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오는 좀처럼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작고 뭉툭한 손으로 건반을 눌러보고 또 눌러보면서 결정의 순간을 유예할 뿐이었다. 상단의 조작부 버튼으로 모드를 변경한 뒤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쳐보고, 이내 다른 모드에서 도시라솔파미레도를 쳐보는 식이었다. 내장된 이펙트 기능 전부를 확인해보는 것 같기도 했고 건반 하나하나의 무게감을 느껴보는 것 같기도 했다. 다행히 작동하지 않는 버튼이나 연결이 끊긴 건반은 없었다.
   자꾸 미적거리는 찬오가 답답했는지 보다 못한 용이가 그러지 말고 제대로 연주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요즘 너 배우고 있는 거 아무거나 한번 쳐보면 감이 오지 않겠느냐고 했는데 찬오는 그건 또 부끄러운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한참 뒤에야 괜찮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정말 괜찮아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용이가 주는 눈치에 마지못해서 한 말 같았다. 용이는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주차 문제로 은근슬쩍 찬오를 재촉했는데 집 주변을 계속 돌았는데도 마땅한 자리가 없어 결국 남의 영업장 앞에 세웠다며 전전긍긍이었다. 아무래도 딱지를 뗄 것 같다고 했다.
   찬오가 탐탁지 않아 해서일까. 나는 그간 이 작은 방 한구석을 당당하게 점령해왔던 디지털 피아노를 조금은 부끄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덮개도 없이 오래 방치해둔 탓에 건반은 전반적으로 노란기가 돌았고, 조작부 오른쪽 끝에 인쇄된 모델명은 절반쯤 벗겨져 있었다. 하필 해가 쨍한 시간인데다 블라인드까지 걷어두어서 악보대 위에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가 적나라했는데, 두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대충이라도 닦아둔다는 걸 깜빡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싫으면 그냥 싫다고 해도 돼.
   용이가 찬오에게 말했다.
   진짜야. 삼촌이 새로 사줄 수 있어. 크리스마스잖아.
   찬오가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유치 갈이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오른쪽 송곳니 자리가 검게 비어 있었다.
   내가 갖고 싶은 게 얼만지도 모르면서.
   얼만데?
   비싸. 그리고 만약에 새 거 샀는데 내가 금방 싫증내면 어쩌려고. 그럼 돈 아깝잖아.
   왜? 싫증날 것 같아?
   모르겠어.
   찬오는 그렇게 말하고는 똑바로 고쳐 앉았다.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다시 건반 위로 손을 올리는 게 어떻게든 마음을 붙여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런 찬오를 보고 있자니 괜히 내가 다 머쓱해져 창밖으로 눈을 돌리려는데 용이가 턱짓으로 찬오를 가리켜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
   어때?
   어른스럽다.
   아니, 그거 말고.
   뭐?
   ……
   나는 용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으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그러자 용이가 카톡으로 말을 걸었다.

   [어떠냐고.]
   [뭐가.]
   [이쪽 같지 않아? 느낌 오지 않아?]
   [돌았냐고.]
   [왜?]
   [작작해, 진짜.]

   나는 찬오를 힐끗 확인하고는 용이를 향해 쉿, 하고 입을 가렸다. 아무리 농이라도 이건 애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다 싶었을뿐더러 앞날이 창창한 애를 두고 이쪽이니 저쪽이니 하는 건 왠지 부정한 짓 같기도 했으니까. 내가 이걸 부정하다고까지 생각한다는 걸 알면 용이는 분명히 내 안의 수치심과 죄의식, 엄숙주의를 들먹이며 한소리를 할 테지만 나는 그렇더라도 이런 얘기는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당연히 조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백번을 생각해도 그랬다.
   그때 더할 말이 있는지 문자를 썼다 지웠다 하던 용이가 갑자기 전화기를 귓가로 가져갔다. 목소리를 낮게 깔면서 예, 예, 하는 걸 보니 어디서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통화는 1, 2초 뒤에 바로 종료되었고 용이는 뭔가 어긋났다는 듯이 미간을 구겼다 펴면서 화면을 내려다봤다. 무슨 전화를 이렇게 받고 또 끊나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데 용이가 찬오의 작고 동그란 뒤통수를 가볍게 헝클어뜨리며 말했다.
   잠깐만 이 아저씨랑 있어. 삼촌 주차 다시 하고 올 테니까. 알겠지?
   순간 찬오의 시선이 내게로 왔고, 나는 얼결에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눈도 하나 깜빡이지 않는 무표정과 살짝 무거워진 공기가 찬오에게 내 미소는 전혀 유효하지 않다는 것을 일러주었지만 그래도 몇 초간은 그 얼굴 그대로 찬오의 환심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

   용이로부터 이번 주말에 피아노를 보러 가도 되겠느냐는 연락이 온 건 사흘 전이었다. 찬오가 요즘 피아노를 배우는 중이어서 마침 연습할 피아노가 필요한데 혹시 지난번에 네가 말한 그 피아노가 쓸 만한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기능에 하자가 없고 찬오가 마음에 들어 한다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고 싶다고 했다. 지난여름, 같이 P에게 다녀오는 길에 남은 계약 기간과 이사 얘기를 하다가 처치 곤란한 피아노 얘기가 잠깐 나왔는데 그걸 기억하는 듯했다. 그래도 선물인데 쓰던 건 좀 그렇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중고를 원하는 건 자기가 아니라 찬오라는 대답이 돌아와서 일단 실물을 직접 보고 결정하자는 쪽으로 얘기가 정리됐다. 크리스마스를 생일보다 더 좋아한다는 찬오는 용이의 첫째 형 아들로 해가 바뀌면 초등학교 5학년이 된다.
   나는 다다음주로 예정되어 있는 이사를 위해 시간이 날 때마다 가구나 집기를 하나둘 처분하는 중이었다. 다시 본가로 들어가는 것인데다 이번만큼은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서 많은 것을 가차 없이 버릴 생각이었다. 과연 한 시절과 나를 분리하는 게 가능한 건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나를 과거에 묶어두는 것들을 정리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쉽게 버려지지 않는 것들이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바로 디지털 피아노였다. 피아노 자체의 무게도 무게지만─일반 업라이트 피아노에 비할 건 아니었으나 페달부에 가림판까지 갖추고 있어 부피가 컸다.─그 안에 깃든 추억의 무게 또한 여실해서 자꾸만 결심이 흐려졌던 것이다. 계속 안고 살자니 그건 너무 청승 같아 찝찝했고 내다 버리자니 그건 또 너무 매정한 것 같아 찜찜했다. 그러므로 조카를 데리고 피아노를 보러 오겠다는 용이의 제안은 퍽 반가운 일이었다. 이건 누가 좀 치워줘야 끝이 날 것 같았을 뿐만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일말의 여지만으로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으니까. 게다가 피아노의 새 주인이 생판 모르는 남이 아닌 찬오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싫지 않았고.
   찬오는 나에 대해 잘 모를 테지만 나는 찬오에 대해 제법 많은 걸 알고 있었다. 요즘 들어 용이가 만날 때마다 찬오 얘기를 빼놓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찬오는 두 해 전 엄마의 재혼으로 아빠와 단둘이 살게 되면서 용이네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용이네 어머니가 찬오네 집 살림을 도와주시기도 하거니와 찬오가 용이네 집에 드나드는 일이 잦아지면서 찬오에 대한 용이의 관심과 애정이 부쩍 커진 듯했다. 용이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찬오에게서 약간의 경외심과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았고, 찬오의 어떤 면면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 깜짝 놀랄 때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일까. 용이는 작년 말부터 찬오가 이쪽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농반진반처럼 했다. 아이의 말투와 몸짓이 왠지 좀 여성스럽고 자꾸 여자아이들이랑만 어울리는 게 또래의 남자아이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로봇보다는 인형을 좋아하고, 밖에서 공을 차고 놀기보다는 혼자서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기를 고집하며, 아빠보다는 엄마의 물건에 관심을 갖는 식의 전형을 일정 시기마다 모두 보여서 더욱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도 용이는 그런 얘기를 했고, 그날은 농반진반이 아니라 농은 반의반이고 진은 7할에서 8할쯤 되는 그런 분위기여서 나도 그냥 흘려듣지만은 못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용이가 젠더 표현과 성적 지향을 함부로 뭉개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심 찬오가 이쪽이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까지 들기도 해서 한번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여성스럽다고 다 이쪽이냐고. 이쪽이라고 다 여성스럽고?
   나는 용이에게 어깃장을 놓듯 물었다. 찬오가 보여 왔다는 일련의 행동을 여성스럽다고 규정짓는 것도 문제적이었지만, ‘여성스럽다’와 ‘이쪽’을 등가로 놓는 건 그저 고착화된 편견을 답습하는 것이었으니까.
   저기요, 빻으셨어요. 너무 성급한 일반화세요.
   일반화 아니고 이반화. 너무 성급한 이반화.
   ……
   제 말장난이 흡족한 건지 아니면 그 순간의 무안함을 멋쩍은 웃음으로 무마해보려는 건지 한참을 키득거리던 용이가 이내 콧마루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물론 아닌 사람도 있겠지. 왜 없겠어, 어딘가 있겠지. 나는 본 적이 없지만……
   야, 있어. 많아, 존나 많아.
   그래? 디나이얼 아니고? 숨 쉴 때마다 자기 안의 여성성 죽이는 거 아니고?
   ……
   농담 농담. 근데 이건 딴소리일 수도 있는데, 그래, 뭐, 자격지심에 버튼 눌린 걸 수도 있는데,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의를 생각하게 된단 말이야.
   나는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듯이 용이를 똑바로 쳐다봤다. 그러고는 여기서부터는 농담이 아니라는 듯이 뜸을 들이는 용이를 기다렸다.
   다 그런 건 아니라는 말. 이쪽이라고 다 여성스러운 건 아니라는 말. 그건 그게 사실이니까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나한테는 뭐랄까……
   뭐.
   받아들여지려고 하는 말 같거든. 특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가 그런 말을 할 때는 꼭 누구한테 해명하는 것처럼 들린단 말이지. 여기에 그런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니 우리를 도매금으로 보지 말아 달라는 부탁 같기도 하고. 그렇게 꼬리를 잘라야 우리가 이등 시민이라도 될 수 있다는 듯이.
   내가 아니, 그건, 하면서 반박의 말을 고르는 사이 용이가 빠르게 덧붙였다.
   생각해봐, 그런 말을 할 때 거기에 우리가 가진 여성성을 축소하려는 마음이 없나? 이상하지 않아? 늘 감춰야 하는 건 여성성이고 증명해야 하는 건 남성성인 게. 아닌가? 내가 오버하는 건가?
   어, 오버야. 많이 오버야.
   나는 그런 저의로부터 과연 내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어 멈칫했지만 그 말을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는 않을뿐더러 용이가 말꼬리를 잡고 억지를 부린다는 생각에 거기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러고는 다시 찬오 얘기로 돌아갔다. 아무리 그래도 아직 정체성이 확립되지도 않았을 아이를 멋대로 퀴어로 단정하는 건 잘못인 것 같다고도 했고, 어쩌면 일시적일지도 모를 기질이나 취향만으로 아이를 퀴어로 짐작하는 것 또한 실례인 것 같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말 역시도 용이는 내켜 하지 않았다. 제 판단이 성 고정관념에 기인하고 있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네 말대로 나는 빻았고 멀었다며 적잖이 민망해하면서도, 어째서 찬오를 미래의 시스젠더 이성애자로 규정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면서 미래의 퀴어로 상상하는 건 그릇되고 불온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용이가 처음부터 불만인 건 바로 이거였다.
   퀴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이 나는 왜 이렇게 좆같을까. 그런 가정이 나는 왜 퀴어가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처럼 느껴질까. 이것도 오버야?
   그럼 아니기를 바라지. 너는 맞기를 바래?
   나는 속내를 숨기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리고 어쩐지 안간힘처럼 느껴지는 용이의 진심을 마주하고는 더는 가타부타 말을 얹을 수가 없었다.
   응, 나는 맞기를 바라는데? 왜냐하면 나는 찬오가 배제된 사람들에게 선 그으면서 편하게만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거든. 허락된 것만 욕망하면서 안전하게만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고, 일반적인 생애주기에 연연하면서 성실하게만 살지는 않았으면 좋겠거든. 그게 잘못된 건가?
   생각해보면 용이도 처음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찬오가 전학을 온 지 두 해가 다 되어 가는데도 여전히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겉도는 데다 학교생활의 여파인지 집에서도 점점 말수가 줄고 소극적이 되는 것 같다고 했으니까. 한번은 일기장에 이번 주에 잘한 일로 ‘여자애들이랑 안 놀기’라고 적어서 담임이 아이 아빠에게 상담차 전화를 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 용이는 찬오가 벌써부터 스스로를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게 보이니까, 그게 어떤 건지 아니까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용이는 이제 걱정은 그만할 거라며 태도를 고쳤다. 걱정은 이미 주변에서 넘치도록 하고 있으니 자기는 아이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용이는 맨박스야말로 허상이라는 걸 몸소 보여줄 수 있는 삼촌이 되고 싶다고도 했고, 아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곁에 있을 수 있는 가족이 되고 싶다고도 했다. 불굴의 프라이드로 무장한 어른. 한 세기쯤 뒤에서 살다가 온 것 같은 어른. 용이는 그런 어른인 척할 거라고 했고 그런 어른이 될 거라고도 했다. 용이는 서른 가까이 끙끙 앓다가 벽장 밖으로 간신히 나온 케이스였는데, 역시나 늦게 배운 프라이드가 더 무섭다고, 날이 갈수록 성소수자로서의 삶에 대한 의지와 애착이 커지는 것 같았다.
   어렸을 때 제일 싫었던 게 뭔지 알아?
   그날 용이는 이런 말도 했다.
   진심으로 나를 걱정하는 엄마의 눈빛. 남들과 다르면 인생이 가시밭일 텐데 이걸 어쩌면 좋나 근심하는 눈빛. 나는 다른 애들의 수군거림이나 놀림보다 그게 더 싫었어.

   *

   잠시 자리를 비운 용이가 뭘 먹지 않겠느냐며 전화를 걸어온 건 이십여 분 뒤였다. 금방 주차만 다시 하고 온다더니 어째서 한세월인가 싶어 연락해보려는데, 마침 용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얘기를 들어보니 결국 동네를 빙빙 돌다가 전철역 사거리에 있는 공영 주차장까지 간 모양이었다. 주차장은 집에서 못해도 십 분은 걸어가야 했다. 용이는 주차가 기본 2시간이라며 밥을 먹자고 했고 가는 길에 픽업해갈 수 있는 메뉴 몇 가지를 얘기했다. 맥도날드, 던킨도너츠, 써브웨이, 도미노 피자, 교촌치킨. 열거하는 상호만으로도 지금 용이가 어디쯤 서 있는지 짐작이 갔다.
   나는 뭐든 상관없었기에 식탁에 앉아 있는 찬오에게 눈을 돌렸다. 찬오는 아까 전부터 넷플릭스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보고 있었는데 통화 소리가 컸는지 내가 묻기도 전에 맥도날드요, 하더니 전화기 너머에서 리치 포테이토? 하고 되묻는 용이에게 오케이 사인도 보냈다. 리치 포테이토 버거라는 걸 되게 좋아하나보다 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고 이번 달 안에 스탬프 4개를 모아야 크리스마스 스노우볼을 받을 수 있어서 먹는 거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찬오가 입고 있는 초록색 스웨터에도 루돌프 와펜이 달려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찬오에게 주스를 한 컵 가득 따라주고는 할일 없이 거실과 부엌을 맴돌고 있는데 찬오가 저기요, 아저씨, 하면서 나를 불렀다. 하쿠를 따라 온천에 잠입한 치히로가 오래 참고 있던 숨을 터트리며 요괴들에게 발각되는 순간에 화면이 멈췄다. 찬오가 내게 먼저 말을 건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찬오는 이제 피아노는 안 치는 거냐고 물었다. 왜 피아노를 버리려고 하는 건지, 자기가 정말로 피아노를 가져가도 되는 건지 확인하고 싶은 듯했다. 그런 걸 묻는 걸 보니 어쨌든 가져가는 쪽으로 마음을 정한 것 같았다.
   나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른다고 대답했다. 피아노는 내 것이 아니었고 나는 장난으로 몇 번 건반을 눌러본 게 전부일 뿐 악보를 읽을 줄도 음계를 외울 줄도 몰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같은 구간을 십수 번씩 반복하는 P의 모습을 지켜보거나 어느새 익숙해진 멜로디를 흥얼거리는 정도였다.
   찬오는 내가 하는 말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피아노의 주인을 궁금해했다.
   친구 꺼야.
   친구요?
   응.
   친구 껀데 왜 여기에 있어요?
   여기에 살았으니까.
   아저씨 혼자 사는 게 아녜요?
   지금은 혼잔데 예전엔 같이 살았지.
   아……
   찬오는 주변을 한번 쓱 둘러보았다. 그렇게 하면 무슨 흔적이라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수납장의 그릇과 조리 도구, 냉장고에 붙어 있는 마그넷과 엽서들, 식탁 구석의 탁상 달력과 양념통 같은 것들을 일별했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올려다보며 그럼 아저씨 친구한테도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냐고, 나중에 그분이 피아노가 필요해지면 돌려줘야 하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어떻게 말하는 게 좋을지 생각을 가다듬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 더는 연락할 수가 없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고, 피아노 같은 건 영영 필요하지 않을 테니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내키지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다른 얘기를 했다. 다행히 하고 싶은 얘기가 떠올랐고 그제야 찬오의 맞은편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 친구는 피아노를 늦게 시작했어. 오랫동안 밤낮없이 일을 하다가 몸도 마음도 많이 안 좋아져서 쉬게 됐는데 어느 날 동네에 있는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더라고. 어렸을 때부터 늘 배우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허락을 안 해줬다나. 아무튼 나는 그 친구가 피아노를 치는 그 시간들이 좋았어. 언젠가부터 그 친구가 말을 잘 안 했거든. 이렇게 마주 앉아 있는데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피아노를 칠 때만큼은 알 것 같았어. 그날의 기분이나 감정 같은 게 전해지곤 했거든. 같은 곡을 연습해도 날마다 느낌이 다르니까 듣고 있으면 아, 오늘은 기분이 좋구나, 오늘은 속상하구나, 알 수 있었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나는 방금 내가 늘어놓은 얘기 속에도 나의 패착이 들어있다는 걸 깨닫고는 아연해졌다. 왜냐하면 그 시절의 나는 그 알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무턱대고 안도해버렸으니까. 한번 더 묻는 대신에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고, 조금 더 의심하는 대신에 다 지나갈 거라고 확신하곤 했으니까. 생각하기를 멈추고 관심 갖기를 포기한 시간들. 사실은 무감했고 어쩌면 오만했으며 그래서 낙관할 수 있었던 시간들.
   내가 잠시 침묵으로 물러서 있자, 찬오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나를 건너다보았다. 애한테 별말을 다 한다 싶어 그만 입을 다물자 생각하던 찰나였는데 찬오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표정이었다.
   저희 학원 선생님도 그랬어요. 피아노 치는 걸 보면 진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요.
   그렇구나.
   네.
   그럼 그 선생님은 찬오 너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네.
   그런 것 같아요. 얼마 전에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얘기해주셨어요.
   그래? 뭐라고 하셨는데?
   찬오는 잠깐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말을 이었다.
   저는요, 총명해서 뭐든 빨리 배우고요. 외유내강이래요. 그리고……
   그리고?
   할머니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아이래요.
   그런 것도 알 수 있다고? 피아노로?
   네, 알 수 있대요.
   찬오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진짜로 들은 말을 전하는 건지 아니면 장난으로 지어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시치미를 떼는 듯한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오려는데 찬오가 다시 한번 근데요, 아저씨, 하고 나를 불렀다. 아니, 찬오가 그 말을 꺼낸 건 어쩌면 그보다는 조금 더 뒤였을지도 모르겠다.
   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그럼 되지. 너는 백 개도 돼.
   나는 내게 똑바로 향하는 찬오의 눈을 바라봤다. 눈가와 입가를 감돌던 장난기가 조심스럽게 걷히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우리 삼촌이랑 친한 거죠?
   친하지.
   그럼 삼촌에 대해서 잘 아는 거죠?
   그런 편이지.
   그럼 이것도 알아요?
   뭐?
   삼촌이 게이예요?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무심코 종이에 손끝이 베인 것처럼 흠칫했고, 찬오의 그 한마디가 쿵쿵 몸속에서 맥동하는 듯한 기분에 잠깐 숨을 멈추기도 했다.
   게이가 뭔지는 알고 묻는 걸까. 그게 어떤 사람들을 뜻하는 건지 알고 있는 걸까. 나는 찬오가 그 말을 정확히 어떤 의미로 파악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검색만 하면 바로 다 나오는데 모를 수가 있나 싶으면서도, 뭐든 빠르다는 요즘 애들이라면 이해를 못 할 것도 없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찬오가 실제로 알고 있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불현듯 겁이 났다. 찬오가 찾아본 것들이 인터넷 기사나 영상마다 기생하는 혐오 댓글일까 봐. 그런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고 있을까 봐.
   나는 찬오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알았다. 아우팅을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걸 아는데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알량한 자존심인지 모르겠지만 그 상황에서도 거짓말은 또 하고 싶지가 않았다. 생각의 회로가 망가진 것처럼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점점 시선이 낮아지고 있는데 찬오가 말했다.
   맞나보네요. 아니면 아니라고 했을 텐데.
   그런 게 아니고. 나는 잘 몰라서.
   베프인데도요? 아까 오는 길에 삼촌이 그랬거든요. 아저씨가 베프라고.
   그렇더라도 잘 모르는 게 있는 법이라고 말끝을 흐리는 사이 찬오가 물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것들만 묻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아저씨가 보기엔 어때요? 제가 삼촌이랑 비슷해요?
   ……응?
   우리가 닮았어요?
   나는 찬오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 것 같았고, 그래서 가슴이, 아니 영혼이 조여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찬오는 이미 세상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한 것 같았고, 나는 그런 아이들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통제하고 또 미워하게 될지를 알았다.
   글쎄, 별로 안 닮은 것 같은데. 왜 삼촌을 닮아. 너는 엄마랑 아빠를 닮았겠지.
   혹시 삼촌을 닮은 게 싫으냐고 물었을 때 찬오는 그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그러고는 자기 삼촌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내게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나는 찬오 덕분에 용이가 주말마다 찬오를 데리고 레고방과 고양이 카페에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따금 산책 삼아 함께 공원을 돌며 길고양이들한테 밥을 준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흙이 묻거나 땀이 차도 찬오의 손을 절대로 먼저 놓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찬오는 끝내는 이런 얘기를 꺼냈다.
   제가 싫은 건요. 할머니가 걱정하는 거예요. 할머니가 그러는데요. 제가 삼촌 어렸을 때랑 비슷하대요.
   그래?
   네. 너무 비슷해서 깜짝깜짝 놀란대요.
   할머니는 그게 싫으시대?
   아니요,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냥 제가 알아요, 속상해한다는 걸.
   ……
   그래서 말인데요. 아저씨가 저 대신 우리 삼촌이랑 많이 놀아줄 수 있을까요? 저도 안 놀 건 아닌데, 앞으로도 계속 놀 거긴 한데,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놀아야 할 것 같아서요.
   나는 찬오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식탁 위로, 식탁 위에서 바닥으로 미끄러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한순간 찬오의 얼굴 가득 번졌다 사라진 쓸쓸함과 막막함을 환영처럼 쫓다가 그러겠노라고 약속했다. 지금보다 더 자주 연락하겠다고도 했고 더 많이 만나겠다고도 했다.
   그럼 부탁할게요.
   찬오가 말했고,
   잘 부탁할게, 피아노.
   내가 말했다.
   찬오가 조금 느슨해진 듯한 표정으로 남은 주스를 조금씩 나누어 마시는 동안, 나는 찬오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사각의 부조 문양이 새겨진 천장과 물샌 자국이 남아 있는 벽지, 기름때가 낀 타일처럼 내게는 너무 생활적이어서 그 어떤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것들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이대로 계속 찬오를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날 것 같았고, 총명하고 외유내강이며 할머니 말씀을 잘 듣는 찬오에게 괜한 걱정을 안겨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다음 냉장고 문을 열었다. 쏟아져나오는 냉기가 그사이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삽시간에 식혀주었다.
   주스 더 마실래?
   잠시 후 등 뒤에서 찬오가 대답했다.
   좋아요.

   *

   피아노는 이삿날 아침에 1톤짜리 용달에 실려 용이의 집으로 갔다. 원래는 찬오의 방에 두려는 계획이었는데 실측해보니 책상이나 책장을 빼지 않고서는 공간이 나오질 않아서 일단은 자기 집에다 두기로 했다고, 내년 봄에 찬오네 집이 이사를 하면 그때 다시 옮길 예정이라고, 용이는 보고를 하듯 세세히 말했다. 내게 피아노의 행방을 정확히 알려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용이는 혹시라도 피아노가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 놀러 오라고도 했는데, 나는 어쩌면 용이가 처음부터 피아노를 처분해버리겠다는 내 결정을 만류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지, 그러니까 내가 언젠가 반드시 후회하고 자책하리라는 걸 예감하고는 대신 맡아주려 했던 게 아니었을지 나 좋을 대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날 저녁 용이가 카톡으로 3분짜리 영상을 하나 보내왔다. 큰 짐 정리를 대충 마치고 엄마와 함께 밥을 먹는 중이었는데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찬오의 연주 영상이 이어졌다. 피아노는 용이의 집 거실 한쪽에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이질감 없이 놓여 있었고, 구석의 큼지막한 플로어 스탠드가 발광하며 찬오의 주변으로는 빛 번짐을, 그 뒤편의 커튼 위로는 찬오의 것 같기도 하고 용이의 것 같기도 한 그림자 물결을 만들었다.
   영상 속에서 찬오는 꼿꼿이 앉은 자세로 연주했다. 악보에서 시선을 떼지 않는 게 살짝 경직되어 보였지만 손놀림은 경쾌하고 거침이 없었다. 듣다보니 익숙한 멜로디여서 서너 마디가 지난 다음부터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됐는데 이게 무슨 노래였더라 가만히 생각해보니 캐럴이었다. Wham의 〈last christmas〉. 정말이지 찬오는 크리스마스에 진심이구나 싶었다.
   뭔데, 조성진이야?
   그때 옆에서 듣는 줄도 모르게 듣고 있던 엄마가 물었고,
   무슨 조성진이야. 얘는…… 김찬오야.
   내가 화면을 엄마 쪽으로 돌리며 대답했다. 돋보기 없이는 뭘 제대로 읽거나 보는 게 어려워진 지 오래였기에 과연 이게 보일까 싶었는데 엄마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면서도 찬오의 연주를 유심히 지켜봐주었다.
   누군데? 아는 애야?
   응, 친구 조카.
   야무지네.
   그렇지?
   기특하고.
   맞아, 기특해.
   갑자기 식탁 위로 내려앉은 노래가 캐럴이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걸 같이 들은 사람이 하필 엄마였기 때문일까.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내가 찬오만했을 때의 일이었다.
   그해 겨울 나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갖고 싶어서 거의 앓다시피 했다. 산타를 믿는다거나 크리스마스를 손꼽아 기다리는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즈음 무슨 영화라도 본 건지 우리 집에도 트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마도 나는 온갖 작고 반짝이는 것들로 트리를 꾸미고 싶었을 것이다. 내게는 여름휴가 때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와 조약돌, 문방구에서 뽑은 유리구슬과 플라스틱 반지, 색종이를 접어서 만든 꽃잎과 잘 씻어서 말려둔 복숭아씨 같은 것들을 모아둔 상자가 있었는데 나는 드디어 그것들이 빛을 발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나는 마트에서 판매 중인 조립식 트리를 발견하고는 엄마를 졸랐다. 자라오면서 그렇게까지 막무가내로 떼를 쓴 적은 별로 없었기에 아직도 생생했다.
   엄마에게 혹시 그때 일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이었다.
   트리? 크리스마스트리?
   응, 절대로 안 사주더라고. 바닥에 드러누워서 버티는데도 뒤도 안 돌아보고 그냥 가버리더라고.
   내가? 비쌌겠지.
   아니야, 진짜 나무도 아니었어. 줄기도 가지도 잎사귀도 다 플라스틱이었다고.
   그랬니? 내가 왜 그랬을까? 미안하네.
   사과를 받고 싶어서 꺼낸 얘기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엄마로부터 순순히 미안하단 말이 돌아와서 주춤하는 사이, 만약 그때 내가 갖고 싶었던 게 레고나 미니카, 건담 같은 것이었다면 그래도 엄마는 그토록 강경했을지 되묻고 싶어지는 사이, 엄마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뭐가?
   너도 그렇게 대책 없이 울고불고 생떼 부린 적이 있는 거잖아. 나는 니가 참기만 했다고 생각했거든. 그게 내 탓인 것 같아서 늘 안쓰러웠고.
   내가 안쓰러웠어?
   안쓰러웠지.
   근데도 트리는 안 사줬고?
   미안하다고……
   이윽고 나는 엄마에게 그보다 더 어렸을 때의 나는 어떤 아이였느냐고 물었다. 아직 세상을 배우기 이전의 내 모습이, 좋으면 웃고 싫으면 우는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궁금해졌다. 엄마는 최선을 다해 기억해내려는 것처럼 한참을 공들여 생각했다. 그러고는 그 시절의 내가 눈앞에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이 대답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리라는 걸 확신하는 것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말이야. 동네 아줌마들, 할머니들 얘기 듣는 걸 좋아했어. 어른들 옆에 얌전히 앉아서, 어른들이 무슨 얘기를 하면 전부 다 알아듣는 것처럼 방긋방긋 웃으면서, 아직 말도 제대로 못 하는 게 몇 시간이고 울지도 않고 나를 찾지도 않고 그렇게 오래오래 어른들 사는 얘기를 들었어. 너는 그런 아이였어.

김병운

어린 시절의 나에게 지금의 나를 보내주고 싶어서 썼다. 걱정을 끼쳐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2022/10/25
5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