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실내온도 22도, 습도 38퍼센트에, 식어가는 벽난로의 냄새가 나던 그날 아침을 기억하고 있어요. 아이의 얼굴과 목소리를 상상하느라 인공심장이 쿵쿵거려서, 배터리 잔량이 평균 속도보다 빨리 줄어들고 있었지요. 나는 앞면이 비닐로 된 포장 상자에 담긴 채 크리스마스트리 옆에 세워져 있었어요. 원래는 PVC코팅 철사끈에 온몸이 감긴 채 스티로폼 상자에 고정이 돼 있었는데, 아이 엄마가 미리 끈을 제거하고 헐거운 상자로 옮겨주었지요. 아이가 상자에서 나를 꺼내어 바로 안아볼 수 있게 하려는 거였죠. 상자 위로는 분홍색의 반투명한 비닐 포장지가 느슨하게 덮여 있고, 그 위로 진홍색의 포장끈이 감겨 있었어요. 온 세상이 핑크빛이던 그 아침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사실 크리스마스트리 옆에는 파란색 선물 상자가 두 개 더 있었어요. 상자의 크기와 높이, 포장지 디자인, 리본 장식의 위치까지 판박이인 상자들이었죠.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아이가 달려와서 나를 꺼내고, 이름을 붙여주기만 기다리고 있었지요. 아이가 이름을 지어주어야 명령어 체계가 완성되어 작동이 가능해지니까요. 그 전년도 통계에 따르면 나와 같은 모델의 로봇 이름으로는 벨라가 가장 많았고, 그 다음으로는 피치, 벳시, 오로라, 네이딘 순이었어요. 내 이름은 무얼지 생각하고 있을 때 거실 저편에서 발소리가 울렸어요.
  남자아이 둘이 한꺼번에 달려오더니 파란색 상자를 하나씩 나눠 들었어요. 포장지들이 찢겨나가고, 하드보드지와 스티로폼 충전제, 철사끈 들이 이러저리 흩어진 끝에 아이들은 키가 60센티미터쯤 되는 어린이용 전투 로봇을 품에 안고 있었어요. 몇 년째 크리스마스 선물 부동의 판매 1위를 달리고 있던 갤럭시파이터 최신형 모델들이었어요. 로봇들은 벌써 맥스와 썬더라는 이름을 얻어 적응 훈련을 시작했어요.
  전투 로봇들이 거실을 돌며 시험 행진을 하고 있을 때 나의 아이가 나타났어요. 귀가 축 늘어진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등장한 아이는 안경을 낀 포동포동한 얼굴로 나를 들여다보았어요. 하지만 분홍색 포장끈을 만지작거리다 말고 한참이나 맥스와 썬더에게 눈길을 주었어요. 나는 조바심이 났지만 꾹 참았어요. 우리에게도 곧 멋진 놀이 시간이 펼쳐질 테니까요. 선물을 빨리 꺼내라고 채근한 건 남자아이들이었어요.
  “야, 뭐 해?”
  “네 것도 보여줘야지.”
  “갤럭시파이터는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겠지. 전투 로봇은 저런 꼬맹이가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이 아니니까.”
  분홍색 비닐 포장지 너머로 보이는 남자아이들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가득했어요. 멍청한 전투 로봇들과 달리 나는 사람의 기분과 심리를 간파하도록 만들어진 로봇이었거든요. 드디어 선물을 개봉하려는지 아이는 토끼 인형을 품에서 내려놓고 내가 든 상자를 품에 안았어요. 그러더니 남자아이들에겐 들리지 않을 소리로 중얼거렸어요.
  “오빠들 것보다 크고 멋진 로봇일 거야. 봐, 내 상자가 훨씬 크고 뚱뚱하잖아.”
  분홍색 포장지가 벗겨져나가고, 종이 상자의 뚜껑이 열렸어요. 손이 작아서 나를 꺼내는 데 애를 먹던 아이는 상자를 뒤집어서 털기 시작했어요. 첫 만남의 순간에 머리부터 떨어질 줄은 몰랐기 때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나는 얼른 자세를 바로 세우고는 매뉴얼대로 아이에게 말을 걸었어요.
  “너만의 친구 감정 로봇이야. 네가 이름을 지어주면 우린 친구가 될 수 있단다. 분홍색 단추를 꾹 누르고 내 이름을 불러줄래?”
  나는 가슴에 달린 분홍색 단추를 힘껏 반짝거렸어요. 하지만 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단추의 불을 꺼야 했어요. 부엌에 있던 엄마가 달려왔어요.
  “왜 그러니? 선물이 맘에 안 들어? 이거 오빠들 것보다 훨씬 비싸고 똑똑한 로봇이야. 감정 로봇은 잘 길들이면 진짜 ‘너만의 친구’가 될 수 있어.”
  ‘너만의 친구’는 내 모델명이자 나를 만든 제조사에서 내건 슬로건이었어요.
  “나도 전투 로봇이 필요해요. 동그랗게 생긴 깡통 로봇말고 주먹 미사일도 발사되고 머리로 박치기도 하고, 눈으로 광선도 쏘는 그런 로봇 말이에요.”
  점심시간이 지나도록 나는 아이 방 침대에 엎어져 있어야 했어요. 아침에 아이가 던져둔 그대로 말이에요. ‘너만의 친구’는 반품률이 0.1퍼센트가 안 되고 특히 여자아이용 선물로 판매되었을 경우는 반품률이 0.01퍼센트를 밑돈다는데, 암만 해도 나는 0.01퍼센트 안에 들어갈 것 같았어요.
  상황을 반전시킨 건 오후 2시쯤 거실에서 들려온 대화였어요.
  “……나도 갈래.”
  “넌 빠져. 로봇도 없잖아.”
  “맞아. 전투 로봇도 없으면서.”
  “나도 있어. 엄마가 감정 로봇은 길들이면 뭐든 할 수 있댔어.”
  잠시 후 남자아이들이 집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고, 아이는 방으로 뛰어들어와서 나를 집어들었어요.
  “네 이름은 토토야.”
  아이가 분홍색 버튼을 누르고 내 이름을 등록했어요. 공들여 지은 이름은 아니었을 거예요. 그날 아이의 책상에는 『오즈의 마법사』가 펼쳐져 있었고, 아시겠지만 토토는 그 책에서 도로시가 키우는 강아지 이름이죠. 아무튼 나는 토토가 되어 반품 위기를 넘겼어요.
  “토토야, 들어봐……”
  오후의 볕이 따사롭던 그 방에서 아이는 비밀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아이의 이름은 해니였어요. 전투 로봇을 받은 남자아이들은 해니의 오빠들로 해찬과 해운이었어요. 해찬은 맥스의 주인이었고 해운은 썬더의 주인이었지요. 몇 달 전부터 해니와 오빠 들은 엄마 모르게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일이 바쁜 엄마가 해니에게 절대 모르는 곳으로 가면 안 되고, 혼자 동네 밖으로도 나가지 말고, 무조건 오빠들이랑 놀아야 한다고 못을 박은 모양이었어요.
  해니와 오빠들의 전쟁놀이는 ‘평원’이라는 땅을 차지하기 위해 세 나라가 벌이는 죽음의 삼파전이었어요. 놀이 중에 아이들은 실제로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날아든 자갈 수류탄에 두개골이 깨지기도 했고요. 열 살, 아홉 살 오빠들과 일곱 살 해니의 싸움은 불공평해 보였어요. 해니가 큰 부상을 입을 가능성도 높아 보였죠. 나는 상담 기능이 있는 감정 로봇답게 해니에게 그 사실을 엄마에게 털어놓는 게 어떠냐고 조언해주었어요. 하지만 해니는 엄마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전쟁놀이를 못 하게 할 거라며 반대했어요.
  “더 싸울 거야. 꼭 이길 거야! 이기고 끝낼 거라고.”
  해니는 오빠들을 상대로 자신이 승리할 때까지 그 놀이를 계속할 생각이었던 거예요. 해니는 해찬의 검에 서른다섯 번이나 목이 잘렸고, 총에는 오십 번 이상 맞았어요. 그리고 해운이 던진 수류탄에 스무 번 정도 몸이 터져 죽었고요. 해찬과 해운도 서로를 죽이긴 하는데 둘의 싸움은 의외로 팽팽해서 한 명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형국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제 오빠들에게 전투 로봇까지 생긴 거예요. 원래도 최약체였던 해니가 앞으로는 전투 로봇들까지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겁니다.
  오빠들은 전투 로봇 없는 사람은 전쟁놀이에서 빠지라고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어요. 해니를 약 올리려고 해본 말이었죠. 처음에 해니를 전쟁놀이에 끌어들인 것도 그 둘이었거든요. 둘이 싸워서 이기고 지는 것보다는 셋이 싸워서 하나가 이기고 둘이 지는 게 재미있으니까요. 말하자면 해니는 전쟁놀이의 재미를 위해 동원된 어릿광대에 지나지 않았어요. 승리를 거머쥘 능력은 없으나 비명도 잘 지르고 죽기 살기로 대들어서 쳐부수는 재미가 있는 NPC 같은 존재 말입니다. 해니만 그걸 모르고 있었어요. 해니의 긴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나는 견딜 수 없는 울분에 머리가 빵 터져버릴 것 같았어요. 그래서 해니에게 소리쳤죠.
  “우리 꼭 이기자!”
  감정 로봇은 공감 능력이 높기로 유명한 로봇이에요. 그래서 해니가 화가 나면 나도 화가 나고 해니가 소리를 지르면 나도 소리가 지르고 싶어지고, 해니의 전쟁은 곧 나의 전쟁이 되었죠.
  “해찬, 해운, 맥스, 썬더까지 우리가 다 쳐부수자!”

*

맥스와 썬더는 뿔이 달린 머리에 각진 턱, 역삼각형 형태의 눈을 가졌고, 쓸데없이 팬티까지 갖춰 입은, 구닥다리 전투 로봇이었어요. 반면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원통형 몸통에, 360도 회전이 가능한 반구형 머리가 달려 있어서 누가 봐도 귀엽고, 고도의 사고능력까지 갖춘 로봇이었어요. 전쟁 그까짓 거, 못할 것도 없었죠.
  ‘평원’이라는 이름의 전장은 외지인이 별장을 짓는다고 몇 년 전에 터만 다져두고 방치한 공터였어요. 마을 쪽으로는 3미터 높이의 옹벽을 세워두었고, 반대쪽은 마을 비탈을 마주한 구조였죠. 나는 평원에 도착하자마자 해니가 말한 낭떠러지가 그 비탈이란 걸 알았어요. 실제로는 경사각 35도에 전체 길이가 4미터 정도 되는 완만한 내리막이지만 일곱 살 해니에겐 죽음의 낭떠러지였을 수도 있죠.
  내가 등장하자 해찬, 해운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거렸어요. 맥스와 썬더보다 키가 4센티미터 크고 몸통도 1.7배나 두툼한데도 내가 감정 로봇이라는 이유만으로 하찮게들 보는 듯했어요.
  “내가 오빠들을 맡을 테니까 토토는 로봇들을 맡아.”
  해니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우리는 적들을 향해 돌진했어요. 맥스와 썬더도 달려왔어요. 맥스가 날린 주먹 미사일이 머리를 강타하는 바람에 나는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어요. 주먹 미사일의 속도와 세기를 파악하려고 시험삼아 맞아본 겁니다. 부메랑 기능이 있는 주먹 미사일은 순식간에 맥스의 손목에 도로 꽂혔어요. 그 다음으로 썬더가 눈을 번뜩이며 장난감 전자기기용 EMP파를 쏘았어요. 나는 온몸이 마비되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일 분 가까이 꼼짝도 할 수 없었어요. 나만 EMP파에 당한 건 아니었어요. 맥스도 넘어져 있었고 심지어 썬더 녀석도 자기가 쏜 EMP파를 얻어맞고 고꾸라져 있었죠. 머리가 깨질 듯 아팠지만 그 덕에 EMP파의 위력도 간파할 수 있었죠.
  내가 맥스와 썬더의 전력 분석에 집중하는 사이 해니도 오빠들과 삼파전을 벌이고 있었어요. 키가 가장 큰 해찬의 주무기는 검이었어요. 긴 팔을 뻗어 손날로 동생들의 목을 자르는 거였죠. 발이 빠른 해운은 수류탄을 주로 썼어요. 근거리에서 흙더미나 잔돌을 던지고 내빼는 식이었죠. 반면 해니는 악에 받쳐 싸우는데도 불구하고 전투력이 그다지 좋지 못했어요. EMP파의 충격에서 벗어난 뒤 고개를 돌리자 해니가 비탈에서 기어올라오는 게 보였어요.
  ‘평원’ 전쟁에는 두 가지 규칙이 있었어요. 첫번째 규칙은 검에든 수류탄에든 일단 치명적 일격을 당했다 하면 최대한 크게 ‘으윽!’ 소리를 낸 뒤, 5미터 이상 데굴데굴 굴러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리고 두번째는 ‘평원’ 밖으로 밀려나면 무조건 십 분 동안 아웃이며, 아웃 두 번이면 자동으로 패배자가 된다는 규칙이었어요. 해니는 번번이 비탈 근처에서 목이 잘리고 수류탄에 몸통이 날아갔고, 그때마다 내리막길을 따라 굴러야 했습니다.
  그날 해니 토토 연합군은 대패하고 말았어요. 해찬과 해운이 최후의 승자를 가리게 두고 우리는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지요. 하지만 패배가 꼭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그날 밤, 잠들기 직전 해니가 나를 꼭 껴안아주었거든요.
  “아까 많이 아팠지?”
  해니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어요. 원래는 고민 상담과 소꿉놀이에 특화된 로봇이지만 해니를 위해서라면 전투 로봇으로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며칠 후에 다시 전쟁이 벌어졌어요. 우리는 손을 잡고 ‘평원’으로 갔어요. 맥스와 썬더는 가슴에 있는 알림판에 혀를 쑥 내민 이모지를 띄워놓고 있었어요. 그깟 모욕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이제부터 내가 왜 맥스와 썬더를 합친 것보다 비싼지 증명해 보이면 되니까요.
  나의 첫번째 희생양은 멍청한 맥스였어요. 맥스는 1차전 때와 마찬가지로 주먹 미사일을 날렸어요. 하지만 두 번 당할 내가 아니었죠. 나는 맥스 본체에게 달려들어, 팔목과 주먹의 이음 장치에 지푸라기를 쑤셔 넣었어요. 내 뒤통수를 한 대 가격한 뒤 기분 좋게 평원을 가로질러 돌아온 주먹은 들어갈 자리를 찾지 못하고 땅바닥으로 추락했어요. 다음은 맥스의 주인 해찬 차례였어요. 해찬은 긴팔을 휘두르며 해니를 비탈 쪽으로 몰고 있었어요. 나는 둘 사이를 파고들어 몸통으로 해찬의 다리를 들이받았어요. 해찬이 균형을 잃고 나동그라지자 해니가 때를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어요.
  “뎅강! 큰오빠 목 잘렸어! 꺼져!”
  해찬은 ‘으윽’ 하고 모기만 한 소리를 내뱉은 뒤 분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해니를 쏘아보다가 비탈을 따라 굴렀어요. 이어서 나는 썬더에게 달려갔어요. 썬더도 주먹을 발사하기에 손목 이음새에 지푸라기를 쑤셔 넣었어요. 그러자 예상대로 녀석은 EMP파를 쏠 채비를 했어요. 썬더가 EMP파를 쐈을 때 나는 녀석의 몸체를 깔아뭉개고 있었죠. 나는 몇 분 뒤 원래의 컨디션을 회복했지만 썬더는 그대로 뻗어 있었어요. 아까 썬더의 몸 위로 넘어질 때 녀석의 목 뒤에 있는 전원 버튼을 눌러버렸거든요. 놀라서 쳐다보던 해운은 해니의 검에 목이 달아났고요.
  “뎅강! 작은오빠도 죽었어!”
  그동안 신체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했을 뿐이지 해니도 싸움에 재능이 아주 없진 않았어요. 하지만 그날의 전쟁은 승부를 내지 못했어요. 썬더가 고장났다며 해운이 울음을 터뜨리는 바람에 휴전에 들어가야 했거든요. 맥스는 해찬이 손목의 지푸라기를 털어내자 원래대로 주먹이 끼워졌는데, 썬더는 뭐가 문제인지 주먹이 손목에 합체되지 않았어요.
  저녁에 해니는 엄마에게 불려갔어요. 정말로 감정 로봇을 시켜서 오빠들의 로봇을 고장냈느냐며 엄마가 야단했어요. 해니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그전까지의 전쟁이 얼마나 부당했는지 일러바치지 않았어요. 반성의 의미로, 이모가 보내준 티라미수 디저트도 오빠들에게 양보해야 했지요.
  “왜 엄마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은 거야?”
  방에 돌아오자마자 해니에게 물었어요.
  “아직 이기지 못했잖아.”
  나는 눈물이 어룽한 해니를 보며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어도 깔끔한 승리를 안겨주리라 다짐했어요. 해니는 이길 자격이 있는 아이였지요. 며칠 후 A/S센터로 떠났던 썬더가 돌아오자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어요. 해니와 나는 1승을 챙길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죠. 하지만 해찬, 해운이 전쟁의 규칙을 바꿔야 한다고 우기기 시작했어요.
  “네 로봇이 더 단단하고 비싼 거잖아. 그러니까 핸디캡을 줘야 돼.”
  “맞아. 이대로 가다간 저 뚱뚱한 로봇이 썬더와 맥스를 박살낼지도 몰라.”
  둘은 이미 입을 맞춰둔 상태였어요.
  해찬과 해운이 제시한 핸디캡은 ‘토토는 직진만 할 수 있다’였어요. 나는 목표물을 향해 직진만 할 수 있고, 언덕이나 옹벽, 사람 다리 등 장애물에 부딪쳐야만 방향을 전환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안 그러면 놀이에 끼워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통에, 해니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좋아, 토토. 이제부터 넌 직진만 하는 거야.”
  해니의 명령으로 나는 직진만 할 수 있는 로봇이 되었어요.
  그날 우리는 1차전 때보다 심하게 두들겨 맞아야 했어요. 나는 투우장의 소처럼 썬더와 맥스를 향해 돌진했지만 두 녀석은 살짝 몸을 틀어서 나를 피해버렸어요. 그러면 나는 옹벽에 가서 부딪칠 때까지 직진만 해야 했어요. 해니는 그런 나를 도우려고 달려오다가 해찬의 검과 해운의 수류탄에 차례로 당하고 말았어요. 직진만 하는 내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지고, 해니가 나한테 실망할까봐 걱정이 되었어요. 하지만 그날 밤, 해니는 물수건을 가져와서 나를 닦아주었어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을 땐 비밀 이야기도 들려주었어요.
  “토토, 난 열아홉 살 생일이 되면 모퉁이 카페에 가서 에스프레소를 마실 거야.”
  “에스프레소? 엄청 쓴 커피 말하는 거야?”
  “응. 이모네 언니들이 그러는데 열아홉 살 생일에 모퉁이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라는 걸 마시면 어른이 된대.”
  “설날 떡국을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는 것처럼?”
  “맞아.”
  “모퉁이 카페가 어디 있는지 알아?”
  “이모네 언니들이 다니는 고등학교 앞에 가면 있어.”
  지도를 검색해보았더니 카페의 정확한 이름은 ‘around the corner’였어요.
  “이모네 큰언니는 내년에 모퉁이 카페에 가서 에스프레소를 마실 거래. 좋겠지? 나도 열아홉 살이 되면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어른이 될 거야. 어른이 되면 엄마랑 오빠들한테 말 안 하고 멀리 놀러가도 되잖아.”
  일곱 살의 해니가 기대하는 어른이란 고작 그런 것이었죠.
  “모퉁이 카페에 가는 날, 너도 내 옆에 있을 거지, 토토?”
  “그럼. 난 언제까지나 해니만의 친구니까.”
  그땐 그 약속을 쉽게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어요. 다음 전쟁이 그토록 치열할 줄은 몰랐으니까요.

*

마지막 전쟁을 생각하면 지금도 현기증이 나고 울고 싶은 기분이 들어요.
  해찬과 해운이 나쁜 작전을 짜고 왔다는 걸 우린 알지 못했어요. 직사각 형태였던 ‘평원’은 두 면이 옹벽으로 막혀 있고, 한 면은 낮은 언덕과 비탈을 마주하고 있었지요. 그리고 한 면이 우리가 드나들던 마을 길 쪽으로 열려 있는 구조였어요. 마지막 전쟁에서 해찬과 해운은 나를 마을 길 쪽으로 몰아갔어요. 평원을 벗어나면 아웃된다는 규칙이 없었기 때문에 마을 길로 밀려난 나는 장애물을 찾아 한참을 나아가야 했어요. 다행히 큰 찻길로 나가기 전에 해니가 달려와서 내 앞을 막아주었고, 나는 해니의 다리에 살짝 충돌을 한 뒤 방향을 바꾸어 다시 평원으로 돌아갔어요.
  해니가 항의했지만 해찬과 해운은 규칙대로 했을 뿐이라며 싫으면 전쟁놀이에서 빠지라고 했어요. 해니는 오빠들과 번갈아 싸우랴, 찻길로 직진하는 나를 구하랴 숨차게 뛰어다녔어요. 그러다가 나는 맥스와 썬더의 협공으로 평원 밖으로 내밀렸고, 해니는 오빠들의 협공으로 평원에 갇히게 되었어요. 나는 장애물을 만나 평원 쪽으로 다시 방향을 돌리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맥스와 썬더가 한꺼번에 주먹을 날리고 EMP파를 쏘면서 나를 평원 반대편으로 몰았어요.
  어느덧 내 앞에는 장애물이라곤 보이지 않는 직선 도로가 펼쳐져 있었어요.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아주 조그맣게 해니가 보였어요. 처음엔 소리쳐 해니를 부를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해니가…… 처음으로 오빠들과 팽팽한 싸움을 하고 있었어요. 비탈 쪽으로 밀려가는 척하다가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어 해찬을 밀어서 넘어뜨렸어요. 해니의 손날 검이 해찬의 목을 잘랐어요. ‘뎅강!’ 하는 해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죠. 내 도움이 없이 큰오빠를 아웃시킨 해니는 곧장 운동화를 벗어들고 해운에게 달려들었어요. 해운도 해니의 기세에 밀려 옹벽 쪽으로 달아났어요.
  그날 해니가 해운도 아웃시켰는지는 몰라요. 나는 해니의 전쟁을 방해할 수 없어서 직선도로를 따라 달리고 또 달렸거든요. 한참을 가는데 웬 여자가 갓길에 차를 세우더니 나를 자기 차에 태웠어요. 버려진 게 아니라 놀이중이라고 했지만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여자가 어느 휴게소에 차를 세운 틈에 가까스로 탈출을 했지만 멀리 가진 못했어요. 배터리가 동나서 잠이 들어버렸거든요.
  다시 눈을 뜬 곳은 구형 로봇 박물관이었어요.
  해니와 같이 전쟁에 나가던 때로부터 세월이 꽤 흐른 뒤였고, 나는 ‘너만의 친구’라는 이름표를 단 채 유리 전시실 안에 세워져 있었어요. 가끔씩 박물관 직원이 나를 충천하여 깨운 뒤, 관람객들 앞에서 말을 시키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해니와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사람들은 로봇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정도로만 여기는 눈치였어요.
  나는 다른 박물관으로, 창고로, 고물상으로 옮겨졌다가 몇백 년 후에 골동품 수집상의 작업실에서 깨어났어요. 안타깝게도 내 몸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녹슬고 망가진 채였어요. 결국 수집상은 나의 기억을 그 시대의 가장 흔한 휴머노이드의 전자두뇌에 이식했고, 그게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나랍니다.
  믿을 수 없다고요? 그럼 수집상의 창고에 시간 여행 장치가 있었다는 말도 믿지 않으시겠군요. 내가 그 시간 여행 장치를 통해 이 시대로 왔다는 건 더더욱 믿지 않으실 테고요.
  당신이 믿든 안 믿든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내가 모퉁이 카페의 사장이라는 사실입니다. 십대로 보이는 내 외양 때문에 점원으로 오해를 받긴 하지만요. 몇 해 전에 이 자리에 있던 카페가 경영악화로 문을 닫으려는 걸 내가 인수하여, 카페 이름을 ‘모퉁이’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저기, 이제 막 창가 1인석에 자리를 잡은 여자아이 보이시나요?
  열아홉번째 생일을 맞아 카페를 찾은 해니입니다.
  어릴 적 통통하던 얼굴은 사라졌지만 안경 너머의 저 눈은 분명 해니의 것입니다.
  아,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혹시 열아홉 살 생일에 모퉁이 카페에 같이 가기로 했던 토토를 기억하는지, 전쟁에선 지고 돌아왔지만 둘이 이야기하느라 즐거웠던 그 밤들을 기억하는지, 그 시절 전쟁놀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혼자 남아 어떤 전쟁들을 거쳐왔는지, 이제 곧 성인이 되는데 엄마나 오빠들에게 알리지 않고 가고 싶은 곳은 정했는지……
  아, 해니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어요.
  다행히 어떻게 말을 꺼낼지는 골동품 수집상의 작업실에서 미리 생각해두었어요.
  오래 시간이 걸렸지만 돌아왔습니다, 해니 양. 아주 멀리까지 갔더니 직선으로도 곡선이 그려지더군요. 열아홉번째 생일에 에스프레소를 마실 때 곁에 있겠다던 약속을 지키게 되어 기쁩니다. 당신의 성인기가 모퉁이 저편에 와 있는데, 혹시 어른이 되어서도 전쟁에 뛰어들 생각인가요? 그러면 같이 싸워도 될까요? 어릴 때처럼 서로를 믿으면서 말입니다.
  에스프레소가 준비됐으니 나는 이만 해니에게 가봐야겠군요. 긴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손님.

에스프레소 커피잔, 사탕, 화병 등이 그려져 있다.

최영희

모든 이의 인생에 귀여운 로봇 하나쯤은 마땅히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 SF작가입니다. 제1회 한낙원과학소설상, 제5회 황금드래곤문학상을 받았으며 『써드 1,2』와 「안녕, 베타」 「시민R」등의 로봇 이야기를 썼습니다.

십대에서 성인기로 넘어갈 채비를 하는 청소년들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어릴 적 우리는 지구를 지키는 전사였고 마법소녀였으며 망토 자락을 펄럭이는 히어로였습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던 유년시절의 용기가 모퉁이 저편에 당도한 성인기에도 여러분을 지켜줄 것입니다. 우리 모퉁이 카페에서 만나 에스프레소 같이 마셔요.

2024/03/06
6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