잠시 후, 고라니가 몸을 털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덫에 걸렸던 뒷다리 때문에 바로 설 수 없는데도 애써 중심을 잡으려 버둥거렸다. 굳게 닫혀 있던 고라니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가현은 곧 고라니의 울음소리를 듣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고라니가 돌연 옆벽에 자신의 머리를 부딪치기 시작했다. 한 번, 다시 한 번. 악에 받친 듯이 혹은 무언가를 몹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곧이어 관리자가 우리 안으로 뛰어들어가 고라니의 상태를 살폈다. 마취제가 투여된 고라니의 눈꺼풀이 다시 서서히 내려갔다. 고라니의 눈이 완전히 감기기 전, 가현은 그 안에 자리한 깊고 검은 구멍을 보았다. 구멍은 점점 몸집을 불려 가현의 발밑까지 다가왔다. 그것이 자신을 삼켜버리기 전에 가현은 황급히 눈을 감았다. 아직 듣지 못한 울음소리가 가현의 귓가에 맴돌았다.

조진주

사라진 것의 자리는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라진 것들을 쉽게 잊어버릴까 두렵습니다. 두려움에 익숙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2021/07/27
4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