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이 구르면서 남아 있던 술이 쏟아졌다.
   장이수는 아쉬운 표정으로 카펫이 검게 물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지막 잔이었다. 딱 한 모금만 더 마시면 깊게 잠들 수 있었을 텐데. 쓰러지듯 선잠에 빠졌다가 잠시 후 깨지 않아도 되고, 잠에서 깬 사람이 그렇듯 온갖 생각에 빠져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별 소리가 나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안방 쪽을 쳐다보았다. 시커멓게 입을 벌린 방에서 냉랭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방문을 닫으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화면 상단에 발신자 표시 제한이라고 떠 있었다. 얼마 전에도 이런 전화가 걸려왔다. 자신을 노출하지 않으려는 오기 앞에서 장이수는 겁을 먹고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술을 마시고 있어서인지 겁이 없어졌다. 어차피 목소리뿐이지 않은가.
   “아이, 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전화선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여자였다. 낯선 목소리. 어른인지 애인지 알 수 없는 소리. 그 목소리를 듣자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내키지 않는 전화는 아닌 것 같았다. 여자에게는 날이 선 기색이 전혀 없었다. 어쩌면 오래전 다정한 말을 나누던 사람일 수도 있었다.
   “누구시죠?”
   장이수는 추궁처럼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물었다. 발신자를 숨긴 것을 고려하면 합당한 질문이었다.
   “나를 몰라요?”
   상대가 톤을 높였다. 당연히 몰랐다. 이런 식으로 말을 거는 사람은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누군데요?”
   순전히 목소리를 다시 들어보려고 질문을 던졌다. 상대가 옅은 쇳소리를 내며 웃었다. 오랫동안 큰 소리로 말하느라 목이 상했거나 성대 질환을 겪는 사람인 듯했다.
   “모른다니 유감이네요.”
   “몰라서 나도 유감이에요.”
   상대를 놀리고 싶은 마음에 장이수가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어차피 잠시 목소리를 나눌 뿐이니까. 만약 상대가 자신을 안다고 해도 전처럼 당하지 않으리라는 자신도 있었다. 불에 데본 사람이 불을 아는 법이다. 그게 경험이라는 것이다.
   좀더 젊었을 때는-그에게 젊음은 결혼 이전 시기를 가리켰다-그 역시 부자연스러운 말투를 써가며 여자들에게 묘한 말을 걸었다. 젊음이 그런 건 줄 알았다. 그는 덩치가 크지 않았지만 허벅지가 단단했다. 그게 자랑거리였는데 여자들은 알아주지 알았다. 알아달라고 하면 놀림을 받았다.
   만나는 사람이 생겼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건 참기 싫은 부분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수저를 한 번에 다 들고 식사했다. 맛있는 걸 먹으면 아이처럼 쩝쩝거리는 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어떤 여자는 횡단보도 신호가 초록 등이 될 때까지 못 기다렸다. 급한 일이 있는 듯 매번 신호를 무시했다. 어떤 여자는 자주 역사적 사실을 비유로 들었다. 역사는 되풀이되고 과거는 미래에 대한 믿음직한 주석이라고 말하면서. 장이수는 참지 않았다. 지나간 일에 연연한다며 여자를 몰아붙였다.
   그런 식으로 만났다가 헤어진 사람 중에 이런 목소리를 가진 여자는 없었다. 기분 나쁘다는 말을 유감이라고 돌려 말하는 여자도 없었다. 발신자를 숨기는 상대는 그들 중 누구도 아니었다.
   “알고 싶어요?”
   “힌트를 줘요.”
   장난을 치고 느긋하게 구는 걸 보니 그동안 장이수에게 화를 내던 사람들과는 다른 부류인 모양이었다. 그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맞춰보라며 스무고개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대뜸 화를 냈고 돈을 갚지 못한 장이수를 추궁하느라 시간을 썼다.
   “지금 혼자예요?”
   “그럼요, 혼자죠.”
   상대에게 확인시켜주듯 집을 둘러보면서 장이수는 아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도록 주의했다. 그러는 것만으로도 벌써 누군가와 손을 맞잡은 기분이었다. 그 손의 부드러움에 탄복하듯 장이수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말이 통하겠네요.”
   여자가 말했다.
   “벌써 통한 줄 알았는데요?”
   장이수가 수화기를 귀에 바짝 갖다댔다. 여자가 웃었다. 그 덕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누군지 모를 상대와 호감을 저울질하는 동안 침울했던 그의 기분이 나아졌다. 이제 여자의 쇳소리가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었으나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어찌나 안도했는지 상대에게 느낀 호감을 당장 전하고 싶을 정도였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 것은 오랜만이었다. 더 얘기가 이어지면 자신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 요즘 통 그럴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도 나를 모른 척해요? 당신이?”
   여자가 톤을 높이자 쇳소리가 강하게 느껴졌다. 장이수는 놀랐다. 정확히는 불쾌해졌다. 그는 사이좋은 친구처럼 주고받던 부드러운 농담을 당장 집어치웠다.
   “누굽니까.”
   얼굴이 보인다는 듯 장이수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당신이 알아내야지.”
   여자가 갈라진 소리로 딱딱하게 대꾸했다. 반말은 물론이거니와 당신이라는 말도 거슬렸다. 이제껏 누구도 장이수를 그렇게 부른 적 없었다. 무엇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말이다. 이제껏 통화를 유지한 것은 기대하는 바가 있어서였지만 더는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이수는 화를 참고 다시 한번 부드럽게 누군지 질문을 던졌다. 상대를 설득하거나 회유하는 게 이득이었다. 술에 취한 처지에 그런 계산을 해낸 스스로가 대견하기까지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라는 상대에 대해 잠시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다 보면 아예 잠들지 못할 것이고 선잠에 빠지더라도 금세 깨어나 온 생을 뒤적이며 목소리의 주인에 대해 고민할 게 뻔했다.
   상대가 웃었다. 속셈을 빤히 안다는 듯한 웃음. 장이수는 자신을 보고 웃는 사람에게 곧잘 기가 죽었다. 비웃음당할 일들이 대번에 떠올랐다. 쉽게 떠오르는 일이 있었다. 변명의 여지 없이 장이수의 잘못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누구인지 모를 여자에게 저지른 잘못은 아니었다.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야 할 거야.”
   여자가 겁을 주듯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만약 여자가 조금만 기다려줬다면 장이수는 그러지 말고 제발 누군지 알려달라고 애걸했을 것이다. 장이수는 시커메진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짧은 통화를 나눈 것 외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둠이 쏟아져나오는 안방, 술이 스며들어 얼룩진 카펫, 카펫 위에 나뒹구는 빈 술잔, 거실에 맴도는 비릿한 냄새. 그런데도 기분이 완전히 달라졌고, 고작 몇 분 사이에 그렇게 되었다는 게 의아했다.
   장이수는 휘청거리며 일어나 싱크대 쪽으로 갔다. 술을 조금 더 마시면 괜찮아질 것 같았다. 언제나 그렇듯 별일 아님을 깨달을 것이다. 그간 장이수는 술에 대해서만큼은 엄격한 규칙을 적용해 왔다.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술꾼으로서 명분이 없어졌다. 명분을 잃으면 술꾼에게는 술밖에 남지 않았다. 술만 남는다는 얘기가 아니라, 술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다른 술꾼들처럼 술을 함부로 마시지 않는다는 게 장이수의 자부였다. 병째 마신다거나 정해둔 양을 넘기려고 안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무엇보다 명분이 있었다. 몇 잔 더 마시면 몸이 따뜻해지고 마음이 풀릴 것이다. 마음이 풀려야 잠을 자고 날이 밝으면 승객을 실어나를 수 있었다.
   배관선 뒤쪽까지 뒤져보아도 술은 없었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제 더 마셨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제 그랬을 수도 있고. 장이수는 이만 참아보려고 그저 잘못 걸린 전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려 했다.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 허튼짓을 벌이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실제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지니까. 그러고 보면 ‘당신’이라고 했지 장이수의 이름을 적시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내려면 그간 잘못한 것을 돌아봐야 했는데, 그러기 싫었다. 떠오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장이수는 더는 생각하지 않으려고 기어이 비틀거리며 편의점에 다녀왔다.
   다시 술을 마시면서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님을 상기했다. 한번은 채팅으로만 이야기를 나눠온 여자를 만나려고 약속 장소에 갔다. 여자는 없고 장이수를 보며 싱글거리는 남자가 있었다. 뼈대가 굵고 매끈하게 생긴 어려 보이는 남자였다. 취했군, 취했어. 실실대는 남자를 보면서 장이수는 아내를 흉내내 중얼거렸다. 아내가 왜 같은 말을 두 번씩 반복하는지 알게 됐다. 반복하다보니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록 여자가 나타나지 않아 장이수는 시계와 핸드폰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냥 알아차렸다. 곧 남자가 장이수 맞은편으로 옮겨와 앉았다. 남자에 비하면 장이수는 어리숙했다. 이태리 브랜드의 양복을 입고 있다는 게 유일하게 나아 보였다. 남자를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양복을 더는 입지 못하게 되면서, 장이수는 남자에 비해 나은 점이 하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남자는 바로 용건을 꺼냈다. 자신만만한 말투였다. 어려 보이는 인상과 달리 인생을 깔보는 사람이었다. 마음먹은 대로 안 된 일이 없다는 태도였다. 카페에 있는 다른 사람을 신경쓰지 않고 웃옷을 걷어 칼에 찔린 흉터를 보여준 걸 보면 그랬다. 그렇게까지 하는데 얘기가 안 통할 리 없었다. 게다가 남자는 장이수를 알고 있었다. 특히 그가 여자와 채팅하면서 건네준 사진에 대해 잘 알았다. 남자는 웃으며 그의 체격이 좋다고 추어줬다.
   장이수가 흉터를 보고 얼굴을 찡그리자 남자가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더 무서운 건 흉터도 남지 않는다며, 무엇을 고르겠느냐는 듯 장이수를 빤히 봤다. 장이수는 더 무서운 쪽을 선택했다. 흉터가 남지 않는 대신 돈이 들었는데, 그럴 만한 목돈이 없어서 고객 돈을 건드렸다. 십육 년간 은행에 다니면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일단 시도하자 생각보다 너무 간단했다. 바로 들통났다면 거기서 멈췄을 텐데, 발각되기까지 시간이 걸렸고 그러느라 액수가 커졌다.
   그 일은 장이수가 결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떠오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어떤 일은 덮어둔 채 살아갈 수 없는데, 그 일이 그랬다. 뭔가 망친 기분이 들 때면 어김없이 흉터가 떠올랐다. 남자가 숨을 쉬면 갈라진 배를 형편없이 봉합한 자국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꿈틀댔다. 지점장에게 불려갔을 때도, 결국 아내가 떠났을 때도, 처음 마을버스를 몰던 때도, 정류장을 지나쳤다며 승객에게 욕을 먹은 날도 흉터가 아른거렸다.

   다음 날 잠에서 깼을 때 전화 생각부터 났다. 장이수는 얇은 이불 아래 숨은 채 손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찾았다. 더는 전화가 걸려오지 않았는데도 두려움이 느껴졌다. 술이 깬 탓이었다. 그래도 더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건 원칙에 어긋났다. 장이수는 밤에만 마셨다. 아침에도 마시면 아무것도 아닌 인간, 술만 마시는 인간이 됐다. 장이수는 그런 인간을 잘 알았다. 과거의 자신이 그랬다. 지나간 일이었다. 지금은 나아졌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장이수는 숨어 있던 이불을 걷어차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차고지인 찜질방에 도착하니 사장이 눈을 부라리며 장이수를 노려보았다. 장이수는 부스스한 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리며 걸음을 서둘렀다. 사장은 삼십 년 전 가판 장사로 시작해 몇 년 후 목욕탕을 인수하고 다시 몇 년 만에 그 자리에 건물을 올렸다. 주말이면 입욕객에게 주는 요구르트 삼백 개가 모두 동이 날 정도였다. 젖은 머리로 목욕 바구니를 들고 시내버스를 타는 게 불편하다는 사람들의 불평을 허투루 듣지 않고 셔틀버스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백화점에서나 셔틀버스를 운행하던 시절이었다. 25인승 버스였는데, 매번 사람이 꽉 찼다. 이듬해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에 따라 셔틀버스가 금지되어 잠시 입욕객이 줄었다. 사장은 위축될수록 일을 크게 벌이는 타입이었다. 내친김에 운수업에 등록해 버스 대수를 늘리고 셔틀버스 코스를 노선 삼아 마을버스를 운행했다. 네 대로 시작했는데, 금세 열두 대가 됐다. 번호도 하나 더 등록하고 노선도 확장했다.
   “요샌 잘 자나 봐?”
   사장이 겨우 출근 시간에 맞춘 장이수에게 빈정대며 매표소로 들어갔다. 간밤에 전화를 건 사람이 사장이 아닐까. 쉬고 갈라진 게 딱 사장의 목소리였다. 집에 돌아가면 밤마다 뭘 하는지 안다는 듯 사장은 장이수를 훑어보곤 했다. 그렇게 살다가는 곧 죽을 거라고 웃지 않고 말한 적도 있었다. 사장이 보는 앞에서 술을 마신 적도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사장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밤늦게 전화를 걸어 수상쩍은 퀴즈를 낼 사람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당장 쏟아붓지, 참지 않는다는 뜻이다.
   장이수는 사장을 따라 매표소로 들어갔다. 겨울철이면 기사들은 교대 시간 동안 간이 사무실로 쓰는 매표소에 머물렀는데, 장이수는 가급적 매표소에 들르지 않았다. 자신에게 술 냄새가 난다는 걸 알아서였다. 보통은 밖에서 교대할 버스가 들어오기를 기다렸지만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술이 덜 깼는지 추위가 유난했고, 사장의 잔소리를 듣는 것보다 몸을 떠는 게 더 싫어서였다.
   사장이 슬쩍 쳐다보기만 할 뿐 자리를 내주지 않아 장이수는 뻘쭘하게 쳐다보고 서 있었다. 사장이 마지못해 몸을 비켜 앉을 자리를 내줬다. 매표소는 난방 중이라 딱히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는데, 오래 있으면 그렇지도 않은지 사장은 전기방석을 깔고 앉아 있었다.
   “요새도 못 자요.”
   장이수가 변명하듯 말했다. 사장이 대꾸하고 싶지 않다는 듯 앞만 쳐다봤다.
   “내가 그렇게 나쁜 놈이에요?”
   “아침 댓바람부터 뭔소리야.”
   “나쁜 놈이냐고요.”
   “몰라서 물어?”
   사장이 냉담하게 말했다. 장난은 아닌 것 같았다. 장이수가 빤히 쳐다보자 사장이 물었다.
   “자네 벌점이 몇 점이야?”
   기사 면접을 볼 때 사장은 장이수에게 예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만 물었다. 장이수는 장사를 했다고 대답했다. 사장이 거짓말을 감별할 줄 안다는 듯 양복 차림의 장이수를 훑어보았다. 무슨 장사를 얼마나 했는지에 대한 답도 준비해 두었으나 사장은 더 질문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장사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장이수가 마음에 안 들 때마다 사장은 그저 벌점을 상기시켰다. 하긴 무슨 얘기를 하겠는가. 벌점이 일정 점수 이상이면 계약 만료 후에도 시내버스로의 이직은 불가능했다. 자잘한 문제가 계속 쌓여 어쩔 수 없이 마을버스에 남는 기사들이 많았다. 장이수 역시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간신히 첫번째 운행을 마친 장이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구토를 했다. 빈속이어서인지 침만 질질 흘렀다. 승객이 교통카드를 찾느라 시간을 끌기만 해도 긴장해서 몸이 굳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도 자신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었지만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승객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사이 자신에게 ‘당신’이라고 부르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느라 두 번이나 아찔한 순간을 지났는데 다행히 승객들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장이 구토하는 장이수를 지켜보고 있다가 혀를 차고는 매표소로 들어갔다.
   다음 주행에서는 차선을 바꾸다가 충돌할 뻔하면서 급정거를 했다. 승객 한 명이 똑바로 운전하라고 소리쳤다. 장이수는 별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런 얘기를 자주 들었다. 자신에게 의지해서 이동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종 부리듯 하며 제대로 하라고 소리질렀다. 특히 비가 오거나 눈이 와서 실내가 미끄러울 때면 더욱 그랬다. 매번 안전 고지를 제대로 하긴 힘들었다. 그런 건 솔직히 알아서 했으면 싶었다. 장이수가 아무리 말해도 승객들은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심지어 정류장 안내 방송을 놓치고 왜 방송을 틀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손잡이를 잡으라거나 위험하니까 주행 중 이동하지 말라는 말은 귀담아듣지 않으면서 막상 위험이 닥치면 전부 장이수 탓을 했다. 모르는 사람들을 그저 정해진 곳으로 태워다 줬을 뿐인데, 누군가에게 욕을 먹고 위협하는 말을 듣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날 내내 장이수는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을 만한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얼마 전 기사들과 회식으로 간 노래방에서 도우미에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떼를 썼다가 욕을 먹은 적 있었다. 도우미가 불쾌해하며 손을 뿌리쳤는데 그 사람인지도 몰랐다. 술에 취해 빌라 화단에 오줌을 누다가 이웃에게 걸려 개만도 못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에 발끈해서 대거리를 했다가 경찰이 출동한 적도 있었다. 배차 간격이 길다고 투덜거리며 버스에 올라탄 남자를 놀라게 하려고 급정거를 했고, 사무실까지 찾아와 항의하는 남자의 멱살을 잡기도 했다.
   오래전의 일도 당연히 떠올랐다. 은행에 근무하던 시절, 대출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끝도 없이 서류를 제출하게 만든 일 말이다. 재량으로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순전히 대출을 거절해 굴욕감을 주고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고 싶어서였다. 그때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보고 장이수의 이름을 잊지 않겠다는 듯 여러 번 읊조리고 간 사람도 있었다. 원금 손실 가능성을 고지하지 않고 펀드 가입을 유도한 일도 비일비재했다. 만기일이 되어 황망한 표정을 짓는 노령의 고객들에게 장이수는 그들이 직접 서명한 종이를 보여줬다. 당연히 그들은 약정서를 읽지 않고 장이수가 시키는 대로, 관례라는 말에 따라 서명했을 뿐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삶을 되짚어야 할까. 하루치 운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장이수는 휴대전화의 검은 화면을 노려보았다. 집에서도 술 한 방울 마시지 않고 버텼지만 자정이 가까워지도록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장이수는 참다못해 연락처 목록을 살폈다. 줄지어 있는 이름들을 보면 뭔가 떠오를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그들에게 들은 말도 생각나고 자신이 퍼부은 말도 생각났다. 하지만 모두 오래전 일이었다. 목록에 있는 사람 중 요사이 연락을 나눈 사람이라고는 사장뿐이었다. 장이수가 지각을 한 날이면 사장은 어김없이 벌점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자정이 넘도록 여자에게 전화가 걸려오지 않자 조금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지나간 나날이 완전히 묻힌 듯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장이수는 자신이 무척 허탈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젯밤만 해도 그에게는 화를 내거나 분노를 퍼부을 사람이 있었다. 여자는 왜 다시 전화하지 않을까. 어째서 분노를 이어가지 않을까. 장이수는 다시 전화번호 목록을 열었고, 그중 조금이라도 의심쩍다 여겨지는 사람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검색해 보니 발신자를 숨기고 전화를 거는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전화를 받는 상대에게서 나는 쇳소리를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어렵다면 목소리를 낮춰 자신이 누군지 아느냐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번에 장이수는 발신자를 감추지 않고 전화를 걸어보았다. 역시 전화를 받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두 통의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나는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으름장이 섞인 문자였고 다른 하나는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자동 안내 문자였다.
   장이수는 그 문자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한때 많은 사람에게 사정을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도움을 받기도 했다. 도와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참지 않고 퍼부어댔다. 그들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수치심 때문이었다. 수치심은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술이 있었다. 술은 그 모두를 잊게 해주었다. 그건 오늘처럼 한 방울도 마시지 않은 날이면 고스란히 곁에 머문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없었다. 여자에게 전화가 걸려와야 그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자 역시 수치를 느낀 적 있을 테니까. 혹은 이 일로 수치를 느끼게 될 테니까. 그는 자신만이 여자를 이해한다고 생각한 나머지 여자의 전화가 계속되기를 바랐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이라도. 어떤 인생은 미움과 원망 같은 것으로 근근히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편혜영

가망없다 여겨지는 나날 중에도 인생을 이어가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2022/12/27
6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