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은 마을의 변두리에 국숫집이 하나 있었어요. 그곳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일을 하고 있었어요,
   원래는 할머니와 둘이 했었지만, 몇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부터 할아버지 혼자서 가게를 꾸려나가고 있었어요.
   함박눈이 폭폭 내리는 12월의 어느 저녁이었어요.
   할아버지는 찾아온 손님도 돌려보내고 서둘러 문 닫을 준비를 했어요.
   그날은 바로 할머니의 기일이었거든요,
   할아버지에게는 자식이 없었어요. 그러니 속 썩을 일도, 크게 웃을 일도 없었어요. 할머니를 함께 추억할 사람도 없었지요.
   할머니를 충분히 그리워 해 줄 사람은 세상에 할아버지뿐이었어요. 그래서 그날만큼은 집에 일찍 들어가 할머니가 좋아했던 음식들을 차리고, 할머니를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어요.
   초저녁인데도 밖은 어두웠어요.
   할아버지는 주방을 정리하고 가게의 불을 껐어요.
   밖으로 나와 가게 문을 막 잠갔을 때예요.
   어둠 속에서 누군가 할아버지를 불렀어요.
   “할아버지.”
   돌아보니 아기 너구리가 서 있었어요.
   아기 너구리는 머리에 눈을 하얗게 뒤집어쓰고 있었어요.
   “할아버지, 국수 한 그릇만 주세요.”
   아기 너구리가 말했어요.
   “오늘은 장사 끝났다.”
   할아버지가 손을 내저었어요.
   “나 배고파요.”
   아기 너구리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어요.
   “그럼 이거라도 먹으랴?”
   할아버지는 가방에서 먹다가 남은 빵을 꺼냈어요.
   “싫어요, 빵.”
   아기 너구리가 말했어요.
   “국물이 먹고 싶어요. 따뜻한 국물요.”
   아기 너구리는 고개를 들고 할아버지를 올려다봤어요.
   “난 집에 빨리 가야 한다.”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그러자 갑자기 아기 너구리가 훌쩍거리기 시작했어요,
   “엄마가 걱정할지도 모르는데……”
   “그럼 어서 가면 되지.”
   “하지만 난 오늘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이제 걸을 힘도 없어요.”
   아기 너구리는 손등으로 콧물을 훔쳤어요.
   “그러니 이거라도 먹으라니까.”
   할아버지가 딱하다는 듯 말했어요.
   아기 너구리는 대답도 없이 고개만 저었어요.
   “허허, 그것참.”
   할아버지는 마음이 조급했어요. 마치 집에서 할머니가 할아버지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바람은 차고 눈은 그칠 줄 몰랐어요.
   아기 너구리는 오들오들 떨며 울 듯이 서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산이 있는 곳을 봤어요. 내리는 눈 속 저편에 있을 테지요.
   ‘먼 거리긴 하지.’
   할아버지는 다시 가게의 문을 열었어요.
   할아버지는 가게로 들어와 난로를 켰어요.
   아기 너구리는 재빠르게 따라와 난롯가로 갔어요. 그러더니 의자 위로 폴짝 뛰어올라 자리를 잡았어요.
   할아버지는 주방에 불을 켜고 앞치마를 둘렀어요.
   할아버지는 먼저 큰솥에 물을 붓고 무와 멸치, 다시마를 넣고 끓였어요. 조금 지나자 가게에 달큰하고 구수한 냄새가 퍼졌어요.
   그런 다음 할아버지는 고명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계란을 노른자, 흰자로 나눠 지단을 붙이고, 채 썬 호박과 당근도 들기름에 적당하게 볶았어요.
   아기 너구리는 주방이 보이는 곳에 앉아 조잘대기 시작했어요.
   겨울잠을 자다가 깨서 놀다가 여기까지 왔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을 거다, 엄마가 절대 마을에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런 얘기들을 한 후, 마을에서 자기가 본 것들을 시시콜콜 말했어요.
   아기 너구리는 떠드는 내내 눈이 반짝반짝 빛났어요. 물에 젖어 까맣던 털이 마르자, 황금빛 갈색 털에 윤기가 돌았어요.
   솥에는 물이 팔팔 끓고, 주방 창문에 김이 가득 서렸어요. 할아버지는 솥에 국수를 넣어 삶다가 꺼냈어요. 그리고 재빠르게 찬물에 넣고 휘휘 저은 다음 건져냈어요.
   커다란 그릇에 잘 삶아진 국수를 돌돌 말아 넣은 다음, 뜨거운 국물을 부었어요. 그리고 그 위에 색색의 고명을 듬뿍 올렸어요.
   “자, 먹어라.”
   할아버지는 국수 그릇을 식탁에 올려놨어요.
   아기 너구리는 “와와!” 하며 손뼉을 쳤어요. 그러고는 식탁에 바짝 당겨 앉더니 국수를 먹기 시작했어요. 그릇을 들어 따끈한 국물을 마신 후 다시 맛있게 국수를 먹었어요.
   바닥까지 다 먹자 할아버지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 국수를 한 그릇 더 만들어 나왔어요.
   “아아, 맛있다!”
   아기 너구리는 콧노래를 불렀어요. 콧잔등에 땀까지 났어요.
   국수 두 그릇을 비우고 나자, 아기 너구리의 얼었던 몸이 따듯하게 녹았어요.
   “잘 먹었습니다.”
   아기 너구리가 말했어요.
   “이제 얼른 가봐라.”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아기 너구리가 말이 없어졌어요. 의자 위에 오도카니 앉아 눈만 깜박이고 있었어요.
   아기 너구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보였어요.
   “할아버지.”
   아기너구리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어요.
   “난 돈이 없어요. 이것밖에 없는데……”
   그러더니 주머니를 뒤져 도토리 몇 개를 꺼냈어요.
   “됐다. 그냥 가라.”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안 돼요, 엄마가 신세를 지면 보답을 하는 거랬는데……”
   아기 너구리는 얼굴에 걱정이 가득했어요.
   “그럼 도토리 세 개. 이거면 됐다.”
   “그래도……”
   아기 너구리는 아무래도 부족하다는 표정이었어요.
   할아버지는 그 심각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어요.
   “좋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할아버지는 낡은 오디오에 전원을 켰어요.
   “나랑 같이 이걸 듣자. 처음부터 끝까지 말이다. 할 수 있겠냐?”
   할아버지가 오래된 음반을 들고 말했어요. 젊었을 때부터 할머니와 늘 함께 듣던 거였어요.
   “하지만 그건 돈이 아니잖아요.”
   “나한테는 돈보다 좋은 거다.”
   “정말 그러면 돼요?”
   “그래, 그러면 된다.”
   아기 너구리는 그제야 편안한 얼굴이 되었어요.
   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었어요. 캄캄한 어둠 속에서 국수 가게만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어요, 그리고 창문 밖으로 음악이 흘러나왔어요.
   아기 너구리는 가끔 하품을 했어요. 그렇지만 한자리에 앉아 떠들지도 않고 음악을 들었어요,
   음악이 끝나자 아기 너구리는 꾸벅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섰어요.
   할아버지는 조금 다급한 목소리로 아기 너구리를 불러 세웠어요.
   “거기 좀 있어봐라.”
   할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목도리를 아기 너구리에게 둘러주었어요.
   “이제 앞으로 다신 오지 마라.”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아기 너구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눈 속으로 사라졌어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어요.
   얼음이 녹아 계곡물이 바위 사이로 콜콜 콸콸 흘러내렸어요.
   비었던 들판에는 냉이며 씀바귀같이 푸른 것들이 무리 지어 올라왔어요.
   어느 이른 아침이었어요. 할아버지의 국숫가게에 손님이 찾아왔어요.
   손님은 젊은 여자와 어린 사내아이였어요. 아이는 여섯 살쯤 돼 보였는데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했어요.
   “아직 문 안 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하지만 여자와 아이는 문 앞에 선 채 머뭇거렸어요.
   “아직 준비가 안 됐다니까요!”
   그제야 할아버지는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어요.
   그리고 순간 ‘어디서 봤지?’ 하고 생각했어요.
   꼭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 같았어요,
   여자는 조심스럽게 가게를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어요.
   “밖에서 기다릴게요.”
   목소리마저 귀에 익었어요.
   여자와 아이의 옷차림은 꽃샘바람을 막기엔 많이 얇아 보였어요.
   “그럼 들어와서 기다리던지 맘대로 하슈.”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아이는 뭐가 좋은지 여자를 보며 눈웃음을 했어요.
   할아버지는 마저 하던 일을 했어요.
   할아버지는 식탁을 닦고, 수저통을 채웠어요. 그런 다음 컵들을 가지런히 정리했어요.
   그걸 다 하고 나서는 색이 바랜 커튼을 떼고 새 커튼을 달기 시작했어요.
   할아버지는 의자 위에서 목을 뒤로 젖히고 커튼을 달았어요.
   아이가 가서 의자를 잡았어요.
   “고맙다.”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여자도 일어나 “그거 주세요.” 하더니 남은 커튼을 가져갔어요.
   “어어, 그러지 마요! 손님인데……”
   하지만 여자는 이내 커튼을 달았어요.
   할아버지는 여자의 옆모습을 보았어요.
   “애기 엄마, 혹시 우리 집에 온 적이 있수?”
   할아버지가 물었어요.
   “아니요, 처음인데요. 왜요?”
   “꼭 아는 사람 같아서……”
   “제가 그런 얘기를 자주 들어요.”
   여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어요.
   여자는 까치발을 들고 고리를 걸려고 애를 쓰고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자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떠올랐어요.
   커튼을 달던 오래전 할머니의 모습이요.
   “많이 기다렸수. 잠깐만 있어요.”
   할아버지는 주방으로 들어갔어요.
   잠시 뒤에 국수 두 그릇을 들고나왔어요.
   여자와 아이가 국수를 먹기 시작했어요. 여자는 국수를 한 입 먹더니 ‘아!’ 하는 표정을 지었어요. 그리고는 눈 깜짝하는 사이에 한 그릇을 다 비웠어요. 아이도 역시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한 그릇을 다 비웠어요.
   식사를 마쳤는데도 여자와 아이는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어요.
   여자는 아는 집 구경하듯이 천천히 가게를 둘러보았어요.
   여자가 오디오 옆에서 음반 하나를 집어 들었어요.
   “어머, 이 음반?”
   여자가 반가운 듯 아는 체를 했어요.
   “그거 알아요?”
   “네.”
   “젊은 사람이 그걸 어떻게 알까? 아주 오래된 건데.”
   할아버지가 말했어요.
   “전 이 두 번째 곡이 정말 좋아요.”
   “그거 좋지”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건 할머니가 좋아하던 노래였어요.
   여자가 음반을 들여다보며 노래를 흥얼거렸어요.
   “우리 엄마 노래 진짜 잘해요!”
   아이는 잔뜩 신이 났어요.
   “엄마, 한 번만 불러봐! 응? 응?”
   아이는 생글생글 웃으며 엄마 둘레를 한 바퀴 돌았어요.
   여자는 “어머, 얘가 왜 이래?” 하면서도 싫지 않아 보였어요.
   “그래요. 어디 한 번 불러 보슈. 내가 국숫값은 안 받을 테니.”
   할아버지도 거들었어요.
   “그럼 노래 부르는 거는 보지 마세요. 창피하니까.”
   여자가 말했어요.
   “알았수. 눈을 감고 들을 테니 편하게 불러 봐요.”
   할아버지는 눈을 감았어요.
   여자는 부끄러워하다가 조심스레 노래를 시작했어요.

     봄의 교향악이……

   순간 할아버지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어요.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는 바로 할머니의 목소리였어요. 젊은 시절 할머니의 그 목소리였죠.

     나는 흰 나리꽃 향기 맡으며……

   할아버지는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어요.
   젊은 시절 할머니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떠올랐어요.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할아버지는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하고 싶었던 말과 하지 못한 많은 말들이 생각났어요.
   아아, 단 한 번만 다시 봤으면……
   할아버지 얼굴에 뜨거운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어요.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노래가 끝났어요,
   조용한 가게 안에 여운이 길게 남았어요.
   할아버지는 숨이 멎은 듯 그대로 멈춰있었어요.
   할아버지의 온몸이 떨려왔어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 목이 메었어요.
   선뜩한 느낌이 할아버지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어요.
   할아버지는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천천히 눈을 떴어요.
   가게 문은 열려 있고, 여자와 아이는 보이지 않았어요.
   할아버지는 무엇엔가 홀린 듯이 한동안 멍하니 있었어요.
   여자와 아이가 있던 자리에는 금빛 갈색 털들이 떨어져 있었어요,
   그리고 탁자 위에는 할아버지의 목도리가 놓여 있었지요.
   ‘이건……’
   할아버지는 멀리 산이 있는 곳을 내다봤어요.
   한 줄기 바람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어요.
   차갑지만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었어요.
   어디선가 매화꽃 향기가 실려 왔어요.
   “고맙구나, 고마워. 오지 말라고 한 건 진심이 아니었어.”
   할아버지는 누가 듣기라도 하는 듯 중얼거렸습니다.

이반디

100년 뒤에도 읽을 수 있는 동화를 쓰는 것이 평생의 꿈입니다.

2019/02/26
15호