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은 꿈나무 캐슬 유치원은 그 이름대로 조그마한 성처럼 지어놓았다. 성의 끄트머리, 하늘을 찌르는 뾰족한 탑에 새가 앉기도 하고 달이 걸리기도 했다. 새도 달도 멀리 있어 닿지 않았지만, 새의 그림자와 달빛이 하늘에서 내려와 토끼의 머리를 까맣게 하얗게 물들이고 지나갔다.
   뒤뜰에 울타리를 둘러 만든 토끼 사육장은 그런 장소였다. 날개를 펼치고 자유로이 날아가는 새를 보거나, 밤이 지나는 동안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달을 보는 곳. 그다지 낭만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곰팡이가 더덕더덕 붙은 건물 외벽이 늘 사육장 앞을 막고 있었다. 관리인 보해가 종종 비누칠을 해 닦아냈지만 더럽고 어두운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곳에서 살았다. 유치원 사육장, 토끼의 울타리 안.
   “토끼가 하얗지가 않아.”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그런 것이었다. 그들이 한글로 ‘토끼’라 읽고, 또 한 번은 영어로 ‘래빗’이라 읽어야 했던 그 학습 카드 속 토끼가 깨끗하고 하앴기 때문에, 아이들은 토끼라고 하면 하얀 털을 가진 생물을 떠올렸다. 하지만 모든 토끼가 그렇지는 않았다. 나는 누르스름한 털을 가진 눈이 까만 토끼이고, 몽이라고 불렸다. 이곳에서 사는 다른 토끼는 망이였다. 망이는 털도 까맣고 눈도 까맸다. 밤이 되면 잘 보이지 않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망이를 찾아야 했다.
   “어디 있어?”
   그렇게 물으면 망이는 “여기……”하고 작게 대답했다. 나에게 몸을 바짝 붙여 자신이 얼마나 가까운 곳에 있는지 알려 주었다. 토끼는 목소리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작아서, 상대 토끼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그렇게 가까이 다가와야 했다. 우리는 자주 붙어 있었다. 밤은 밤대로 보이지 않아 붙어 있었고, 낮은 낮대로 시끄러워 들리지 않아 붙어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오자마자 집에 가고 싶다며 악을 쓰고 울어댔다. 교사들은 아이들이 토끼만큼 조용하면 좋겠다고 툴툴거렸지만 아이들은 그들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원하는 일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가 있어 어느 날부터인가 유치원은 정말로 토끼만큼 조용해져버렸다. 당근 스틱을 들고 토끼의 코를 찌르던 아이도 보이지 않고, 피아노 반주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치원 원장도 교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관리인 보해조차 건초를 갈아주거나 토끼 똥을 치우러 오지 않았다.

   먹이를 구하러 사육장 주변을 드나드는 길고양이에게 들어보니 인간 세계에 무서운 바이러스가 퍼져 주변 학교와 유치원 모두 문을 닫았다고 했다. 작은 꿈나무 캐슬 유치원도 처음에는 교사들이 그다음은 아이들이 차례로 바이러스에 전염되어 문을 닫게 되었다.
   “토끼는 누가 돌보는 거야?”
   고양이가 물었을 때 우리는 대답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사육장 토끼 따위 아무도 돌보지 않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있다가는 금방 병에 걸릴 거야.”
   고양이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유치원 건물 벽을 타고 내려온 거뭇거뭇한 얼룩을 바라보았다. 침침한 벽은 우리의 미래 같아서 보고 있기에 껄끄러웠다. 그 순간 커다란 새 그림자가 머리 위를 훑었다.
   “돌보는 인간도 없이 이런 곳에 갇혀 있다니……”
   고양이는 앞발을 들어 울타리 문을 긁었다. 발톱 자국을 따라 칠이 벗겨진 철창이 끽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에서 밀어본 적이 없나 봐. 이렇게 금방 열리는 걸.”
   나올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토끼의 몫이라는 듯 고양이는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먼저 발을 옮긴 건 망이였다.
   “나가지 마. 기다리면 누군가 올 거야.”
   망이는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모르겠어. 그게 좋은 일인지……”
   얼마 전, 망이는 당근으로 코를 찌른 아이의 손가락을 물었다. 아이는 울부짖었고, 놀라서 유치원으로 달려온 아이 엄마는 망이를 안락사시키라고 했다. 상황을 마무리지은 사람은 원장이 아니라 관리인 보해였다. 보해는 아이 엄마의 두 손을 잡고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하얗게 버짐이 올라온 손에 붙들린 아이 엄마는 할말을 잃고 침만 삼켰다. 망이는 그 일을 반복해 떠올렸다.
   ‘인간의 손을 물면 안 돼. 절대……’

   밤이 되어 어두워지자 또 망이가 잘 보이지 않았다.
   “망이야. 어디 있어?”
   아무리 불러도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몸을 붙여오지도 않았다. 혹시나 망이의 기척을 놓칠까 몸을 웅크리고 귀를 바짝 세웠다. 밤새 기다렸다. 바람이 불어와 끼릭끼릭 사육장 문을 건드리는 소음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2
   보해가 유치원 건물 한편에 마련된 쪽방에서 혼자 산다는 사실은 교사들에게 들었다. 그들은 토끼 사육장 앞에서 종종 아이들은 물론 원장과 보해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는데, 그날도 낮잠 시간이 되자 아이들을 재워놓은 후 하나둘 사육장으로 모여들었다.
   “안락사는 어떻게 된 거야?”
   “없던 일 됐어. 보해님이 유치원 관리인이란 걸 알고 지훈이 어머님 한참 웃더라.”
   “지훈이 엄마는 뭐하는 사람이야?”
   “한의사.”
   “의사?”
   “아니. 한의사.”
   “한의사인데, 안락사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는 거 괜찮아?”
   “토끼랑 사람이랑 다르잖아.”
   “어떻게 다른데?”
   “토끼는 귀엽고 사람은 그렇지 않고.”
   망이는 구석에서 크릉 크릉 숨만 몰아쉬었다. 재잘거리던 교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휴대폰 카메라를 켜더니, 망이를 찍어대며 귀엽다고 감탄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망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사육장에 보해가 들어왔다. 품에 건초 포대가 안겨 있었다. 보해는 사육장 문이 열린 것을 보고 당황하지 않았다. 망이가 보이지 않는 것을 신경쓰는 눈치도 아니었다. 나는 보해가 한 움큼 놓아준 티모시 건초 속으로 머리를 쑤셔넣었다. 내가 그랬잖아…… 누가 올 거라고…… 망이가 옆에 있다면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망이는 없다. 숨이 막힐 정도로 건초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러다가 입 언저리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눈을 떴다. 보해가 두 손으로 나를 들어 보고 있었다. 눈을 맞추었다. 까만 눈이다…… 망이와 닮은 듯했다. 나는 보해의 품에 안겨 사육장을 나왔다.

   보해의 방은 사육장으로 쓰는 뒤뜰보다 작았다. 굳이 따지자면 토끼 철창 주변에 울타리를 둘러놓은 면적과 비슷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보해와 나의 생활 규모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곳은 물건이 많지 않은 한 칸짜리 방이었는데, 한쪽 벽을 따라 세워놓은 책들이 눈길을 끌었다. 현관에서 부엌까지 연결된 벽을 따라 키가 맞지 않은 책들이 들쭉날쭉 세워져 있었다.
   한때 인간과 한집에서 살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가 날마다 피아노를 연습했기 때문에, 그를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를 위해 날마다 건초를 갈아주고 부드러운 과일을 간식으로 내주는 사람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식사를 잘 챙기지 않았다. 밥을 뭉쳐 냉동실에 얼려두었다가 아침에 꺼내 녹으면 저녁에 먹는 식이었다. 식사를 마치면 소화를 시킨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한 시간씩 책을 낭독했다. 어린 토끼였던 나는 그 목소리를 자장가 삼아 꾸벅꾸벅 졸았다. 토끼가 신경을 쓰건 말건 피아니스트는 책을 읽었고, 낭독을 끝낸 책들을 벽에 세워두었다.
   그러던 어느 겨울, 그가 피아노 건반에 머리를 쏟으며 쓰러졌을 때, 벽에 세워 둔 책이 하나 넘어지고 도미노처럼 둘 셋 넷…… 계속 넘어졌다. 마지막에 세워둔 책이 쓰러지던 순간, 달려가 그것을 귀로 받쳐들었지만 한발 늦은 탓에 그것마저 쓰러지고 말았다. 폭설이 쏟아진 날이었다.
   피아니스트는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가 토끼를 키울 수 없게 되었으므로, 그의 부모는 나를 지인이 운영하던 작은 꿈나무 캐슬 유치원으로 보냈다.
   “거기에 토끼 사육장이 있대.”
   “그럼, 토끼도 살기에 더 편하겠네.”
   그들은 나를 좋은 환경으로 보내는 거라고 믿고 있었다. 혹은 그런 척하면서 토끼의 존재를 한시라도 빨리 자신들의 생활에서 지워내려 했다. 그러고 보면 피아니스트도, 유치원도 끝까지 나를 돌볼 수 없었다. 앞으로 인간의 돌봄을 믿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보해가 손으로 내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자 결심은 금방 녹아버렸다. 보해의 손바닥은 거친 손등과 달리 솜처럼 부드러웠다. 더 쓰다듬어라, 인간…… 나도 모르게 보해의 손길을 찾아 머리를 이리저리 들이밀었다.

3
   ‘보해님.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요.’
   ‘보해님. 여기 벌 좀 쫓아주세요.’
   ‘보해님. 저 뱀 어떻게 해봐요.’
   누군가 부를 때마다, 보해는 수도를 고치고 벌을 쫓고 뱀을 잡았다.
   ‘보해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유치원 교사들의 감사 인사에 보해는 한 번도 화답하지 않았다. 보해가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란 사실도, 사육장에 모인 교사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보해님 말이야…… 말을 못하는 건 알겠는데, 좀 웃어주면 좋겠어. 가끔은 우리를 무시하는 것 같아.”
   “그만해. 불쌍한 사람이야. 사고 이후로 말을 안 하는 거라잖아?”
   “뭐야? 안 하는 거였어? 그럼 할 수도 있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안 하기로 결심한 거라잖아.”
   “무슨 그런 결심을 해? 우리가 싫어서 둘러대는 거 아니야? 말 섞기 싫어서?”
   “솔직히 난 이게 편해. 딱히 할 말도 없어……”
   때때로 교사들은 자신들이 보해의 무심한 태도에 상처를 받은 피해자인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면 보해에게 교실에 들어온 말벌을 잡아달라고 했다. 피아노를 옮겨달라고 했다. 자신이 퇴근한 후 유치원으로 도착하는 택배를 받아 보관해달라고 했다. 이제 그들은 유치원에 남아 있지 않았다. 이곳에 살고 있는 건 토끼 하나와 인간 하나. 그러니까 나와 보해 말고 아무도 없었다. 보해는 나를 잘 챙겨주었다. 박스 안에 건초더미를 깔아주고, 가끔 사과 같은 과일도 입에 넣어주었다.
   함께 산 지 사흘쯤 지났을 때, 보해에게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바나나 오두막이 도착한 날, 세상에 이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말린 바나나 잎사귀를 엮어 만든 작은 집이었다. 들어간 순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오두막은 안락하게 쉬는 공간이 아니었다. 가열차게 이로 갉아야 하는 곳이었다.
   그즈음 나는 망이를 자주 생각했다.
   ‘망이는 어디 갔을까?’
   ‘망이는 살아 있을까?’
   ‘망이는 돌아올까?’
   바나나 오두막은 망이 생각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이런 선물은 토끼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보해는 토끼의 습성을 잘 알고 있었다. 토끼는 갉아 버릴 수 있는 건 모조리 갉아 없앤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없이 이가 자라 입을 다물 수 없게 된다. 토끼는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갉아 엉망으로 만든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바나나 오두막 바닥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잘 마른 바나나 잎의 고소한 향과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슥 바슥 부서지는 질감…… 바나나 오두막은 금세 듬성듬성 구멍이 뚫렸다. 그 구멍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을 때, 한 번도 본 적 없는 보해의 얼굴을 보았다. 보해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입을 오물거리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바나나 오두막이 금방 사라졌기 때문에, 나는 다시 망이를 떠올렸다. 잊고 있던 시간만큼 더 무겁게 망이 생각에 짓눌렸다. 보해가 사과나 당근을 작게 잘라 입에 넣어주기도 하고, 두 손으로 온몸을 정성스럽게 쓸어주었지만, 망이를 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망이를 잊기 위해서, 나에게는 망이가 필요했다. 나는 이제껏 제대로 이별하는 행운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헤어질 수밖에 없다면, 망이를 다시 만나 반듯하게 마음의 준비를 하고 떠나보내고 싶었다.

4
   망이와 처음 만난 곳은 동물병원이었다. 우리는 ‘뽀얗고 귀엽다’는 수의사의 말을 들으며 마취 주사를 맞았다. 수술을 받았다. 우리는 성별이 달랐고, 유치원 사육장에서 함께 지내야 했기에 토끼나 인간이나 곤란해지지 않으려면 중성화 수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수술을 받은 후 망이는 한동안 힘이 없었다. 나는 망이에게 우리가 인간에게 길들여질수록 더 오래 살 것이라고 말했다. 망이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도 망이는 인간에게 적응하지 못했다. 설령 얼굴이 찔리거나 귀를 잡혀도 인간의 손을 깨물지 말라고, 그저 최선을 다해 당근과 손가락의 경계를 잘 파악하라고 일러주어도, 늘 당근을 받아먹다가 아이들 손을 물었다.
   “어디까지 당근이고 어디부터 손가락인지 모르겠어. 어떻게 그런 걸 알아?”
   망이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변명했지만, 나는 망이의 부주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망이는 정말로 아무리 노력해도 그 경계를 가늠할 수 없는 게 아니었을까?
   망이 생각에 괴로워지기만 했다. 바나나 오두막이 없었으므로 책을 갉아 치우기로 했다. 보해가 방에서 나가자마자 벽에 세워진 책으로 향했다. 부엌을 막아놓은 연보라색 파티션에 기대어 있는 책을 이로 물어 끌어냈다. 표지에 자잘한 갈색 곰팡이가 돋아 있었다. 그나마 깨끗해 보이는 모서리를 물자, 바나나 오두막과 다른 구수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책은 책대로 맛있었다. 나는 무엇이든 엉망으로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 어, 뭐하는 거야?”
   그때 낯선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보해의 책은 하나하나 잘게 부서지고 말았으리라.
   “안녕.”
   인사를 건넨 그것은 아치 모양으로 누군가 벽에 물감을 여러 겹 발라놓은 것처럼 둔탁한 까망이었다.
   “어휴, 답답해…… 이것 좀 치워줄래?”
   책 두 권을 물어 앞으로 끌어내자 그것이 완벽히 모습을 드러냈다.
   “고마워. 좀 시원해졌네.”
   말을 건네지 않았다면, 벽에 그려진 그림이라 착각하고 지나칠 뻔했다.
   “나는 홀이야.”
   벽의 그림 같은 것은 홀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토끼로구나! 토끼는 귀가 길쭉하고 뒷다리가 발달했지. 꼬리가 짧고 번식력이 강한 동물이야.”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 토끼를 좋아해. 저번에도 만났거든. 그때는 까만 토끼였는데 말이야.”
   귀가 찌릿했다.
   “까만 토끼라고? 혹시 이름을 알아?”
   “모르지. 이름은 안 듣는 게 내 원칙인걸.”
   홀은 까맣기만 해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생겼어?”
   “까만 털에 까만 눈.”
   망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까만 꼬리. 까만 귀. 등도 배도 까맣다. 나보다 더 까매. 질투가 날 정도로 어두워.”
   “또?”
   “홀에 들어가기에 알맞은 크기였지.”
   “그게 무슨 말이야?”
   “홀이 토끼를 삼켜버렸다는 말.”
   홀은 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었다. 귓속이 쟁쟁 울렸다. 나는 고개를 털고 홀을 노려보았다.
   “망이를 삼켰어?”
   “응.”
   그 말을 듣자마자 눈앞이 번쩍였다. 앞발을 들어 홀을 향해 휘저었다. 그러나 홀은 안이 비어 있어, 그저 내 발만 허공에 둥둥 떠 헛스윙을 날리는 꼴이었다.
   “이름 같은 건 알고 싶지 않았는데…… 망이라고? 그 까만 토끼가?”
   앞발을 내려놓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런 식으로 대응한다고 망이가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왜 삼켰어?”
   “삼켜달라고 하니까.”
   “망이가? 어째서?”
   “까만 토끼는 큰 벌레한테 코를 물린 것 같더군. 아니면 다른 것일지도 몰라. 더 무서운 것일지도. 시름시름 앓고 있었어. 아주 딱해 보였지. 다른 토끼에게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도 않고, 얼른 편해지고 싶다고 하더군. ”
   “망이는 아프지 않았어.”
   “그걸 어떻게 알아?”
   “아프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걸 어떻게 아는데?”
   망이가 아프지 않았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 걸까? 홀이 계속 묻자 할 말이 없었다.
   “까만 토끼가 원했어. 깊은 어둠 속에서 편히 쉬는 거.”
   나는 홀을 노려보았다.
   “못 믿겠으면 확인해봐.”
   “어떻게?”
   “홀은 긴 미로 같은 곳이야. 안으로 들어오면 까만 토끼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망이는 어디 있는데?”
   “그건 나도 몰라. 하지만 홀 안의 모든 길은 이어져 있어. 운이 좋으면, 홀에서 길을 헤매다가 굶어 죽기 전에 서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잘만 하면 함께 홀 밖으로 나올 수도 있는 거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상관없어. 하지만 들어올 생각이라면, 이름 따위 알려주지 마. 알면 나도 괴로워. 망이라니. 그건 못 들은 걸로 할게.”
   더이상 홀이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앞발을 들어 근처에 세워진 책을 모두 쓰러뜨렸다. 예전에 피아니스트의 책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던 것처럼 책더미가 홀 앞에 쌓여, 그 까만 아치로 된 얼룩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갑갑해…… 토끼한테 당하다니……”
   홀은 곤란한 듯 웅얼거리고 있었지만, 책더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딘지 의기양양하게 들렸다.

5
   보해가 방으로 돌아왔다. 수박을 들고 왔다. 그것을 바닥에 두고 굴러가도록 내버려두었다. 보해는 책이 넘어진 모습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피곤한 듯 책 근처로 다가가 주저앉았다. 나는 구겨지고 찢어진 종이들을 앞발로 긁어모아 보이지 않게 깔고 앉았다. 보해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쾅, 쾅, 쾅, 쾅.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방이 울렸다. 보해가 미간을 좁힌 채 일어나 문을 열었다.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재킷과 검은 바지를 입고, 살결마저 검붉은 남자가 문을 붙잡고 서 있었다. 망이만큼이나 까만 인간. 남자는 무방비하게 바닥을 구르는 수박을 흘긋 보았다.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어.”
   보해는 말없이 아래만 보았다. 나는 그 발치로 갔다. 엉덩이에 힘을 주고 최대한 길게 일어났다. 토끼가 이렇게 서 있는다고 어떤 인간이 위협을 느끼겠는가 싶지만……
   “당장 짐 챙겨.”
   남자는 아예 나를 못 본 것처럼 굴었다. 보해는 남자의 말에 꿈쩍 않다가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는 멈춰선 채 보해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나가자.”
   하지만 보해는 현관문을 마주한 채 서 있기만 했다. 남자가 벽에 걸린 보해의 옷을 뭉텅 빼내 팔에 걸었다. 남자의 시선이 벽에 세워진 책으로 향했다.
   “버리고 가자.”
   보해가 대꾸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무슨 대답을 들은 사람처럼 분주히 움직였다. 그가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도구를 모두 휴지통에 넣어버렸다.
   “다시 사면 돼. 다 새 걸로 바꿔.”
   그러더니 팔에 걸린 옷들을 휴지통 안으로 쑤셔넣었다. 보해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입을 열었다.
   “그만해.”
   나로서는 처음 듣는 보해의 목소리였다. 보해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조금만 기운을 차리면 금방 상쾌한 기운을 주변에 풍길 만한 목소리였다.
   “당신이야말로 그만해. 이런 곳에 숨어 있으면 무슨 수가 생겨?”
   “그만해. 그만하고……”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고 보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수박…… 먹을래?”
   침묵.
   “먹어?”
   보해가 다시 묻자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칼이 쑥 꽂히자 과육이 시원하게 갈라졌다. 보해는 잘게 자른 수박을 접시에 담아 내 앞에도 놓아주었다. 우리는 오물오물 수박을 먹었다. 조금 전 남자가 옷을 쓰레기통에 버렸을 때, 서늘하게 공기를 감싸던 긴장감은 누그러져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우리가 다시 평범하게 사는 거야.”
   남자가 보해에게 말했다.
   “평범한 게 뭐야?”
   “가끔 웃고도 지내는 거. 너무 어두워지지만 않았으면 좋겠어.”
   보해는 수박을 한 입 삼키고 멈춰 있었다. 나는 보해의 종아리에 몸을 붙였다. 보해가 손을 들어 내 몸을 쓰다듬었다.
   “그 사고 네 탓 아니야……”
   보해는 괴로운 듯 이마를 찌푸리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거기 가고 싶어한 건 나였어.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가 문제였어.”
   보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슬리퍼를 선물한 사람이 나잖아. 이모는 그걸 잡으려다 물살에 휩쓸린 거고……”
   “그건 실수야.”
   “누가 실수한 건데?”
   보해가 물었다. 남자는 잠시 답이 없었다.
   “물의 실수……”
   남자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곤거렸다. 그러나 토끼의 귀는 그 말을 낚아챘다. 물의 실수. 보해는 듣지 못한 모양인지 아무 대꾸가 없었다. 그저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저 혼자 웅얼거렸다.
   “뒤꿈치를 감싸주는 물신을 사왔어야 했어…… 내가 바보같이 그걸 고른 거야…… 분홍색이 예뻐서…… 나비 문양이 어울릴 것 같아서……”
   “실수야……”
   “그냥 보고 있었어. 멍청하게…… 수영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어. 이모는 아침마다 강습을 다녔거든.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물살을 가르고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니었잖아…… 그건 실수가 아니야……”
   남자의 눈가에 눈물이 배어나왔다. 흐르지는 않고 눈 주변을 적시기만 하다가 금방 말랐다.
   “구해야 했어. 뭔가 했어야 해……”
   “이런 식으로 속죄하는 건 의미 없어. 그냥 살아. 옛날처럼.”
   남자가 주먹을 꼭 쥐었다.
   “옛날에는 어땠지? 생각이 안 나……”
   두 사람은 더이상 수박을 집어들지 않았다. 남자는 손을 바지에 닦더니 일어섰다. 그 작은 방을 한 바퀴 둘러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보해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내뱉지 않았다.
   “시신 찾으면 그때는 돌아올 거야?”
   남자의 질문에 보해는 허리를 접고 무릎 위에 고개를 묻었다. 몸을 한껏 웅크린 인간은 커다란 토끼처럼 보였다.
    그들은 더이상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남자가 나갈 때까지 보해는 얼굴을 들지 않았다. 남자가 떠난 후, 보해는 휴지통에서 옷과 세면도구를 꺼냈다. 비누를 묻히고 거품을 내서 오랫동안 씻어냈다.

   밤이 되자 밝은 달빛이 창을 통해 들어와 방바닥을 길게 비췄다. 몸도 마음도 소진된 것인지 보해는 푹 곯아떨어졌다. 정말 잠이 들었나 싶어 손가락 끝을 입으로 더듬어보았다. 보해는 전혀 기척이 없었다. 혀에 손가락이 닿았을 때, 오묘한 냄새가 났다. 바나나 오두막보다 그윽하고, 낡은 책보다 깊고 고소한 향이 코를 간질였다. 보해는 햇볕에 말려두어 알맞은 정도의 온기를 품은 얇은 옷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보해의 손을 물어버릴 뻔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고, 뒤로 잽싸게 물러섰다. 보해가 뒤척이며 웅얼거렸다.
   “너무 어두워지지만은 않아……”
   보해는 꿈을 꾸는 듯했다.
   달빛이 더 넓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보해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 보다가, 달빛을 따라 책이 쌓인 곳으로 갔다. 넘어진 책을 물어 하나씩 치우자, 점차 홀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곡선이 드러났다. 책을 더 치워내자 홀의 눈이 있을 법한 자리가 보였다.
   “아!”
   홀이 반색했다.
   “다시 보는군.”
   흩어진 책을 이로 물어 옮기는 일을 반복한 끝에 홀의 모습이 다 드러났다.
   “까만 토끼 찾으러 갈래?”
   아무 말 하지 않자 홀이 심란한 듯 주절거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 토끼는 그게 가능해?”
   홀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보해가 뒤척거렸다. 그 모습을 보았는지 홀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인간 아직 여기 있구나. 홀에 들어가고 싶다고 떼를 부려 한동안 곤란했지……”
   “보해가 그랬어?”
   “뭐야? 이번에는 보해야? 정말이지 이름 따위 알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보해는 왜 들어가고 싶어하는 거야?”
   “숨고 싶은 거지.”
   “왜?”
   “편해질 거라 생각하는 게 아닐까?”
   “정말로 편해지나?”
   “들어가봐야 알지.”
   “인간은 못 들어가?”
   “너무 크잖아. 홀이 아무리 입을 크게 벌려도 인간은 안 들어가.”
   보해를 돌아보았다.
   “인간이 들어가는 방법은 없어?”
   달빛이 홀을 비추었다.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방법이 있어?”
   “이 안에 들어올 정도로 줄어든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어떻게?”
   갑자기 홀이 흐흐 불길한 웃음을 흘렸다.
   “저 인간은 말이야. 이곳에서 울 만큼 울었어. 아주 바삭바삭해졌지.”
   “무슨 말이야?”
   보해의 손에서 맡았던 냄새가 다시 코로 흘러들어오는 듯했다.
   “바삭바삭하면 갉아먹기도 쉬워지지.”
   홀이 말하자, 나도 모르게 코가 쉼 없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토끼 뱃속에 인간을 담고 홀 안으로 들어오는 거야.”
   눈을 감자 바나나 오두막 냄새가 났다. 부러진 당근, 접시 위 수박, 밖으로 밀어본 적 없는 창살, 구석에서 몸을 떠는 까만 토끼 냄새가 났다. 그러더니 매캐한 먼지가 주위를 둘러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방바닥에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이마가 쓰리고 눈이 따끔거렸다. 이가 시큰거리고 뱃속이 묵직했다. 도대체 무엇을 갉아 치운 것인가? 얼른 보해가 누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해는 그곳에 있었다. 다행히도 나는 보해를 갉아먹지 않았고 폴폴 휘날리는 종이 먼지 속에 있었다. 눈앞에 뜯겨나간 책이 보였다. 보해가 잠결에 쿨럭 기침을 했다.
   “넌 말이야. 계속 여기 있다가는 정말로 인간을 갉아먹을지도 몰라.”
   토끼가 인간을?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다 생각하지만, 경계를 넘어서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어.”
   그 말이 나를 붙들었다. 한 발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홀은 어쩔 수 없어.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홀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냥 여기 있는 거지.”
   달빛이 방으로 더 넓게 퍼져 들어왔다. 보해의 손끝에 달빛이 걸렸다. 홀린 듯 다가가 손가락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맛있는 냄새가 나지?”
   홀이 말한 순간, 깨물어버렸다. 손가락은 바사삭, 쉽게 부서졌다. 그 질감을 믿을 수 없어 다시 깨물었고, 손가락은 또 한번 바스스슥, 갈라지고 부서졌다. 금이 간 자리마다 엷은 빛이 흘러나왔다. 은은한 빛 속에 이를 들이밀고, 혀로 반짝이는 부스러기를 집어삼켰다. 손끝에 매달린 고통의 한 조각을 먹어 치우는 것 같아서, 이것이 보해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 토끼가 정말 먹어버릴 줄은……”
   인간의 고통은 조금 단단했다. 단맛이 나는 듯도 했다. 고통의 맛은 점차 혀를 마비시켰다. 모두 꿈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보해는 아픔 없이 잠들어 있었다. 이대로 인간을 먹어버릴 수도 있나. 그러나 인간을 먹는 것은 토끼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등을 돌렸다. 그렇다면 토끼의 일은 무엇인가? 나는 홀 안으로 귀를 밀어넣었다.
   “까만 토끼 찾으러 가는 건가?”
   나는 홀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귀를 어둠에 적시고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데 집중하고 싶었다. 실은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고개를 돌려 홀을 빠져나가야 하는 걸까? 결국 홀의 계략에 말려든 게 아닐까? 이 어리석은 토끼를 응원하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한발 한발 나아갈 때마다 달빛이 그림자처럼 따라와, 토끼의 꼬리와 등을 넘고 귀와 이마를 건너 앞을 서서히 밝혀주었다. 그래서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다. 완전히 홀 속으로 들어와 나는 힘껏 망이를 불러보았다. 뒷다리에 힘을 주고 멀리 뛰어보았다. 더 앞으로 나아가자 달빛이 옅어지고 어둠이 서서히 깊어졌다. 토끼가 갈 수 있는 한 멀리 어둠 속으로 가보고 싶었다. 망이를 만나고 돌아올 때, 그와 같은 방식으로 다시 멀리 뛰어 돌아올 것이므로, 나는 홀 밖에 남은 인간에게 이 말을 하지 못한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인간이여, 제발 이 어둠의 끝을 막아두지만 말아 달라.

김나현

퇴고를 할 때마다 소설이 달라졌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쓸 때마다 늘 이런 일을 겪습니다. 그래서 더 고치면 「래빗 인 더 홀」은 아주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 소설에서는 몽이와 망이, 그리고 보해가 어떻게 살아갈지 궁금해집니다.

2022/10/25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