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에만 사십 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에요. 수요일은 4교시 수업이라서 학원 가기 전까지 놀 수 있거든요.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예지 손을 꼭 잡았어요. 우리는 곧바로 운동장으로 나갔지요. 운동장을 가로질러 철봉 뒤쪽으로 달리다보면요. 감나무가 나와요. 그곳이 우리의 비밀 공간이에요.
  “우아, 예쁘다.”
  예지가 감나무를 올려다보며 소리쳤어요.
  어느새 감나무에 노란 꽃이 가득 피었어요. 바람이 살랑살랑 불자, 감꽃 향기가 비밀 공간에 가득 찼어요.
  우리는 감나무 아래에 있는 모래 놀이터에 앉았어요. 어젯밤에 비가 와서 그런지 모래가 축축했고요. 곳곳에 물웅덩이도 보였어요. 오늘은 모래 놀이하기 딱 좋은 날이에요.
  “다은아. 뭐 만들까?”
  예지가 감나무 뒤에서 우유갑과 작은 삽을 가져왔어요.
  “장난감 성.”
  나는 그곳에서 마음껏 놀 생각이에요.
  “좋아. 내가 물 떠올게.”
  예지가 수돗가로 달려가서 우유갑에 물을 가득 담아왔어요. 그러고는 내 손에 물을 살살 부었지요. 나는 시원한 물을 모래 위에 뿌렸어요.
  ‘조물조물. 토닥토닥’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성을 만들었어요.
  “짠! 장난감 성이야.”
  어느새 둥근 모양의 성을 완성했지요. 예지는 작게 모래를 뭉쳐서 블록 놀이와 장난감 자동차를 만들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소꿉놀이도요.

   ‘어른은 못 들어옴’
  나는 흙바닥에 뾰족한 돌멩이로 적었어요.
  “맞아. 여긴 아이만 들어올 수 있어.”
  예지가 맞장구쳤어요.
  “우리끼리 놀자. 이건 예지, 요건 나.”
  나는 작은 나뭇가지 두 개를 성안에 넣었어요. 성안에 있는 예지와 내가 행복해 보였어요.
  시계를 보니 벌써 이십 분이나 지난 거예요.
  “휴, 학원 가기 싫다. 진짜로.”
  한숨이 푹 나왔어요. 나는 영어, 수학, 미술, 피아노, 컴퓨터 학원까지 다니거든요.
  “나도 너랑 계속 놀고 싶어.”
  예지는 내가 학원에 가면 혼자라서 심심하다고 했어요.
  “넌 좋겠다. 매일 놀 수 있고, 할머니가 잘해주잖아.”
  나는 예지가 부러웠어요. 할머니는 예지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주거든요.
  “응. 하지만 나는 엄마 잔소리가 듣고 싶어. 우리 엄마는 너무 바쁘니까……”
  예지가 힘없이 말했어요. 예지는 주말에만 아빠, 엄마를 만난대요.
  “잔소리가 듣고 싶다고? 우리 엄마랑 너희 엄마랑 반씩 바뀌면 좋겠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놀자.”
  시계를 보니 점점 마음이 급해졌어요.
  우리는 성 앞에 모래를 깊게 팠어요. 그러고는 그곳에 남은 물을 다 부었지요.
  어느덧 멋진 호수가 만들어졌어요.
  “배도 만들자.”
  예지는 주변에 떨어져 있는 감나무 꽃잎을 주워 왔어요. 호수 위에 노란 꽃잎을 둥둥 띄웠지요.
  “여기에서 배를 타면 바람이 씽씽 불겠지?”
  나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뻥 뚫렸어요.
  “난 아빠, 엄마랑 같이 탈 거야.”
  예지는 배 위에 가느다란 나뭇가지 세 개를 올려놨어요.
  “음, 나는 혼자 탈래.”
  나는 나뭇가지 하나만 배 위에 놨어요.
  “함께 배 타고 멀리 떠나볼까?”
  예지가 소리쳤어요.
  “좋아.”
  우리는 손가락으로 물을 첨벙첨벙 치며 놀았어요. 원피스에 흙탕물이 튀는지도 모른 채 말이에요.
  신나게 놀고 있는데 예지가 내 어깨를 툭 쳤어요. 고개를 들어보니 엄마였어요.
  “다은아! 여기서 뭐 해? 찾았잖아.”
  엄마가 나를 내려다봤어요. 엄마의 눈이 뾰족했어요.
  벌써 사십 분이 지난 거예요. 행복한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요.
  “엄마, 조금만 더 놀면 안 돼?”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어요. 어쩌면 엄마가 허락해주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요.
  “학원 늦었어.”
  엄마는 내 옷에 묻은 모래를 힘주어 털었어요.
  “딱 한 번만…… 응?”
  오늘은 정말 학원에 가기 싫었어요.
  “김다은. 바보 될 거야? 공부 안 하면 바보가 되는 거야!”
  엄마가 자주 쓰는 말이에요. 이 말을 들으면 진짜 바보가 된 기분이에요.
  엄마는 내 손을 잡아끌었어요. 예지와 눈이 마주치자 눈물이 핑 돌았어요.
  나는 엄마에게 질질 끌려서 교문 밖으로 나왔어요.
  학원 가는 길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아요. 교문 맞은 편에는 큰 놀이터가 있고요, 학원 입구에는 떡볶이 가게도 있어요. 쫀득쫀득하고 매콤한 떡볶이 냄새가 나자 침이 꼴깍 넘어갔어요.
  “엄마. 떡……”
  “칠칠치 못하게 옷이 뭐야? 때가 지겠어?”
  엄마의 잔소리에 떡볶이 말이 쏙 들어갔어요.
  학원 수업은 여전히 지루했어요. 2학년인데 왜 3학년 수학을 배워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수학은 갈수록 어려워진다고 미리 배워놔야 한다니요.
  나는 수학 문제집에 오늘 만든 장난감 성을 그렸어요. 당장 그곳으로 가고 싶었거든요. 그러다가 혹시 엄마가 볼까봐 장난감 성을 지우개로 박박 지웠어요.

목요일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날이에요. 학원에 가장 많이 가는 날인데요. 오늘은 시험까지 본대요.
  창밖을 바라보니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었어요. 멀리서 보이는 감나무의 노란 꽃도 반짝 빛났어요.
  학원 갈 생각을 하니 기운이 빠졌어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책상에 엎드렸어요.
  “어디 아파?”
  예지가 내 어깨를 토닥였어요.
  “오늘 학원에서 시험 봐. 시험 못 보면 혼날 거야. 정말 가기 싫어.”
  속상해서 엉엉 울었어요.
  “이따 친구들하고 놀이터에서 놀기로 했는데……”
  예지가 말했어요.
  “정말? 좋겠다.”
  놀이터에서 노는 상상을 했어요. 그네를 타면 시원한 바람이 가슴 속으로 송송 들어오겠죠?
  “같이 갈래?”
  예지가 조심스레 말했어요.
  “안 돼. 엄마한테 혼나.”
  엄마의 화난 모습이 먼저 떠올랐어요.
  “조금만 놀고 학원에 가면 되잖아. 너희 엄마 오늘 어디 가셨다면서?”
  고민됐어요. 엄마가 모임에 갔다가 늦게 온다고 했거든요. 생각할수록 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커졌어요.
  “그럴까?
  학원에 조금 지각하는 건 괜찮을 것 같았어요.
  학교가 끝나자마자 예지와 놀이터로 달렸어요. 예지는 아파트 후문 쪽에 있는 놀이터로 데리고 갔어요. 이곳은 친구들이 잘 오지 않는 놀이터거든요. 놀이터까지 뛰는데 가슴이 콩닥댔어요.
  나는 도착하자마자 가장 좋아하는 그네부터 탔어요. 예지가 내 등을 힘껏 밀어줬고요.
  파란 하늘 위로 다리를 쭉 뻗자 가슴 속으로 시원한 바람이 쏘옥 들어왔어요. 눈을 감고 하늘을 나는 상상을 했어요. 하늘을 날면요. 먼저 학원 창문을 모조리 열 거예요. 그럼 시험지가 바람에 휙휙 날아가겠죠? 시험지를 가장 큰 나무 꼭대기에 올려놓을 거예요. 아무도 닿지 않을 만큼 높게요. 아마도 선생님과 엄마는 시험지를 찾으려고 방방 뛸 거예요. 그때 시험지를 구름 속으로 날려버릴 거예요. 아주 멀리요. 생각만 해도 짜릿했어요.
  “다은아, 또 성 만들래?”
  한참 그네를 타는데 예지가 말했어요.
  “그래. 이번에는 바다도 만들자. 종이배도 접어서 올리고.”
  오늘은 각자 원하는 성을 만들기로 했어요.
  ‘토닥토닥. 조물조물.’
  나는 세모 모양으로 모래를 쌓았어요. 뾰족한 성이에요. 꼭 마녀가 사는 성 같았지요.
  “이건 무슨 성이야?”
  예지가 성을 자세히 봤어요.
  “엄마 감옥. 엄마는 학원을 좋아하니까, 여기에서 공부만 하는 거야. 어때? 히히.”
  나는 나뭇가지로 엄마를 만들어서 성안에 넣었어요. 그리고 문을 꼭꼭 잠갔지요.
  예지는 모래를 가득 쌓아서 둥근 성을 만들었어요.
  “난 이곳에서 아빠, 엄마랑 신나게 놀 거야. 맛있는 것도 만들어 먹고.”
  예지는 아빠, 엄마와 함께 지내는 것이 꿈이라고 했어요. 매일 밤 아빠, 엄마가 보고 싶대요.
  “히히. 재미있다.”
  예지와 성을 만들다보니 정말 즐거웠어요.
  “이번에는 같이 만들자.”
  우리는 주변에 있는 모래를 퍼와서 차곡차곡 쌓았어요. 이번에는 큰 성이 되었어요. 손가락으로 구멍을 송송 내서 창문도 만들었어요. 바닥에
‘매일 노는 성’이라고 적었지요. 마지막으로 나뭇잎 깃발을 성 꼭대기에 꽂았어요.
  “성 앞에 바다를 만들자. 성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정말 멋지겠어.”
  나는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어요.
  내가 물 뜨러 간 사이에 예지는 모래 속을 깊고 넓게 팠어요. 파놓은 구멍에 내가 물을 부었어요. 물이 찰랑찰랑 차올랐지요.
  우리는 돌멩이로 멋지게 바다 주변을 꾸몄어요.
  “이건 예지 배. 요건 다은이 배. 이제 가볼까?”
  예지는 종이배를 두 개 접어서 바다에 띄웠어요.
  “매일 노는 성으로 출발!”
  손가락을 넣고 첨벙첨벙하자 배가 살살 움직였어요.
  “더 세게 달려볼까?”
  이번에는 손가락을 재빠르게 움직였지요. 물이 사방으로 튀어서 옷이 젖었지만 괜찮아요. 튀기는 물은 아주 시원했거든요. 한참 달리다보니 매일 노는 성까지 도착했어요. 예지와 나는 손바닥을 마주치며 방방 뛰었어요.
  “우리 성에서 매일 같이 놀자.”
  예지가 나뭇가지 두 개를 성안에 넣었지요.
  “좋아.”
  나는 매일 노는 성에 가는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났어요.
  신나게 놀다보니 친구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아무도 없었어요.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지 몰랐어요. 금세 어두워진 거예요.
  “다은아, 배고픈데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을래? 할머니가 맛있는 거 해주실 거야.”
  예지가 내 팔을 잡고 흔들며 말했어요.
  갑자기 엄마 얼굴이 떠올랐어요.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버린 후 확인도 안 했거든요. 아마 학원 선생님과 엄마에게 전화가 왔을 거예요.
  “난, 집에 가야 해. 너 먼저 들어가.”
  마음은 예지네 집으로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더 늦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너희 엄마 화났겠다. 괜찮겠어?”
  예지는 걱정되는지 내 옆을 떠나지 못했어요.
  “응. 괜찮아. 빨리 들어가.”
  나는 예지 등을 떠밀었어요. 예지는 알겠다며 집으로 갔어요.
  놀이터에는 이제 나 혼자예요. 물에 젖은 종이배가 힘없이 흐느적거렸어요.
  이젠 정말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집에 가려고 일어나자 놀이터 주변에 있는 가로등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어요. 그러자 매일 노는 성이 별빛처럼 반짝였어요.
  나는 매일 노는 성에게 손을 흔들었어요.
  “내일 또 올게.”
  바람이 불자, 성 위에 깃발이 또 오라고 손짓하듯 흔들렸어요.

소연

『갑자기 악어 아빠』, 『루이치 인형』, ‘비밀 교실’ 시리즈 등을 썼습니다. 비룡소문학상과 정채봉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학원에 가기 싫어서 책상 위에 엎드려 엉엉 울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매일 노는 성’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아이가 ‘매일 노는 성’에서 마음껏 놀았으면 좋겠습니다.

2024/04/03
6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