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향수1)



   완강한 곳에 가보았다

   보고 싶었던 장소들이 옹기종기 편집되어 있었다

   혜원이가 관리하는 밭으로 재하가 깊숙이 걸어들어간 미성리는 얇은 강줄기가 관통하고 있다 은숙이와 내가 걷는 길을 따라 미나리가 자라났다 이 마루에는 진짜 오랜만에 앉아봐 평상에 모여 앉은 연희와 혜원이가 키운 웃음은 서로 비슷했다 솥에서 익어가는 고구마를 기다리는 동안 마당에는 연기와 어둠이 자욱해진다
   연희는 미성리로 여행이나 워킹 홀리데이를 하러 찾아온 조엘, 이치코, 페이와 친해지면서 새로운 활력을 찾은 일을 얘기해주었다 이치코가 사는 곳에 덮인 눈을 보게 되면 가와바타가 왜 그런 이야기를 써냈는지 알게 될 거라며 기대를 가득 키워놓고 갔다고 한다 조엘은 작년에도 봤으면서 해마다 처음 온 듯이 구는 게 좀 이상하긴 했는데 무탈하게 지냈다고 한다 서울에 가면 한동안 버티다 몬토크, 코모리, 충킹에 가게 될 거야 혜원이가 계획을 말하는 방식이 꼭 한컴 타자 연습에서 타이핑하던 패, 경, 옥과 비슷하단 생각이 드는 곁귀로

   그곳을 잊고 있었단 사실이 들려와 그곳에 가야 했다

   미성리와 그곳 사이 거리와 거리감이 모두 편집된 건 생각할수록 마음에 든다

   그곳에 발을 들이면 잔디가 즐비하다 퍼질러 누워 있는 동안 그곳은 이곳이라는 말로 얼굴에 가깝게 닿는 잔디가 된다 이곳에 퍼지는 태양은 고온 저습한 여름을 창출해낼 줄 안다 거리에서부터 감도는 노래들이 하나씩 잔디 사이로 인용된다 둘리의 목소리, 네덜란드산 초록 맥주병2), 99년 여름 매미, 내가 읽다 적당히 접어뒀었던 소설책3)…… 나는 페이가 연희에게 알려줬다던 노래도 따라 불러보았다
   잔디는 얼기설기 여러 손을 뻗었다 거리에선 사람들이 그랬다 들어간 가게에서 주문한 브런치에는 두부조림과 마늘종 볶음이 나왔는데 접시를 놓고 닦는 손짓을 보니 가족들은 아니었다 잔멸치를 곱씹으면서도 뭔가 할 말이 입속에서 삽시간에 풍부해졌는데 대신 말을 걸어주는 키오스크에게 별다른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곱씹다 편집된 말들을 비집고
   미나리는 쑥쑥 자라났다

   얼었던 강 밑으로는
   다른 물빛이 흘러들어온다

   감탄을 다물기 어려웠다

   그런 자연과 여기 생활은
   여러 사람과 여러 노래와 함께
   대사와 행동을 먼저 맞춰보고
   최선으로 구체적인 표정을 고민해본 고충을 전해주었다

   그 덕에
   한동안 살아볼 마음이 났다

   나보다도 먼저 독립한 집이
   이곳에 정착해 있었단 사실이

   반갑고
   살가워

   여러 계절을 비벼내가며 살았다

   꿋꿋이

   미처 편집하지 못한 장면들은
   종종 아는 사람처럼 선연하게 서 있었고

   더이상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절체절명은
   떠나온 곳을 향해 떠나가야 한다고
   독립한 집과 나를 데리러 왔다

   미성리보다 한참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일상을 다물기 어려웠다

   너무나 아는 기분을
   애써 잘게 갈아내려 하자
   이 잔향은 깊어진다

   켜켜한 느낌과
   이 장소들을 조성하려 했던 이 세계는
   손을 서로 잡고 완강해진다

   감쪽같이 자연스러워지려 한다

   가상하다





   소백산 자락에서 온 저 나무4)5)



   산림 관찰 전용 드론은 소백산 상공을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초음파 검사를 하듯이. 스캐너 내부에서 바삐 오가듯이. 드론은 소백산 구조를 자신의 시야에다 담아냈습니다. 이동 방식은 고고했는데요. AI는 오차 범위를 줄여가며 드론이 쳐다본 소백산의 계절을 죄다 분석해내고 말았습니다. 축적된 데이터는 노련해졌습니다. 이제 분석실에서는 그들 중 고사목(枯死木)과 죽음을 겨우 고사한 고목을 구분해내고 말겠지요?

   분석실에서는 주목(朱木) 군락 일대를 주목했습니다. 하필 드론은 청초한 유월에 띄워졌습니다. 바람의 몸짓을 잘 반영하는 초록들. 줄기로도 모자라 주황빛이 온몸에 퍼진 주목들을 가을까지 지켜볼 여유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고사목으로 분류될 열세 그루 주목들이 모여 있는 모습은 일종의 항의를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주목들을 유지 또는 제거 판단으로 변환해내는 AI에게 주목들의 주황을 주입한 뒤에 사람의 목소리를 확장자로 설정해볼까요.

   목소리가 교차적으로 출력됩니다.

소백산 자락에서 온 저 나무 시의 일부

   출력을 시도한 제 혀에서도 목 너머로도 구내염이 심해져 따가웠습니다. 이제 막 인화된 상공 사진 속에서 천 년이 팽창하고 있습니다. 이 일화들이 제 삶이 아님을 자각하고 나서야 후유증은 차츰 사라져갈 뿐이었습니다. 주목들은 새로운 거처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고사목의 목소리를 출력할 리 없는 분석실의 AI와 스캐너는 주목이 있어도 괜찮겠다 싶은 지점을 위성 사진으로 출력하여 관계자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주목들이 옮겨진 곳에는 백로들이 서식하고 있었습니다. 공사가 다 끝나자마자 가지마다 백로들이 풍성해졌습니다. 주목은 겨울 산을 겨우 기억하여 백로들의 도움을 받아 소소하게 하얘졌습니다. 뼈만 남은 것처럼 말입니다. 국도를 타고 지나가던 차 안 사람들은 국도 옆에서 하얀 띠처럼 늘어진 백로들을 보면서 신기해하거나 소름이 끼친다 합니다. 국도 위에서는, 근래 주목 기둥 곁에서 죽어나가는 백로들을 발견할 수 없는데 말입니다.


차현준

♬ 혁오의 「Graduation」 ♬ 모임 별의 「진정한 후렌치후라이의 시대는 갔는가?」 ♬ 검정치마의 「Flying Bobs」 ♬ f(x)의 「When I’m Alone」 ♬ Faye Wong의 「夢中人」 ♬ 조영욱, The Soundtrackings의 「후지산 아래서 온 저 나무」

2023/01/31
62호

1
“즉, 가상의 향수(pseudo-nostalgia)이다.”, 비눈물, ‘About 뉴진스 : ②뉴진스의 꿈과 환상의 세계’, 《아이돌로지》, 2022년 9월 23일. (링크)
2
모임 별, 〈진정한 후렌치후라이의 시대는 갔는가?〉.
3
f(x), 〈When I’m alone〉.
4
영화 〈아가씨〉의 OST 〈후지산 아래서 온 저 나무〉 변용.
5
‘소백산 주목군락에 드론 띄워보니… 생목ㆍ고사목 구별 손바닥 보듯’, 고은경, 《한국일보》, 2018년 8월 31일.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